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의 세스테르티우스. |
고대 로마의 화폐.
영어 위키백과
명칭의 유래는 semis-tertius에서 온 것으로 2와 2분의 1이라는 의미다. 이런 명칭을 붙인 이유는 세스테르티우스의 가치를 아스(as / asses)의 2와 2분의 1로 책정했기 때문이다.
최초로 도입된 것은 기원전 211년으로 데나리우스 은화의 4분의 1가치를 가지는 작은 은화로 제조되어 유통되었다. 데나리우스 은화는 약 4.5g 정도였으며 세스테르티우스는 그 무게의 4분의 1이었으므로 약 1.2g 정도의 무게였는데 실제로는 더 가벼웠다고 한다.
본래 1 데나리우스가 10 아스였다가 아스가 가벼워지면서 16 아스로 가치가 변했고 1 세스테르티우스가 4 아스가 되어서 여전히 세스테르티우스는 데나리우스의 4분의 1 가치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데나리우스가 더 많이 유통되었고 세스테르티우스는 기원전 44년까지 산발적으로 적은 양이 주조, 유통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가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은으로 주조되던 세스테르티우스를 큰 모양의 황동화로 바꾸게 되었다. 기원후 3세기까지 세스테르티우스는 로마 최대의 황동화였고 네로 시대까지는 로마에서만 주조되다가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이르러서는 루그두눔(오늘날의 프랑스 리옹)에서도 주조되었는데 이는 세스테르티우스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고대에는 청동보다 황동이 더 귀하게 여겨졌는데 황동을 오리할콘으로 부를 정도였다. 무게는 약 25-28g 정도였고 직경은 32-34mm, 두께는 4mm 정도였다. 황동의 가치는 청동과 같은 무게라 해도 2배 더 나가는 걸로 여겨졌기 때문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듀폰디우스는 2 아스의 가치로 책정되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세스테르티우스의 질도 떨어졌는데 그 이유는 낡은 세스테르티우스를 녹여서 새 세스테르티우스를 만드는 식으로 주조한 탓에 황동에 첨가된 아연 성분의 함유율이 갈수록 떨어진 탓이었다. 청동이나 납을 혼합해 만들기도 한 탓에 제국 후기로 갈수록 세스테르티우스화의 질은 조잡해져 갔다.
은화의 질이 떨어져 가며 인플레이션이 진행되 소액 화폐의 가치도 떨어져 갔다. 1세기에만 해도 시장에 갈 때는 아스나 듀폰디우스만 가지고 가도 충분했지만 인플레이션이 진행되면서 2세기에는 세스테르티우스를 잔뜩 가지고 가야 했다.
3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은화의 질이 추락해 은화에 청동 함유율이 높아졌고 260년에서 270년 사이에 2 데나리우스의 가치를 가진 안토니누스(antoninianus)화가 주축 통화가 되었지만 소액 화폐는 모두 청동제가 돼버렸다. 명목상으로 안토니누스화는 8 세스테르티우스에 해당되었지만 함유된 금속의 무게로는 그만 한 가치는 나오지 않았다.
아우렐리아누스 때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세스테르티우스가 주조되었는데 이에 앞서 데키우스 때에 2 세스테르티우스화가 주조되어 유통되었다. 갈리아 제국의 포스투무스는 이 데키우스의 2 세스테르티우스화를 녹이지도 않고 그대로 자기 얼굴도장을 망치로 내리쳐서 갈리아 제국 통화를 만들 정도였다. 그만큼 세스테르티우스의 질은 열악했다는 말이다.
이후로 세스테르티우스는 모두 국가에서 회수하여 그것을 녹여서 더 조잡한 안토니누스화를 만들어 유통했고 세스테르티우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로마에서는 세스테르티우스를 회계 단위로 사용했는데 큰 금액은 천 세스테르티우스 단위로 표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크라수스의 저택 가격을 2억 세스테르티우스로 표기하는 것이라든지 군단병의 연봉을 900 세스테르티우스로 표기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브리타니아나 이스라엘 같이 로마 제국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변방에서는 경제적으로도 비교적 낙후되어 있었기에 오히려 데나리우스보다 세스테르티우스를 훨씬 더 일상적인 화폐로 유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서)로마 제국 후기로 갈수록 이런 "변방"에 속하는 영역의 면적이 넓어졌기에 세스테르티우스를 원활하게 주조하는 것이 갈수록 중요한 일이 되어 갔다.
예술적으로 세스테르티우스는 화폐에 조각된 화상이 상당히 아름다운 게 특징인데 특히 예술적으로 최고의 아름다운 세스테르티우스는 네로 시대의 세스테르티우스로 알려져 있다. 이때 세스테르티우스를 주조한 조각공의 솜씨가 역대 최고였다고 한다. 이 역대 최고의 조각공이 조각한 네로의 화상은 품위 있고 우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잔혹해 보이는 네로의 인상을 잘 표현하고 있어 후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 각지를 순행한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순행지를 알리는 세스테르티우스를 주조하게 했는데 그 중에는 브리타니아가 최초로 등장하는 화폐도 있다. 이것에 크게 감명받은 영국인들은 찰스 2세 시대에 이 세스테르티우스의 도안을 그대로 영국 동전의 디자인으로 채택했고 2008년까지 이 디자인이 유지되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