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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송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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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과연 '최후의 로마인'인가?
3.1. 아니다.3.2. 맞다.3.3. 무의미한 논쟁이다.
4. 역대 마기스테르 밀리툼

1. 개요

파일:3039fbd4294657528f48aa1c69beb1c6.jpg
476년 말의 유럽 지도
DOMINIAN of SYAGRIUS라고 쓰여 있는 곳이 서로마의 마지막 갈리아 속주 수아송 왕국이다.
Domain of Soissons

서로마 제국 멸망하는 과정에서 갈리아 북부 지역에서 자립하게 된 서로마의 반독립정권으로 수도는 노비오두눔(Noviodunum)[1]이며 수아송 왕국은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2. 상세

갈리아계 로마인이었던 아에기디우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아비투스로 정신없이 황제가 갈려나가면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던 서로마 제국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제국의 멸망에 브레이크를 밟아보려고 했던 마요리아누스 황제의 심복으로 갈리아의 최고 군 사령관(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되어 남부 갈리아 수복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다.[2] 아에기디우스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이민족한테 털릴대로 털려 너덜너덜한 걸레짝이 된지 오래인 갈리아의 마기스테르로 임명되어 임지로 들어가 현지를 추스리고 마요리아누스의 갈리아 수복 전쟁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일 것이다.[3] 이렇게 마요리아누스와 아에기디우스의 갈리아 수복 전쟁 덕분에 제국의 영토를 갉아먹던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은 먹은 영토를 전부 토해내고 다시 머리를 로마에 숙이게 되었다.

그러나 갈리아- 히스파니아 전쟁에서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을 물리치고 서로마 서부 영토를 수복한 성공으로 고무된 마요리아누스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북아프리카 원정[4]이 사전에 배신자를 심어놓은 가이세리크 화공으로 함대가 홀랑 타버리는 대패로 끝나자, 마요리아누스의 유능함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던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가 로마로 복귀하던 그를 폐위하고 암살해버리게 된다.

마요리아누스 황제 시해에 크게 반발한 아에기디우스는 공개적으로 리키메르와 대적하면서 리키메르가 추대한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이탈리아로 진공해 들어가는 군사작전을 계획하며 동로마 제국과 연계하여 서로마 제국을 바로 세울 것을 도모했다. 이에 대응해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 시대의 수복 전쟁으로 되찾은 리옹, 나르본네시스 등을 각각 부르군트와 서고트에게 할양하는 대가로 동맹을 맺었고, 리키메르가 영토까지 할양해가며 아군으로 끌어들인 서고트족은 고립된 아에기디우스의 북부 갈리아까지 얻으려 북상하다가 아에기디우스-잘리어 프랑크족-알란족 연합군에게 아우렐리움에서 왕의 동생 페데리코가 전사하고 왕 테오도리크 2세가 도주하는 대패를 당한다. 갈리아 수복전쟁에서도 아에기디우스에게 호되게 당했던 테오도리크 2세는 얼마후 암살당하고 왕위까지 빼앗기게 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463년 (아에기디우스의 동맹) 킬데리크 1세가 오를레앙에서 전투를 벌였다"라고 기술했으며, 마리우스 아벤티센지스(Marius d'Avenches)는 아에기디우스와 서고트 왕국이 오를레앙 인근에서 격전을 벌여 서고트군이 패했고 서고트 왕은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이 당시의 서고트는 로마군의 많은 부분을 이식받고 남부 프랑스와 히스파니아까지 손에 넣은 당시 서유럽의 떠오르는 강호였기 때문에 굉장히 인상적인 군사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제국이 혼란스러울 때 갈리아에서 황제를 참칭하는 군사 지도자가 난립했던 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5], 스스로 마지막까지 제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남아 동방을 존중하고 간신을 두려움에 떨게하며, 제국 수복에 일생을 바친 아에기디우스는 잘 부각되지 않은 로마의 마지막 별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6]

아에기디우스의 당초 목적은 서고트와 부르군트를 무릎 꿇리고 남부 갈리아를 수복하고 리키메르를 몰아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아우렐리움 전투 이후 아에기디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7]하면서 이는 무산되었고, 이후 아에기디우스의 아들인 시아그리우스가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북부 갈리아에서 반독립 세력을 구축했다. 이후 서로마가 오도아케르 라벤나 함락으로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노가 오도아케르의 손을 들고 그들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서 로마 본국과의 교류가 단절되었으나, 시아그리우스는 둑스(dux)[8]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통치하며, 476년 이후에도 자신이 단지 로마 속주를 통치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주변 게르만족들은 그를 "로마인의 왕"이라고 불렀다. 이후 이 지역은 486년 프랑크 왕국 침입으로 멸망했다. 시아그리우스는 서고트 왕국으로 망명했지만,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의 요청으로 서고트 왕국이 송환시키면서 처형당했다.

시아그리우스는 처형되었지만 그의 후손은 8세기 중엽까지 프랑크 왕국의 귀족으로 남아 있었고 그 이후에는 기록이 끊긴다. 시아그리우스 가문의 기록이 사라진 이후에도 수아송과 파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프랑크 왕국의 핵심 지역 중 하나로 남아있던 네우스트리아 왕국으로 발전했다.

3. 과연 '최후의 로마인'인가?

3.1. 아니다.

수아송에 있는 아에기디우스의 본거지는 부르군트족 고트족의 영토로 인해 제국 군대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에서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에기디우스에 대한 충성은 그가 로마의 관직을 가져서가 아니라, 게르만으로 이루어진 그의 개인 군대, 즉 부켈라리(bucellarii)의 힘 때문에 확보될 수 있었다. 그가 464년에 죽자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그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시아그리우스가 순전히 게르만 식 칭호인 렉스 로마노룸(rex Romanorum), 즉 "로마인들의 왕"으로 선출되었다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기록은 아마도 시아그리우스의 지위를 정확하게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시아그리우스가 제국의 관리였건 아니건, 그의 실제 권력 기반은 그가 게르만 군대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렉스(rex)'의 지위에 선출되었다는 데 있었다. 실제로 시아그리우스는 제국에 의해 배신자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이전에 로마를 위해 일했던 게르만 출신 사령관들과 마찬가지로 킬데리크( 프랑크족의 지도자)는 수아송 왕국 내에 있는, 그리고 자신이 직접 통치하는 영토에 있는 갈리아-로마 인의 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메로빙거 세계 (pp.118-119)
이를 보면 아에기디우스면 몰라도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 제국 정부에겐 최후의 로마인으로 여겨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국 정부 뿐만 아니라 원로원 계급의 직계 후손인 갈리아-로마(Gallo-Roman) 귀족 사회도 시아그리우스가 아닌 프랑크족 지배자를 지지하였으며, 시아그리우스의 지지기반은 게르만족으로 이루어진 개인 군대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게르만 왕국들이야말로 현지 로마인의 지지를 받은 로마의 후계국들이며, 시아그리우스의 세력은 지도자가 로마인일 뿐 본질적으로 게르만 군벌 권력이었다.

'렉스'가 순전히 게르만식 칭호라는 설명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렉스가 왕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인 것은 맞지만, 이 시기의 '렉스'들은 그 스스로 게르만 민족집단의 지도자로서 그 집단의 '왕', 곧 렉스였지, 로마 제국이나 황제에게 렉스의 지위를 공인받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 권위와 연결된 맥락에서는 오도아케르, 테오도리쿠스, 클로비스의 예처럼 파트리키우스, 집정관 등의 칭호를 원하거나 실제로 수여받았다.

따라서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실제 시아그리우스의 자칭과는 관련 없이) 그를 '로마인 렉스'라고 지칭한 것에 주목하는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며 셰도우복싱도 아니다. 그레고리우스에겐 시아그리우스가 로마 제국의 권위를 기반으로 통치하는 관직 보유자보다는, 오히려 게르만 군벌 지도자-렉스들과 같이 그 스스로 군사적 권력을 행사한 '로마인 렉스'로 보였던 것이다. 오히려 시아그리우스의 자칭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우스가 이런 용어를 쓴 것이 현지 갈리아-로마 엘리트 사회가 그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3.2. 맞다.

시아그리우스가 당시의 서로마 중앙정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그를 최후의 로마인이라 평가하면 안 된다는 근거가 되진 않는다.

인정 여부를 갖고 따지면 서로마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역시 같은 시대의 동로마 황제에게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으니,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아니라는 논리 역시 성립 가능한데, 그 논리를 서로마 중앙정부에는 적용 안 하면서 수아송 왕국에 적용하는 것은 모순이다.

또한 렉스는 애초에 게르만식 칭호가 아니라 군주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로, 로마인들이 게르만족과 접촉하기 훨씬 이전인 로마 왕국 시절부터 사용해온 단어인데다, '렉스 로마노룸(Rex Romanorum)'은 어디까지나 타칭일 뿐, 해당 칭호를 갖고 시아그리우스를 최후의 로마인이 아니라고 공격하는 것은 쉐도우 복싱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에기디우스와 시아그리우스 휘하의 병력 대부분이 게르만족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들의 군대가 마지막 서로마 세력이 아니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들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상당수의 게르만족이 로마 영내로 유입되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상태였던데다, 이미 서로마 중앙정부에서도 스틸리코, 리키메르 등, 심지어 동로마 중앙정부에서도 아스파르 등의 게르만 혈통 권신들이 실권을 행사한 사례가 있다.

따라서 아에기디우스, 시아그리우스 휘하의 병력 가운데 상당수가 게르만족이었으니 그들을 최후의 로마인이라 평가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제정 시대의 로마가 다민족 국가였다는 것을 간과한 낡은 역사관에 불과하다.

3.3. 무의미한 논쟁이다.

최후의 로마인라는 단어 자체는 어디까지나 해당 인물이 로마의 가치를 마지막으로 수호했다고 치켜세우는 문학적 수사일 뿐, 객관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있는 단어가 아니다.

굳이 엄격한 기준을 갖고 따지면 동로마 제국 멸망하는 콘스탄티노스 11세 시대까지 내려와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서로마가 멸망하기 수십년 전에 사망한 스틸리코, 아에티우스 등의 인물들도 최후의 로마인으로 자주 거론되므로, 최후의 로마인 여부를 갖고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설정놀음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다만 서로마 영토에서 로마적인 가치를 계속 추구하던 서로마의 잔재로써의 로마 정체성은 확고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는 부여할 수 있겠다.[9]

4. 역대 마기스테르 밀리툼


[1] 오늘날의 수아송 [2] 사실 마요리아누스, 아에기디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이 세 사람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밑에서 경력을 쌓아 친구로 지냈던 인물들로, 차세대 로마의 인재로 주목받는 인물들이었다. 아에티우스가 그렇게 급작스레 죽지 않았더라면, 리키메르가 권력욕에 취해 다른 두 사람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서로마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3] 킬데리크 1세 문서에도 나오지만 아에기디우스는 한때 킬데리크 1세를 쫒아내고 프랑크인들을 직접 통치하기도 했다. 킬데리크는 나중에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면서 복귀할 수 있었다. [4] 북아프리카는 당대 서로마 영토 가운데 가장 부유한 영토였으므로 서로마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핵심적으로 되찾아야 할 영토였다. [5] 바로 전의 아비투스도 갈리아에서 황제를 자칭한 케이스. [6] 우연히도 아에기디우스의 이름 뜻은 그리스어 아이기스( 이지스함의 그 이지스)에서 유래한 수호, 보호라는 뜻이었다. [7] 암살설도 있고 자연사라는 설도 있는데 보통 역병으로 인한 자연사라고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8] 속주의 군사 지휘관 [9] 사실 이런면에선 수아송 왕국이 유명해서 그렇지 동고트 왕국 치하 서로마 영토도 로마적 가치가 파괴되었다는 시각은 부정되고 있다. 즉, 동고트왕이 명시적으로 서로마 황제가 되지 않았다 뿐이지 이들도 사실상 로마나 다름 없었고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로마적 전통도 유지되었다는 것. 오히려 그런 전통은 동로마가 벌인 고트 전쟁에서 상당히 파괴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