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3:12:48

대동법/광해군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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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기선혜법의 시행
2.1. 2000년대 초반까지의 통설2.2. 실상
2.2.1. 미디어의 왜곡2.2.2. 광해군의 기여?
3. 경기선혜법의 한계와 의의

1. 개요

광해군 대는 선조 대의 논의가 실천의 영역으로 첫 발을 들인 단계로서, 광해군 즉위년( 1608년) 5월, 선혜청(宣惠廳)이 설치되어 대동법이 시행되기 시작한 시기로, 교과서 등에는 대동법이 광해군 시기에 시행되기 시작되었다고 하고만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해군이 대동법을 앞서 추진했다는 서술은 없지만 애매하게 적혀있다. 그러나 이러한 광해 대의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은 서울로 올리는 공물에 한해, 대동법의 형식으로 거두어들이는 경(京)대동이었다.[1]

이러한 시범운영은 시행처인 경기 지방의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나, 방납의 폐단을 완전히 뿌리 뽑는 것까지는 무리였고, 시행 초기답게 거센 반발에 부딪쳤으며, 시행 과정에서 이런저런 진통을 겪기도 했다.

2. 경기선혜법의 시행

광해군 즉위년 5월,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선혜청이 설치되고 다음해 봄부터 경기에서 경기선혜법 시행이 결정되었다.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였다.
전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貢物)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 십 배, 몇 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매년 봄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結)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本廳)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하고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山陵)과 조사(詔使)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그런데 전교 가운데에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청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 의정(議政)을 도제조(都提調)로 삼고, 호조 판서가 부제조를 겸하도록 하였으며, 낭청 2원(員)을 두었다.
이뒤로 수령이 못된 자일 경우 정해진 법 밖에 더 거두어도 금할 수 없었고, 혹은 연호(烟戶)를 침탈해서 법으로 정한 뜻을 다 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전의 전결에 대한 역(役)은 이에 힘입어 조금 나아졌다.
광해군일기(중초본) 4권, 광해 즉위년 5월 7일 임진 2번째기사
이때의 경기선혜법은 후에 이원익이 인조에게 말했듯이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고 부역을 고르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 이원익은 조선 후기 경세론(經世論)의 원조인 율곡 이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당시 종사관으로서 그 아래에서 실무를 담당하며 수미법(收米法)의 시행 경험이 있었고, 또한 지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사대동(私大同)[2]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에 대한 의견을 내어놓고 시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광해군이 처음 경기에 시행했을 시에는 선혜법(宣惠法)으로 지칭했으나, 이후 대동법(大同法)이 보편적인 지칭으로 바뀐다.
한편 이정철은 경기선혜법에 관한 최근 연구를 통해 선혜법과 대동법의 성격이 달랐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선혜법과 대동법의 가장 큰 차이를 대동세 안에서 지방재정을 충분히 배정했는가의 여부에서 찾았다. 경기선혜법은 결당 16두의 대동미 중 2두만을 지방재정에 할애함으로써 사실상 京大同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5) 경기선혜법이 유치미를 적게 책정하였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다만, 지방에 할애 된 유치미가 적다고 해서, 선혜법과 대동법을 다른 제도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액수가 적기는 하지만 지방관수를 대동세 안에 포함시키는 원리가 이미 경기선혜법에 적용되고 있었으며, 이외에 대동세의 출납구조는 둘 다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6)
5) 이정철, 2015, 광해군대 경기선혜법 성립과 확대요구 한국불교사연구 제6호
6) 현종 4년(1663) 경기에 양전을 한 후로 16두의 대동세는 12두로 하향조정되었다. 현재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선혜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18세기 후반 경기선혜청의 재정규모는 대략 다음과 같이 파악되고 있다.
<표> 경기선혜청의 경상납과 본도유치미 구조(분청;경상납미;유치미)
경기선혜청;30,000석;15,300석
용도;25司 공물 및 공상가;營下官需 使客 대소잡역가
* 출전: 度支志 外篇 卷之十 貢獻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4
시행직전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라. 광해군때 대동법이 시작된 계기

2.1. 2000년대 초반까지의 통설

대동법은 광해군이 시행한 정책으로 알려져 있었다. 기존 통설로는 대동법의 시행 의도는 공납에 따른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기득권인 양반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대동법을 극성으로 반대했다. 그래서 대동법은 경기에 한정해 경기선혜법만이 시행될 수 있었다. 이상의 통설을 묘사한 것이 영화 《 광해, 왕이 된 남자》다. 해당 영화의 묘사를 따르면 광해군은 이것을 시행하려는데 신하들이 완고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이는 연구가 부족해서 나온 오해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광해군 시기 대동법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멀쩡한 사학자들까지 그렇게 받아들인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후 대동법 연구들이 진행되면서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2.2. 실상

광해군은 처음 경기선혜법 시행에도 어디까지나 수동적으로 동의했고, 그 뒤로는 이 법을 유지하는 데에 회의적이었다.[3] 그리고 확대 실시에는 명백히 반대했다. 광해군 원년 봄, 선혜법 두 번째 실시를 앞뒀을 때 광해군은 '송나라 왕안석의 개혁책인 신법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결국에 커다란 재앙이 됐다'며 대동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다음 해 봄에는 아예 이를 폐지하려 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선혜법에 대해서 말하며, 1년은 실시해 본 뒤에 판단하자고 광해군을 설득했다. 그런데 공물변통 논의가 시작되자 그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던 계획은 경기 지역으로 축소됐다.[4]

이후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자는 주장은 신하들 사이에서 여러 번 제기됐다. 광해군 2년, 곽재우는 선혜법의 확대 실시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비변사의 보고를 보면 이런 요구를 했던 사람이 비단 곽재우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A]

경기선혜법 이후 대동법 확대 요청이 여러 번 들어왔지만 광해군은 천천히 하자며 이를 막았고 # 그 뒤로도 조정 신하들은 여러 번 확대를 주장했는데 광해군은 반대했다. # 즉 광해군이 대동법 확대 시행을 막은 것이다. 광해군은 기존의 임토작공(任土作貢)[6]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이항복이나 이덕형 등도 경기선혜법 확대를 기대하지 못했으며, 유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A]

이렇듯 신하들이 주장하는데 오히려 광해군이 반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반대하며 주장한 바는 이러하다.
전교하였다.
"일전에 인견했을 때 승지 유공량(柳公亮)이 선혜청(宣惠廳) 작미(作米)의 일이 불편한 점이 많아 영구히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을 대략 말하였다. 당초 나의 생각에도 이는 진실로 시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본청이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기에 우선 그 말을 따라 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공량의 말을 들으니 심히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나라를 소유한 자가 모두 토양의 실정에 맞게 공물(貢物)을 바치게 한 데에는 그 뜻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방납(防納)으로 교활한 수단을 부리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여 이 작미의 일이 있었으니, 그 근원은 맑게 하지 않고 하류(下流)만을 맑게 하고자 한 데 가깝지 않은가.
나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만약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을 편하게 해주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기강을 세우고, 방납하고서 지나치게 징수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거듭 자세히 밝혀 혹 금령(禁令)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다스려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조종(祖宗)의 헌장(憲章)을 준행해 어기거나 잊지 않는 것이 좋은 계책인 듯하다. 송(宋)나라의 신법(新法)이 그 뜻이 어찌 백성을 괴롭히는 데 있었겠는가마는 마침내 구제하기 어려운 화를 불렀으니, 옛 헌장을 변경하는 것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 가령 이 일이 폐단은 없고 유익함만 있다 하더라도 춘궁(春窮)에 쌀을 내게 하는 것은 그 시기가 아닐 듯하니, 조사(詔使)가 돌아가고 가을이 와서 곡식이 많아질 때를 기다려 다시 의논해도 늦지 않다. 이 뜻을 대신에게 말하여 다시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3권, 광해 1년 2월 5일 정사 1번째기사
한마디로 하류만을 맑게 하고 근원은 맑게 하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물론 광해군이 신중해서 확대를 막은 것일 수도 있다. 당시 공납(貢納)은 조선 세입의 60% 정도인데, 이걸 함부로 바꾸면 세입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전후 복구 중인데 함부로 세입을 바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지주층의 반발이 심한 것도 광해군의 태도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어쨌거나 광해군은 이 법의 존치여부가 불거진 후에도 1년 동안 잠정적으로 시범운영 할 것을 결정하였고 시범운영 후에도 또한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시행지역인 경기에서 이 법을 존치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한마디로 경기에서는 해도 되고 강원도에서는 하면 안된다고 즉위 초에 이미 결정한 것이다.
조정에서 건의해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한 것은 백성들의 피해를 제거하는 데 힘써서 백성을 안스럽게 여기시는 성상의 인자함을 몸받고자 함이었습니다. 오늘날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방납(防納)하고서 교활한 방법으로 대가(代價)를 곱절로 징수하는 폐단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경기의 1년 공부(貢賦) 및 온갖 응역(應役)의 대가를 절감해 헤아려서 결수(結數)를 계산하여 쌀로 거두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대개 백성들이 무거운 짐을 벗고 편히 쉴 수 있는 것이 전일 방납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함부로 징수하던 수에 비교하면 몇 갑절이 덜한 정도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시행되기도 전에 논의가 분분하고, 방납하는 사람들은 그 이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따라서 교란시키니, 일이 장차 중도에 폐해지게 될 형편인지라 진실로 한심합니다.
대체로 일의 이해와 편부는 반드시 1년을 통하여 시험해본 뒤에야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반년 동안만 시행하고 그만둔다면 각사에서 공물(貢物)에 대한 값을 줄 때 방애되는 일이 많아 이해의 소재를 미처 알 수 없을 것이니, 금년을 한정하여 선혜청의 사목(事目)에 따라 시행해서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시험해 알아보고 나서 다시 의논해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감인관(監印官)은 이미 추고하였으니 잡아다가 국문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선혜청의 일은〉 서서히 결정하겠다. 내수사 노비는 군대로 편성한다 해도 별로 할 만한 일이 없다. 수영패는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권, 광해 1년 2월 28일 경진 3번째기사

선혜청이 아뢰기를,
"선혜청이 쌀을 거두는 일을 대신에게 수의(收議)하였더니, 영의정 이원익은 의논드리기를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니 폐단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변통하는 거조가 있어야 합니다. 폐단이 극심한데도 변통하지 않으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구제될 수 있는 때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맨 먼저 백성을 근심하는 전교를 내리시니, 백성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기를 큰 가뭄에 비를 바라듯이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방납(防納) 등의 일이 오늘날의 극심한 폐단이 되었으므로 변통해서 백성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제거하고 덕의(德意)가 선포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또 사세에 구애될까 염려하여 감히 결단해 행하지 못하고 우선 기전(畿甸)에 시험할 내용으로 사목(事目)을 만들어 계청(啓請)해서 윤허를 받았습니다. 모든 민간의 각종 공역(貢役)을 모두 1년을 기한으로 정하여 1년의 공역의 대가를 선혜청이 그 거둔 쌀로 계산해 준 것이 자못 많고 또한 아직 주지 않은 곳도 있는데, 지금 만약 단지 반년만 시험해 보고 곧장 정파(停罷)할 경우 민간의 응역(應役)에 한계가 분명하지 않아 각사(各司)의 모리배가 혼동해서 징책(徵責)할 것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1년 동안 계속 시행해서 마감한 뒤에야 바야흐로 민간의 이병(利病)의 대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본의가 이와 같았으나 전에 동료가 출사하지 않아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하여 회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우선 봄에만 시행하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삼가 대간의 계사를 보건대 신의 소견과 다름이 없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 하고, 행 판중추 윤승훈은 의논드리기를 ‘어리석고 망령된 신의 소견에는 이 일이 마디마디 구애되니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일이라 지금 중지할 수 없으니 대간의 계사에 따라 1년 동안 통행(通行)하여 그 이해를 보고서 다시 의논해 처치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 하고, 우의정 심희수는 의논드리기를 ‘쌀로 거두는 한 가지 일이 실로 민폐를 개혁해서 불에 타고 물에 빠진 듯한 백성을 구제하려는 본의에서 나온 것이지만, 먼저 기전에 시행해 본 결과 이미 마디마디 방애되어 불편한 걱정이 있습니다. 방납(防納)하는 간사한 소인의 무리들이 고의로 교란시키는 말은 들을 것도 없거니와, 그밖에 식견 있는 이들의 공명한 의논도 모두 끝내 시행할 수 없을 것으로 염려하였으니, 지금 당장 정파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모든 민역(民役)에는 색목(色目)이 많고 완급(緩急)이 같지 않은데, 어찌 반년만 시험해 보고서 그 이해를 환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미 창설하였으니 일단 대간의 계사에 따라 가을까지 한시적으로 시험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 하고,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은 의논드리기를 ‘이 일을 이미 시작했으니 반드시 1년을 통행한 뒤에야 민간의 이해를 알 수 있으니, 대간의 계사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시기 바랍니다.〉 ’ 하였습니다. 〈아성 부원군(鵝城府院君) 이산해(李山海)와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은 병 때문에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의논대로 하되, 가을까지 한시적으로 시험삼아 시행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4권, 광해 1년 3월 16일 정유 3번째기사

사간원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상께서 생민(生民)의 고통을 생각하시어 모든 공상물(供上物)을 아래에서 잘 헤아려 줄여서 아뢸 것으로 계하(啓下)하셨으므로 대신이 성상의 지극한 뜻을 받들어 선혜청에 일제히 모여 일일이 참작해 헤아려 감정하여 약간 더 재감(裁減)해서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몇 달이 지나도록 아직 결정하지 않으시니, 비단 쇠잔한 백성에게 오랫동안 혜택을 아끼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대신이 계품한 일을 오래 보류하고 내리지 않는 것은 지극히 미안한 바가 있으니 속히 결재하시어 준행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공사(公事)는 절목이 많으므로 반드시 자세히 살피고서 결정해야 하는데, 내가 오랫동안 병을 앓고 난 끝이라 정신이 맑지 못하여 사리에 합당한지를 점검하지 못하였다. 가까운 시일 내에 판하(判下)하겠다."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4권, 광해 1년 3월 16일 정유 3번째기사

강원도 관찰사 홍서봉(洪瑞鳳)이 치계(馳啓)하기를,
"선혜청의 작미(作米)에 관한 공사(公事)에 대해 백성의 뜻이 귀일되어 모두 편하게 여기면서 빨리 시행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청이 보내온 공문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수령 두 사람을 가려 차사원(差使員)으로 삼은 뒤 서울로 올려 보내 사목(事目)을 자세히 정하게 하는 한편 두 사람에게 모든 일을 위임해 본청의 분부를 듣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은계 찰방(銀溪察訪) 심즙(沈諿)은 평소 일처리에 노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다 본도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수령은 아니지만 홍천 현감(洪川縣監) 윤신지(尹愼之)와 함께 올려 보냈습니다. 특별히 본청으로 하여금 조속히 사목을 정해 시행케 함으로써 산골 백성들이 애타게 바라는 소망을 위로해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선혜청이 회계(回啓)하기를,
"본도 백성들의 뜻이 그러하니 경기의 예에 따라 사목을 마련해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만 강원도의 경우 전결(田結)은 적지만 갖가지 공부(貢賦)는 기전(畿甸)보다도 많은 실정입니다. 따라서 기전에 대해서 1 결(結)당 미곡 16 두(斗)씩 내게 했습니다만, 강원도의 경우 이 숫자로는 1년의 공부를 충당하기에 부족하니 부득이 4 두를 더 배정하여 1 결당 미곡 20 두씩 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15 두는 위에 바치게 하여 항공(恒貢) 및 연례 별복정(年例別卜定), 전세조 공물(田稅條貢物), 기인(其人), 조례(皂隷), 과원 결실(果園結實), 관상감 월과지(觀象監月課紙) 등의 값으로 충당케 하고, 5 두는 그대로 본도에 주어 매월의 진상물(進上物),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 각참(各站)의 쇄마(刷馬)·적초(積草)·파발(擺撥), 각관(各官)의 관수(官需), 참로(站路)의 지공(支供) 등의 비용으로 쓰게 하되, 각 조항의 일과 물색(物色)에 모두 정가(定價)를 매긴 뒤 일일이 절목을 마련해서 시행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감사에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작미(作米)하는 한 가지 일을 혹 기전에만 시행한다면 그것은 그래도 괜찮다. 그러나 다른 도에까지 확산시킨다면 분명히 끝에 가서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로 볼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듯싶다. 조종(祖宗)의 법제를 준수해 가면서 크게 폐단이 되는 것만 제거해 나가면 되지 꼭 변경시키려고 노력할 것은 없다. 혜택을 조금 베풀려다가 큰 근본을 망각하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이 공사는 거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35권, 광해 2년 11월 22일 계해 4번째기사
그러나 광해군의 실제 행태는 이상의 변호 논리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광해군이 대동법을 반대하고 상납 방식을 그대로 시행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궁궐 공사였다. 옹호가 불가능한 명백한 학정이다. 광해군은 선조 말년에 재건하던 창덕궁 뿐 아니라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건설하고 정릉행궁( 경운궁)을 확장했으며 경복궁도 간을 봤는데, 조선 왕조 전체를 살펴봐도 광해군처럼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렇게 많은 궁궐 공사를 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궁궐 공사 대부분은 기존 상납 방식을 따른 것이다.[8] 다시 말해 광해군은 공사비 마련에 문제가 생길까 저어하여 대동법 확대 시행을 거부한 것이다. 도저히 변호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광해군 참고.

물론 인조 때 삼남에 확대했다가 강원도를 빼고 실패한 사례를 들어 광해군을 옹호하는 주장이 있는데, 인조 대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광해군 반대론에서 제기해온 문제점들을 검토하고 보완하며 실무자들을 육성해가는 과정이었다. 나라 세법을 통째로 뒤흔드는 제도 시행이, 그것도 조선 시대인데 과정상의 오류가 없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 과정에서 노하우를 축적하고 김홍욱, 이시방 같은 실무 인력이 이때 경험을 쌓아 효종 초에 대동법을 바로 재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예 개혁 할 생각이 없었던 광해군과 비교하는 것은 실례다.

2.2.1. 미디어의 왜곡

상술했듯,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학계의 대동법 연구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그 이전의 미디어 묘사는 역사 왜곡이라기보다는 연구 부족, 자료 부족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관련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여 광해군이 대동법 전면 시행을 막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적어도 현재 기준으로는, '광해군 덕분에 대동법이 시행됐다', '광해군은 대동법을 시행하려 했는데 기득권층 양반들이 반대해서 못했다'는 주장은 분명한 왜곡이다. 교과서나 역사서에서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고, 대동법 관련해서는 주로 김육의 공이 부각된다.[9] 물론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고증 과정에서 옛 학설을 업데이트하지 않아 의도치 않게 실수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인터뷰에 따르면, 원작자는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참조했다고 한다.[10] 그런데 보다시피 박시백 만화에선 대동법 주체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11] 만약 그 책을 보고도 그렇게 만들었다면 '알고도 일부러 왜곡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영화 1000만 관객 이상 흥행이 된 걸 생각하면 각본가이자 감독인 추창민 씨의 잘못이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2.2.2. 광해군의 기여?

어디까지나 경기선혜법이 시작되기 직전과 그 직후의 극초반에는 광해군이 꽤 해당법안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볼 여지는 있다. 말인즉슨 경기선혜법에 대한 논의 자체는 광해군의 비망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12] 해당 비망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목전의 긴박한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백성들의 일이 매우 안스럽고 측은하기 그지없다. 산릉(山陵)의 역사(役事)와 조사(詔使)의 사행(使行) 때 드는 비용을 털끝만한 것도 모두 백성들에게서 염출하고 있으니, 불쌍한 우리 적자(赤子)들이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만일 위로하고 구휼할 대책을 서둘러 강구하지 않는다면 방본(邦本)이 먼저 동요되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이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경들은 백방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일푼의 은혜라도 베풀기를 힘써야 한다.
예컨대 해묵은 포흠(逋欠), 급하지 않은 공부(貢賦), 군졸들의 도고(逃故), 세도를 부리는 호강(豪强)들의 침릉(侵凌)은 물론 이밖에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모든 폐단은 일체 견감하고 개혁시켜 혹시라도 폐단이 되는 일이 없게 하라. 공상(供上)하는 방물(方物)과 내수(內需)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감하겠다. 그리고 중외(中外)로 하여금 소회를 다 진달하게 하여 가언(嘉言)이 숨겨지는 일이 없게 하면 더없는 다행이겠다. 이런 내용으로 대신에게 이르라."
광해군일기(중초본) 2권, 광해 즉위년 3월 2일 기축 2번째기사

비망기로 일렀다.
"근래 해사(該司)의 공사(公事)를 살펴보건대, 산릉의 일 때문에 군정(軍丁)을 징발하고 잡물(雜物)을 복정(卜定)한 색목(色目)이 매우 번다한데, 이는 모두 백성들에게서 책판(責辦)하는 것이어서 내가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앞으로 조사의 사행(使行)이 계속해서 나올 터인데 그때의 징독(徵督)은 반드시 이것의 몇 배가 될 것이다.
궁궐의 역사(役事)는 사세가 용이하게 다시 거행하기 어렵고 도감(都監)에 있는 미포(米布)는 모두가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고을에 저장해 놓은 아직 상납(上納)하지 않은 숫자를 해조(該曹)에서 일일이 조관(照管)하여 우선 산릉과 조사 등의 일에다 옮겨 사용함으로써 백성들의 힘이 일푼이나마 펴지게 해야 한다. 단, 궁궐도감에 저장된 미포는 이미 옮겨다 쓰고 나서 또 이를 외방에 가정(加定)하는 것은 매우 온편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리고 시장에서 무역(貿易)하는 것은 이것이 해사(該司)에서 눈썹이 타는 듯한 급박함을 해결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매양 이를 규례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시민(市民)도 또한 나의 백성인데 그냥 물화(物貨)만 가져오고 그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매우 무리한 일이다. 무역해다가 쓴 것에 대한 값은 일일이 준급(准給)하고 이 뒤로는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무역하기를 즐겨하여 거듭 백성들에게 원망을 끼치는 일이 없게 하라. 이런 내용으로 대신에게 이르고 〈해조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거행하게 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2권, 광해 즉위년 3월 2일 기축 3번째기사
이 비망기에는 즉위 직후 광해군이 가졌던 민생문제 해결에 대한 열의와 문제의식이 드러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설사 제도화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하더라도 방납인(防納人)인 사주인(私主人)을 암시하는 정부-민간 사이의 무역(貿易)이라는 상행위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같은 어휘사용은 보고에 언급된 것에 대한 국왕의 재언급을 재외하면 광해군 이전의 조선국왕의 발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13][14][15][16][17][18][19]

이삼주 후에는 비망기를 내린 것에 그치지 않고 이원익을 적임자라고 생각했는지 병으로 사직하려는 그의 차자를 반려했으며 이호예 주요 삼부처 당상들을 그의 사저에 보내 이원익이 정무를 보게했다.
영의정 이원익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겸하여 시사(時事)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니, 경이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병중에도 더욱 돈독함을 알고서 매우 감탄하였다. 내가 마땅히 체념(體念)하여 의논해서 조처하겠다. 병의 치유에 지속(遲速)이 있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경은 의당 미안해 하지 말고 평안한 마음으로 조리하여 차도가 있으면 출사함으로써 나의 기대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이조·예조·호조의 당상은 영상의 집으로 가서 의논하여 아뢰고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권, 광해 즉위년 3월 26일 계축 4번째기사
그리고 하루뒤 논의결과가 취합되어 이원익의 사저에 다녀온 당상들은 광해군의 비망기를 언급하며 경기선혜법을 시행할 선혜청 조직 초안을 올린다.
좌찬성 유근(柳根), 병조 판서 이정귀(李廷龜), 예조 참의 유인길(柳寅吉), 호조 판서 김신원(金信元), 이조 판서 정창연(鄭昌衍)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하교를 받들고 영의정의 집으로 갔더니, 말하기를 ‘지난번 전교한 일에 대해 근래 듣건대, 유사(有司)가, 신이 말미 중에 있는 탓으로 아직껏 거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속히 거행하라는 내용으로 따로 진계(陳啓)하였다고 합니다. 절목(節目)을 마련하는 것에 관해서는 본래 다른 대신이 있으니 신이 혼자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은 병가(病暇)를 얻어 집에 있으니 더더욱 마음대로 결단할 수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전일의 전교(傳敎) 가운데 조사(詔使)를 접대하는 일이 더욱 긴급하니, 관반사(館伴使)와 원접사(遠接使)를 먼저 차출해야 됩니다. 그런 뒤에 의주(儀注)·지대(支待)·용군(用軍) 등에 관계된 일은 마땅히 호조·예조·병조 등과 함께 마련하여 시행하겠습니다. 군졸들의 도고(逃故)에 대한 일들에 이르러서는 해조(該曹)에서 지금 거행하고 있습니다만 사목(事目)은 미처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이밖에 해묵은 포흠(逋欠), 긴급하지 않은 공물(貢物) 등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에 관계된 것은 일체 견면하고 혁파하고 통렬히 금하라는 것으로 전교가 있었기 때문에 차자에서 하나의 국(局)을 설치하여 전적으로 그 일을 주관하게 하라고 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차자의 내용대로 백성들의 일을 잘 아는 사람 4, 5원(員)을 차출한 뒤 회의하여 마련해서 시행하게 하소서.
경재(卿宰)의 반열에서 치사(致仕)한 사람, 선비 가운데 염퇴(恬退)하여 시골에 가 있는 사람, 순유(淳儒)·선사(善士)로서 초야(草野)에서 스스로 지조를 지키고 있는 사람을 대신들에게 명하여 각기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고 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습니까. 앙품(仰稟)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각기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는 일은 대신들에게 이르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권, 광해 즉위년 3월 27일 갑인 2번째기사
이원익과의 긴밀한 소통정황이 드러나는 것에 더해서 이원익의 사저에 갔던 당상들은 매우 직접적으로 광해군이 어떻게 이 논의를 촉발시킨 것인지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호조가 아뢰기를,
"근래에 조세가 들어오는 것은 많지 않은데 경비는 날로 넓어져서, 1년 동안 들어오는 쌀로 반 년의 비용도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응당 서울로 바치는 수는 겨우 5만여 섬뿐인데 1년에 필요한 쌀은 10만여 섬이며, 불시에 필요한 수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일을 담당하는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지난 정미년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겨우겨우 마련하여 지탱해가고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인데, 〈실상 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미년에는 바닷가의 각 고을이 〈모두〉 매우 심한 흉작이어서 작미하여 〈서울로 바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에 한하여 본색(本色)으로 바칠 것을 청하였으므로 본조에서 부득이 허락하고, 그 다음해인 경신년 조는 예전처럼 작미하여 바칠 일로 일찍이 행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건 도감의 계사를 보니 이런 공물의 작미(作米)를 도감에서 갖다 쓰겠다는 일이었는데, 계하하여 본조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대개 도감이 다른 조(曹)의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 이런 계사가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만약 국가의 경비가 전적으로 여기에 의존하는 것을 알고 있다면 반드시 이런 계사를 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조에 이 작미(作米)가 없다면 백관에게 줄 녹봉과 삼수(三手)에게 줄 요미(料米) 및 잡다한 비용과 뜻밖의 수요를 어떻게 계속 댈 수 있겠습니까. 〈비단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중국 사신의 접대를 모두 이런 공물을 가지고 하였는데, 긴요하고 긴요하지 않은 것에 따라 혹은 쌀·베·은·인삼·종이로 바꾸어서 이쪽을 덜어 저쪽을 보충하는 식으로 형편에 따라 요리하며 지탱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이것을 잃는다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諸道)의 산간 지방 각 고을의 공물은 분호조 참판 윤수겸(尹守謙)과 분호조 참의 이창정(李昌庭) 등이 관할하여 작목(作木)하고 작미(作米)해서 전적으로 서쪽 변경의 군량으로 넘겨주고 있으니 관계된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이 정해지기 전에는 또한 다른 용도에 쓰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경비와 군대의 양식은 모두 긴급한 일에 속하니, 대신들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여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53권, 광해 12년 6월 15일 신유 2번째기사
광해군 시기는 경기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실시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의 정미년은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도, 전라도 해읍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의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의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 전라 해읍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이충이 호조판서로 있을 때에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을 참고하라
호조가 아뢰기를,
"〈내섬시 제조의 계사에서 말한 ‘공물(貢物)을 납부하지 않은 수령을 파직하고, 또 작미(作米)하지 말며, 봉자전(奉慈殿)에 복정(卜定)하였다가 도로 혁파한 물품을 해사(該司)에 옮겨서 납부케 하고, 또 부족한 물품이 있을 경우에는 호조로 하여금 사들여서 쓰게 하라.’는 일에 대해서, 상께서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시었습니다.〉
각사의 외공(外貢)을 난리 뒤에 상정(詳定)할 때 눈앞에 당장 쓸 것만 계산하고 뒷날에 늘어날 것은 미처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외방의 공물이 일제히 한꺼번에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각사의 지용(支用)이 태반이나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가 다 가도록 납부하지 않고 있는 자가 있는데, 〈내섬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각사가 모두 똑같습니다.〉 이에 공문을 보내어 독촉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팔도가 모두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내섬시 외의 다른 각사도〉 일제히 조사해서 3년이 지나도록 공물을 납부하지 않은 수령은 일일이 파직하되, 사면령을 내리기 전의 일이더라도 구분하지 말고 파직하여 뒷사람들을 징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다만 ‘내섬시에서는 스스로 마련할 길이 없으니 호조로 하여금 무역해서 진배(進排)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본조를 설립한 것은 본디 각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기 위해서 설립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 각사를 두루 살피고 규검(糾檢)하여 거행하기 위해서 설립한 것입니다.〉 지난날에 난리가 끝난 지 얼마 안되어서 각 해사가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을 때, 마침 조사(詔使)가 나옴에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어, 본조에서 각사의 공물을 모두 거두어들여서 호조로 곧장 봉입(捧入)하여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변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분호조(分戶曹)’라고 이름하였는데, 부족한 것을 옮겨 쓰면서 그대로 설치해 두고 철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뒤로는 이른바 ‘분호조’란 것이 하나의 시장으로 되었습니다. 이에 좌아(坐衙)하고 있을 때에는 시정의 무뢰배들이 각자 물화(物貨)를 가지고 와 관아의 뜰을 가득 메운 채, 서로 이끗을 다투느라 뒤섞여서 떠들어대는데, 차마 보고 들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다가 또 담당 낭관을 적임자를 뽑지 못해서, 연줄을 타고 청탁을 해 놀랄 만하고 침뱉을 만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각사의 하인들은 공물의 수취권을 빼앗긴 뒤로는 살아갈 길이 없어서 날마다 와서 하소연하는데, 그 정상 역시 가련합니다.
성상께서 갖가지 폐단을 모두 통찰하시고 여러 차례 정파(停罷)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지난해 송순(宋諄)이 본조의 판서가 되었을 때 폐단의 정상에 대해 통렬히 진달하면서 정파하기를 청하여 입계해서 윤허를 받았는데, 그 뒤에 송순이 마침 체차당하여서 정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신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가 된 뒤에 더욱더 각사가 감당할 수 없고 하리(下吏)들이 이끗을 노리는 것을 보고는, 전에 이루어진 공사(公事)를 준행해서 각사에 소속된 물품을 하나하나 도로 내려보낸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각사의 공물을 본조에서 한 데 거두어 모을 때에는 지공하기에 부족한 각사의 모든 물품을 본조에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며, 본조에서도 사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해사의 잡물(雜物)을 모두 도로 내려준 뒤에도 부족한 물품을 그대로 본조에 요청할 경우, 본조에서 무엇을 가지고 해사의 일을 대신 행할 수 있겠습니까. 비단 사체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단코 계속해서 시행할 만한 방법이 아닙니다. 1년 원공(元貢)의 숫자가 1년의 지공(支供)에 부족할 경우에는 긴요치 않은 공물을 줄여도 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더 정해도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난해의 잘못된 규례로 인하여 도로 내려준 것을 생각지 않고 전과 같이 진배(進排)하게 한다면, 호조에서도 역시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각사 중에서 내섬시(內贍寺)는 다른 곳에 비해 조금 나은 편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내자시(內資寺)나 예빈시(禮賓寺) 등과 같이 형편없는 아문 역시 내섬시의 예에 의거하여 본조로 하여금 똑같이 진배하게 할 경우, 모르겠습니다만, 본조에서는 어느 곳을 취하고 어느 곳을 버리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리 거행하고자 하더라도 결단코 시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시(本寺)에서 진배하는 어공(御供)이 실제로 많은데도 원공(元貢)이 적은 듯하므로 지난해 12월에 본시에서 보고한 것을 인하여서 부족한 물품을 그대로 항공(恒貢)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작미(作米)한 숫자에 포함되지 않아서 숫자에 준하여 더 정하여 계하받아 행이(行移)한 지 겨우 몇 달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관서에서는 허락받지 못한 것을 얻은 지 얼마 안되어서 또다시 본조에서 도와주기를 요구하니, 역시 온당치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4, 5년이 지나도록 납부하지 않은 참기름과 꿀의 수효가 8백여 두(斗)나 된다고 합니다. 이 거두어들이지 못한 물품에 대해서 각도의 감사에게 각별히 하유해서 3월 안으로 남김없이 상납하게 한다면, 족히 몇 년 동안은 지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 쓴 뒤에, 계속해서 쓰기에 부족한 것에 대해서 천천히 의논하여 시행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번에 본 호조에서 각사를 취사 선택해서 작미하거나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체 전의 규정에 의거해서 하였으며,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것은, 성상의 분부에 따라서 작미하는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의 규례에서 상고해 보니, 봉상시(奉常寺)·전생서(典牲署)는 제향에 관계되고, 상의원(尙衣院)·사도시(司䆃寺)·사재감(司宰監)·장원서(掌苑署) 및 장흥고(長興庫)의 공상지(供上紙)는 어공에 관계되는데, 내섬시는 어공하는 각사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초출(抄出)해서 본시에 행회(行會)하였습니다. 어공하는 각사로 논할 것 같으면, 내자시(內資寺)·사포서(司圃署)·제용감(濟用監)·의영고(義盈庫) 등 각사는 모두 어공을 진배하는 각사라고 말할 수 있으니, 만약 내섬시를 제외할 경우에는 이들 각사 역시 아울러 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모르겠습니다만 아무 탈 없이 작미할 수 있는 각사가 유독 어느 각사이겠습니까. 더구나 이들 각사의 공물은, 전에 모리배들이 방납(防納)할 때에는 이른바 사주인(私主人)이라고 하는 자들이 아무말없이 있었는데, 본조가 국가의 경비가 부족해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해 우연찮게 성사시킨 뒤에 미쳐서는 떠들어 대는 바가 있으니,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방납하는 사람들이 ‘본색(本色)의 숫자 역시 맞추어서 지급해 주지 않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조에서는 각종 공물에 대한 대가(代價)를 한결같이 그들의 말에 따라서 맞추어서 지급해 준 뒤에, 인정(人情)과 작지가(作紙價)에 이르러서도 다 지급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그들의 뜻에 차지 않는 점이 있기에 반드시 그들의 마음에 맞게 된 연후에 그만두려고 한단 말입니까. 이 일은 또한 해마다 그대로 시행할 규정이 아니라, 금년에만 그렇게 하고 그만둘 것입니다. 이미 거두어들여서 반 정도를 구처(區處)하였으니, 지금 다시 합하여서 도로 줄 수 없습니다. 다른 각사의 예에 의거해 시행하소서. 그리고 시급히 써야 할 부족한 물품이 있을 경우에는 상규(常規)에 의거해서 여유가 있는 다른 각사에서 차하(上下)해 주도록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어찌 그 사에 보탬이 됨이 적겠습니까.
봉자전(奉慈殿)의 제향조(祭享條)에 이르러서는, 참깨·찹쌀·꿀 등의 물품을, 이러한 물품이 항상 부족할까 걱정되는 내자시·예빈시·내섬시 등 각사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내섬시 제조의 계사가 이와 같은데, 본시의 어공은 과연 다른 각사에 비해서 배는 됩니다. 그러니 수량 전부를 내섬시에 옮겨주도록 각도의 감사에게 다시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이번의 작미에 대한 곡절을 상세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공물을 상납하는 것은 2백 년 동안 해내려온 규례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작미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다. 금년에는 하되, 내년에는 절대로 작미하지 말라. 그리고 지난해에 이미 납부한 공물과 각사의 어공은 다른 사도 아울러 작미하지 말라. 이상의 일을 착실하게 거행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3권, 광해 9년 3월 8일 계유 2번째기사

호조가 아뢰기를,
"근년 들어서 경비가 점점 많아져서 국가의 저축이 고갈됨이 이미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보충할 계책이 없었습니다. 이에 전의 규례를 상고해보니, 지난 경술년과 신해년 등의 해에 공물(貢物)을 작미(作米)하고 작은(作銀)한 일이 있었으므로, 신들이 계청해서 윤허를 받아 각도에 공문을 보내었습니다.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2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예전 규례인데 하루아침에 뜻하지 않게 작미하였다.’고 전교하시었습니다. 신들은 몹시도 황공하고 미안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번의 이 작미는 어공(御供)하는 물품을 감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물 본색(本色)과 인정(人情) 및 작지가(作紙價)는 끊임없이 각사(各司)에 제급해 주고, 본조에서는 단지 민간에게서 지나치게 거두어 방납(防納)하는 데 소비하는 각 고을의 자금을 가져다가 써서 국가의 경비에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사의 하인들이 전날 세가(勢家)들이 방납할 때에는 본색(本色)에 이르러서도 절반도 주지 않았는데도 아무말없이 있다가, 본조에서 입계하여 작미한 뒤에 미쳐서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니, 몹시 가증스럽습니다.
성상의 분부대로 단지 금년에만 시행하고, 또 지난해에 이미 납부한 내섬시 및 기타 각사의 공물을 작미하지 말도록 양호(兩湖)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13권, 광해 9년 3월 11일 병자 2번째기사

3. 경기선혜법의 한계와 의의

경기선혜법은 대동법의 초창기 시행으로서 몇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는 전란으로 말미암은 전결(田結) 파악의 미비를 들 수 있다. 선조 35년의 계묘양전(癸卯量田) 이후로 추가로 양전(量田), 즉 농지의 수량을 파악하는 사업이 필요했지만, 계속되는 토목 공사로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하며 시행되지 않았다. 광해군 3년(1611년), 호조판서 황신(黃愼)은, 임란 이전의 경기의 전결이 15만여 결에 달했으나, 지금은 3만 9천여 결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세금 수취 대상에서 제외된 토지를 제외한 실결수를 이야기한 것으로 보인다.[20] 이러한 전결 파악의 미비는 전결을 기초로 조세 제도를 정리하는 대동법의 입법 취지상 그 근본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광해 대에 아직 전결 파악, 즉 양전(量田) 사업이 아직 충분히 이뤄지지 못한 듯하다. 양전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상, 전결을 기초로 하는 조세 제도인 대동법이 제대로 시행되기는 힘들다. 실제로 전결 파악이 미비하다는 점을 악용, 뇌물 등을 활용해 부유하고 힘 있는 자의 전결수는 적은 것으로 평가되고, 가난한 백성들의 땅은 척박한 땅도 높은 결수로 평가되어 문제가 상당했다.

다만 경기선혜법은 이 법이 어쨌든 광해 대에 내내 유지되었고 이 법에 대한 확대요구와 우호적인 반응이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분명히 정책효과 자체를 부정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일단 수취액이 1결당 16두로 수취액이 1결당 12두인 이후의 대동법에 비해서 1결당 1/3 정도의 재원을 더 확보했고 전결은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26% 정도로 줄었지만 공물수요 또한 전결만큼 줄지는 않았어도 선조 대에 평시의 2할 3할 정도의 2배인 평시의 5할 정도로 광해 대에 줄어들기는 했다.[21] 그렇다면 공물수요 7할 정도가 충당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수취액이 1결당 16두로 수취액이 1결당 12두인 이후의 대동법에 비해서 1결당 1/3 정도의 재원이 낭비되는 운영상의 비효율성이 다소 있었을지언정 시행지역인 경기에서 이 법 자체가 정상적인 시행이 가능했는지의 부분만 놓고 보았을 때는 이 법이 아예 형해화되어 시행되지 않았다는 식의 이해는 사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만약 그랬다면 광해 폐위 인조 즉위 직후 단 3주도 안 돼서 이어지는 이 법의 확대요구와 시행지역인 경기에서 이 법에 대한 우호적인 반응들[22]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사료상으로도 이 법 자체가 양전미비로 인한 세수부족 곧 예산부족 이유로 광해 대에 시행 지역인 경기에서 완전히 중단되는 정도의 심각한 시행상의 위기를 겪었다는 근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23] 한마디로 이 법은 새로 집권한 인조 정권 입장에서도 광해 대에 최고로 성공한 민생정책이었다는 말이 된다.

둘째로, 이때의 경기선혜법은 어디까지나 방납의 폐단을 해결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고, 1세기 후 대동법이 도달한 영역인 '대부분의 공납과 요역 및 잡역을 전결로 일원화하여 전세화' 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수많은 논의와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후대의 대동법의 영역에 처음부터 다다르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폐단의 완전한 해결까지는 이뤄내지 못했으며, 특히 이후의 대동법에서 중요시되는 쇄마(刷馬)[24], 쇄마가(刷馬價)가 빠져있었다. 쇄마가란 공물의 운반, 사신 및 관헌의 교통 등을 위한 마필 및 선박의 운영비에 해당되는 항목이다. 그 외에도 경기선혜법에 포함되지 않은 항목은 특히 경기에서 무거운 세금이었던 전세조공물(田稅條貢物)[25], 산릉역(山陵役)[26], 조사역(詔使役)[27] 등이 있었고, 그 외의 잡역도 경기에 상당히 많았는데 이것이 빠져있었다.

셋째로, 경기선혜법은 서울로 향하는 공물에 대한 것을 고려한 경대동(京大同)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결당 16두를 거두어 지방 각관에는 2두만을 배정했는데, 이는 12두를 거두고도 지방 각관의 지출 비용을 모두 배정한 완성형 대동법에 비하면 부족하다.[28] 특히 경기는 서울을 둘러싼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각 관의 지출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문제는 경기선혜법 자체의 유명 무실화를 낳을 여지도 있었다. 다만 지방으로의 확대는 지주들의 대규모 반대를 수반하는데다 곡창 지대의 흉작 문제 등 난이도가 훨씬 높다는 한계도 있었고, 실제로 인조 시기 삼남에 반짝 시행되었다가 곧 철회되기도 했다.

경기선혜법은 이러한 한계 속에서도 최초의 대동법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저런 한계점을 감안하더라도 경기 백성들에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만큼 구(舊) 조세 정책의 폐해가 심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제대로 정착되기까지 무려 1세기나 걸렸다는 점을 보면, 이 제도에 대한 지주층과 기득권의 거부감과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도 알 수 있다.

한편으론 당시 유통 체계의 불명확성 또한 한몫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공물을 쌀로 대신 내서 조정과 관아에서 필요 공물을 조달하려면, 최소한 쌀이 화폐 대신 쓰일 수 있을 만큼의 유통 체계가 받쳐줘야 한다. 그런데 당시 한반도는, 18세기 들어서서야 화폐가 유통되었던 만큼, 당시에는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중앙 조정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서 쌀을 화폐인 양 쓰는 대동법이 정착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의구심과 불신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흔히 각종 매체에서의 묘사에서, 광해군이 직접 대동법을 발안하여 주도했다는 식으로 나왔지만, 실제 광해군은 즉위와 동시에 이원익의 대동법 시행 건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일찍이 시도나 성공 전례가 없었으므로 이 법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29] 그랬기에 적어도 집권 직후에는 시범운영 지역인 경기 밖으로 경기선혜법을 확대하자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분명히 했다. 광해군 2년인 1610년 12월 25일, 선혜청에서 이 일을 강원도로 확대하기를 바랐고, 광해군 8년인 1616년 3월 11일에는 유학 최기문(崔起門)이 속히 팔도에 대동법을 시행하시라고 권하기도 했다. 앞서 선혜청의 요청에 대해 광해군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답하기를,
“아뢴 뜻은 알겠다. 다만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는 모두 토질의 형편에 맞추어 공물을 거두었으니, 그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는가. 지금 지엽적인 폐단이나 구제하고자 하고 근본을 바로잡는 계책은 도모하려 하지 않으니, 낭묘(廊廟)의 여러 신하들이 친히 이익을 분석해 보인 계책이 어찌 해로움이 없겠는가. 조정은 다만 기강을 정돈하고 법전을 밝혀 방납하는 사주인의 폐습을 엄격히 금지하고, 곧바로 토산물로 상납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옛사람은 무릇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시작할 때에 반드시 끝을 맺을 것까지 염두에 두었다. 온 나라의 세금을 다 쌀로 내게 하는 것이 어찌 먼 훗날까지 헤아리는 일이겠는가. 경기 이외의 다른 도에까지 점차 미치게 하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경들은 다시 강구하여 조종조의 구례를 그대로 따라 시행함으로써 한 번 두 번 변함에 따른 고질적인 폐단을 전부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36권, 광해 2년 12월 25일 병신 5번째기사
그럼에도 이 법 차체는 어쨌든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가 되었다.
대동법의 범주에 대해 한 가지 더 고려해 볼 점은 상정법에 관한 것이다. 대동법이 100여년에 걸쳐 시행되었다고 하는 통설에는 숙종 34년(1708)에 시행된 해서상정법이 포함되어 있다.7) 상정법은 토지결수가 적은 황해도와 함경도에 시행되었으며, 강원도에도 추가로 시행되었다. 상정법은 邑勢를 고려하여 한 도내에서도 과세율에 차등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각도에 부과된 공물·역을 미·포로 대신 거두는 원칙에 있어서는 동일하였다.8)
대동법은 지방민의 과세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제도였기 때문에 지역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시행되었다. 시행과정에서 경기와 삼남의 대동법은 과세율을 12두로 평준화하고, 황해와 강원, 함경도는 상정사목을 개정, 반포하는 등, 대동·상정법은 18세기 후반까지 제도적 보완을 지속해갔다.9)
비록 지방관수로 쓰일 유치미를 충분히 설정하지 않았고, 광해군 스스로 정책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지 못한 점 등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경기선혜법은 대동법의 뼈대를 갖춤으로써 이후 대동법의 전범으로 인식되었다.10)
7) 한영국, 1976, 대동법의 실시 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앞 논문, 158∼159쪽
8) 상정법에 대해서는 김옥근, 1975, 大同法硏究(二)-황해·평안·함경도에 실시된 대동법- 논문집 14, 부산수산대학교, 앞의 논문 참조
9) 김옥근은 收米法을 대동·상정법과 동일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으나(김옥근, 1975, 大同法硏究(二)-황해·평안·함경도에 실시된 대동법- 논문집 14, 부산수산대학교, 앞 논문, 215∼225쪽), 한영국은 평안도, 함경도에 시행된 상정법을 대동법과 같은 범주로 이해할 것인가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해서상정법을 포함하여 100년 동안 6도에 대동법이 시행된 것으로 설명하였다(한영국, 1976, 대동법의 실시 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56, 159쪽). 대동법의 범주는 상정법 연구가 본격화되어야만 진전된 논의가 가능하리라 본다. 다만, 현존하는 江原廳事例(奎15231) 내 大同來歷 을 살펴보면, 경기선혜법부터 평안도의 수미, 함경도의 개정상정법까지 포괄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비록 19세기에 작성된 자료이지만, 대동법의 연혁에 경기선혜법에서부터 함경도 개정상정법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당대 왕조정부에서 경기선혜법과 상정법을 대동법과 동일한 제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0) 忠淸道大同事目(奎1594)은 현존하는 가장 앞선 시기의 대동사목으로, 조목 중에 京畿例에 의거한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경기선혜법 시행 당시 사목을 가리키는 것이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4-5

호서대동사목에는 月課軍器를 제작할 때의 군량미는 경기선혜청의 예대로 停罷하는 대신 이를 대동세에서 지급하도록 정해 놓았다.44)
44) 忠淸道大同事目 72條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17

다만 분호조의 경우, 애초에 명목이 없는 은이나 포목, 곡물 등의 재원을 중앙의 필요에 따라 조도하였던 것과 달리, 선혜청은 공물을 ‘作米’하던 관행을 공식화하여 운영함으로써 외방에서 그때그때 차출해 쓰던 현물과 노동력이 서서히 대동세 안에 수렴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인조대 삼도대동법이 시행되었다가 3년만에 폐지됨으로써 공물작미의 관행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金堉(1580∼1658)에 의해 호서지방에 대동법 시행 논의가 재개되면서 그때그때 적용되던 공물작미 방식은 폐지되고, 각도마다 고정된 대동세를 거두는 방식으로 정비되어갔다. 이처럼 경기선혜법은 17세기 전반 당면한 재정현안을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으며, 경기선혜법을 시행을 통해 정해진 원칙, 즉 공물을 일관된 기준의 대동세로 거두고, 민역 동원을 給價체제로 전환하는 방식은 이후 중앙의 재정구조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29

그러나 시행과정에서 다소 난항을 겪었던 경기선혜법은 향후 대동법 시행에 중요한 원칙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것은 잡다한 민역을 수시로 동원하는 역체계를 급가체계로 변화시킨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대동사목에는 각종 요역을 대동세로 지급하는 조항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러한 역체계의 변화는 향후 중앙 뿐아니라 지방재정의 지출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30


[1] 조정에 진상하는 것만을 대상으로 하고, 지방 관아에 관련된 것에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아, 백성들 사이에서는 반쪽 대동법이라는 뜻의 '반(半)대동' 이라고도 불렸다. [2]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 (1) 사대동의 발생 [3] 당시 조선 왕조는 전제정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김범 교수에 따르면, 조선에서 전제 왕권을 가진 사람은 갑자사화를 벌인 뒤의 연산군 뿐이었다고 한다.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김범 著, 글항아리) 참고. 다만 군약신강이나 전제군주제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왕권에 대한 분석은 관점에 따라 다르다. [4] 이정철,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조선을 움직인 4인의 경세가들》, pp. 201 ~ 202 [A]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p. 109 [6] 토지 생산력을 기준으로 공물을 분정(分定)하여 수취하여, 분전제공(分田制貢: 농지에 따라 공물을 나눠서 정함)과 수기소산(隨其所産 : 각 지방 특산물로 공물을 받음)을 조화시킨 방식. 과도한 특산물 요구를 비롯한 여러 폐단이 발생했다. [A] [8]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p. 62 [9] 다만 아무래도 교육이 제일 느리게 변하는지라 광해군의 업적처럼 가르치는 교사들도 소수 있다. [10] 1000만 영화 `광해` 시나리오 작가 황조윤 [11] 광해군편)광해군과 대동법 [12]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8-10 [13] <栗谷 李珥의 貢物.進上 개혁안의 영향과 한계>, 173-174, 181, 192-193, 196-197 [14] 수미법은 사주인의 존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것은 백성들에게 거둔 쌀로 공물을 마련해서 수령 책임 하에 직접 서울에 납부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후일 사주인이 담당하게 될 역할을, 이이는 각 관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이는 사주인 문제에 대해서 당시 일반의 인식을 공유했다. 이이는 그들을 “姦猾之隸 桀黠之吏”로 묘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아직 부당하게 이익을 갈취하는 간교한 무리들이었을 뿐이다. 이런 인식에 차츰 전환이 오는 것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한 세대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 (<栗谷 李珥의 貢物.進上 개혁안의 영향과 한계>, 173) [15] 18) 기존의 몇몇 연구들은 이이의 수미법이 나중에 대동법 성립으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둘 사이에 전연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대동법은 임토작공 원칙의 철폐와 사주인 역할 긍정을 필수적인 요소로 한다. 이런 조건을 생각한다면, 이이의 수미법을 대동법과 곧바로 연관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栗谷 李珥의 貢物.進上 개혁안의 영향과 한계>, 174) [16] 한편 공물가는 각 지역의 담세능력에 맞춰서 재조정되어야 하고, 현물로 거두어서 각 관 수령 책임 하에 직접 경각사에 납부되어야 한다. 사주인의 역할을 긍정하는 것은 그의 시대에는 너무 이른 생각이었다. 또 공물가를 줄이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작은 고을들을 통합하고, 각 고을에서 공물을 바치는 경각사의 수를 줄여야 한다. (<栗谷 李珥의 貢物.進上 개혁안의 영향과 한계>, 181) [17] 주목할 것은 이이가 말하는 官과 박지계가 말하는 官이 같지 않다는 점이다. 이이가 말하는 관은 지방 각 관이었고, 박지계가 말하는 관은 경각사의 관이다. 물론 경각사나 지방 각 관이 크게 보면 모두 관인 것은 사실이고, 박지계와 이이의 목적이 모두 방납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똑같았다. 하지만 물품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이이의 방식은 지방에서 마련하는 것이었고 박지계의 방식은 서울에서 마련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경각사가 물품을 마련하는 방식은 결국 사주인을 부려서 마련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박지계는 경각사 下吏나 시정 부상대고의 방납은 거부했어도, 경각사가 직접 이들을 부려서 물품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역할 자체를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이이와 박지계의 차이가 있었다. (<栗谷 李珥의 貢物.進上 개혁안의 영향과 한계>, 192-193) [18] 유백증은 같은 내용을 인조 14년에 다시 한 번 주장한다.59)59)(≪翠軒疏箚≫ 권2, <因辭職兼陳所懷疏> 丙子 六月 三日) 병자호란 이전에 이미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인사들조차 어공의 시장구매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사주인의 역할을 긍정하게 했다. 이것은 사주인을 “간활지예 걸힐지리”로 인식했던 이이의 인식과는 크게 대비된다. 이것은 임진왜란 이후 전개된 현실 상황이 가져온 차이였다. (<栗谷 李珥의 貢物.進上 개혁안의 영향과 한계>, 194) [19] 이이가 주장했던 공물.진상 개혁안은 비록 후대에 그 원칙을 전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에서는 후일의 대동법과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사대동 및 사주인을 긍정하는 인식 같은 대동법의 기초가 되는 사회적 관행과 인식들은 그의 사후에야 민간에서부터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그 민간의 자생적 관행을 제도적으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사실 그가 말하는 ‘치용의 학’이란 그러한 전환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치용의 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栗谷 李珥의 貢物.進上 개혁안의 영향과 한계>, 196-197) [20] 《추포집(秋浦集)》에서 인용. 임진왜란 때 많은 농지가 엉망이 되고 토지 대장이 유실된 게 치명적이었다. [21] 인조 4년 10월 22일, 광해 3년 7월 20일 중초본, 광해 9년 1월 3일 중초본 [22] 인조 1년 4월 4일 [23] 광해 13년 10월 28일 중초본 [24] 지방에 배치해두었다가 관용(官用)으로 쓰는 말 [25] 수요가 왕실과 관련된 공물. 가격 조정이 없어서 나중엔 방납고리(防納高利)의 근본이라는 공물 주인조차 손해를 봤다. [26] 각지의 능역을 관장하는 데 들어가는 역(役), 즉 인건비 등 제반 비용. [27] 칙사 접대비. 황해도 함경도는 이를 위한 미곡(米穀)의 유치분(留置分)이 있었지만 경기에는 그게 없었다. [28] 인조 치세 초에 시행된 삼도대동법(三道大同法)은 8두 중 4두를 지방 각관에 배정했었다. 이후 12두로 확장되면서 '지방 각관의 수요를 포함해 양입위출(量入爲出)을 시행하는' 것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것이 잠시 시행되었으나 반발에 부딪쳐 폐기되었다. [29] 다만 이건 단순히 광해군이 대동법 시행에 적극적이지 않아서 그렇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선례가 없던 일을 시행하는데다가 대동법으로 부담이 늘어날 지주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