成墓
1. 개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위치한 묘소. 조선왕조 제 14대 임금이었던 선조의 후궁이자 임해군과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성묘는 조선왕릉을 능원묘(陵園墓)의 등급으로 구분할 때 가장 격이 떨어지는 묘소임에도 왕릉의 격으로 조성이 되어있는데, 이는 1610년(광해군 2년)에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면서 성묘를 성릉(成陵)으로 추봉하였기 때문이다. 성릉으로 추봉된 이후에 왕릉의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여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과 호석을 둘렀으며 곡장을 설치하고 문석인 1쌍, 무석인 1쌍, 석마 2쌍,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1쌍, 석양 2쌍, 석호 2쌍을 배치하여 왕릉의 형식을 갖추었다.[1]
2. 역사
1577년(선조 10년) 5월 1일에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풍양 조씨 시조 묘소 뒤인 현재의 자리에 묘소를 조성하고 성묘(成墓)라고 이름지었다. 이후 그의 친아들인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고 1610년(광해군 2년)에 광해군이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성묘를 성릉(成陵)으로 추봉하고 석물을 다시 조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그러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공성왕후는 공빈으로 다시 강등되어 현재의 성묘(成墓)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3. 그 외
성묘 바로 아래에는 풍양 조씨의 시조인 조맹(趙孟)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1630년(인조 8년) 5월 21일자 두 번째 기사에는 성묘와 조맹의 묘소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처음 공빈 김씨가 죽고 성묘를 조성할 당시에 조맹의 묘소가 옆에 있으므로 조맹의 묘를 허물 것을 의논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광해군이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성묘를 성릉으로 높이면서 조맹의 묘소를 파낼 것을 다시 의논하였으나, 봉분만 헐었다.[2] 인조반정으로 다시 성묘로 돌아간 이후, 서울에 있던 여러 풍양 조씨의 학자와 관료들이 상소하여 봉분을 다시 세웠다. 조선왕조실록 기사[3]성묘에서 서쪽으로 약 650m 떨어진 곳에는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과 그의 부인이 묻혀 있는 광해군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는, 광해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인 공빈 김씨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또한 북쪽으로 약 430m 떨어진 곳에는 공빈 김씨의 큰 아들인 임해군의 묘소도 위치하고 있다. 즉, 어머니와 두 아들의 묘소가 모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
성묘는 근처에 있는 광해군묘와 함께 사릉(思陵) 관리소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공식 홈페이지
[1]
다만, 여타 왕릉에 비해서 좌우폭이 좁아서 비좁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처음에 묘소를 조성할 때 왕릉이 될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묘소로 꾸몄기 때문일 것이다.
[2]
원래 왕릉으로 조성하는 경우에 주변의 무덤은 모두 없애는 것이 예법에 맞는 사항이니, 왕릉 바로 앞에 묘소를 그대로 두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3]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성묘에서 왕릉의 형식에 맞는 석물들(무인석 등)은 없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인조반정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 안팎이 어지러운 점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