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23:10:36

장드디외 술트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1e43, #002654 20%, #002654 80%, #001e43);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부르봉 왕정복고|
왕정복고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아르망에마뉘엘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 장조제프 데솔 엘리 드카스
(제2대) 제5대 제6대 제7대
아르망에마뉘엘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 조제프 드 빌리에 장바티스트 실베르 게 드 마르티냐크 쥘 드 폴리냐크
제8대
카지미르루이빅투르니앙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트마르
[[7월 왕정|
7월 왕정
]]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자크 라피트 카지미르 페리에 장드디외 술트 에티엔 모리스 제라르
제13대 제14대 제7대 제16대
위그베르나르 마레 에두아르 모르티에 빅토르 드 브로이 아돌프 티에르
제17대 (제11대) (제16대) (제11대)
마티외 몰레 장드디외 술트 아돌프 티에르 장드디외 술트
제18대 (제17대)
프랑수아 기조 마티외 몰레
[[프랑스 제2공화국|
제2공화국
]]
제19대 제20대 제21대 제22대
자크 샤를 뒤퐁 드 뢰르 프랑수아 아라고 루이외젠 카베냐크 오딜롱 바로
제23대 제24대
알퐁스 앙리 도풀 레옹 포셰
[[프랑스 제2제국|
제2제국
]]
제25대 제26대
에밀 올리비에 샤를 쿠쟁몽토방
[[프랑스 제3공화국|
제3공화국
]]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루이 쥘 트로쉬 쥘 아르망 뒤포르 알베르 드 브로이 에르네스트 쿠르토 드 시셰
제31대 (제28대) 제32대 (제29대)
루이 뷔페 쥘 아르망 뒤포르 쥘 시몽 알베르 드 브로이
제33대 (제28대) 제34대 제35대
가에탕 드 로슈부에 쥘 아르망 뒤포르 기욤 워딩턴 샤를 드프레이시네
제36대 제37대 (제35대) 제38대
쥘 페리 레옹 강베타 샤를 드프레이시네 샤를 뒤클레르
제39대 (제36대) 제40대 (제35대)
아르망 팔리에르 쥘 페리 앙리 브리송 샤를 드프레이시네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르네 고블레 모리스 르비에 피에르 티라르 샤를 플로케
(제43대) (제35대) 제45대 제46대
피에르 티라르 샤를 드프레이시네 에밀 루베 알렉상드르 리보
제47대 제48대 (제47대) (제46대)
샤를 뒤피 장 카지미르페리에 샤를 뒤피 알렉상드르 리보
제49대 제50대 (제40대) (제47대)
레옹 부르주아 쥘 멜린 앙리 브리송 샤를 뒤피
제51대 제52대 (제42대) 제53대
피에르 발데크루소 에밀 콩브 모리스 루비에 페르디낭 사리앵
제54대 제55대 제56대 제57대
조르주 클레망소 아리스티드 브리앙 에르네스트 모니 조제프 카요
제58대 (제55대) 제59대 제60대
레몽 푸앵카레 아리스티드 브리앙 루이 바르투 가스통 두메르그
(제46대) 제61대 (제55대) (제46대)
알렉상드르 리보 르네 비비아니 아리스티드 브리앙 알렉상드르 리보
제62대 (제54대) 제63대 제64대
폴 팽르베 조르주 클레망소 알렉상드르 밀랑 조르주 레이그
(제55대) (제58대) 제65대 제66대
아리스티드 브리앙 레몽 푸앵카레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마르시알 에두아르 에리오
(제62대) (제55대) (제66대) (제58대)
폴 팽르베 아리스티드 브리앙 에두아르 에리오 레몽 푸앵카레
(제55대) 제67대 제68대 (제67대)
아리스티드 브리앙 앙드레 타르디외 카미유 쇼탕 앙드레 타르디외
제69대 제70대 (제67대) (제66대)
테오도르 스테그 피에르 라발 앙드레 타르디외 에두아르 에리오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68대)
조제프 폴봉쿠르 에두아르 달라디에 알베르 사로 카미유 쇼탕
(제72대) (제60대) 제74대 제75대
에두아르 달라디에 가스통 두메르그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페르낭 부아송
(제70대) (제73대) 제76대 (제68대)
피에르 라발 알베르 사로 레옹 블룸 카미유 쇼탕
(제76대) (제72대) 제77대 제78대
레옹 블룸 에두아르 달라디에 폴 레노 필리프 페탱
[[비시 프랑스|
비시 정권
]]
(제70대) (제74대) 제79대 (제70대)
피에르 라발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프랑수아 다를랑 피에르 라발
[[프랑스 임시정부|
임시정부
]]
제80대 제81대 제82대 (제76대)
샤를 드골 펠릭스 구앵 조르주 비도 레옹 블룸
[[프랑스 제4공화국|
제4공화국
]]
제83대 제84대 제85대 (제84대)
폴 라마디에 로베르 슈만 앙드레 마리 로베르 슈만
제86대 제87대 (제86대) 제88대
앙리 쾨유 조르주 비도 앙리 쾨유 르네 플레뱅
(제86대) (제88대) 제89대 제90대
앙리 쾨유 르네 플레뱅 에드가르 포르 앙투안 피네
제91대 제92대 제93대 (제89대)
르네 마예르 조제프 라니엘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에드가르 포르
제94대 제95대 제96대 제97대
기 몰레 모리스 부르제스모누리 펠릭스 가야르 피에르 플림랭
(제80대)
샤를 드골
[[프랑스 제5공화국|
제5공화국
]]
제98대 제99대 제100대 제101대
미셸 드브레 조르주 퐁피두 모리스 쿠브 드뮈르빌 자크 샤방델마스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제105대
피에르 메스메르 자크 시라크 레몽 바르 피에르 모루아
제106대 (제103대) 제107대 제108대
로랑 파비위스 자크 시라크 미셸 로카르 에디트 크레송
제109대 제110대 제111대 제112대
피에르 베레고부아 에두아르 발라뒤르 알랭 쥐페 리오넬 조스팽
제113대 제114대 제115대 제116대
장피에르 라파랭 도미니크 드빌팽 프랑수아 피용 장마르크 에로
제117대 제118대 제119대 제120대
마뉘엘 발스 베르나르 카즈뇌브 에두아르 필리프 장 카스텍스
제121대 제122대
엘리자베트 보른 가브리엘 아탈
}}}}}}}}}


파일:프랑스 제1제국 국장.svg
프랑스 제1제국의 제국원수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2px -12px"
장 란 루이니콜라 다부 조아킴 뮈라
앙드레 마세나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 미셸 네
장바티스트 베시에르 장드디외 술트 에두아르 모르티에
장바티스트 주르당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 피에르 오주로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기욤 마리 안 브륀
도미니크 카트린 드 페리뇽 장 마티유 필리베르 세뤼리에 아드리안 쟈노 드 몽세
클로드 빅토르 오귀스트 마르몽 자크 마크도날
니콜라 우디노 루이가브리엘 쉬셰 로랑 구비옹 생 시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에마뉘엘 그루시 }}}}}}}}}
제1대 달마티 공작
장드디외 술트
Jean-de-Dieu Soult
1er duc de Dalmatie
파일:Soult2.jpg
생몰년도 1769년 3월 29일 ~ 1851년 11월 29일
신체 178cm
출생지 프랑스 왕국 생타망라바스티드(Saint-Amans-la-Bastide)
사망지 프랑스 공화국 생타망라바스티드
매장지 프랑스 공화국 타른 주 생타망술트(Saint-Amans-Soult)[1]
국적 프랑스 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부르봉 왕정복고 7월 왕정 프랑스 제2공화국
계급 제국 원수( 프랑스 제1제국)
프랑스 원수(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 대원수( 7월 왕정)

1. 개요2. 생애
2.1. 전투의 달인2.2. 잇따른 실패2.3. 부르봉 왕조 복귀 후
3. 평가

[clearfix]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그리고 왕정복고 때 프랑스 대원수까지 오르며 21세기 현재까지 프랑스 역사상 마지막 대원수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휘하 부대의 규율과 기강, 보급을 늘 만반으로 준비 해놓는 운용 능력도 보여주었지만 그의 전술적 기량은 그가 상대한 영국군 지휘관들에 비해 약간 부족했고, 참모로서는 유능하지 못해 스페인 전선을 망치는 단초를 제공했으며 워털루 전투의 패배에도 일조했다.

2. 생애

1769년 남프랑스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이 일찍 사망하여 16세에 이등병으로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이등병으로 군력을 시작했음에도, 그가 유년기 받은 고등교육 덕택에 그는 복무 5년 만에 하사관으로 진급하고 1792년에 혁명정부가 들어서고부터는 자기 부대에서 차출되어 신설된 자원병 대대의 훈련 교관에 임명, 교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장교가 부족했던 혁명정부의 눈에 띄어 1년만에 대위로 파격적인 진급을 한다.

1794년에는 대대장, 1796년에는 여단장에 오르는 등 진급에 진급을 계속했고, 1799년에는 앙드레 마세나 휘하에서 복무하며 스위스 전역에 참전, 쮜리히 포위전에서 도시 공격의 일부를 담당했으며 그 때의 공으로 인해 사단장에 임명된다. 술트는 계속해서 마세나 밑에 복무하며 1800년의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했는데, 이 때 제노바 전투에서 그는 나폴레옹의 눈에 든다. 나폴레옹은 이 때까지 술트에 대한 칭찬과 명성만을 들어보았을 뿐이었고 직접 대면한 바 없었는데, 그는 술트를 눈여겨보고 마세나에게 술트가 그 명성만큼의 장수냐 물었다. 이에 대한 마세나의 대답은 "그의 판단력과 용기로 보면 그보다 더 뛰어난 지휘관은 드물겁니다." 였다. 나폴레옹은 이 때 즉각 술트를 중용하기 시작, 1804년에는 원수로 진급한다.

2.1. 전투의 달인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앞두고 적지 깊숙히 들어와 병력면에서 우세한 동맹군과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술트는 , 뮈라와 함께 나폴레옹에게 후퇴를 설득하기로 합의했는데, 나폴레옹을 직접 설득하는 건 가장 나폴레옹과 친한 란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나폴레옹이 란에게 후퇴를 제안받고 몹시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술트는 그 자리에서 "저라면 절대로 후퇴를 건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여 란의 뒤통수를 쳤다(...). 빡친 란이 결투를 신청하자 나폴레옹이 중재를 나서서 어떻게든 무마되긴 했지만 이 일로 란과 사이가 틀어져 버린다.[2] 그러나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일, 나폴레옹군의 우익을 담당한 술트는 오스트리아군이 포진한 고지를 20분이면 충분하다며 실제로 15분만에 점령하는 대전과를 올린다.

그 후 예나, 아일라우등지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군과 싸우다가 1808년 혼란에 빠진 이베리아 반도를 수습하기 위해 출동한 나폴레옹을 따라 스페인으로 향한다. 여기서 스페인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중이던 영국군을 패퇴시키고 사령관 무어 장군을 전사하게 하는 성과를 올린다.

2.2. 잇따른 실패

그러나, 이후 포르투갈 왕국으로 너무 느리게 진군하다가 신임 사령관 웰링턴 지휘하에 전력을 재정비한 영국군에게 패배, 스페인으로 후퇴하여 웰링턴과의 악연을 시작한다.

이후 술트 원수는 스페인 국왕이 된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군사자문관으로 스페인 주둔 프랑스군을 지휘하지만, 판단착오와 우유부단함으로 스페인 게릴라를 키우고, 영국군의 증강을 막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1811년, 마세나 원수와 양동으로 포르투갈의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출동, 영국-포르투갈연합군이 주둔하던 바다호즈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마세나 원수의 부대가 패하는 탓에 요새 주둔군을 놔두고 퇴각한다.

그해 4월, 영국-포르투갈군이 바다호즈 요새를 제공격하자 구원, 1812년까지 영국군이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낸다.

1813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돕기 위해 독일로 호출되지만, 독일에 도착할 무렵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대패함으로써 러시아 전역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해 5월 뤼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활약하지만, 웰링턴의 영국군이 스페인으로 재침입,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하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 남부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영국군이 스페인을 석권했기 때문에, 술트는 프랑스 남부에서 예비군을 중심으로 급조부대를 편성, 피레네 산맥에서 영국군이 프랑스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전투를 벌였지만, 일주일만에 8만명의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맹공으로 와해되어 술트는 잔여병력을 이끌고 영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프랑스로 퇴각한다.

1813 ~ 1814년 겨울 동안 술트는 와해된 프랑스군을 재규합하여 남부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저항을 계속했지만, 웰링턴에게 번번히 패배, 하여 툴루즈까지 후퇴한다. 그리고 1814년 4월, 툴루즈를 포위한 웰링턴의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과거 여러차례 웰링턴에게 털렸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아주 필사적으로 저항해서, 오히려 도시로 들어오려던 연합군을 격퇴 해버리는등 예상외로 선전하였다. 진작에 이렇게 좀 싸우지[3] 하지만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4일 전 나폴레옹이 황제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선 결국 대불동맹군과 휴전을 하게 된다. '툴루즈 전투'는 백일천하 이전 프랑스군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 되었다.

나폴레옹 퇴위 후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만,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자, 곧바로 달려가 나폴레옹의 총참모장이 된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에서 술트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잘못 전달하거나 늦게 전달하는 등[4] 참모로서의 재능이 부족했음을 보이며 패배에 일조하고 만다.[5]

2.3. 부르봉 왕조 복귀 후

부르봉 왕조 복귀 후 프랑스에서 추방당하지만, 1819년 루이 18세에게 용서받고 귀국, 국방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1820년에는 다시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루이 18세의 동생)가 퇴위하고 루이필리프가 입헌군주제를 천명하자 즉시 루이필리프에게 충성을 맹세, 그의 아래에서 1830년부터 1834년까지 국방장관, 1832년부터 1834년까지 프랑스 총리를 역임하고, 1838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식에 특사로 파견, 나폴레옹 전쟁기간 중 치열하게 싸웠던 웰링턴 공작과 재회한다. 여기서 웰링턴은 그를 보자마자 갑자기 달려들어 술트의 팔을 잡아 그를 놀라게 하며 "드디어 잡았다!!"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유인 즉슨, 전쟁 내내 술트가 여러번 그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 갔던 것에 대한 장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트 역시 넉살 좋게 웃으며 옛 숙적과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눴다.

1839년부터 1847년까지 루이필리프 밑에서 프랑스 총리를 역임[6], 무난하게 직무를 수행했으나 몇차례 뇌물수수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또다시(...) 루이필리프를 버리고 열성적인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하며 혁명가들을 지지했다. 술트의 정치 생활은 길었으나 딱히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총리직을 여러번 지냈으나 이는 대부분 무난하게 흘러갔다. 어떤 이는 그의 정치 감각에 대해 " 그는 적군 앞에서만 용맹했다."고 평했을 정도였으니. 뇌물 수수 혐의도 여러차례 제기된 바 있다. 그런데도 후임 총리였던 프랑수아 기조가 2월 혁명으로 불명예스럽게 은퇴한 것과 달리 이 양반은 3차례나 총리를 역임한 것을 보면 정치 수완(...)은 나름 좋았던 모양이다.

결국 나폴레옹과 동갑으로 30년이나 더 살며 당시에는 엄청나게 오래 산 82살 천수를 누리고 1851년에 고향에서 눈을 감았다.

3. 평가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장으로 불리기에는 부족했으나 야전지휘관으로서는 유능한 인물.
나폴레옹 → 루이 18세의 왕정복고 → 루이 필리프의 입헌군주체제로 계속 변화하는 시류에서 내내 고관의 자리를 유지한 처세술에 뛰어난 인물.

사석에서 나폴레옹은 술트에 대해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유인 전술가." 라고 평했을 정도로 유능한 야전 사령관이었지만 참모로서 능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정권 교체기에 약삭빠른 행동으로 인격적으로는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다만 파리 방어를 맡아놓고 조금 불리해지는 낌새가 보이자 바로 항복해버린 마르몽과는 달리,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에서 웰링턴한테 두들겨 맞으면서도 홀로 끈질기게 버티었고, 나폴레옹이 하야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은 높게 사줄만 하다.

또한, 코루나 전투에서 적장인 영국군 무어 중장이 전사했을 때 남겨진 그 유해를 예우를 갖추어 제대로 묻어준 점이나, 영국군 포로들을 원칙에 맞게 잘 대우한 점, 그리고 반도전쟁과 피레네전투, 남프랑스의 전투들에서 '웰링턴의 호적수'로 활약한 점,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 대관식에서 프랑스 대사로 참석한 것 때문에 술트는 영국인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1] 고향이자 출신지인 위의 생타망라바스티드와 같은 동네다. 술트의 사망 직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1851년 지명 변경. [2] 출처: 그레고리 프리몬-반즈,토드 피셔 작, <나폴레옹 전쟁-근대 유럽의 탄생> p.81~82 [3]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 숫적으로 근소하게 불리했지만, 웰링턴측 보다 사상자도 적게 냈다. 그러나 영국군이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고지대를 선점하자 수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철수 해버렸다. 참고로 영국과 프랑스 양측은 현재까지도 서로 자신들이 이긴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4] 대표적으로 숲속탐험을 하느라 헤매던 에마뉘엘 그루시를 찾으라며 명령했을 때 술트가 단 한 명의 장교만 보내자 " 베르티에라면 20명은 보냈을 거라고!" 라며 질책했다고 한다(…). 그 전령도 가다가 영국군의 포탄을 맞고 죽어버렸고. [5] 다만 웰링턴에게 털려본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군을 얕봐선 안된다며 나름 최선을 다해 직언을 하긴 했다. 하지만 직접 웰링턴과 붙어본 경험이 없던 나폴레옹은 이를 간과했다. [6] 1840년 3월 1일과 10월 29일 사이에는 아돌프 티에르가 총리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