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nia, Pronoia.
1. 의미
'시혜(施惠)', '배려' 라는 뜻의 말로, 중기~말기 동로마 제국의 봉급 지불형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주로 프로니아의 대상인 토지에 대한 이용권이나 해당 토지에서 나오는 각종 세금에 대한 수조권의 형태로 봉급을 받는 것을 가리키며, 군인 외에도 제국 내의 수도원 같은 조직이나 황제의 호의를 받는 인물들도 프로니아의 대상인 프로니에(Proniai)가 되었다. 군인에게 봉급을 지불하기 위한 사액 토지 프로니아의 경우 명목상으로는 군역을 지는 1대에만 해당되며 상속할 수 없었다.2. 작동 원리
제국은 매 15~20년에 한번씩 토지대장조사를 실시하고, 각 지방의 관료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앙의 토지국이 이를 추합해 평가하는데, 만일 자신이 직업군인이거나 프로니아를 받아야 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이를 관청에 신청한다. 이 토지신청을 요구받은 공무원은 신청자의 요구나 직급에 맞는 산출량을 가진 토지를 책정하는데, 이는 어떤 영지나 소유의 의미가 아닌 수조권만이었다. 토지의 지세나 강, 삼림, 방앗간, 도축장 등 이용료를 받을수 있는 수치를 임의로 지정했기 때문에, 그 땅들 자체는 전부 농장, 밭 별로 제국 국토 전역에 떨어져있어 지배권을 행사할수는 없었다. 이 프로니아가 황제나 관청에게 승인되면 프로니아의 주인, 즉 프로니에는 수조권에 대한 증서를 받는다. 이제 증서의 주인은 매 수확철마다 이 증서를 프로니아 토지가 있는 지방 관청이나 그곳의 주민들[1]에게 제출하고, 이를 제출받은 프로니아 토지의 주민들은 그 지역서 산출된 세금을 국가관청이 아니라 대상자인 프로니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3. 배경
제국의 법전중 하나인 프렉티카(praktika)에서 약 11세기쯤부터 등장하는 이 단어는 콘스탄티노스 9세의 치세 혼란한 세금 수급을 대신해 봉급을 주는 임시 방편중 하나였다. 그냥 영지를 하사하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 이렇게 복잡한 형태를 취한 이유는 동로마 제국이 고도화 된 행정 기구를 갖춘 중앙집권 국가이기 때문이었고, 동시에 제국 중앙정부가 유력자(Dynatoi)로 불리는 토호세력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즉, 전시과나 과전법 처럼 토지의 소유권은 정부에게 있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놓지 않되, 수조권만 대상자에게 부여하여 행정비용을 절감하는 것이었다.프로니아의 대상이 되는 토지는 엄격히 작성되는 서류에 의거해 관리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인준하고 제국 정부가 발급하는 문서에 의해서만 수혜자가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시작은 임시 방편이었지만, 수혜자가 정부의 권위와 행정 기구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반란이나 할거를 시도하기 어렵게 했다.
프로니아 제도를 공고히 한 것은 알렉시오스 1세였다. 신생 콤니노스 정권은 비교적 정치적 기반이 불안했다. 알렉시오스는 정치적인 기반을 제고하고자 콤니노스 왕조에 충성적인 집단을 양성하고자 했는데, 프로니아는 그런 방안 중 하나였다. 황제의 형인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와 매부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황실 직할지의 수입, 곧 프로니아의 수혜자가 되었다. 프로니아의 수혜자들은 주로 황제의 친인척이거나 황제의 개인적인 신임을 받는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이렇게 혜택을 입어 제국의 새로운 엘리트 계층으로 발전하였다.
한편으로 알렉시오스의 프로니아 정책에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황제의 친척들은 황실에 충성스러울수도 있었지만 때로는 가장 위험한 정적이 될 수도 있었다. 즉, 종친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또한 있었던 것이다. 종친들은 자신의 관할지를 관리하기 위해 수도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수입이나 권위가 황실에 종속된 상태였기에 황실에 적대적인 태도를 쉽게 취할 수도 없었다.
이 시기 프로니아는 절대 세습되지 않았으며, 지속적으로 황실의 권위를 드높이고 근황파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특히 알렉시오스의 치세에 프로니아는 종친 외의 인사들에게는 거의 지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콤니노스 황실과 혈연적인 관련이 거의 없던 구 아나톨리아 토호들 상당수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2]
4. 발전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요안니스 2세는 이러한 족벌주의를 경계했다. 그는 콤니노스 족벌들을 정계에서 멀리 떨어트리며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튀르크계 정교도들, 소귀족 자제들, 하급장교들을 지원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군사적 의미로 말하는 프로니아 제도가 첫 시작을 알렸다. 요안니스의 치세는 전반적으로 하나의 기나긴 원정에 가까웠다. 그가 새로 등용하는 신인들은 대부분 토지가 적거나 없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고, 이들에게 봉급을 줄 방법중 하나로[3] 프로니아 제도를 이용했다.이것이 정규화되어 크게 확장된 것은 요안니스의 아들인 마누일 1세의 치세였다. 수혜자들은 중세의 장원 제도처럼 프로니아에서 살고있는 소작인 파리키등이 내는 소작세와 거래세 등을 수취해 삶을 영위했다. 또한 그 영역에 숲이나 강, 바다가 있다면 수렵, 채집, 어로활동에 대한 권한도 그들에게 있었다. 스트라티고스, 카발라리오스 등의 중급 군사관료들이 이런 제도의 수혜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니아에 속한 파리키들은 농노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프로니아의 수혜자에게 소집되거나 복종할 의무가 전혀 없었고, 거주 이전도 자유로웠다. 프로니아의 대상 토지는 수혜자가 군역에서 해제되면 즉시 제국 정부로 환속되었다. 또한 프로니아의 수혜자는 대부분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나 군사지역에 거주하는 장교들이었기에 수조권을 가진 지역에 살고 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프로니아의 대상인 토지로부터 병력을 동원해 황실에 반기를 드는 등의 상황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 프로니아의 수혜자들은 파리키를 무장시킬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4]
프로니아의 수혜자들은 그가 수조권을 가진 지역에 대한 사법, 행정권등이 전무했지만, 황제가 소집령을 내린다면 자기 자신의 비용으로 무장해 참전해야 했다. 대부분의 프로니에들은 부유했으므로, 황제의 중앙군에서 중기병으로 복무했다.
5. 말기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제국의 운명을 갈랐을 때 그 동안의 군사 제도들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 동안 유지되었던 테마 제도는 수도가 함락되어 행정 기반이 붕괴되고, 알렉시오스 3세와 니케아 제국 등의 망명 정권의 군대가 각지에서 테마군 수천을 징집해 4차 십자군에게 반격을 가한 마지막 시도들의 결과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리고 그 잔해는 카스트레니(Kastrenoi)라는 지방 수비대로 남게 되었다.반면 프로니아 제도는 살아남았다. 테오도로스 1세는 치세내내 용병과 프로니에를 통해 군비를 증강해 8천의 정예군을 육성해내었는데, 뒤를 이은 요안니스 3세는 충분히 국력이 축적되자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지금까지 소규모의 군대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204년 이전보다 빈약한 정부의 권위와 행정기반 위에서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민개병제에 가까운 소지주 군인을 육성하여 군비를 확장했다. 그러는 한편 요안니스 3세는 이러한 개혁을 위해 제국 내의 유력자들의 호의를 사고자 교회와 귀족의 영애들까지 프로니아의 지급 범위를 대폭 넓혔다. 이렇게 숫적으로 다수인 소지주 군인과 정예한 용병 및 프로니에를 혼합한 군제는 니케아 제국이 경쟁국들의 시도를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복된 1261년 이후, 미하일 8세는 프로니아 제도를 세습 가능하게 만들었다.[5] 제국은 계속해서 봉건화를 가속했고, 미하일은 프로니에가 해당 토지 내에서 더 많은 권리를 행할 수 있게 만들면서 무너져가는 제국이 조금 더 쉽게 병력을 조직화하고 징집할 수 있게 만들었다. 프로니아 제도가 확대되고 제국의 권위와 통제력이 떨어지자 이에 따른 폐단도 성행하기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시기에는 파리키들이 프로니에에 예속되게 만들어 그들의 유사농노화가 시작되었고, 프로니에들은 점점 더 봉건 영주처럼 군대를 소집해 보내기보다는 세금을 모아 군비를 지원하고 마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에 더해 흑사병과 인구 고령화등이 심화되자 프로니에들이 자신들의 파리키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는 대신 군역을 지게 하는 등 프로니아 내의 작은 테마 제도들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공급이 수요를 못따라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프로니아 제도는 상기한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약해진 제국을 방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육지책도 무심하게 오스만 제국의 서진은 계속되었고, 1453년 제국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도 프로니아 제도는 계속되었다. 마지막 황제의 두 형제는 최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끝나고서도 모레아의 지배를 두고 프로니에 병력을 징집해 내전을 벌였다.
6. 여담
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에도 프로니아 제도는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당장 세르비아 제국에서 Pronija라는 이름으로 프로니아 제도가 사용되었으며, 그 특징 역시 동로마의 것과 거의 동일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프로니아와 오스만 제국의 티마르 제도의 유사성에 주목, 전자가 후자에 영향을 주었다고 추측하기도 하나, 이슬람 세계에 이크타(Iqta) 제도와 같이 이미 유사한 제도가 존재했기 때문에 그 유래에 대한 확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다만, 그렇다고 이러한 차용론이 지닌 의미를 지나치게 확장하면 안 되는데, 직간접적 교류가 없더라도 이러한 제도를 비슷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수립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당장 유럽의 은대지 제도부터[6] 한국사의 전시과, 관료전 등 대동소이한 제도들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보인다. 중근세의 영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러시아, 페르시아 등등 주요 국가들 중에서 이런 제도 혹은 현상이 존재하지 않은 국가를 찾기가 더 힘들다. 물론 14~16세기 쯤 되면 공식적이고 정기적인 외교 라인이 확립되고, 유럽 동쪽 끝의 러시아와 서쪽 끝의 영국조차 서로 정치적 상황과 제도들을 언급하기에 모를 수가 없으며 정황상 어느 정도 참고는 했을 것이다. 반대로 전근대 군주 개인이 근현대처럼 타국의 정치제도를 자국에 이식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세르비아처럼 어형에서부터 그 영향이 짙게 드러나는 사례를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참고는 했을지언정 기본적으로는 인간 정치체제의 수렴진화로 봐야 한다.
7. 관련문서
[1]
파리키paroikoi 라고 한다.
[2]
이에 불만을 품은 토호들은 1094년
로마노스 4세의 아들인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의 모반에 적극 동참하기에 이른다.
[3]
당시까지 기존의 봉급제나
테마 제도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4]
정확히는 무장시킬 수는 있었지만 파리키의 자의로써만 가능했다.
[5]
다만 이 조치도 최초에는 프로니에 계승자가 군역을 질 경우나 군인의 유복자에게만 해당되었으며, 이후에도 제국에 충성하며 공직을 수행하는 대상에게만 허용되었다.
[6]
봉건정도 봉건정 나름인데, 흔히 알려진 편견과는 다르게 주요 봉건정 유럽 국가들은 고대 로마의 유산을 지워버리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기존 사회를 그대로 안고서 탄생하였고, 따라서 토지대장과 인구조사에 기반한 문서화된 관료주의적 구조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