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92em; letter-spacing: -.4px" |
황하 문명 하(夏) |
||||||||
상(商) | |||||||||
서주(西周) | |||||||||
동주(東周) |
춘추전국시대 (
춘추 |
전국 ) 춘추오패 | 전국칠웅 |
||||||||
초한쟁패기 후초(後楚) | 서초(西楚) | 십팔제후국 |
|||||||||
전한(前漢) | |||||||||
신(新) 현한(玄漢) |
|||||||||
후한(後漢) | |||||||||
삼국 | 위(魏) | 촉(蜀) | 오(吳) | ||||||
서진(西晉) | |||||||||
동진(東晉) 환초(桓楚) |
오호십육국 전진(前秦) |
||||||||
남북조 | 송(宋) | 북위(北魏) | |||||||
제(齊) | |||||||||
양(梁) 후량(後梁) |
|||||||||
수(隋) | |||||||||
당(唐) 무주(武周) | 위연(僞燕) | 황제(黃齊) |
|||||||||
오대십국 | 여러 민족들 | ||||||||
요(遼) 서요(西遼) |
|||||||||
북송(北宋) | |||||||||
남송 (南宋) |
금(金) | ||||||||
몽골 제국 | |||||||||
원(元) 북원(北元) |
|||||||||
명(明) 순(順) | 남명(南明) | 후금(後金) |
|||||||||
오주(吳周) |
동녕(東寧) 청(淸) 태평천국(太平天國) |
|||||||||
중화민국 (中華民國) 군벌세력 |
청황실 소조정 |
임시정부(臨時政府) 북양정부(北洋政府) 중화제국(中華帝國) | 호법정부(護法政府) |
||||||||
중화인민공화국 (中华人民共和国) |
}}}}}}}}} |
춘추시대 제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
진(秦) | 진(晉) | 연(燕) | ||||
주(周) | 정(鄭) | 위(衛) | 조(曹) | 노(魯) | 제(齊) | ||
채(蔡) | 진(陳) | 송(宋) | |||||
초(楚) | 오(吳) | ||||||
월(越) | |||||||
관련 틀:
춘추오패 삼황오제 · 하 · 상 · 주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한 삼국시대 · 사마진 · 오호십육국 · 남북조 · 수 · 당 오대 · 십국 · 송 · 서하 · 요 · 금 · 원 · 명 · 청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 |
송 (宋) |
|
존속기간 | 기원전 11세기~기원전 286년 |
위치 | 중국 허난 |
수도 | 상구(商丘) |
국성 | 자성(子姓) 송씨(宋氏)[1] → 자성(子姓) 대씨(戴氏)[2] |
국가원수 | 공작 → 왕[3] |
주요 군주 | 양공 |
언어 | 상고 중국어 |
문자 | 금문 → 전서 (대전체) |
종교 | 중국 토속 종교 |
종족 | 상족(商族) |
성립 이전 | 상나라, 주나라 |
멸망 이후 | 제나라 |
현재 국가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clearfix]
1. 개요
宋[4]중국의 서주시대부터 존재하던 국가(기원전 1040년?~기원전 286년).
상나라 멸망 후 상나라 28대 왕인 제을의 장자이자 주(紂)의 이복형인 미자 계(微子啓)가 분봉받은 나라다. 사실상 상나라 왕실 혈통이 상나라를 그대로 계승한 나라이며 주류 민족도 상나라 구성원인 상족(商族)이었다. 수도는 상구(商丘)로,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商丘市) 남쪽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공실이 쓰는 국성(國姓)은 상나라 왕실 때와 같이 자(子)였고, 씨(氏)는 송(宋)이었다.
2. 역사
2.1. 춘추시대
서주가 통일한 직후에 받은 땅이 중원의 제후국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고, 칭호 또한 모든 제후국 중에서도 으뜸가는 공(公)이었다. 공신인 태공망 강상이 분봉받은 제나라(齊) 국군의 칭호가 후(侯)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우인데 이는 송나라가 이전 왕조인 상나라의 후예이기 때문으로 대대로 공의 칭호를 쓴 제후국은 오직 송나라 뿐이었다. 괵(虢), 소(召), 주(周)[5] 등 공(公)을 칭호로 쓰는 다른 제후국들은 제후국 자체가 공 대우를 받은 것인지 주 왕실의 경사를 맡아서 공이라 불린 것인지 불분명하다.무엇보다도 이렇게 우대를 받은 이유는 비록 주가 상을 멸망시키기는 했으나, 상의 유민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제신의 아들 무경을 상나라의 수도에 봉했으나 무왕이 죽고 혼란한 틈을 타서 무경을 감시하라고 붙여놓은 관숙과 채숙이 무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진압하느라 진땀을 뺐다. 무경, 관숙, 채숙의 난을 진압한 주나라는 무왕의 동생 강숙(康叔)을 상나라의 옛 수도인 조가에 봉하는 한편, 무왕이 상나라를 칠 때 주나라에 협력한 미자 계를 상구(商丘)에 봉건하여 상나라 유민의 민심을 달랜다. 송나라의 군주가 공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도 신하가 아니라 손님으로 대우했기 때문이며 천자국만 거행하는 제례를 허락했던 것도 같은 이유로 추측된다. 결국 상나라의 종묘사직은 상에서 송으로 이름만 바뀐채 상 왕실의 제례를 통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회유책만 펼친 것은 아니었다. 미자 계의 아들을 주나라 왕실로 데려와 제례를 돕는 관리로 삼았는데 이는 대외적으로는 송나라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존중하기 위해서 관리로 삼은 것은 아니고 아들을 인질로 삼아 송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다분했다. 미자의 후손이 주나라를 위해 일해야 했기에 결국 미자 계 사후 송나라는 동생인 미중 연이 뒤를 이었고, 이후 송나라의 국군들은 모두 미중 연의 후손이다. 또 통혼으로 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나 주 왕실의 여자가 송나라 군주에게 시집오는 일은 있어도 송나라 공실의 여자가 왕후가 되는 일은 없었다.[6]
춘추시대 초기만 해도 노(魯), 위(衛), 정(鄭) 등 중원에 위치한 제후국들과 함께 강성한 편이었으나, 태산을 등지고 제수(濟水)를 바라보는 드넓은 평아에 자리잡은 제(齊)[7], 분수(汾水)가 흐르는 태행산의 골짜기에 자리잡은 진(晉), 물자가 풍부한 한수(漢水)와 장강(長江) 사이에 자리잡은 초(楚)가 강성해지자 여타 중원의 제후국들과 마찬가지로 그 사이에 끼여 혼란을 겪게 된다.
2.1.1. 양공의 실정과 그 이후
송양공 때는 상나라의 부활을 꿈꾸며 패자를 노리기도 하였으나 상황에 걸맞지 않은 행동으로 실패하고 만다. 양공은 원래 자신의 능력은 군주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이복형 목이에게 군위를 양보하는 등 겸손한 행동을 보였으나 제 환공 사후에 제나라의 후계 분쟁를 수습하며[8] 점차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양공은 주(邾)문공을 시켜 증(鄫)의 군주를 제사에 희생으로 바치는데 인신공양은 상나라의 제사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주나라에서는 실제로 행해지는지와 별개로 원칙적으로 인신공양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 행동은 제후들로부터 인망을 잃는 원인이 된다. 또 등선공을 사로잡고 조나라를 공격하는 등 포악한 행동을 일삼아 제후들이 환공의 인덕을 그리워하며 송나라를 배반하게 된다.기원전 639년에는 양공이 녹상(鹿上)에서 회맹을 열고 제후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초나라를 초대하니 초성왕이 이를 수락하여 참가한다. 사마 자어[9]는 이를 두고 소국이 맹주가 되려 하는 것은 큰 화를 부를 것이라 예측한다. 가을에 송 양공, 초 성왕, 진(陳) 목공, 채 장공, 정 문공, 허 희공, 조 공공이 우(盂)에서 회합하는데 이때 초나라가 양공을 사로잡고 송나라를 정벌한다. 겨울에 제후들이 다시 회합을 열고 양공을 석방한다. 이를 보면 초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제후국들도 양공을 사로잡는데 동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진(晉)나라 같은 군사강국도 제후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는데 송나라 같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것도 아닌 나라가 제후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패자를 노렸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기원전 638년, 양공은 설욕을 하고자 초나라와 동맹국인 정나라로 쳐들어갔다. 초나라는 정나라를 돕고자 병력을 동원했고 두 군대는 홍수에서 맞붙었다. 송나라는 이미 전열을 갖췄으나 초나라군은 아직 강을 다 건너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마 자어는 적군은 수가 많고 아군은 적으니 도강하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송나라의 국력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전 패자인 제나라의 군위 계승 분쟁을 해결하고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가서인지 송 양공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어서 초군이 도강을 마쳤으나 아직 진영을 갖추지 못했을 때도 신하들이 공격을 주장했으나 양공은 따르지 않았다. 양공은 초나라 군대가 진영 정비를 마치자 마침내 공격했다.
결과는 당연히 송나라의 참패. 양공 본인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수많은 경대부의 자제들이 죽었다. 이에 모든 국인들이 양공을 원망했으나 양공은 군자가 어찌 상대의 어려움을 틈타 공격한단 말이냐.라는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망언을 남긴다. 아무리 춘추시대의 전쟁이라는 것은 극히 일부분의 계급만이 참전할 수 있는 특권이었고 당시 관습이 양측 군대가 정비된 상황에서 맞붙는 것이라 하지만 이런 관습 또한 결국 전투에서 이기기 위함임을 몰랐던 것이다.
양측이 정비된 상황에서 맞붙는 관습이 만들어진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일단 춘추시대에는 아직 전차가 주력이었고 전차는 잘 정비된 평야에서만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탁트인 평지에서는 기습을 한다 해도 멀리서부터 먼지가 일어나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기습의 의미가 없고 산지나 구릉에서는 전차가 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땅에서는 기습이 불가하고 양측이 정비된 상태에서 맞붙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땅이 아니라 강을 끼고 하는 전투의 경우, 만약 양측의 전력이 비슷하다면 어느 쪽도 먼저 도강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승부를 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 쪽이 도강하기 전에 반대편한테 군대를 물리라고 부탁한다. 한쪽이 군대를 물리면 다른 쪽이 도강하고 이어서 전투를 하는 것이다. 불과 11년 후인 기원전 627년, 진(晉)과 초(楚)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10]
진(晉)나라를 상대할 때와 달리 초나라가 송나라한테 군대를 물리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도강을 하는 것으로 보아 양군의 전력 차이가 컸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송나라가 중원에서 강한 축이라고 하지만 초나라는 중원에서 가장 강한 제나라도 혼자서 상대할 수 없어 제후 연합군을 모아서 대응한 강국이다. 전력 차이는 생각하지 않고 관습만 따라간 것으로 왜 그러한 관습이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송나라의 대패 이후 자어가 양공에게 하는 말은 정곡을 찌른다.
스포츠였다면 매우 훌륭한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쟁은 스포츠가 아니다.무엇보다 초나라는 이민족으로 취급되어서 이들과의 전쟁은 결코 스포츠라 할 수 없고 길거리 싸움과 같은 급이다. 초나라와 송나라의 전쟁은 스포츠로 따지면 체급이 밀리는 무에타이 선수가 본인보다 체급이 큰 복싱 선수를 상대하면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겠다며 킥을 쓰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스포츠에서도 어리석은 결정인데 하물며 길거리 싸움에서는 더 설명할 필요도 없는 행동이다.
송 양공의 행동이 문제인 것은 단지 전투에서 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렇게 인(仁)을 추구 했으면 이전에 타국의 군주를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해서는 안됐다. 인망을 얻어야 할 중원의 제후에게는 공포와 분노를 심어주고 물리쳐야 할 이적의 군대를 상대할 때는 인을 행했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이런 모순적인 행동은 본인의 능력보다 큰 목표를 노린 송 양공의 패착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송 양공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후 '인을 행해야 할 장소가 아닌데 인을 찾다가 망하는' 행동은 ' 송양지인'이라 불리며 2,000년 넘게 까이고 있다.[11]
송 양공의 이런 몰락 이후에 송나라는 더이상 패자를 꿈꿀 수 없었고 정(鄭), 위(衛), 진(陳), 노(魯) 등과 함께 진(晉)과 초(楚)의, 때로는 진(晉)과 제(齊)의 장기판 위 말로 전락한다. 춘추시대 중기에 한번은 화원, 다른 한번은 상술의 주도로 진, 초를 비롯한 열국의 정전협정을 기획하여 성사시켰지만 송나라의 외교적 능력 덕분이 아닌, 화원은 진나라의 집정 난서와 초나라의 영윤 자중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상술은 진나라의 집정 조무와 초나라의 영윤 자목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2. 전국시대
이렇게 남아있던 송나라의 위세도 전국시대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328년에 뜬금없이 각성하여 제(齊), 초(楚), 위(魏) 등을 격파하여 영토를 확대하였다.이때 군주가 언이었는데 강왕이라고 부른다. 송강왕은 송나라 역사상 유일한 왕으로 형 척성군을 몰아내고, 송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송나라가 일시적이나마 전국칠웅과 동급의 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송나라가 부강해진 이후에 강왕은 긴장이 풀어지고 교만해지면서 암군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신이 초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높은 장대에 소 피를 담은 자루를 걸고 화살을 쏘아 맞혀 피가 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12]
그는 신하들과 잔치를 열어 음주 대회를 했는데 자신은 10말을 들이켜도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은 그가 먹는 건 술이 아니라 꿀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멀쩡히 잘살던 신하 한빙의 아내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자 그의 아내를 강제로 빼았았으며 간신들을 총애하고 충신들을 내쫓았다.[13] 거기에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백성들에게 세금을 과중하게 거두는 폭정까지 저질렀다. 결국 이러한 행실로 인해 송나라 사람들에게조차 인망을 잃게 되었고, 이러한 기회를 주변국이 틈타, 왕호를 자칭하고, 형을 몰아내며, 약한 나라를 치고[14], 강한 나라[15]에게는 빌붙는 등 10가지 악행을 내건 제(齊), 초(楚), 위(魏) 등의 공격을 받고 기원전 286년에 멸망했다.
다만 송 강왕의 악행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한다. 제, 초, 위 연합군은 송나라가 아니라 조(趙)나라였어도 막기 버거운 강군으로 강왕이 폭군이 아니라 하더라도 송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잘나가다가 망했다고 폭군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또 합종군의 송나라 정벌 이후 제나라가 약속을 어기고 땅을 거의 독차지 함으로서 다른 국가의 어그로를 끌어 악의에게 멸망직전까지 몰린 것을 생각한다면, 송나라의 상태와 관련없이 연나라의 반간 소진의 계략에 제 민왕이 넘어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16]
3. 지역드립
상나라의 후신인 만큼 주나라 계열의 다른 제후국과는 다른 특이한 풍속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에 관련하여 송나라에 대한 특이하면서도 우스운 고사들이 많이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수주대토와 알묘조장이다. 주나라 시대 이후 우스꽝스러운 일이 있으면 덮어놓고 '송인(宋人)의 소행'이라 기록할 정도로 송나라를 희화화하는 기록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다만 송양지인이나 수주대토 등 송나라 사람들을 비하하는 고사성어가 여럿 전해져 오는 것은 당대에 송나라를 바라보는 비하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멸망한 왕조의 후예다 보니 인식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보기에 따라서는 송양지인, 수주대토 같은 고사성어는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지역드립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송이 상의 후신이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후대한 것과는 별개로, 망국의 후손이므로 그들을 희화화, 폄하, 무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망한 왕조에 대한 비하적 인식은 하나라의 후예로 알려진 기나라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했다. 기우가 그 예.
4. 기타
또 상나라에서 대대적으로 행해졌던 인신공양의 관습이 춘추전국시대의 송나라에게도 그대로 내려와서, 그 시대에도 인신공양을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문에 주변국들이 기겁하기도 했는데[17], 그 시절부터 이미 제물이 소로 교체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공자는 송나라의 공족인 '공보가'의 후손으로 알려졌으며[18][19] 묵자가 이곳의 대부였으며 장자도 송나라 사람이다. 따지고 보면 제자백가 중 유•도•묵(儒道墨)의 으뜸을 배출한 나라인 것이다.
5. 역대 군주
송 국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
자성 송씨(子姓 宋氏)
|
|||
초대 국군 미자 계 |
||||
2대 국군 미중 연 |
3대 국군 송공 계 |
4대 국군 정공 |
5대 국군 민공 |
|
6대 국군 양공 |
7대 국군 여공 |
8대 국군 희공 |
9대 국군 혜공 |
|
10대 국군 애공 |
11대 국군 대공 |
12대 국군 무공 |
13대 국군 선공 |
|
14대 국군 목공 |
15대 국군 상공 |
16대 국군 장공 |
17대 국군 민공 |
|
18대 국군 송공 유 |
19대 국군 환공 |
20대 국군 양공 |
21대 국군 성공 |
|
22대 국군 송공 어 |
23대 국군 소공 |
24대 국군 문공 |
25대 국군 공공 |
|
26대 국군 평공 |
27대 국군 원공 |
28대 국군 경공 |
29대 국군 송공 계 |
|
30대 국군 후소공 |
31대 국군 도공 |
32대 국군 휴공 |
33대 국군 후환공 |
|
자성 대씨(子姓 戴氏)
|
||||
34대 국군
척성군
|
초대 왕
강왕
|
|||
삼황오제 ·
하 ·
상 ·
주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한 삼국시대 · 진(晉) · 오호십육국 · 북조 · 남조 · 수 · 당 오대십국 · 송 · 서하 · 요 · 금 · 원 · 명 · 청 중화민국 국가원수 · 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
}}}}}}}}}}}}}}} |
- 미자(微子) 계(啓): 제을의 서장자이자 제신의 서형.
- 미중(微仲) 연(衍): 미자의 동생.
- 계(稽): 미중의 아들. 시호가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20]
- 정공(丁公) 신(申): 계의 아들.
- 민공(湣公) 공(共): 정공의 아들.
- 양공(煬公) 희(熙): 민공의 동생.
- 여공(厲公) 부사(鮒祀): 민공의 아들.
- 희공(釐公) 거(擧): 여공의 아들.
- 혜공(惠公) 한(覵): 희공의 아들.
- 애공(哀公): 혜공의 아들.
- 대공(戴公) 백(白): 애공의 아들. 무공을 제외한 대공의 나머지 아들들인 공자 충석, 열, 간에게서 각각 황보씨(皇甫氏), 화씨(華氏), 악씨(樂氏)가 나와 송나라의 주요 가문이 된다.
- 무공(武公) 사공(司空): 대공의 아들.
- 선공(宣公) 역(力): 무공의 아들.
- 목공(穆公) 화(和): 선공의 동생.
- 상공(殤公) 여이(與夷): 선공의 아들.
- 장공(莊公) 빙(馮): 목공의 아들.
- 민공(閔公) 첩(捷): 장공의 아들.
- 유(游): 민공의 동생으로 민공을 시해한 남궁만에게 옹립.
- 환공(桓公) 어열(御說): 민공의 동생. 그의 아들 공자 목이, 공자 탕, 공자 인, 공자 상에게서 주요 가문인 어씨(魚氏), 탕씨(蕩氏), 인씨(鱗氏), 상씨(向氏)가 유래.
- 양공(襄公) 자보(玆父): 환공의 아들로 송양지인의 주인공이다.
- 성공(成公) 왕신(王臣): 양공의 아들.
- 어(禦): 성공의 아우로 성공이 죽자 쿠데타를 일으켜 즉위.
- 소공(昭公) 저구(杵臼): 성공의 아들로 어를 죽인 송나라 사람들에 의해 옹립.
- 문공(文公) 포(鮑): 소공의 아우.
- 공공(共公) 하(瑕): 문공의 아들.
- 평공(平公) 성(成): 공공의 아들.
- 원공(元公) 좌(佐): 평공의 아들.
- 경공(景公) 난(欒): 원공의 아들.
- 계(啓): 경공의 종손.
- 소공(昭公) 득(得): 원공의 증손이자 계의 아우.
- 도공(悼公) 구유(購由): 소공의 아들.
- 휴공(休公) 전(田): 도공의 아들.
- 환공(桓公) 벽병(辟兵): 휴공의 아들.
- 척성군(剔成君) 희(喜): 환공의 아들.[21] 대공(戴公)의 후손으로 사성(司城)의 지위에 있다가 환공을 죽이고 찬탈하여 즉위.[22] 《사기》에서는 재위 41년[23][24]만에 아우 언에게 쫒겨났다.
- 강왕(康王) 언(偃): 척성군의 아우. 제나라, 위나라, 초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1]
춘추전국시대에는 성(姓)과 씨(氏)를 구별했는데 송나라의 국성은 상나라때와 같은 자(子)성이었고 씨는 송(宋)씨였다.
[2]
후환공 대에
척성군이 이끄는,
송대공 시기 갈라져 나온 대(戴)씨에게 송(宋)씨가 축출당해 씨가 바뀌었다. 물론 성은 자(子)로 동일.
[3]
기원전 318년부터.
[4]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sˤuŋ-s/. 현대 발음은 Sòng. 宋은 현대의 한자이며
금문 표기는 이렇다.
참조
[5]
주공 단이 다스린 주읍(周邑)
[6]
이는 주나라 희성(姬姓)과
제나라로 대표되는 강성(姜姓)은 대대로 통혼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주나라 왕비는 대대로 강성의 여인이 차지했다.
[7]
다만 이쪽은 춘추 초기에도 강국이었다.
[8]
제 환공이 훗날
제효공이 되는 태자 소의 계승을 송 양공한테 부탁한다.
[9]
양공의 이복형 목이의 자가 자어이다.
[10]
다만 이때는 초나라가 군대를 물리지만 진나라는 초나라가 자기들을 두려워하여 후퇴했다고 선전하며 도강하지 않고 돌아간다.
[11]
공자나
사마천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이를 옹호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양공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일례로
진수는 "사마천이나 공자가 나라를 다스리거나 군대를 이끌어 봤더라면 양공이란 바보를 찬양하는 짓을 절대 안 했을 것."이라고 둘을 호되게 비판한다. 대다수 평은 허세로 아주 나라를 말아먹을 짓이었고 더불어 양공 자신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 전투에서 초군이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그는 1년도 되지 않아 죽었기 때문이다.
[12]
이건 그의 먼 조상이었던 상나라 왕 무을이 시전했는데 그는 우상을 만들어 같이 도박하고 우상을 목베며 강왕과 똑같은 짓을 했다가 벼락을 맞고 죽었다.
[13]
한빙과 그 아내는 자살했다. 화가 난 강왕은 합장해달라는 그 아내의 유언을 무시하고, 따로 매장했지만 두 무덤에서는 나무가 자랐고 결국 붙었는데 여기서
상사병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14]
등나라 같은 소국을 멸했다.
[15]
진(秦)나라를 말한다.
[16]
전국종횡가서에 의하면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것과 달리 사실 소진의 주 업적은 6국의 재상의 인수를 차고 진나라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제나라에서 연나라의 반간으로 활약하며 제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안그래도 소진열전은 오류로 가득했는데 전국종횡가서의 발견 이후 사마천이 묘사한 소진의 신뢰도는 사실상 부정되는 상황이다.
[17]
주변국 뿐만 아니라 송나라 내부에서도 기겁하는 경대부들이 존재했다.
[18]
공자 본인도 자신이 상과 송의 후예라는 것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죽기 직전 제사를 송나라와 상나라의 예법으로 지내며 장례하는 꿈을 꾸고 유언하면서 상 왕실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내보였다.
[19]
다만 공자의 부친 숙량흘 이전의 세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공자가 스스로 상나라의 후예라 생각한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공보가의 후손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
서주 초기는 아직 시법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송나라 뿐만 아니라 많은 제후국들한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주나라의 무왕, 성왕, 강왕, 소왕, 목왕조차 시호가 아니라 생전부터 불리던 칭호다.
[21]
《
사기》
[22]
《
죽서기년》, 《
한비자》
[23]
중국 학자 백광기(白光琦)는 재위 23년(기원전 355년 ~ 기원전 333년)으로 추정.
[24]
중국 학자 양관(楊寬)은 재위 28년(기원전 356년 ~ 기원전 329년)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