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27 05:09:48

부르봉 왕조


프랑스의 역사
L'Histoire De La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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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3년 843년 ~ 1940년 19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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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시초2.2.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본가)
2.2.1. 프랑스의 오를레앙 왕조
2.3. 스페인의 보르본 왕조
2.3.1. 룩셈부르크의 부르봉파름 왕조2.3.2. 양 시칠리아 왕국의 보르보네 왕조
3. 기타

1. 개요

중세부터 현대 이전까지 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를 통치했고 일부는 현재도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왕조.

2. 역사

2.1. 시초

프랑스 카페 왕조의 한 갈래로 성왕(聖王) 루이 9세의 막내아들(육남)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가 시조다. 유럽 최대의 가문인 카페 왕조의 방계로, 샤를마뉴 때부터 족보를 추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가문이다. 근세의 경쟁자인 합스부르크 가문도 범(汎) 카페 가문보다 정통성과 유래 면에서는 밀린다. 합스부르크는 원래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듣보잡 백작 집안이었다. 다만 원래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귀족 가문 에티크노이드의 방계지만 합스부르크는 곁가지였을 뿐이다. '부르봉'이라는 말의 어원은 부르봉라르샹보 시(市). 원래는 소영주 가문이었으나 부르봉 가문의 베아트리스가 카페 가문의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와 결혼함으로써 왕족의 일원이 되었다.

로베르와 베아트리스 사이에서 나온 자식인 루이 1세가 초대 공작이 되었고, 이후 1488년 장 2세가 죽음으로써 그의 동생 피에르 2세가 영지를 계승하여 루이 11세의 왕녀 안과 결혼했다. 이들 사이의 딸인 수잔은 1505년 몽팡시 가문의 샤를과 양자(養子) 결혼을 했으며, 이 샤를은 원수(元帥)로서 프랑수아 1세의 휘하에서 이탈리아 전쟁 때에 활약하였다.

2.2.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본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96px-Coat_of_Arms_of_the_Bourbon_Restoration_%281815-30%29.svg.png
프랑스 부르봉 왕조(1589~1792, 1814~1815, 1815~1830)
샤를 이후 직계가 단절이 되었다가 그의 일족인 방돔 공작 앙투안이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르그리트의 딸 나바르 여왕 잔과 결혼하여 위그노 교도들과 연합해 발루아 왕조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나바르의 잔 또한 카페 왕조의 방계인 알브레 왕가 출신으로, 독실한 신교도에다 당대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위그노 전쟁에서 발루아 왕조의 섭정 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프랑스의 차기 국왕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위그노 전쟁 당시의 프랑스를 다스리던 카트린은 발루아 왕조의 직계가 끊어지면 무능한 아들들을 대신하여 가장 가까운 왕족 가문인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잇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잔느와 그 아들을 증오했다. 잔느 또한 아들의 왕권을 주장하며 카트린을 음험한 이탈리아 여자라고 비난했다. 어찌나 사이가 나빴던지 잔이 파리까지의 무리한 여행과 아들의 결혼 준비로 얻은 병으로 사망했을 때 카트린이 그녀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 그러나 아들을 프랑스 왕위에 앉히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결국 사후에 결실을 맺게 된다.

잔의 자식인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은 결국 앙리 4세가 되었다. 카트린은 앙숙의 아들인 앙리를 미워했으나, 그녀가 낳은 아들들이 후사를 볼 가망이 없자 극단적인 조치로 막내딸 마르그리트를 앙리와 결혼시켜 핏줄을 이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둘 간의 자식은 없었기 때문에 발루아 왕조의 피는 결국 단절되고,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왕의 정식 명칭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자 앙리 4세의 부인이 되는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다룬 영화가 여왕 마고이다. 마르그리트(별명이 마고/Margot)의 배우는 이자벨 아자니. 복잡한 과정을 통해 앙리 드 부르봉이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인 앙리 4세가 되고,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여왕인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가 된다.

14세기 초반에 잠시 프랑스와 나바르가 동군연합을 이룬 적이 있었지만 곧 해체되었던 선례가 있었는데,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한 앙리 4세가 나바르의 왕이기도 했기 때문에 프랑스 왕의 칭호에 나바르 왕이 다시 한번 덧붙게 되었다. 다만 나바르 왕위는 계속 카페 왕조로 계승되었다. 이후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에서는 샤를 10세까지 이어지다가 7월 혁명 때 퇴출되었다. 샤를 10세의 장남 앙굴렘 백작 루이( 루이 19세)는 자손이 없었고 샤를 10세의 차남 샤를 페르디낭의 외아들이자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 앙리 5세) 역시 자손이 없어서 직계는 여기서 단절되었다.

이후 방계로 넘어가서 루이 13세의 차남( 루이 14세는 장남이다) 필리프의 가문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에게 넘어가 루이 13세의 6대손 루이 필리프 1세가 이어받았으나, 2월 혁명 때 퇴출되었고 현재 프랑스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은 루이 필리프 1세의 7대손인 파리 백작 장 도를레앙(일명 장 4세)이다. 앙리 7세는 현 파리 백작 장 도를레앙의 아버지이다.

샤를 10세의 후손들인 부르봉 직계가 단절된 이후 명목상의 계승권에 논쟁이 있어서, 정통주의자들은 혈통상 가장 앞서지만 부르봉 가문과 척을 진 오를레앙 왕조 대신에 펠리페 5세로부터 내려오는 두 번째로 오래된 분가인 스페인 보르본 가문을 지지했다. 여기서는 또 살리카 법을 적용해서 이사벨 2세로 이어지는 스페인 본가가 아니라 남계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를 지지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의 명목상 계승권은 카를리스트가 주장하게 되는데, 카를로스의 남계 후손이 단절된 이후에는 스페인의 알폰소 13세로 넘어가 스페인 보르본 가문이 부르봉 왕조 전체의 수장[2]이 된다.

알폰소 13세 이후에는 후안 카를로스 1세[3] 펠리페 6세가 왕위주장자가 될 것 같지만, 위에도 나왔다시피 스페인 왕위계승법과 따로 노는 프랑스 왕위계승법에 따라 알폰소 13세의 차남인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로 계승권이 넘어갔다. 이유를 말하자면 하이메 왕자는 청각장애 때문에 아버지의 강요로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는데, 스페인과는 별개로 프랑스 왕위계승권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폰소 13세 사후 하이메 왕자는 부르봉 왕조 전체의 수장이자 앙주 공작을 자처하며 정통주의자들에게 인정받았다.

이렇게 부르봉 왕조의 계승권이 분리된 결과, 2019년 기준으로는 하이메의 손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루이 20세)이 프랑스 왕위 요구자이며 부르봉 왕조 전체의 수장이다. 루이스 알폰소는 알폰소 13세의 증손자며, 어머니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외손녀로 현재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의 육촌에 해당하며, 앙주 공작 직함을 갖고 있다. 부모님이 나중에 헤어졌고, 생모는 그 후 두 번이나 더 재혼해서 모자관계가 썩 좋지 못하다고 한다. 게다가 1987년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발표로 아버지의 직함인 카디스 공작을 세습하지 못했기에, 스페인 보르본 왕실과의 사이 또한 좋지 못한 상황이다. 2003년 베네수엘라 여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고 있지만, 혼인식 때 스페인 왕족은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아 스페인 왕실의 불화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1987–1989년 당시 파리 백작 앙리 도를레앙(현재 파리 백작 장 도를레앙의 아버지)은 라이벌인 앙주 공작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을 상대로 프랑스 왕실 수장 직함 사용 금지를 청원하며 법정 공방을 벌였으나 패소했다.

2.2.1. 프랑스의 오를레앙 왕조

부르봉 왕조의 가장 오래된 분가로 1661년 루이 13세가 차남 필리프에게 왕자령으로 오를레앙 공작 칭호를 수여하면서 시작되었다. 길게 써서 부르봉오를레앙 왕조로 부르기도 하지만 오를레앙 왕조로 훨씬 많이 쓰인다. 100년 이상 프랑스의 제2왕족가문으로 권세를 누렸고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가 혁명을 지지하며 왕위를 노리기도 하였다. 1830년 그 아들인 루이필리프 1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위를 차지하였으나 1848년 퇴위하며 왕조로서는 1대로 그쳤다.

1883년 부르봉 본가의 샹보르 백작 앙리가 사망하면서 살리카법 원칙대로라면 부르봉 가문의 종가가 되었어야 하지만, 선대 오를레앙 공작과 루이필리프 1세가 부르봉 본가와 완전히 척을 졌기 때문에[4] 제대로 된 종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분가로 브라질의 오를레앙브라간사 가문이 있다. 이 쪽은 1864년 브라질의 페드루 2세의 후계자였던 이자베우 황태녀와 오를레앙 가문의 가스통 공이 결혼하면서 시작되었고 이자베우 황태녀 사후 장남과 차남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여[5] 두 계열로 나뉘어 있다.

2.3. 스페인의 보르본 왕조

스페인어로 부르봉은 Borbón이다. 보르본 왕조 참조.

2.3.1. 룩셈부르크의 부르봉파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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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보르본 왕가의 방계가문으로, 파르마 공국의 통치가문으로서 공식적인 가문명은 보르보네 디 파르마(Borbone di Parma)이며 스페인어로는 보르본파르마(Borbón-Parma), 룩셈부르크에서는 프랑스어인 부르봉파름(Bourbon-Parme) 가문이라고 읽는다. 보다시피 가문 이름을 읽는 법이 여러가지인데 출신은 스페인이지만 다스렸던 영지는 이탈리아고, 또 폐위된 이후로는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9년 기준 가문의 수장인 카를로스 공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네덜란드인인데 그 아버지인 카를로스 우고 공은 또 프랑스-스페인 이중국적자다.

1748년 파르마 공국의 상속녀이자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왕비인 이사벨 파르네제가 아들 필리포[6]에게 파르마 공국을 물려주면서 시작되었다. 소국의 통치가문이었으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부르봉 본가와 같은 대가문들과 계속해서 통혼하여 상당히 지체가 높은 가문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1801~1807년에 나폴레옹의 괴뢰국인 에트루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잠시 즉위했던 적이 있으나 곧 사라졌다. 전쟁이 마무리된 후 빈 체제 때는 열강들의 조정으로 오스트리아 마리 루이즈가 1847년까지 통치하기도 하였다. 약 반세기가 지난 1847년에야 겨우 부르봉 가문이 복위했으나 1859년 리소르지멘토 사르데냐 왕국에 점령되면서 영구히 통치권을 잃었다. 마지막 파르마 공작이었던 로베르토 1세는 두 번 결혼했는데, 각각의 결혼에서 12명씩의 자식을 낳아 유럽 각국의 가톨릭 가문들과 통혼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샤를 10세의 손녀인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였다.

룩셈부르크는 로베르토 1세의 6번째 아들인 펠릭스 공이 샤를로트 여대공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장 대공이 대공위를 이어받은 1964년부터 부르봉 왕가의 일원으로 봤으나...

1987년 당시 룩셈부르크 대공이던 장 대공이 부르봉 왕가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당시 보르본파르마 가문의 수장 카를로스 우고(2010년 별세)가 장 대공들의 아들들이 평민과 결혼하자 이를 귀천상혼으로 취급하려 한 것이다. 비통치 왕가들은 오히려 지금까지도 귀천상혼을 엄격히 지키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현재 군주제를 유지하는 나라의 왕족들은 법적으로 귀천상혼을 규정하기가 쉽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분쟁일 수도. 군주제가 폐지된 나라의 왕족 후손들은 귀천상혼을 지키지 않을 경우 언젠가 군주정 복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가문 전체가 왕족의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일반인에 동화되기 쉽기 때문에 기를 쓰고 귀천상혼을 지키려 하는 반면 군주제가 계속 유지되는 나라의 왕족들은 현재까지도 자기네 가문이 대대로 군주를 배출하여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상황이라 왕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분가하여 일반인에 동화되어도 자기 가문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왕위에 오르기 때문에 언젠가 군주제가 폐지되지 않는 한 왕족 전체가 남김없이 일반인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을 걱정이 없다는 점도 한몫 하는 듯하다. 고로 현재 룩셈부르크 왕조는 나사우바일부르크 가. 왕족들은 원래 대공가에서 가지고 있던 'SAGD' 칭호가 아니라 부르봉파름 가문의 후손 자격으로 가지게 된, 즉 SAR(전하)칭호는 그대로 유지한다.

정확히 말하면 칭호를 취사선택했다기 보다는 1987년에 보르본파르마 가와 완전히 단절했다가 1995년에 화해하면서 SAR 칭호를 다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고로 장 대공과 아들인 앙리 대공은 부르봉파름 공작 칭호와 계승권을 포기했지만 손자대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부르봉파름 공작 칭호를 사용하고 계승권도 가진다. 다만 1987년에 정해진 바와 같이 룩셈부르크의 왕조명은 그대로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으로 유지하는 식으로 정리했다. 사실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부르봉파름 가문 계승서열이 직계에 이어 바로 4위에다가[7]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남계후손만 19명이라 전체 부르봉파름 가문 남성 계승권자 31명 중 거의 2/3나 되기 때문에 이들이 전부 계승권을 포기해버리면 부르봉파름 가문에 계승권자들이 남아나질 않는다.

2.3.2. 양 시칠리아 왕국의 보르보네 왕조

보르보네 델레 두에 시칠리에(Borbone delle Due Sicilie) 또는 보르보네 디 나폴리(Borbone di Napoli)로 읽는다. 이쪽 또한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분가로 이사벨 파르네제의 아들인 나폴리 국왕 카를로 7세가 이복형의 뒤를 이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하면서 삼남인 페르난도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을 물려주며 시작되었다. 1734년~1861년까지 나폴리 왕국과 양 시칠리아 왕국을 다스렸다. 현재 계승권 분쟁으로 칼라브리아와 카스트로 두 계열로 나뉘어 있다.

3. 기타

  •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통치기가 프랑스의 여러 소설이나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경우가 많다. 왕가에 배출한 왕들이 하나같이 특별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또한 프랑스 혁명같은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
  • 앙리 4세 이래로 상당수의 왕들이 어쩐지 호색한이었던 전통이 있다.(...) 루이 13세 등의 예외가 있어서 전부 호색한은 아니다.
  • 왕가의 상징은 위 그림에 나오듯 백합. 왕들의 초상화에 보면 모피에 노란 백합이 수놓아져 있다.
  •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2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고작 5명이 다스렸을 정도로 국왕의 평균 재위기간이 긴 왕조였다. 가장 짧은 치세의 루이 16세만 해도 18년에 달하며, 루이 14세는 72년, 루이 15세는 58년이나 왕위에 있었다.[8] 그래서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증손자고, 루이 16세도 루이 15세의 손자라서, 왕 댓수는 고작 두 번 밖에 안 넘어갔는데, 세대는 5번이나 넘어가서 루이 16세는 루이 14세의 5대손이 된다.(...)

[1] 프랑스어 스페인 나바라(Navarra)지역은 나바르(Navarre)다. 때문에 프랑스와 관련해서는 나바르라고 읽어야 한다. [2] 오를레앙 가문과 카를리스트들이 반대하여 완전하게 인정받지는 못한다. [3]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알폰소 13세의 삼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아들이다. [4] 선대 오를레앙 공작은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데에 한 표를 던졌고, 루이필리프 1세는 샹보르 백작 앙리를 밀어내고 시민의 지지로 왕위에 오르면서 유럽 왕실들에게 폭동왕으로 불릴 만큼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5] 장남 페드루 왕자가 체코의 귀족과 결혼하면서 귀천상혼 논란이 일었고, 이 때는 계승권을 포기하는 듯했으나 이자베우 사후에 오를레앙 본가와 협상하여 동등결혼으로 인정받으면서 이를 번복하였다. 이자베우 본인은 생전에 차남 루이스 왕자를 후계자로 선언했다. [6] 원래 1731년에 형 카를로스가 파르마 공작이 되었으나, 그가 나폴리의 카를로 7세로 즉위하면서 동생 필리포가 공국을 물려받았다. 이후 카를로스는 1759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가 된다. [7] 2위인 하이메 공은 딸만 둘이고 3위인 식스토 공은 1940년생에 미혼이라 실질적으로는 2위나 다름없다. [8] 이는 두 사람 모두 어렸을 때 즉위했다는 점도 한몫했는데, 둘 다 5살에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