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년 동서분할 |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어진 모습 |
고토 수복과 7~8세기의 위기 | |
서기 550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당시 강역. | ■ 서기 600년, 마우리키우스 당시 강역. |
■ 서기 650년, 콘스탄스 2세 당시 강역. | 서기 717년, 레온 3세 당시 강역. |
제국의 반격과 중흥기 | |
서기 867년, 미하일 3세 당시 강역. | 서기 1025년, 바실리오스 2세 당시 강역.[1] |
■ 서기 1081년경, 알렉시오스 1세 당시 강역. | ■ 서기 1180년, 마누일 1세 당시 강역. |
4차 십자군의 점령과 쇠퇴, 그리고 황혼 | |
■ 서기 1215년, 테오도로스 1세 당시 강역.[2] | ■ 서기 1263년, 미하일 8세 당시 강역. |
서기 1328년경, ■ 안드로니코스 3세 당시 강역. |
서기 1450년, ■ 콘스탄티노스 11세 당시 강역. |
1. 개요: 정치 체제2. 동서 분할과 내부 쇄신3. 전성기4. 쇠퇴
4.1.
페르시아 전쟁 (602~628)4.2. 7세기 중반,
이슬람 제국의 발흥과 슬라브족의 남하4.3. 사회상의 후퇴와 영토 축소4.4. 717년, 유럽의 방파제4.5.
성상 논쟁 (726~842)4.6. 8 ~ 9세기, 라벤나 상실과 불가리아 전쟁
5. 제국의 반격5.1. 성상 논쟁 종결5.2. 정복 군주의 시대 (863 ~ 1025)5.3.
니키포로스 2세 (963~969)5.4.
요안니스 1세 (969~976)5.5.
바실리오스 2세 (976 ~ 1025)
6. 후기 마케도니아 왕조 (1025 ~ 1056)7. 11세기 말의 위기8.
콤니노스
중흥9. 황혼9.1.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과 수도 상실9.2.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9.3.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닌 제국9.4. 1299년,
오스만 베이국의 등장9.5.
팔레올로고스 내전의 시작9.6. 술탄의 봉신이 되다9.7. 서유럽에 지원을 구하다9.8.
모레아의 짧은
중흥
10. 최후의 순간10.1.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10.2. 1479년, 제국의 마지막 잔재가 사라지다
11. 관련 문서[clearfix]
1. 개요: 정치 체제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나타낸 그림이다. |
21세기 이후 대대적인 옛 로마권역 내 유물, 유적 발굴과 비문 해석 등을 통한 연구에서 발표되었듯, 로마 제국의 국가정체는 2세기 후반 세베루스 왕조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치세 아래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프린키파투스(원수정)보다 효율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원수정체, 즉 후기 로마제국 도미나투스(전제정) 모습의 원시적 형태인 후기 프린키파투스로 변모된다. 이는 군인황제시대로 불리는 3세기 이래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의 개혁 등을 거치면서 기원전 31년부터 서기 2세기 말까지 계속된 '황제와 원로원 간의 형식적 양두정체(diarchy)'에 기반한 프린키파투스의 그 본질이 변화된다. 따라서 원로원의 권한은 갈리에누스의 개혁 이래 유명무실화되었고, 이런 흐름은 아우렐리아누스가 자신을 태양신과 동일시하면서 내세운 권력 강화, 국가 통제 하의 배급품 배급과 생필품 전매제 시행,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는 태양신 기반의 유일신교적 종교 체계 구축, 원로원 의원들의 유일신교적 종교 사제단 계서제 강제 편입 등을 통해 4세기 이후와 비슷한 개혁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러나 이런 변화 흐름은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혼란을 수습하고 중세 농노제와 비슷한 방법으로 국가 재건에 성과를 거둔, 프로부스 황제 아래에서 잠시나마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후기 프린키파투스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프로부스는 어이없게 병사들의 폭동에 휘말려 페르시아 원정 중 암살됐고, 로마 제정은 프로부스 암살 이후 더 이상 프린키파투스를 유지한 황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때 3세기 위기 상황을 정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년) 아래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벌어지면서, 로마의 정치 체제는 후기 제정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도미나투스(전제정)로 바뀐다. 이때부터 황제에게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었고, 황제가 머무는 황궁과 관련 기관들에는 황실예법[3] 등이 도입된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황제를 최정점으로 하는 고도화된 관료제와 황실 행정이 완비되고, 속주를 통한 지방행정 체계를 대체하게 된 관구(diocese)와 별도의 명령체계를 새롭게 만들어 이중체계로 구성된 새로운 지방행정 통제체계 등이 도입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불리는 이 새로운 개혁은 공화정 내전의 승리자가 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이상으로 큰 사건이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흔히 부르는 콘스탄티누스 마그누스 아래에서 보다 정교화, 고도화, 효율화된 제국 개혁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4세기 두 황제 아래의 개혁으로 만들어진 도미나투스는 후기 로마제국으로 부르는 4세기 이후 로마 제국에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제국의 황제는 당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권력을 누렸으며 때문에 권력 다툼도 심각했다. 그러나 제국은 점차 봉건화되었으며, 11세기 이후 동로마에는 서유럽 장원제도와 유사한 모양의 봉건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로마는 철저한 전제군주제와 그에 수반되는 방대하고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관료제 형태로 구성되었다.
동방 제국이 서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정치와 경제적 번영 그리고 합리적 통치의 혜택을 본 것은 이미 3세기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부터였다. 제국 동방 지역에서는 군사적 능력은 좀 모자랐어도 통치 혹은 경제 운용에서 모자란 황제는 거의 없었던 행운을 맞았으며, 4~5세기부터는 일종의 숙군 사업으로 충성심 없는 야만족을 군대 바깥으로 쫓아내는 작업도 성공시키고 있었다.[4] 이런 기조는 5세기 말의 대혼란 시대에까지 이어졌으며, 제국은 이렇게 차근차근 유지되고 축적된 국력을 토대로 해서 6세기가 되면 서방의 게르만계 국가들에 대해 전면 반격으로 돌아서게 된다.
2. 동서 분할과 내부 쇄신
{{{#!folding [ 펼치기 · 접기 ] {{{#4A3800,#FFF {{{#!wiki style="margin: -5px 0px" |
단독황제 | 양두정치 | 제1차 사두정치 | 제2차 사두정치 | |
동방 정제 | 디오클레티아누스 | 갈레리우스 | |||
동방 부제 | - | 갈레리우스 | 막시미누스 다이아 | ||
서방 정제 | - | 막시미아누스 | 콘스탄티우스 1세 | ||
서방 부제 | 막시미아누스 | - | 콘스탄티우스 1세 |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 |
>>> 306 ~ 310년 >>>
|
|||||
제2차 사두정치 | 제3차 사두정치 | ||||
동방 정제 | 갈레리우스 | 갈레리우스 | |||
리키니우스 | |||||
동방 부제 | 막시미누스 다이아 | ||||
서방 정제 |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 콘스탄티누스 1세 | |||
막시미아누스 | |||||
막센티우스 | |||||
서방 부제 | 콘스탄티누스 1세 | 콘스탄티누스 1세 | - | ||
막센티우스 | |||||
>>> 311 ~ 316년 >>>
|
|||||
내전기 | |||||
동방 정제 | 갈레리우스 | 리키니우스 | 리키니우스 | ||
리키니우스 | |||||
막시미누스 다이아 | |||||
동방 부제 | - | ||||
서방 정제 | 콘스탄티누스 1세 | 콘스탄티누스 1세 | |||
막센티우스 | |||||
서방 부제 | - | 바시아누스 | |||
>>> 316 ~ 324년 >>>
|
|||||
내전기 | |||||
동방 정제 | 리키니우스 | 리키니우스 | 리키니우스 | 리키니우스 | |
발레리우스 발렌스 | 마르티니아누스 | ||||
동방 부제 | 발레리우스 발렌스 | - | 리키니우스 2세 | ||
서방 정제 | 콘스탄티누스 1세 | ||||
서방 부제 | - | 크리스푸스 | |||
콘스탄티누스 2세 | |||||
>>> 324 ~ 35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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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왕조 | |||||
동방 | 콘스탄티누스 1세 | 콘스탄티우스 2세 | 콘스탄티우스 2세 | ||
중앙 | 콘스탄스 | 콘스탄스 | |||
서방 | 콘스탄티누스 2세 |
베트라니오 마그넨티우스 |
|||
>>> 353 ~ 364년 >>>
|
|||||
콘스탄티누스 왕조 | - | ||||
동방 | 콘스탄티우스 2세 | 콘스탄티우스 2세 | 율리아누스 | 요비아누스 | |
서방 | 율리아누스 | ||||
>>> 364 ~ 378년 >>>
|
|||||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 |||||
동방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발렌스 | |||
서방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
그라티아누스 | |||||
>>> 379 ~ 39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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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 왕조 | 테오도시우스 왕조 | ||||
동방 | 테오도시우스 1세 | 테오도시우스 1세 | |||
서방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발렌티니아누스 2세 | |||
그라티아누스 | 마그누스 막시무스 | ||||
에우게니우스 | 플라비우스 빅토르 | ||||
>>> 39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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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 동로마 제국 | ||||
서방 | 서로마 제국 | }}}}}}}}}}}}}}} |
서기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아래에서 이론적 개념으로 복수의 황제가 분할 통치하는 개념이 가능해졌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래로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와 같이 복수의 황제가 당연하게 각자의 통치권역을 장악하는 방식을 일반화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황제들 역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은 방법을 일반화하여 복수의 후계자에게 완전히 계승케 하진 않거나 하더라도 그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게획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기 전까지의 58년 동안, 제국의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분담 통치 내지 복수 정부의 관할 담당이 영구 분할로 향할 것을 예측케 했다. 이는 두 수도가 정식으로 수립되고, 두 원로원이 존속하게 된 상황에서 제국의 면적이 방대하고 국내외 문제들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발렌티니아누스 생전 군장교들과 로마 엘리트들이 공동 황제 임명을 요구하는 등 복잡한 사정이 맞물리면서 시간 문제로 비춰졌다. 특히, 동서로마 간 상황 차이가 여전했다. 여기에 더해 3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은 걸출한 인물이 통일 후 복수의 아우구스투스를 내세우기보다 제국의 복잡한 사정을 고치고 다른 부분에서 주안점을 뒀다는 점은 자칫 분할 통치가 영구 분할로 인식될 것으로 예상케 했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대제 생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공교롭게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이후 로마 제국은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처럼 다시 동·서가 합쳐지지 못하였다. 동방과 서방을 관할하게 될 아우구스투스들이 별개의 정치세력에게 따로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대제의 두 아들은 어렸고 그들의 능력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무능했다. 설상가상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처럼 온전히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사망한데다, 아직 서로마 일대 정세는 동로마와 달리 불안요소가 많았다. 이 결과,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어린 황제들과 그 후계자들 아래에서 제국은 로마와 노바 로마에서 각각 임명된 1년 임기 집정관 혹은 섭정으로 불리는 이들이 어린 황제를 보필하면서 명목상 통일을 유지하고 협력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제국을 방어하고 통치했다. 따라서 황제의 조각상과 프로파간다 정책들은 나란히 전시되고 추진되었고, 제국의 법률들은 공동 명의로 공포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한 정부가 공포한 법률은 다른 정부가 복잡한 사정으로 호혜 원칙 하에 공포하지 않거나 온전히 집행되지 않는 일이 빈번해, 종국적으로 제국의 동방과 서방 행정은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따로 국밥처럼 운영되게 됐다.
아르카디우스 시절에는 서고트족의 침공을 받아 서로마의 스틸리코의 도움을 받는 등 오히려 서쪽에 비해 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테오도시우스 2세의 기나긴 통치를 거치며
이후 마르키아누스는 국방을 강화하였고, 비록 레오 왕조의 제노 대에 혼란을 겪었지만[5]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동로마판 대동법을 실시하며 (납세의 기준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통일) 국고에 3년치 예산을 채워 놓은 채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에게 바톤을 넘겨주었다. 이는 6세기 중반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재정복의 기반이 되었다.
3. 전성기
3.1.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527 ~ 565)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주요 업적은
- 1. 고토(故土) 수복
- 2. 『로마법 대전』 편찬
- 3. 성 소피아 대성당(현재의 아야 소피아 모스크)의 건축
…등이 예로 들어진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즉위 후 민중 반란[6]을 진압한 뒤 고대 로마의 형법과 민법을 참고로 해서 로마법전을 편찬하도록 법학자들에게 지시했으며, 실제로 일은 그들이 다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그냥 지시만 했을 뿐이지만 이 법전이 르네상스 이후 서유럽에 전파되어 나폴레옹 법전을 비롯한 근대 유럽 헌법의 골간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다.
또 하나의 업적인 고토수복 원정의 경우 초중반에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계획대로 잘 진행되는 듯 싶었지만 페르시아-동로마 도시들을 대대적으로 강타한 역병 때문에 제국 내인구가 상당히 감소하였고 그 결과 세수는 줄어드는데 인력부족으로 군대 유지비는 대폭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어 제국의 재정을 지속적으로 갉아먹게 되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재정복 이후 다시 해당 지역을 날려먹기 전까지 해당 지역의 동로마 제국의 재정에 대한 기여는 컸지만, 적어도 재정복 직후에는 흑사병의 영향으로 인해 제국 재정에 큰 부담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해당 지역 주민에게나, 제국 정부에게나 초반에는 다 손해였고, 그나마 제국 정부에 한해서 중기 이후에는 이득이었다는 것 정도로 정리가 가능하다.
다만 동로마 입장에서도 이 재정복 사업이 완전히 헛된것이 아니었던게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지역은 예로부터 경제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수복할 가치는 충분했다.[7] 실제로 카르타고를 중심으로한 북아프리카 속주의 경우 원래부터 풍요로웠던 지역이었고 외침의 위협도 적었기 때문에 동로마의 재정복 지역중에 경제/군사적으로 유일하게 정상궤도로 되돌아오는데 성공했으며 아르무크 전투의 여파로 본토와 분단되고 몇십년 뒤 이슬람 제국에게 넘어가기 직전까지 동로마 제국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탈리아 속주의 경우 비록 북부 지방은 랑고바르드 족에게 날아갔으나 라벤나 총독부와 남이탈리아 지역은 살아 있었으며 이는 제국 본토인 발칸 반도를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함과 동시에 동방 황제들이 교황을 비롯한 서방 지역에 압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751년에는 라벤나 총독부도 날아갔지만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일대의 남이탈리아는 여전히 제국의 영역으로 남아있었으며 덕분에 제국은 이탈리아를 잃는 1071년까지 이민족들의 침략을 남이탈리아로 집중시켜서[8] 효율적인 거점 방어를 할 수 있었으며 지나치게 성장한 베네치아 공화국 또한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한편 이전에는 로마 시를 비롯한 이탈리아인들이 (동)로마를 고국, 옛 조국으로 생각했고 제국군을 해방자로 생각했다면(서로마가 망한지 몇십 년밖에 되지 않았고), 이 시기 이후에는 그렇지만은 않다는 쪽으로 입장이 복합적으로 바뀐다. 이는 제국 서부와 동부의 문화-언어적 차이, 교회 간 전례 양식과 전통 등의 차이, 제국 측의 로마 시와 이탈리아에 대한 관점[9] 등의 요인에 의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사에서 나온 2019년 수정판 동로마사에 따르면 '이탈리아가 제국에 다시 편입되었다는 것이 이민족(게르만인)의 지배 이전처럼 이탈리아가 누렸던 독립적인 위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았으며[10], 이탈리아의 로마계 주민이 고트인 아래에서 지녔었던 영향력이라는 위상도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다.'[11][12]라고 평가된다. 사실 이런 전조는 재정복 전쟁 당시부터 보였다는 분석도 있다: Schwerpunkt라는 역사 유튜브 채널의 Rome between the Ostrogothic sieges (538-544 AD): the Latin-Germanic ties against Byzantine rule.
이 부분은 후대 동로마에서 고대 로마적 전통[13]이 다소 퇴조하여 '그리스화' 되는 경향이 우세해지고, 제국 자체의 역량이 쇠퇴하며 더욱 심화되는데 이 부분은 아래에 기술하도록 하겠다.
그 외에도 Schwerpunkt라는 역사 유튜브에서 이 시기를 다룬 Byzantine Italy: an introduction 영상에서의 20~25분경 즈음 내용에 의하면, 동로마령 주민들이 동로마의 과중한 세금을 피해서 세금이 가벼운[14] 랑고바르드령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프랑크 왕국과 직접 국경을 맞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랑고바르드 왕국을 힘들여 완전히 제압하기보다는 완충국으로 남겨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지금까지의 유스티니아누스의 낭비벽에 대한 부당한 비판은 고쳐 생각함이 마땅하다.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 아프리카를 손에 넣은 시점에서도 유스티니아누스가 운용했던 예산은 3세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가 운용했던 예산보다도 적었다.
3.1.1. 성 소피아 대성당 건축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어 원래 있던 성 소피아 대성당이 니카의 반란으로 불타 파괴되자 복구를 명령해 과거보다 더 거대하고 웅장하게 재건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헌당식에서 대성당을 보고 감격해 "솔로몬이여, 짐은 그대를 능가했노라!" 라고 외친 말은 유명하다. 이 말은 미하일 프실로스의 《건축에 대하여》가 출처인데, 이 작자가 다른 곳에는 영 이상한 소리를 써 놓긴 했지만 하기아 소피아 건축을 자세히 다루어 놓았다.
그러나 성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지은 6세기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이후 지진과 화재로 몇 차례 파괴되었기 때문에 수차례 개축, 보수 되었고, 최종 개보수는 9세기(혹은 10세기)에 있었다. 이후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하면서 더 이상의 보수나 개축은 없어졌지만 화려한 모자이크와 실내장식은 정교회 총대주교가 기거하는 곳으로 알맞았다.
그러나 1204년 최초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 제4차 십자군 기사들에게 대량으로 털려 많은 문화유산, 보물, 성유물들이 베네치아를 위시한 유럽으로 빠져나갔다. 심지어 라틴인들은 성 소피아 대성당을 가톨릭 성당으로 마개조하고 십자군들을 선동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약탈을 주도한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을 대성당 2층에 마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5] 설상가상으로 15세기 오스만 술탄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동로마를 멸망시킨 뒤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면서 모자이크에 회반죽을 칠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사실 오스만은 성당을 개조할 때 모자이크를 없애 버리려 했다. 그러나 자신들도 그 모자이크가 아까웠는지 언젠가 뗄 수 있게 회반죽을 칠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첨탑(미나레트)이 개축되면서 아예 성 소피아 대성당은 이슬람 모스크로 거듭났는데,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성 소피아 대성당은 박물관으로 개축되었으며 내부의 회반죽이 제거되면서 화려한 모자이크가 다시 드러났다. 복구 작업은 한동안 계속되다가 튀르키예 내의 반발로 인해 중단된 상태다.
3.1.2. 고토 회복 전쟁
고토 수복 전쟁이 끝난 직후인 555년의 동로마 제국. |
마지막으로 고토 회복 전쟁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가장 골몰한 사업 중 하나였다. 자세한 것은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참조. 최초의 전쟁은 534년에 있었는데, 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지휘한 동로마 군대는 압도적인 수의 반달족 군대를 분쇄하고 반달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로서 북아프리카는 동로마의 판도에 편입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에 고무되어 동고트 왕국을 상대로 이탈리아 수복 전쟁을 시작했지만, 이탈리아 원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535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불과 7500명(!)의 병력을 벨리사리우스에게 쥐어주고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를 점령하도록 했다.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나폴리에 이어 고도 로마까지 탈환한 벨리사리우스는 엄청난 병력으로 로마를 포위한 고트족에 의해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혈전 끝에 로마를 지켜 내었고 이윽고 후퇴하는 고트족을 역으로 격파하여 중부 이탈리아를 손에 넣는다. 이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의 고질적인 의심병이 벨리사리우스의 발목을 잡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540년 라벤나에 입성하는 데 성공하고야 만다.
이제 유스티니아누스는 더이상 벨리사리우스를 그가 정복한 이탈리아에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소환되었고 그의 빈 자리는 여러 명의 장군들에게 맡겨졌으나 새롭게 왕위에 오른 젊은 고트족 청년 토틸라에 의해, 시칠리아, 사르데냐와 남이탈리아 일부 도시를 제외한 이탈리아가 다시 한번 고트족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벨리사리우스는 다시 한번 파견되었지만, 황제의 지원 없이 그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위기의 이탈리아를 구한 것은 70대의 늙은 환관 나르세스였다. 그는 황제를 잘 설득하여 여러 부족의 용병이 포함된 3만 5천의 군세를 이끌게 되었다. 552년 나르세스는 라벤나에 도착하여 다시 한번 고트족과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타기나에 전투에서 게르만족 최강의 기병을 자랑하던 고트족은 분쇄되고 토틸라는 사망한다. 이제 동고트 왕국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나르세스는 이 틈을 타 이탈리아를 노리던 프랑크 왕국을 쫓아낼 필요가 있었다. 결국 554년 카실리눔 전투에서 게르만족 보병의 강자였던 프랑크 왕국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이제야말로 이탈리아는 제국의 패권하에 놓이게 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르세스는 이때 이미 나이가 70대 중반이었으며, 장수를 누리긴 했지만 결국 이탈리아를 13여 년간 통치하는 선에 그쳤다. 그 동안에는 로마 시에서 나르세스에게 가혹한 통치에 대해서 탄원하러 보낸 대표단이 차라리 그리스인[16] 당신들보다 동고트인을 모시는 게 낫겠다고 했을 정도로 통치가 빡빡했다고 한다.[17] 그가 죽자마자 북방에서 밀고 내려온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8세기 라벤나 총독부를 상실하면서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 대한 제국의 헤게모니는 종말을 고한다. 이탈리아 동북부의 라벤나에 위치한 라벤나 총독부에 속해있던 베네치아가 황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하기도 했다. 동로마가 여기서 이탈리아를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면 이탈리아 라틴인들과 동로마의 간극은 줄어들수도 있었겠지만 7세기부터의 극심한 쇠락과 영토 상실로 제국은 다시는 그럴수 없게 되었다.[18]
3.2. 역병과 계속되는 전쟁
565년 동로마 제국. |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말기부터 감소한 정치력과 역병, 오랜 전쟁으로 6세기 후반의 동로마 제국은 재정난에 시달렸다. 원래 유스티니아누스는 한탕 크게 정복해놓으면 거기서 나오는 세금으로 금방 재정손실이 복구될 것이라 예상했고, 실제로도 계산된 확장이었다. 하지만 가장 나쁜 타이밍에 역병이 발병하면서 전쟁으로 텅빈 국고를 매꿔놓지 못했다. 중세 흑사병 못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역병이 일어난 때를 제1차 페스트 혹은 선 페스트 시기라고도 할 정도다. 얼마나 전염성이 지독했는지 유스티니아누스 본인마저도 감염되어서 골골 앓아누웠고 이후 사실상 폐인이 된다. 덕분에 마우리키우스 황제[19] 대까지 국고주의를 비롯한 온갖 재정부양책으로 모아놓은 제국의 국고가 모자라게 된다. 한동안 유스티니아누스가 만들어놓은 제국 영토 이곳 저곳에 구멍이 송송 뚫린 상태로 그 영토가 유지되었지만 제국 전체를 강타한 전염병으로 인한 막중한 손실에. 북방 민족의 침입, 사산 왕조와의 끝없는 전쟁, 제위를 둘러싼 국내 분열이 겹쳐 급속히 국력이 쇠약해져 갔으며, 서로마 권역의 영토는 지속적으로 날아가는 판이었고 이탈리아도 구멍이 송송 뚫려가는 상태로 라벤나 총독부가 겨우 유지되고 있는 판이었다.[20][21]
4. 쇠퇴
4.1. 페르시아 전쟁 (602~628)
600년의 동로마 제국. |
포카스가 쿠데타로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폐위하고 즉위하면서 제국의 혼란은 더욱 심해졌고 그가 즉위하면서부터 제국은 기나긴 쇠퇴의 길을 밟기 시작한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장기간 긴축 정책으로 군대와 시민 모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 황제는 야만족과 싸우던 군대에게 도나우 강 너머에서 겨울 동안 머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군대는 반발하며 그들의 백인대장 중 한 명인 포카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황제를 싫어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도 합세하였고 결국 마우리키우스는 아나톨리아로 도망갔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포카스는 공포정치를 펼친다. 죄가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의심만 있으면 모두 죽인 것인데, 잔인한 고문은 덤.
한편 전임 마우리키우스의 도움으로 내전에서 승리하고 복위한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명분으로 하여, 동로마 내부의 정세불안을 활용하여 전쟁을 개시했다. 한편, 포카스를 찬탈자로 규정하여 인정하기를 거부한 동부 군사령관(Magister militum per Orientem) 나르세스[22]는 진압하러 온 포카스의 부대에 의해 에데사에 갇혀 포위되어 있었는데, 나르세스는 쳐들어온 인근의 호스로에게 구원을 요청해서 호스로는 요청을 수용하고 페르시아군을 동원해 포위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가 마우리키우스 측 사람으로서 포카스의 찬탈을 인정할 수 없어 내전까지 벌였던 데다가, 호스로 또한 마우리키우스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해도, 어쨌든 포카스와는 같은 나라 사람이고, 호스로는 적국의 수괴였다. 즉 이런 상황은 뭔가 잘못된 것이기는 했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나르세스는 신변안전을 약속받고서 사자를 보내지 않고 본인이 콘스탄티노플에 직접 출두했지만 그것은 페이크였다! 포카스는 약속을 뒤집고서 나르세스를 화형시켰다. 어떻게 보면 적국 페르시아에 붙어먹은 외환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포카스 또한 통수를 친 것인데다가 화형시켰던 것도 크게 작용하여 민심, 특히 사회지도층의 민심은 더더욱 떠나갔다. 동부군 사령관이면 제국 내 거의 최고위급 직위인데 무참하게 화형당했으니 그 밑의 사람들은 안 봐도 뭐... 상황이 이랬으니 상하일치 단결해서 페르시아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애초에 틀린 것이었다.
포카스는 싸우고 있던 아바르족과 강화를 맺고 동쪽에 집중했으나 성공한 기록이 없다. 608년, 아나톨리아 대부분이 넘어가고 페르시아군은 보스포루스 해협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포카스는 짧은 치세 동안 계속 해왔던 잔인한 고문과 숙청을 계속 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카르타고 총독령의 이라클리오스는 아들 이라클리오스[23]와 군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시킨다. 610년 이라클리오스는 포카스를 폐위하고 황제가 된다.[24]
하지만 전임 황제 포카스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면서 제국의 방위 체계를 모조리 망가뜨려 놓았던지라, 사산 왕조의 호스로 2세가 진격했을 때는 제대로 방어가 가능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611년에 시리아와 아나톨리아를 정복당하고, 613년 이를 막기 위해 군사를 보내지만 안티오키아에서마저도 격파당하며 다마스쿠스도 점령당하고, 614년에는 예루살렘마저 빼앗겨 제국의 최고 성유물인 성십자가마저 빼앗긴다. 617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스포루스 해협 바로 건너편의 칼케돈마저 정복한다. 619년에는 전염병까지 도는 데다가 621년에는 이집트의 나일강 중상류까지, 622년에는 로도스 섬마저 함락당하는 초유의 위기 상황이 되었다.
이라클리오스에게는 남은 야전군을 끌어모아 회전에서 도박적인 승부를 벌이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라클리오스는 그렇게 하지 않고, 시간을 벌어가면서 후퇴하는 대신 잔여 병력을 철저하게 훈련시켜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622년,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영토를 절반 넘게 잃은 상황에서도 동방 방면 야전군 편제와 병력을 상당 부분 온존하여 병력을 2/3 넘게 건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제국 서쪽에서 슬라브와 아바르에게 페르시아군에게 입은 것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어 일리리쿰군은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훗날 아랍인들과의 전투에서도 야전군 전체가 통째로 날아가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돌이켜 볼 때, 이 참사가 이라클리오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이래도 저래도 방법이 없겠다 싶은 이라클리오스는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길 생각까지 하지만, 카르타고로 가려는 배가 악천후로 침몰한 데다가 총대주교의 만류로 그는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황제가 이끄는 군대는 페르시아군을 대파하였고, 그 휘하의 장군들도 차례차례 페르시아를 격퇴하기 시작하였다. 622년부터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격렬한 전투가 매년 벌어졌다. 이라클리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어를 믿고 페르시아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사산 왕조와 동맹군인 아바르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압박해 들어왔지만 동로마 해군이 제해권을 잡은 상황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626년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방어에 성공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연전연승한 이라클리오스는 정면 돌파를 회피하고 돌아서 사산 왕조의 중심부로 진격, 627년 처절한 전투 끝에 니네베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그리고 이듬해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빼앗긴 성물을 되찾았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2년 후 샤르바라흐즈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페르시아 왕으로 인정해 주는 대가로 반환했다. 한때 동로마의 황제를 경멸하던 페르시아의 왕중왕(Shahanshah)들은 자신들을 황제의 노예라고 칭하기까지 하는 데까지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4.2. 7세기 중반, 이슬람 제국의 발흥과 슬라브족의 남하
동로마 제국은 사산 왕조와의 긴 전쟁에서 이겼지만 같은 시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교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서로간의 전쟁에 지쳐버린 두 나라는 7세기 중반 이후 시작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를 앞세운 이슬람 군대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었고, 결국 잇따라 패배하게 된다. 게다가 제국의 경우, 황제의 노환과[25] 교리 논쟁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분열되어 나가는 등 온갖 추가적 악재와 사산 왕조와의 결전 + 이전의 역병까지 겹친 상태에서 이슬람 침공을 받은 결과, 레반트와 이집트를 영구히 상실했고[26], 가까이 있는데다가 패전 크리에 왕위 계승 분쟁까지 겹쳐있던 사산 왕조는 아예 멸망해버리고 왕족들은 중국 당나라로 망명한다.이슬람 제국은 정통 칼리파 왕조가 무너지고 우마이야 왕조가 설립이 되면서도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레반트를 확고히 장악한 아랍인들은 허구한 날 제국령 아나톨리아를 습격했고, 674년에는 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제국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켜냈지만, 아나톨리아에 대한 아랍인들의 습격은 조금도 주춤하지 않았다. 또한 마스트 해전의 패배로 지중해가 로마의 호수이던 시절은 완전히 끝났고, 지중해에는 사라센들이 들끓었다. 기원전의 공화정 후기 시절부터 인근의 유럽, 지중해, 중동 일대에서 단일 세력으로는 항상[27] 국력 지표상으로 1등이었던 시절도 이슬람 제국에게 엄청난 영토를 정복당하면서 끝났고, 2등으로 내려앉았다.
이에 국력이 약화된 제국을 노리고 북방에서 슬라브계 민족들이 침공해 들어왔다. 이들의 공세로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 테살로니카, 트라키아 일대, 그리스 및 달마티아의 몇몇 해안 거점들만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640~660년대의 콘스탄스 2세 당시에 불가리아 제1제국 성립 전 불가르족의 일파가 그리스까지 내려가서 코린토스를 점령했었다는 것을[28] 시사하는 논문도 존재한다.( The Emperor Constans II and the Capture of Corinth by the Onogur Bulgars) 670~680년대에는 불가르족이 다뉴브 강 남쪽으로 남하해왔고, 제국군은 온갈 전투에서 이에 대한 저지에 실패하여 681년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성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불가르족은 많은 슬라브 부족들을 제압하고 발칸 반도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결국 제국이 20년간의 혼란에 빠져있던 698년에 카르타고마저 함락되면서 북아프리카도 상실하고 이집트나 시리아 탈환도 무산되어 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아있던 지역은 그리스어와 칼케돈파 기독교를 중심으로 더욱 높은 응집력을 갖게 되었다.[29] 이런 가운데 이탈리아는 유일한 비 그리스어(당연히 라틴어)권이었고 이로 인해 제국 본토/본국과의[30] 이질성이 두드러졌다. 7세기 말부터는 교황의 이탈리아 내 권위가 라벤나 총독을 압도하게 되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라벤나 총독들 중 마지막에서 6번째이자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로 넘어가는 시기에 맡았던 요안니스 2세 플라티노스부터는 위키 문서에 교황이 동로마 당국의 말을 안 듣기 시작했던 것은 물론 현지의 이탈리아인들도 동로마 당국에 대해서는 경원시하여 교황 vs 제국의 구도가 될 경우 대부분이 교황의 편을 들어주었던 모습이 나온다. 총독인데도 마치 군주처럼 '2세'가 붙어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탈리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상당히 멀어서 어느 정도의 지방자치가 강제되었으며 또한 제국의 원래 발상지라는 큰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에, 7세기 중반에 테마 제도를 도입하여 문·무 권력을 한 손에 쥐어준 원 동로마 지역보다 수십년이나 앞선 584년부터 문·무를 모두 통할했으며, 그 재량의 정도 또한 다른 지방관에 비해 매우 높아 그야말로 엄청난 권력자라서 그 위상이 프랑크·랑고바르드·서고트 같은 다른 서유럽 왕국들의 왕에 버금갔다. 그런데 7세기 말부터 확실하게 교황에게 밀렸던 것이다.
4.3. 사회상의 후퇴와 영토 축소
7세기 이후로 콘스탄티노플 및 테살로니카, 니케아, 니코메디아 등 수도 및 수도에서 가까운 몇몇 주요 도시를 제외하면 한 번이라도 함락당하지 않은 도시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전쟁 중에 영토가 뺏었다가 뺏겼다가 하는 것이 자세하게 묘사된 몇몇 유튜브 연도별 영상을 보면, 로마-페르시아 전쟁, 674-678년 및 717-718년의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아나톨리아에서는 북부를 제외한 중·동부 내륙, 서·남부 해안 등이 대부분 침탈 혹은 일시적인 점령을 당했었다. 이에 따라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쇠퇴하여 사라졌다. 예컨대 그리스 폴리스 시절부터 고대 후기까지 아나톨리아 서해안을 대표할 정도로 잘 나가던 에페수스는, 안 그래도 퇴적으로 항구기능을 점차 잃어가던 가운데, 사산 왕조와의 전쟁통이던 614년에 지진을 겪었고, 여기에 654-655년, 700년, 716년 등 영어 위키에 기록된 것만 해도 세 차례에 걸친 이슬람 군대의 침략으로 결정타를 맞아 쇠퇴하여, 그 이후로는 전혀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거의 언급이 안 되고 아나톨리아 서해안의 대표 도시로서의 위상은 스미르나( 이즈미르)가 가져가서 오늘날에도 이즈미르는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이어 튀르키예 내 인구수 3위, (두 대륙에 걸쳐 있으며 유럽 쪽이 메인인 이스탄불을 제외한) 아나톨리아 반도 내 2위의 도시이다. 살아남은 곳도 줄어든 인구와 방위 문제로 인해 시가지를 버리고 방어에 용이한 좁은 지역에 요새를 쌓고 그 쪽으로 이동한다든지, 구시가지의 잔해를 사용해서 임시 요새를 건축하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축소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타우루스 산맥 근처의 전방 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역민들은 최소한의 안전이라도 보장해주는 군대조차 믿을 수 없어 그 대신 산성과 험한 산세에 숨어 의지해서 살았다고 한다.[31]이로 인해 고대 로마부터 이어지던 소위 고전적인(Classical) 도시 문화는 거의 소멸되어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예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귀족들 또한 전쟁, 전염병으로 많이 죽거나 영지를 정복당해 뺏겨서 크게 힘을 잃었다. 이에 따라 소작농 베이스로 돌아가는 고대의 대토지 경제가 쇠퇴했고 자영농 경제로 바뀌었다.[32] 테마 제도는 이러한 환경에서 새로이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렇게 구성원 간 빈부의 차가 줄어들었던 점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물리적 거리가 멀기도 했던 非 칼케돈파, 非 그리스어권 영토의 대부분을 뺏기면서 남은 제국령 내 칼케돈파, 그리스어권의 비중이 더욱 올라갔던 점과 함께, 남은 제국령 내 구성원 간 응집력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정리하면 혼란기를 거쳐 종교적, 언어적, 종족적으로 더 균일해지고 빈부의 격차가 줄었는데 내부 일체감이 강화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곡창 지대였던 이집트를 상실함으로 인해 식량 부족과 물자 부족 역시 심각해졌고, 심지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도 주변 지역에서 식량을 충당하여 겨우 버티는 지경이였고,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은 각지에 토착화되어서 이 때까지도 고질적으로 제국을 괴롭혔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50만에서 4 ~ 7만까지 감소했는데, 콘스탄티노플에도 정착되어 있었던 무료 식량 배급(소위 빵과 서커스) 제도를 이라클리오스 때 페르시아를 상대할 전비를 축적하면서 재정부담으로 폐지했던 것이 인구 감소에 큰 요인이 되었다. 이 줄어든 인구 또한 인근의 마르마라 및 에게 해의 섬 지역의 인구를 콘스탄티노플로 사민시켜서 채웠다고 한다.
제국의 재정도 가난하기 짝이 없고[33] 경제도 과거로 되돌아가서 화폐 경제의 몰락으로 수도를 떠나기만 해도 물물교환이 대세였으며, 세금을 내기 위한 화폐 자체를 구하기 어려워서 농민들이 고생했다는 기록까지 나올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해 누구나 제국이 망해가고 있음을 절감할 정도의 대위기였다.[34] 이렇게 되니 당면한 생존 및 수비가 목적이 아닌 중장기적인 것이나, 고차원적인 국가기능에 자원을 투자할 여력이 많이 사라졌다. 이에 해당되는 교육·학술·문예 분야는 직격탄을 맞았다. 뭐 애초에 이라클리오스 때 전비 조달을 위해서 세르기오스 총대주교의 협조를 받아 그 전에는 손도 안, 아니 못 대던 교회의 보물, 패물들을 처분하거나 녹여서 전비에 보태썼던 것에서부터 예술 쇠퇴의 전조는 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역사서도 부실하지다 못해 사라졌고, 제국 전체에서 글을 아는 사람이 많게 잡아 3천 명이었다. 관공서 기록도 부실해졌으며, 그나마 있는 기록도 글을 아는 자가 없어서 관리 임명에 곤란을 겪는다는 내용이 수록될 정도였다. 한마디로 말해 교육 기능이 완전히 붕괴되어버린 셈이다. 가문과 가계에 대한 기록도 부실해졌으며, 지방에 대토지를 가진 귀족들이 해당 영지를 상실하면서 몰락하여 다른 가문으로 교체되었는데, 그들조차도 언제 정확히 자신들이 집권했는지 잘 모르는 막장 상황에 돌입하고 말았다. 물론 시장의 상인들과 직공들도 자신들이 언제부터 이 일을 했는지 감도 못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7세기 이후의 동로마 제국을 두고 현대 서양사 학자들은 기존의 로마적 전통이 동로마에서 사실상 사라지고 독자적인 제국으로 변모했다고 보고 7세기 이전 유스티니아누스 왕조가 지배하던 시절까지를 대체적으로 '로마 제국', 그 이후 이라클리오스 왕조 이래로의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구분임을 명심해야 한다. 8세기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와 법률은 여전히 7세기에서 이어지던 연속체였고, 적어도 군부대들 거의 전체는 몇몇 타그마 부대들 외엔, 7세기 이전은 고사하고 아예 기원전부터 시작되는 로마 군단들과의 강력한 편제 연속성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무려 네로 다음에 황제가 된, 갈바가 창설한 군단들에서 시작되는 부대들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몇 안 되는 예외라는 타그마 부대들도 대부분은 3~5세기 황제들이 창설한 부대들의 직접적 연속이었다. 그러니 그리스어 공용어만 갖고 7세기부터 로마 제국은 아예 로마 제국 아니라고 하는 관점은 편의적, 문학적, 수사학적 관념을 역사적 관념과 혼동한 것이라고밖엔 할 수 없는 것이다. 영토, 국가 체계, 문화적으로 고대 로마와는 다른 비잔티움만의 체제와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건 이미 반박된 1970년대 이전의 관념에 불과하다.
물론 적어도 제국이 7세기 이슬람 제국의 흥기 이래로는 그 전과는 달리 지중해 문화를 혼자서 선도해나가는 절대 강국의 위치는 잃었으니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별도 구분은 결코 의미가 없진 않으나, 그렇다고 엄밀한 역사적 구분 및 분명한 정부 연속성, 법률, 군제 연속성 등을 부정하며 그것이 단히 동로마팬들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견해 또한 진지한 견해는 될 수 없다.
4.4. 717년, 유럽의 방파제
717년, 우마이야 왕조는 동로마 제국을 아예 끝장내기 위해 수천 척의 전함과 10만이 넘는 대병력을 동원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35] 이 전투는 치열하게 이어져 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였으나, 뛰어난 명장인 황제 레온 3세(Λέων Γ´ 재위 717~741년)의 지휘와 혹독한 겨울 날씨, 불가리아의 지원과 그리스의 불로 알려진 액체화약의 위력으로 718년에 우마이야 군대를 격퇴할 수 있었다. 이 전쟁에는 732년 프랑크 왕국이 우마이야 군의 침공을 격퇴한 투르-푸아티에 전투보다 더 중요한 의의가 있는데, 대중적인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동로마 제국이 이때 무너졌다면 그대로 유럽 세계는 이슬람 세력에 잠식됐을 가능성까지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승리로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대는 끝났고 생존이 보장되었다. 제국이 이만한 위기에 다시 빠지게 되는 것은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기독교권을 지켜내게 되었다. 이 전투의 의미를 동시대인으로서 아주 잘 이해하고 있던,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여러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도 사절을 파견하여 축하한 것은 아주 의미가 크다. 심지어는 당시 동로마 제국과 혈전을 벌이던 불가리아 제1제국마저도, 동로마 제국보다 더 강력한 이슬람 제국이 발칸에 모습을 드러낼 경우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동로마 제국 측에 섰었다.
732년 프랑크 원정에서도 실패하고 국력을 너무 소모한 나머지 힘이 빠진 우마이야 왕조는 740년 아크로이논 전투에서도 레온 3세에게 크게 패했고, 결국 750년 반란으로 우마이야 왕조는 멸망하고 [36], 아바스 왕조로 교체되었는데 아바스는 종전 우마이야 시절의 수도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메소포타미아(이라크)의 나자프(쿠파)로 바로 천도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머지 않은 곳에 바그다드를 세워서 수도로 삼은 왕조였다. 즉 무게 중심이 동쪽으로 옮겨간 것이 되어서, 서방에 있는 동로마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은 끝나게 된다.[37] 하지만 아예 전쟁이 끝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아바스 왕조는 제국의 완전한 정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결과 제국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 위해 국경 지대에 대한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 그 결과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일대는 이슬람군의 기습과 동로마 제국군의 반격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영어 위키백과에 Abbasid invasion of Asia Minor (782), Abbasid invasion of Asia Minor (806), Abbasid invasion of Asia Minor (862) 등의 문서가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아래는 이 시기 우마이야 및 아바스-동로마 간 국경지대 지도이다.
이후 레온 3세는 아나톨리아의 테마를 재정비했고, 레온 3세와 그의 후계자 콘스탄티노스 5세의 치세를 기점으로 제국의 경제와 영토는 최저점을 찍고[38] 다시 반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로마는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1세기 가량 제국을 소진시킬 소모적인 논쟁에 돌입하였다. 일단 이슬람의 대규모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자, 레온 3세는 국내 문제에 집중해 동방 교회의 '성상 공경'을 문제시하여 '성상 파괴령(726)'을 내린 것이다.
4.5. 성상 논쟁 (726~842)
8세기 중반, 9세기 전반의 성상 파괴 운동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에 보면 신바빌로니아 제국 이후 세 제국이 차례로 들어선 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기독교도들은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제국, 로마 제국이 이 세 제국에 해당한다고 여겼고, 마땅히 로마 제국은 세상의 마지막 제국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의 수호자가 된 이후로는 로마 제국은 제국의 기독교인에게는 세상의 유일한 제국이었다. 그런데 성상 파괴 운동의 결과, 서쪽에 새로운 로마 제국이 탄생하며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은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겪었다.[39]
다만 성상 공경 문제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성상 옹호파'와 황제 레온 3세를 중심으로 하는 '성상 파괴파'의 대립이란 건 틀린 얘기다. 서방 교회가 보기에는 어느 날 갑자기 동로마 제국에서 듣도 보도 못한 성상파괴주의라는 이단이 떡하니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 동방 교회의 관점에서 성상파괴주의는 동서 교회 간의 대립이라기보다는 황제에 의해 유도되어 동방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이단 투쟁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에서도 오히려 성상 옹호파가 전반적으로는 우세일 때가 많았고, 서방 교회도 성상 문제 자체는 황제가 갑자기 성상 공경을 이탈리아에서도 하면 안 된다고 생떼를 쓰기 전엔 이 문제에 큰 관심은 없었다. 동로마 제국의 성상 논쟁에서 서방 교회는 처음부터 동방 교회 내의 정통파(성상 옹호파)를 지지하는 보조적인 입장에 있었다. 정치적 차원에서 이 논쟁의 본질은 고갈되어가는 재정을 교회 재산을 털어서 보충하고 싶은데 핑계가 필요했던, 동로마 제국의 재정상 문제에 있었다. 물론 황제 개인의 성상 공경에 대한 생각도 일부 작용했지만, 진짜 문제라고 보기엔 너무 단순한 분석이다.
이 문제는 이슬람측과 보다 많이 상호작용하게 된 탓에 성상 공경의 반대적 개념에 익숙해진 아나톨리아 지방과 그렇지 않은 유럽쪽 지역의 견해 대립도 크게 작용했고, 그 생명력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서기 843년의 유능한 섭정 황태후 테오도라에 의해 성상파괴주의가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성상 파괴주의는 제국을 내란 상태에 빠뜨리긴 했으나, 황제들이 그동안 많은 재산을 축적한 교회들을 털어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강제 결혼시켜 변방 속주에 배치하는 핑계를 만들어내는 효과도 있었다. 젊은 수녀와 신부들을 경기장에 강제로 끌어내서 옷을 죄다 벗긴 다음, 남녀 한 쌍이 손 잡고 경기장을 달리게 만드는 이벤트도 벌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손 잡은 남녀는 강제 결혼-합방한 후, 변방에 배치. 기독교 탄압에 광분했던 이전의 이교도 시절 로마 황제들도 이런 식의 AV스런 이벤트로 교회를 감히 모독하진 못했었다.
다만 성상 파괴 운동이 제국 서방의 라틴 로마인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만으로 서방 교회와 실질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보기엔 때문에 설명이 대단히 부족하다. 랑고바르드족이 마구잡이로 밀고 내려오면서 라벤나 총독부가 망가진 건 성상 파괴 탓이 아니라, 유스티니아누스 이래로 계속해서 급여를 못대줘 이탈리아 야전군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탓이지, 성상파괴 논쟁 탓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 전체가 일관적으로 성상 파괴주의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교회 재산과 인력을 정기적으로 털어대는 막장 황제들에 대항해 로마 교황과 연대하는 입장이었던 지라 서방 교회와의 골 운운은 설득력 없는 주장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3세가 샤를마뉴에게 붙은 명분은 당대 제국에 '황제'[40]가 없다는 논리 때문이었지 성상 운운은 전혀 관계 없었다.
4.6. 8 ~ 9세기, 라벤나 상실과 불가리아 전쟁
8 ~ 9세기 내내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제국은 서방지역에서도 종종 '(신성한) 공화국'[41] 등으로 높여 불리며 마치 기독교권의 종주국과 같은 대접을 받았으나,[42] 751년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라벤나 총독부가 무너지면서 교황과 서방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서유럽에서는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이 제국으로 거듭났고 카롤루스에게 제관을 씌워준 로마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강해졌다. 참고로 8세기 후반에는 제국 대신 교황령이 '공화국'으로 지칭되었다고 한다.[43] 800년 카롤루스의 로마 황제 대관 이후 서방에서 동로마 제국을 진짜 로마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게 된 것의 전조현상이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이슬람 아바스 왕조는 751년 중국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해상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문화를 꽃피웠다. 또한 발칸 반도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성장을 거듭하여 9세기에 이르면 발칸 대부분을 석권하고 제국을 위협하는 강대국이 되었다.한편 워낙 상징성이 강한 지역이라 제국은 로마와 이탈리아에 계속 신경을 썼지만[44][45] 유스티니아누스 시절부터 동로마에 제기되던 이탈리아인들의 불만은, 쇠약해지는 제국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이라클리오스 왕조 후 문화적, 종교적 이질감이 더욱 증가했으며 동로마의 푸대접이 갈수록 더해짐에 따라 극히 심해졌다. 대표적으로 663년에 동서 분할 이후 로마를 처음 방문한 동로마 황제인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콘스탄스 2세의 행적을 보면 7세기 이후 동로마가 로마 시를 얼마나 푸대접하고 있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교황 비탈리아노의 따뜻한 환영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판테온을 비롯한 옛 건축물들의 장식이나 청동을 떼어다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었다.[46] 666년, 콘스탄스는 교황의 라벤나 대주교에 대한 간섭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황제 본인이 임명하는 총독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콘스탄스는 사르데냐, 칼라브리아 등지를 순행하며 로마에서 했던 짓을 반복하였고 연공을 강요하는 등 정복자처럼 굴어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를 샀다.
이 시기 동로마가 이탈리아인들을 동등한 로마인으로 보지 않은 사례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수복한 유스티니아누스 때보다는 300여 년 정도 뒤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동로마군이 남이탈리아 주민(문맥상 전쟁 포로나 랑고바르드인 같은 이민족이 아닌 동로마 영역 내의 일반 주민)을 노예로 파는 악습이 있었다는 꽤 충격적인 내용도 영어 위키백과에 있다.[47]이런 푸대접이 계속 차곡차곡 쌓여 후대에 로마-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동서 대분열, 4차 십자군 등이 일어나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동로마 본국 입장에서는 이탈리아 쪽이 우선순위에 있어서 다뉴브 강 및 트라키아 쪽이나, 아랍과의 최전선인 아나톨리아 전선에 비해서 확연히 밀렸고 그래서 신경을 덜 썼다면, 이탈리아의 입장에서는 옛 본국이면서도 이제는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는 속주로 격하된 처지에서 오는 미묘한 입장과, 우선순위 면에서 항상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에 비해 밀리니 '이렇게 신경 안 써줄 거면 그냥 우리가 동고트 치하에 살게끔 냅두지 구태여 왜 20년간 전쟁하면서 이 땅을 초토화시키면서까지 들어왔냐?'는 불만이 성상 파괴 운동을 발화점으로 해서 폭발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귀결이 바로 중ㆍ북부 이탈리아를 포함한 로마 시 및 교황청의 동로마에서의 이탈과 카롤루스 왕조( 신성 로마 제국)으로의 귀순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회복기에 접어들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아나톨리아와 불가리아에서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으며, 니키포로스 1세는 그리스를 완전히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존망의 위기를 넘긴 9세기에도 제국의 영토 상실은 계속되어 시칠리아, 크레타 등의 지중해의 주요한 섬들이 상실되었고, 해군력이 약화된 제국은 사리센들에게 시달렸다. 이 시기에는 서방 교회 및 서방 국가들과의 갈등, 제위 다툼이 이어졌다.
5. 제국의 반격
위축되었던 제국은 과거 제국의 알짜 영토였던 이집트, 시리아, 북아프리카를 잃고도 9세기부터 꾸준히 국력을 축적해, 마케도니아 왕조 때부터 다시 한 번 동지중해의 패권을 잡는 강대국의 위치를 회복한다. 국내외 서적에서도 이 시기를 명실상부한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로 설명한다. 10세기 중반 ~11세기 초반 제국의 인구는 테오도시우스 사망 당시 로마 제국 동부와 거진 비슷하며, 실질적인 경제력이나 군사력 그리고 체제적 역량은 오히려 당시 제국보다도 상회한다는 시각도 있다.[48]
5.1. 성상 논쟁 종결
843년 성상 파괴 논쟁이 종식되었고 그와 동시에 제국은 빠른 속도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간혹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삼중성벽에 막혀 실패하였고, 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강력했던 아바스 왕조도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또한 니키포로스 1세의 세제 개혁으로 제국은 수입이 상당히 크게 증가했고, 9세기부터 제국은 다시 부유해지기 시작하였다. 유능한 섭정 테옥티스도스는 제국의 해군을 재건하였고, 사리센의 위협도 크게 줄어들었다.
830 ~ 840년대에는 테오필로스 황제가 이슬람 세계에 공세를 가했다. 그전까진 이슬람군과 정면 대결 야전을 벌이는 건 엄두도 못냈으나 바로 그때부터 제국이 야전을 이슬람측과 대등한 입장에서 공방을 주고 받게 되었다. 9세기 후반에는 유명한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주교 형제가 슬라브 족에 대한 지속적인 선교 활동을 벌이고, 863년 드디어 강력한 불가리아 제1제국이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프랑크족을 끌어들인 로마 교황에 맞서 제국은 슬라브족을 배경으로 얻을 수 있었다.
5.2. 정복 군주의 시대 (863 ~ 1025)
제국의 확장은 마케도니아 왕조를 전후하여, 863년 마르줄 우즈쿠프(Marj al-Usquf) 전투에서 멜리테네 토후국을 격파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0세기 경에는 내분으로 급속도로 위축된 이슬람 세계에 대해 일방적인 공세로 돌아선다. 이때부터 제국의 전쟁은 이교도들에 대한 성전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대두되었고, 니키포로스 2세는 모든 전사자를 순교자로 시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제국 교회는 난색을 표했다.[49]
마케도니아 왕조를 개창한 바실리오스 1세는 남이탈리아의 대부분을 다시 제국의 영토에 편입시켰고, 이후 200년간 제국의 남이탈리아에서의 위치는 공고해졌다. 또한 바실리오스 1세는 아바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 동부 전선에서의 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동부 전선에서의 공세는 계속 되었지만 그 후계자인 레온 6세의 치세인 902년에 시칠리아가 완전히 아랍인들에게 함락되었고, 904년에는 제국 제 2의 도시 테살로니카가 아랍 함대에게 함락되어 약탈 당하기도 했다.
또한 여전히 유럽 - 아시아 이중 전선은 제국의 골칫거리였고 10세기 초 불가리아 제1제국은 시메온 대제의 활약으로 제국을 몰아붙이고 다시 한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다. 결국 제국은 913년 시메온을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하였고, 이로써 유럽에는 로마, 프랑크, 불가리아의 세 제국이 공존하게 되었다.
시메온은 계속해서 제국에 공세를 가했고, 제국군은 계속 패전하였지만 927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대제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제국에게 동부 전선에 집중할 기회를 주었다.
이 시기에는 니키포로스 포카스,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라는 유능한 장군들과 그 후손인 황제 니키포로스 포카스, 요안니스 쿠르쿠아스(치미스키스는 별명) 등 위대한 정복자들이 연달아 등장했다. 934년에는 멜리테네를 탈환하였고,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제국의 승전이 계속되었다.
5.3. 니키포로스 2세 (963~969)
10세기 중반에는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앗 다울라(Sayf al-Dawla)가 제국의 확장을 저지했고 일시적으로 제국과의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950년 전투에서 사이프가 이끈 3만 명의 군대가 제국군의 협공을 받아 궤멸되었고, 958년과 960년의 공세도 잇달아 실패로 돌아갔다. 오히려 962년 니키포로스 2세의 군대가 역습을 가해 함단 왕조의 수도인 베로에아(헌 시리아의 알레포)를 함락했으며[50] 이후 함단 왕조를 속국으로 삼고 제국에 대한 몇몇 의무를 규정한 사파르 조약을 맺었다. 또한 제국은 961년 크레타를 수복하였으며, 965년에는 킬리키아 일대와 키프로스, 969년에는 고대 5대 총대주교(Pentarchy) 소재지였던 안티오키아까지 수복하였다.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크레타, 킬리키아, 키프로스, 안티오키아 등 주요 포인트를 성공적으로 수복했다. 이를 기점으로 아랍 해적들의 활동이 크게 줄어들면서 에게 해 일대가 크게 번성할 수 있게 되었다.유명한 클리바노로포스도 이 시기에 운영되기 시작하는데, 이 용도는 동로마 군대와 유사했던 함단조의 보병대열을 분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마찬가지로 함단 왕조도 얼마 안되어 클리바노로포스를 도입했다). 유럽에 있어서 니키포로스 2세는 내부 분열로 휘청거리던 불가리아 제1제국을 키예프 루스가 하여금 침략하도록 사주하였으나, 불가리아 제1제국을 접수한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가 곧바로 제국의 영토로 밀고 들어와 전면전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단 니키포로스 본인은 이러한 군공을 본인과 정권의 인기와 지지도로 환산할 정치력이 부족하여, 960년대 팽창기를 이끈 황제치고는 허무하게도 조카인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에게 암살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5.4. 요안니스 1세 (969~976)
니키포로스 2세를 암살하고 그 뒤를 이은 요안니스 1세는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브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불가리아 제1제국을 해체시켰다. 이 당시의 불가리아는 상당히 넓었기에 한 번에 완전히 병탄하기에는 어려웠고, 오랫동안 수도였던 플리스카를 비롯한 (불가리아 기준) 동부의 중심지역을 정복했다. 불가리아의 잔여 세력은 서쪽(특히 오늘날의 북마케도니아 일대와 그 주변)으로 밀려났고 그 중 코메토풀리 일가가 두각을 드러내어 이들의 지도 아래 1018년까지 반 세기 가까이 불가리아의 명맥을 이어갔다. 요안니스 1세는 예루살렘과 바그다드 근방까지도 찍고 왔었으며, 실제 영유로도 안티오키아에서 좀 더 남쪽 및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안티오키아의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이처럼 동방 원정의 주역들은 바로 아나톨리아의 군벌 귀족들이었고, 그 귀족들의 전형적 대표자가 바로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1세였다.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1세는 바실리오스 2세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정통 황제의 양부라는 지위로 공동황제가 되는 바람에 허수아비 신세였던 바실리오스 2세가 친정을 시작했을 때, 황제를 얕본 아나톨리아의 귀족들은 나라고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처럼 황제가 못 될 쏘냐 싶었는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제국의 아시아 영토를 기반으로 한때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함락할 기세였으나, 바실리우스 2세는 왕조에 충성스러운 유럽 지방군과 정교회 개종을 조건으로 제국이 절대 외국에게 넘겨줘서는 안 되는 3가지 중 하나인 포르피로예니타(계승권이 있는 후계자)를 신부로 맞이한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의 도움을 통해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5.5. 바실리오스 2세 (976 ~ 1025)
5.5.1. 공격적 방어 정책
귀족들을 굴복시킨 바실리오스 2세는 동방 원정을 중지하였다. 그는 재위 초반의 내전으로 군벌 귀족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동방 원정을 통해 그들의 세력을 불리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전통적인 공격적 방어 정책을 재확인했다. 이는 즉,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지는 않으나 주변 적국들에게 제국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파티마 왕조의 예가 가장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991년 파티마 왕조가 제국의 보호령이던 베로에아(현 시리아의 알레포)의 함단 왕조를 침공하자 즉각 개입하여 1000년 휴전할 때까지 전쟁을 벌인 것이다. 호되게 당한 파티마 왕조는 휴전 이후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를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기독교를 박해하여 제국의 어그로를 끄는 등 적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더이상 알레포에 기웃거리지 못했다.
또한 바실리오스 2세는 제국의 유럽 영토를 위협하던 숙적 불가리아 제1제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한때[51] 황제( 카이사르) 칭호[52]까지 허락받으며 수도 오흐리드에 총대주교구까지 설치했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완전히 해체되고 여러 개의 테마로 편입되고 말았다.
또한 제국의 동쪽 아르메니아 고원 일대의 군소 왕국들을 합병하여 당시 막 떠오르던 신흥 세력 셀주크 제국를 견제하고자 노력했다. 국가 내적으로 바실리오스 2세는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시절을 거치며 세력을 더한 귀족가문들과의 대결에서 이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와 12세기에 제국은 문화, 문명 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53]
5.5.2. 높은 균형감각과 자제력
바실리오스 2세는 귀찮아하는 게 많은 황제였고 모든 면에서 권력을 자기 몫으로 움켜쥐려 하였으며 학문도 싫어했지만, 균형 감각과 자제력만은 대단한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불가리아 제국과의 사투에서 마지막 쐐기를 박은 클레디온 전투에서는 말단 군인의 견해와 충고를 받아들였고, 그를 몹시 괴롭힌 군사 귀족들의 기반인 아나톨리아의 둔전병들에게도 여전히 급료를 지불하도록 노력하였으며 그들의 전투 역량이 적어도 예비군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주도면밀한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제국의 장래가 동방에서 공상적인 확장을 더 계속하는 것보다는[54], 아나톨리아 반도 밖으로 아르메니아- 북부 메소포타미아-중북부 레반트 축선을 형성하여 아나톨리아에 대한 버퍼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확장하는 대신, 남부 이탈리아에 집중하여 시칠리아를 정복, 중부 지중해와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에 있었던 것도 꿰뚫어보고 있었다.5.5.3. 후계자 지정 실패: 지방 군사귀족의 약화
하지만 바실리오스 2세의 정복사업은 시칠리아 정복을 눈 앞에 두고 미완으로 끝났으며, 적합한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궁극적으로 완성한 제국의 체제는 오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사후 제국은 수도에 자리잡은 명문 관료 귀족들과 원로원 등이 득세하며 그에 따른 지방 군사귀족의 약화로 국방력이 감소하였다. 이는 반란 빈도가 줄어든다는 점에선 큰 이점이었으나, 반란 전문인 아나톨리아의 토호들은 제국의 핵심적인 군사력 제공처였고, 이들의 세력의 약화는 곧 제국의 군사력의 약화를 뜻했다. 즉 황제나 제국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지방 군사귀족이 너무 강해도, 너무 약해도 문제였다.6. 후기 마케도니아 왕조 (1025 ~ 1056)
바실리오스 2세는 적합한 후계자를 지정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이어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남자인 콘스탄티노스 8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무기력한 치세를 보내다 1028년 사망했고, 이때부터 원로원의 권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후기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들은 모두 조이와의 결혼으로 정통성을 얻어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왕조를 창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 시기에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6.1. 로마노스 3세
콘스탄티노스 8세가 사망하자 원로원은 다음 황제로 원로원 의원이였던 로마노스 3세를 제위에 올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부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기에 군부는 로마노스 3세를 시기했다.1030년 로마노스 3세는 알레포의 아미르를 공격하기 위해 직접 출정했다가 대패했고( 아자즈 전투), 미하일 프셀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미르의 군대는 적이 제대로 대항하지도 않고 도망치는 걸 오히려 깜짝 놀라 지켜봤다고 한다(...). 이로써 바실리오스 2세가 죽은 지 5년 만에 제국군은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1034년 로마노스 3세는 목욕탕에서 의문사했다. 당시 남편인 로마노스 3세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조이 황후는 미하일이라는 파플라고니아 출신의 소작농에게 반해있었고, 파플라고니아 출신의 인물을 황제에 임명하면 파플라고니아 군벌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선 원로원과 조이 황후에 의해 미하일은 조이와 결혼하고 미하일 4세로서 황제로 즉위했다.
6.2. 파플라고니아 왕조
미하일 4세는 로마노스 3세의 실정으로 사기가 크게 떨어진 군대를 빠르게 복구하였고, 성실하게 제국을 통치하였다. 조이 황후가 로마노스 3세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배신할 것을 두려워한 미하일 4세는 조이를 규방에 가두었다. 1038년 미하일 4세는 원래 1026년 바실리오스 2세가 실행하려고 했던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했고, 상당한 지역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원정군 내부의 분열로 메시나 인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을 상실하고 만다. 1041년 미하일 4세는 사망했고, 젊은 나이에 죽었기에 자녀가 없어 조카인 미하일 5세가 제위에 올랐다.1042년, 미하일 5세는 파플라고니아 왕조를 공고히 하기위해 걸림돌이였던 조이를 유폐시켰다. 하지만 미하일 5세의 예상과는 다르게 마케도니아 왕조의 종말을 원하지 않았던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켰고, 유폐되었던 조이와 테오도라를 제위에 올렸다. 당황한 미하일 5세는 도주하여 수도자가 되었으나 시민들은 미하일 5세를 끌고왔고, 미하일 5세는 시력을 잃고 거세를 당했다. 그 후 얼마안가 미하일 5세는 사망하였다.
6.3. 콘스탄티노스 9세
미하일 5세가 폐위당한 후 조이는 원로원에서 유력한 가문이였던 모노마호스 가문의 인물인 콘스탄티노스 9세와 재혼하였고, 콘스탄티노스 9세는 황제에 즉위하였다. 콘스탄티노스 9세의 치세 대부분은 전쟁으로 점철되어있다. 제국은 1043 ~ 1046년에는 키예프 루스, 1047 ~ 1053년에는 페체네그족과 전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제국은 상당히 많은 국력을 소모해야만 했다.콘스탄티노스 9세는 1046년 파티마 왕조에 많은 선물을 보내고 동맹을 체결하였고, 동방 전선을 안정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기 셀주크 제국이 급부상하기 시작하였고, 카페트론 전투와 제1차 만지케르트 전투 등 아르메니아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다. 제국군은 셀주크군을 격퇴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튀르크 유목민들은 장기적으로 주둔하여 변경 지역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이에 셀주크 제국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인식하게된 콘스탄티노스 9세는 파티마 왕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였고, 당시 중동의 세 강대국이였던 동로마 제국, 파티마 왕조, 셀주크 제국이 균형을 이루는 구도를 만들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파티마 왕조와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긴 힘들었고, 1055년부터 1058년까지 시리아를 두고 양국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콘스탄티노스 9세는 시민과 원로원을 화합시키기 위해 원로원의 자격 제한을 크게 개방하고 공교육을 개선시켰다. 또한 잦은 전쟁으로 갈수록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파플라고니아와 카파도키아의 군부 인사들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6.3.1. 동서 교회 대분열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과 남부 이탈리아 등의 관할권 그리고 동로마 제국 소재 로마 교회에 대한 통제 등을 두고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급기야 1054년, 교황청 대사 일행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1세 케룰라리오스를 파문하고 케룰라리오스도 교황청 대사를 맞파문하면서 동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분열되었다.콘스탄티노스 9세는 당시 이미 지병인 관절염 등의 악화로 병석에 있던 상황이었지만 교황청 대사단을 불러들여 적절하게 대우하고 총대주교와 제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다르다는 점을 거듭 확인시켜주었다. 이런 정책하에서는 동서 대분열이 장기화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는 곧 사망해버렸으며 혼란에 휩싸인 동로마 제국은 교회 분열 문제를 후순위로 미루어두었다. 이 분열은 자연스럽게 장기화되어 서유럽권과 동로마 제국의 항시적인 논쟁거리가 되었고 멀게는 4차 십자군 사태까지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7. 11세기 말의 위기
1055년 콘스탄티노스 9세가 사망하고 테오도라가 즉위하였지만, 정책의 큰 틀은 변하지 않았고 군부 억제를 위해 군대 사령관들을 황제에 충성스러운 인물들로 교체하였다. 이것은 미하일 6세의 치세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1056년 테오도라는 사망하였고, 마케도니아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제국은 다시 급변하기 시작한다.7.1.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
콘스탄티노스 9세가 사망할쯤인 1050년대가 되면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원로원의 비호를 받는 데서 벗어나 직접 정치에 개입하길 원하기 시작했고, 후기 마케도니아 왕조 황제들이 만든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로원과 시민이 대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1056년 테오도라 사후 황제에 즉위한 미하일 6세는 콘스탄티노스 9세와 테오도라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콘스탄티노스 9세부터 미하일 6세에 이르기까지의 황제들은 군부를 신뢰하지 않았고, 견제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에 빡친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를 중심으로한 군부 세력들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원래부터 황제에 충성하는 자들로 구성되어있던 제국의 서부군과 아나톨리아 서부의 군단들은 황제에 충성하였고,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쿠데타는 난항에 부딪혔다. 반군은 페트로에(Petroe) 전투[55]에서 정부군을 격파하였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56] 하지만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는 다행히도 미하일 6세는 내전의 장기화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이사키오스에게 부황제의 자리와 차기 후계자를 약속했고,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는 대환영이었다. 하지만 수도 내부의 관료들은 미하일 6세를 지지하지 않았고, 그에게 퇴위를 권고했다. 미하일 6세는 결국 자진해서 퇴위하였고, 1057년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는 이사키오스 1세로서 제위에 올랐다.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는 동로마에 여러 가지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콘스탄티노스 9세 이래로 유지해왔던 안정적인 정치 구도가 붕괴되었다. 콘스탄티노스 9세가 원로원 개방 정책 등으로 시민 대중과 원로원의 공존을 통한 안정적 정치를 꾀했으나 그의 사후에는 시민과 원로원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점점 원로원 및 이에 기반한 관료 집단과 황제들의 정통성도 약화되어 갔다. 그 결과가 바로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였다. 이로 인해 멜리타니를 중심으로 견고하게 형성되어 있던 유프테라스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남이탈리아에서는 제국 내부의 정치 상황이 혼란한 틈을 타 1058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남이탈리아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면 바실리오스 2세가 비축해두었던 제국의 국고는 완전히 바닥났고, 이사키오스 1세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민간, 교회,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하였다. 또한 여러 이유로 주어지던 세제혜택을 철폐하였다. 당연히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을리 없었고, 콤니노스 가문을 위시한 파플라고니아 군벌의 위상은 급격히 하락하고 카파도키아 군벌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결국 1059년 이사키오스 1세는 퇴위하였고, 그의 쿠데타를 도왔던 동료 콘스탄티노스 10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7.2. 콘스탄티노스 10세
이사키오스 1세의 실패를 똑똑히 본 콘스탄티노스 10세는 과거 미하일 6세 시절로의 회귀를 시도했다. 원로원을 미하일 6세 시절로 원상복구시켰고 학문과 행정, 사법개혁에 진력하면서 시민과 원로원을 화해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파플라고니아 군부 세력은 1060년 정부 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곧 진압되었고, 이에 콘스탄티노스 10세는 군부를 통제, 견제하려는 정책을 계속해서 취하게된다.1063년, 1054년 이후 10년 동안이나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튀르크 유목민 부대가 방어군과 크게 충돌하여 궤멸되자, 한숨 돌리게된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재정난 해결을 위해 엄청난 군축을 감행하였다. 덕분에 제국의 재정은 콘스탄티노스 9세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1060년의 쿠데타로 동부군 군부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있던 콘스탄티노스 10세는 보급품과 급여 지급을 삭감했고, 튀르크 유목민 부대가 격퇴되자 완전히 안심해버렸다. 1064년, 셀주크 제국의 군대가 아르메니아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아르메니아 방어선을 박살내버린다. 셀주크군은 금방 돌아갔지만 튀르크 유목민들이 무너진 아르메니아 방어선을 넘어 수시로 노략질을 일삼았다.
콘스탄티노스 10세는 1058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제국이 혼란한 틈을 타 남이탈리아 대부분을 점령한 것에 대해서도 대응에 나섰다. 로베르 기스카르가 시칠리아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제국은 반격을 감행하여 1060~1061년 사이 바리, 타란토 등을 탈환하였다. 로베르 기스카르가 원정에서 돌아온후 전쟁은 계속되었고 1067~1068년에는 제국군이 브린디시와 타란토를 재차 탈환하며 제국의 반격이 이어졌다.
1067년 콘스탄티노스 10세는 군부의 제위계승 개입을 막기위해 아내 에브도키아가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한 뒤 사망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아들 미하일 7세와 아내 에브도키아가 그 뒤를 이었다.
7.3. 만치케르트 전투와 몰락
1067년 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론은 또 다시 급변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유목민들의 침공으로 유프테라스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유프라테스 방어선 중심 기지인 멜리티니는 포위당했고, 튀르크 유목민들은 아나톨리아의 중앙부인 이코니온 평원 일대까지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치세에 경외시 당하던 군인들의 입지가 급격히 늘어났다. 다만 이것은 콤니노스 가문을 위시한 파플라고니아 군부 세력이 아닌, 카파도키아 군인들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1068년, 에브도키아는 원로원 상원의 표결로 당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통보받았던 카파도키아 군부의 대표자 격인 로마노스 4세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협상으로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인정받은 에브도키아가 로마노스 4세와 재혼함으로써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했다.로마노스 4세는 두 차례 원정을 나갔으나 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셀주크 제국은 원래 제국의 세력권 아래에 있던 알레포 토후국과 마르완 왕조를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만들었고, 제국 동방의 외부 방벽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에 처음부터 그를 탐탁치 않아하던 원로원과 에브도키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로마노스 4세는 그의 입지가 위험해지자 대규모 원정을 결심하였다. 그 결과는...
1071년, 제국은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알프 아르슬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군사적 피해는 크진 않았으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암살되면서 제국의 고질병인 심각한 내분이 벌어졌으며 장군들은 내전을 위해 각자가 튀르크인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 대가로 요충지와 요새를 넘겼다. 국정의 총괄자인 황제가 사라지자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원로원은 로마노스 4세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미하일 7세를 다시 제위에 올렸다. 그런데 얼마안가 로마노스 4세가 석방되어 수도로 오고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로마노스 4세를 막기 위해 군대를 소모해야 했다. 1071년 부터 1081년까지의 10년 동안은 그야말로 대혼란의 시대였고, 각지의 군부 유력자들이 난립하여 군벌 시대가 펼쳐졌다.
미하일 7세는 동부 방어선의 구멍이 되어버린 카이사레아 인근의 통행로를 차단하기 위해 1072년과 1074년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 아직 남아있는 가용 병력을 총동원하여 원정을 나갔으나 실패했다. 이후 튀르크 유목민들은 아나톨리아 깊숙히까지 들어왔고, 중앙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거의 없었다. 결국 1080년까지 아나톨리아에 있는 거의 모든 제국의 영토가 튀르크인들에게 잠식되었고, 시노페, 트라페준타 등 흑해 연안의 일부 도시들만이 제국령으로 남아있었다.
한편 미하일 7세 정부는 물자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인상하였고, 이는 1074년의 이스트로스 강 일대 도시들의 반란을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의 방어선도 무너졌고, 1076년 페체네그족은 남하하여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약탈했다.
1076년이 되자 유통 경제가 전란으로 마비되면서 곡물 공급에도 애로사항이 닥쳐왔고, 이에 미하일 7세 정부는 1077년에로 공영 식량 창고라는 시설을 도입했다. 모든 식량 판매자들은 이 국영 시장에 식량을 판매하고 수수료를 지불했으며, 구입자들은 시장에서 수수료가 포함된 값으로 식량을 구입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상인들이 끼어들어 가격 장난질을 시작하자 1077년도의 공식 식량 가격이 1075년~ 1076년 대비 거의 50배 수준으로 폭등했다.
1077년에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절도사인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와 디라키움의 절도사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미하일 7세의 중앙 정부는 처절하게 버텨 수도 인근을 수비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더 이상 튀르크족이나 페체네그족을 막을 힘이 없었다. 1078년 3월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수도 건너편 해안에 도착하여 봉화로 도착을 알리자 곧 시민군은 반란을 일으켰고, 미하일 7세는 결국 제위를 포기하고 수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는 니키포로스 3세로서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후기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들이 만든 정치 체제는 최종적으로 붕괴되었다.
7.4. 쇠퇴의 원인
바실리오스 2세 이후 점차 동로마 제국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바실리오스 2세 사후부터 지방의 군사 귀족 세력과 중앙의 문민 관료 세력의 대립이 점차 치열해졌다. 사실 문민 관료 세력이라고는 하지만 중앙 세력도 예~전에는 아나톨리아의 군사 귀족이었긴 했다. 문제는 이들이 수도로 거점을 이동한지 오래라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과거 아나톨리아 내륙의 고원을 적극적으로 방위하던 때와는 달리 그럴 필요가 사라졌기 때문에 방위력 증강에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셈이다. 이들은 허약한 황제들을 조종해가며 중앙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고, 경쟁자들을 꺾기 위해 다른 군사 귀족들을 공공연하게 억눌렀다. 황제들은 이들의 대립을 조정하지 못한데다 귀족가문의 세력확장으로 자영농이 몰락하기 시작했으며[57], 무모한 건축과 늘어나는 튀르크와 페체네그족의 압력으로 국고의 소비가 커졌다. 특히 자영농 계층의 몰락과 귀족들의 토지겸병은 제국의 테마 제도(동로마식 둔전제)를 근본적으로 약화시켰다. 물론 제국이 공세로 돌아서면서 테마 제도 자체가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용병 및 타그마(중앙군) 비중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지역 방어 전술에 적합한 테마 제도의 몰락으로 병력 동원에도 제한이 오기 시작했다.8. 콤니노스 중흥
알렉시오스 1세 | 요안니스 2세 | 마누일 1세 |
마누일 대제 시기 동로마 제국 최대 강역.[58] |
이때 제국이 영구적으로 잃어버린 지역은 아나톨리아 내륙지방이었던 데 반해 인구와 부의 집중지대는 아나톨리아의 해안 지대였기 때문에 아나톨리아 내륙의 상실이 바로 제국의 몰락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최근 연구자들은 아나톨리아 내륙을 잃어버린 12세기 콤니노스 왕조 치하가 동로마 제국 경제력의 절정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후 콤니노스 왕조가 행운과 노력을 통해 바실리오스 시기 이상의 경제력과 70%에 달하는 영토를 확보하였고 십자군 국가들 위에 군림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제국을 위협하던 노르만 인을 용병을 투입하며 격퇴해 내었고 1차 십자군을 교묘히 이용하여 아나톨리아의 서부를 회복하였다. 또한 재정 개혁으로 1070 ~ 1080년대에 막장 상태였던 제국의 경제를 복구하였다. 요안니스 2세는 발칸을 넘보던 헝가리 왕국을 격파하였고 페체네그 족은 베로이아 전투에서 아주 소멸시켜 버렸으며 다니슈멘드 왕조를 패재시켰다. 뒤를 이은 마누일 대제는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 군을 대패시켰고 한때 남이탈리아를 회복하였으며 달마티아와 킬리키아를 정복하였다. 안티오크 공국이 제국이 복속되었다.
마누일 대제는 십자군의 보호자를 자처하였고, 그의 치세에 제국은 외교적으로도 큰 성과를 거두어 십자군 국가들과 헝가리 왕국 등은 제국의 보호국이 되어 제국에게 저자세를 취했고, 서방 세계는 동로마 제국을 기독교 세계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마누일 대제의 치세에 제국은 1054년 동서 교회 분열 이후로 교회 통합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이 시기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기독교 세계의 양대 강대국 이였다.
그러나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패배는 군사적으로는 큰 피해가 아니었음에도 외교적으로 큰 피해를 불러왔다. 서방 세계는 제국의 실력에 의심을 품게되었고, 제국의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이 소멸되었다. 또한 룸 술탄국과 십자군 국가들은 서서히 제국의 질서 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마누일 대제는 1180년까지 그러한 피해를 나름대로 잘 수습하였고, 영토 확장은 멈추었지만 경제력 만큼은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이후 최대 규모였고, 마누일 대제의 노력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튀르크는 아나톨리아 해안지대를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아나톨리아 내륙은 예로부터 군사 귀족의 근거지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황제권에 대드는 귀찮은 존재들이었지만 과거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맞서 제국을 지키던 이들이었다. 거기에 유목민족인 튀르크족들은 점령한 곳들을 초토화시켰다.[59] 잘 정비된 도로와 요새들은 대부분 흔적도 남지 않았고, 결국 단 몇십년 만에 아나톨리아 내륙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단기적으로는 물론 장기적으로도 아나톨리아 내륙의 상실은 제국에게 군사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가져왔다. 당장 군사적인 면만 보더라도 내륙부의 상실로 인해 과거에는 내륙부의 험준한 지형과 짧은 방어선의 도움을 받아 경제적으로 방어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제국은 부유한 아나톨리아 해안부를 방어하려면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많은 군대를 보유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므로 이 때부터 아나톨리아는 점점 심해지는 약탈로 제국의 중심부의 위치에서 서서히 밀려나게 되었으며, 유럽의 영토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8.1. 왜 아나톨리아를 수복하지 못했나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다시 획득하는 데에 크게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출발한 십자군은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선을 따라 성지로 가는 육로를 확보하였는데, 콤니노스 가문의 황제들은 귀족들의 세력 기반인 아나톨리아를 재탈환하기보다는 총대주교좌 도시이자 성지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진 안티오키아를 획득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었다.결국 동로마의 황제들은 마누일 1세를 제외하면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튀르크인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했고, 그들이 세력을 키우는 동안 몇 차례의 작은 원정 이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물론 콤니노스 왕조가 아나톨리아를 전적으로 방치한 건 아니었다. 당시 제국의 여력이 아나톨리아에 전력할 만큼 풍부하지도 않았고, 이미 아나톨리아는 완전히 튀르크인의 손에 넘어간 뒤였기에 수복했다 하더라도 모든 행정체계를 재건하고 유목민인 튀르크멘의 습격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선 요새화가 필수적인 정책이었는데 그게 워낙 돈과 인력이 많이 드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알렉시오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노르만족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고, 그 다음엔 페체네그와 싸웠으며, 그와 거의 동시에 키프로스의 반란자와 스미르니의 튀르크인 토후 차카와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그가 아나톨리아에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있었던 시기는 페체네그 전쟁이 끝난 1091년 이후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차카와 키프로스의 반란자와의 전쟁에 대부분의 시간과 자원을 빼앗겨버렸다. 애초에 알렉시오스 1세가 디라히온 전투에서 남아있던 대부분의 야전군을 상실한 이후에는 제대로 된 병력도 없었다. 먼 옛날 이라클리오스 이전의 고대 후기나 심지어 그 이전의 고대 로마까지 역사가 거슬러올라가는 수많은 부대가 이 즈음 10년 간격으로 1071년 만지케르트 혹은 1081년 디라히온 전투에서 전멸 혹은 전멸에 근사한 수준까지 분쇄되어서 역사가 끊어졌다.
그럼에도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니케아와 비티니아를 수복하기 위해 심복 타티키오스와 그나마 남아있는 병력을 동원해 미시아와 비티니아에서 어느 정도 세력을 재건했으며, 십자군 전쟁 이후에는 십자군과 황제 본인의 처남 요안니스 두카스 대공이 이끄는 제국 함대를 이용해 서부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수복하는 성과를 올렸다.[60]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아나톨리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건 이전과 마찬가지였지만 니케아, 아드라미티온, 니코미디아 등의 아나톨리아 해안가를 요새화하여 튀르크인의 대규모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으며 드디어 아나톨리아에 집중할 수 있게 된 1116년에는 수 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진군하여 필로멜리온에서 룸 술탄국의 주력군을 박살내고 부근의 로마인들을 구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콤니노스 가문의 황제들이 '부유한 아나톨리아 해안지역과 역사적 상징성이 큰 대도시 안티오키아의 탈환에만 집중하고, 군사적 요충지이지만 황제권에 도전하는 귀족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던 아나톨리아 내륙은 상대적으로 도외시한 건 맞다. 이 대목에서 주로 눈여겨 볼 것은 국정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어린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2세와 노련하고 정력적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안드로니코스 1세의 치세, 그리고 그런 황제가 있었다는 것도 잊기 쉬운 이사키오스 1세의 치세를 제외하면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한 1081년에서 마누일 1세가 사망한 1180년의 딱 100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가 바로 흔히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중흥기' 라고 불리는 콤니노스 3현제의 치세이다.
이 100년은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그리 편한 시기가 아니었으나, 그 점은 근본적인 전략적 실수에서 보면 커버해주기 어려워진다. 애초에 알렉시오스 1세의 치세 자체가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의 대패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 전체의 상실과 이로 인한 군사력의 총체적 붕괴, 그리고 화폐 가치가 1/10 이하로 떨어질 정도로 극심한 재정난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 페체네그족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 동방의 이슬람 제국이라는 3면 전선을 유지해야 했다지만, 이 점은 초유의 위기에 시달리던 7세기 제국도 더욱 더 크게 겪었던 어려운 점이었다. 당대의 동로마 제국이 군사력에서 여유 있는 시기는 아니었으나, 아나톨리아에 반독립적인 군사 귀족들을 재건하지 못할 정도 상황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국가 지출(특히 전비 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세수 확보에 필수적인 아나톨리아 해안지역의 탈환을 우선시 한 것 자체는 옳은 선택이었으나, 황가의 힘과 입장만을 우선시한 아나톨리아 내륙 탈환 의지는 애초부터 매우 실현되기 어려웠다. 콤니노스 황제들이 아나톨리아 수복 자체는 끊임없이 시도했으나 그것이 실패했던 건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산악 지역부터 수복했어야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콤니노스 왕조가 아나톨리아 내륙의 탈환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지만, 변명은 되지 못한다. 제국은 1차 십자군이 아나톨리아 내륙을 행군하면서 수복하고 반환한 이코니온, 티아나, 케사리아, 이라클리아 등의 도시를 유지할 여력조차 없었다지만, 발칸 반도에 일단 피신해 있던 옛 군사 귀족들의 거점을 회복하는 걸 알렉시오스 1세가 극력 꺼렸기에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스티븐 런치만 경의 'The History of Crusades' 에 물론 다음과 같은 참조할 내용은 있다. 침탈지의 기존 그리스계 기독교인 주민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첫째, 아직 제국령인 지역이나 튀르크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오지로의 피난. 둘째,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튀르크의 힘에 복종해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는 것. 셋째, 튀르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정체성을 유지하고 지역에 남는 것. 첫 번째 선택지와 두 번째 선택지를 택한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이는 아직 튀르크의 손에 있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지만, 이러한 과정은 한 번에 완료된 게 아니라 백 년 넘게 진행되었던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상술한 대로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 또한 놀고 있지 않고 꾸준히 자력으로 튀르크인들의 세력을 축소하거나 굴복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군사적 전제에 무리가 있었던 이상, 내륙 지역을 탈환한다고 해도 이슬람화, 튀르크화되어서 점점 튀르크에 동화되어가는 그 지역 주민들의 동요를 잠재우긴 대단히 어려웠다. 그 지역을 튀르크 유목민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며, 수십년 만에 그 지역에 행정 조직을 온전하게 재건하려면 결국 답은 예전처럼 제국에게 충성하는 반독립적인 군사 귀족들을 재건하거나, 그 자리에 십자군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으나 국내 안정을 우선시한 콤니노스 왕조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안이었다.
물론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이 무능하고 무관심하진 않았으며, 알렉시오스 1세의 외교 정책을 근본부터 반성한 마누일 1세는 상당한 성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제국의 역량을 보면 마누일 1세 뒤에 제대로 된 후계자들이 있었어도 아나톨리아 수복이 끝내 불가능했을 거란 가정은 무리한 가정이며, 콤니노스 왕조의 통치가 결국 제국의 튀르크에 대한 약세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필연이란 주장은 많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이 취한 군사 전략에 애초부터 적지 않은 무리가 있었던 건 사실이며, 이것이 아나톨리아 수복에 무시하지 못할 장애물이 된 건 부인할 수 없다.
9. 황혼
1190년대 유럽 판도[61] |
1180년 마누일 대제의 사망 이후 제국은 다시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마누일 대제의 후계자였던 알렉시오스 2세는 어렸고, 황위를 놓고 내분이 발생하였다. 알렉시오스 2세와 라틴인 섭정단을 쫓아내고 즉위한 안드로니코스 1세는 뛰어난 능력(?)으로 제국을 외교적으로 궁지로 몰아넣었고, 마누일 대제 시절의 친서방 정책을 모두 폐기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병크만 저질렀다.
이에 보다못한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앙겔로스 가문의 이사키오스 2세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콤니노스 왕조는 몰락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재위 초에는 시칠리아 왕국을 격파하고 마누일 대제 시절 외교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선정을 펼쳤지만, 얼마 안가서 그도 안드로니코스 1세와 별반 다를게 없는 인물이라는게 밝혀졌다. 이사키오스 2세는 3차 십자군을 비협조적으로 대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아이유브 왕조와 비밀협정을 체결하는등 서방인들을 분노하게할 조치들을 취했다. 이로 인해 서방 세계와의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또한 이사키오스 2세의 계속된 실정으로 약 200년 만에 불가리아가 제국에서 떨어져나갔고, 이사키오스 2세가 불가리아인들을 막기위하여 보낸 장군들은 죄다 반란을 일으켰다. 콤니노스 왕조 이후 제국의 중심 영토는 유럽이 되었기에, 불가리아가 제국에서 독립해나간 것은 제국에 큰 위협이 되었다.
이사키오스 2세의 실정을 보다못한 그의 형 알렉시오스 3세가 이사키오스 2세를 실명시키고 황위에 올랐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악화되어 있었다. 이 시기, 조금 더 넓게는 1180년 마누일 사후의 제국은 해군력의 약화로 에게 해에서 해적이 창궐했고, 제위 계승의 혼란상으로 지방 통제력이 붕괴하였다. 옛 콤니노스 왕가 소속인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62]라거나, 레온 스구로스 등을 필두로 지방 할거가 전면화되기 시작했다. 영어 위키백과에는 'Rebellions, secession, and autonomous magnates in the Byzantine Empire, 1182–1205'(동로마 제국에서의 반란, 분리독립, 독자행동하는 유력자들)라는 틀이 따로 만들어져 정리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래도 알렉시오스 3세는 당면한 제국의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제국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으나 앙겔로스 황족들은 권력을 탐해 서방 십자군을 로마 내정에 개입하도록 부르는 패착을 저지르고 만다.
9.1.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과 수도 상실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은 마누일 대제를 제외하면 십자군 세력들을 믿지 않고 그저 여러 야만인들 중 하나로 취급하는 외교 정책을 고수했으며 십자군도 이에 대한 대응으로 동로마 제국을 음험한 권모술수가들이라 생각하였다. 십자군이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병크와 만행을 생각하면 이게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순 없지만, 실리를 따져볼 때 이런 정책은 동로마 제국에게도 별로 득될 게 없었다.[63]
그나마 마누일 대제의 노력으로 동서방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지만, 안드로니코스 1세의 라틴인 대학살로 모든게 물거품이 되고만다. 상호 불신으로 인해 12세기 동서방의 관계는 최악으로 냉각되었고[64], 제2차 십자군 이후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세력이 통합되어 움직이기 시작하자 십자군 전쟁 또한 희망적인 예상과는 달리 완전히 엇나가기 시작하였다.
제4차 십자군(1202~1204)이 자금의 부족으로 곤경에 처하자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 십자군을 활용하여, 베네치아의 라이벌격인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사태가 매우 나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65]
한편 제국은 지방 통제력이 붕괴하면서 각 지방에서 지방 귀족들이 실권을 장악하여 지방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 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콤니노스 시대 콘스탄티노플 및 수도의 황실 일가로의 중앙집중화가 가속화되었던 탓에 그 반작용으로 각 지방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잠재되어 있었는데, 마누일 1세 사후 혼란상이 펼쳐지면서 이렇게 잠재되어 있던 반발이 크게 대두되었다. 유명한 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의 형인 미하일 호니아티스는 정확히 이 시기였던 1180년에서 1205년까지 오랫동안 아테네 대주교를 지내고 있었는데, 그리스와 에게 해 각 지역과 그 특산물들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모두 이미 콘스탄티노플로 흘러들어가고 있는데 무엇이 더 부족하냐면서 콘스탄티노플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고 한다. 나아가, 이 모두를 우리(us, our)로 함께 묶어서 지칭하는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you라고 타자화하며 콘스탄티노플 vs 나머지 지방의 대립구도가 표출되고 있는 점이 보인다.[66]
이런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알렉시오스 3세는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문제를 해결해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의 폐위로 위기에 몰린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자신을 황제로 옹립해주는 대신 십자군에게 보수로 많은 지원을 약속했다. 십자군은 이 제안에 솔깃했고, 알렉시오스 4세의 제위를 되찾아주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4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외세를 끌여들여 황제를 교체한 까닭에 민심도 좋지 못하여 반십자군 선동이 확산되자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에서는 민심을 잃은 알렉시오스 4세가 쫓겨나고 알렉시오스 5세로 교체되었지만, 금각만 지역의 성벽에 생긴 틈으로 십자군이 침입하였다. 원래 육상부의 3중 성벽에 비하면 해안의 성벽은 좀 낮았으며, 베네치아인들이 그 곳을 집중 공략했다. 게다가 정예병들은 모두 반대편으로 도망간 상황이었다. 난장판은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금각만 지역의 성벽에서도 내통자로 인해 성문이 열린 것이다! 결국 위엄 돋는 3중 성벽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이로인해 난공불락이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처구니 없다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사흘 동안 마음껏 약탈하면서 그 광기를 여실히 보여주었다.[67] 약탈이 끝난 후 십자군은 제국이 멸망한 자리에 로마니아 제국, 통칭 라틴 제국(1204 ~ 1261)을 세웠으며 에우보이아와 크레타 등 일부 지역은 십자군을 지원한 베네치아가 먹었다. 베네치아는 가장 큰 경제적 라이벌이었던 제국을 멸망시키고 동방과의 교역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하며 '아드리아 해의 여왕'으로 떠올랐다. 이로써 고대 로마에서부터 한번도 끊기지 않고 이어져내려오던 동로마 제국의 법통은 여기서 끊어졌다.
한편, 제국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십자군이 점령하지 않은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각지로 도주하여 니케아 제국과 트라페준타 제국, 에피로스 공국 등의 망명 국가를 세워 제국을 짓밟은 라틴인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9.2. 1261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결론부터 말하자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다시 되찾은 것은 아나톨리아 서부에 자리잡은 니케아 제국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중앙정부가 와해되어버린 이후, 귀족들은 옛날처럼 내전을 벌이지 않았으며, 세력이 상당히 있으면서도 전 황실이었던 콤네노스 및 앙겔로스 가문과 친인척으로 이어져 정통성을 어느 정도 갖춘 인물 및 가문을 중심으로 해서 각 근거지마다 새로운 나라들이 세워졌다. 서유럽식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라틴 제국의 영토와는 달리, 자신의 세력의 확실한 근거지에 자리잡은 각 망명국가들은 역설적이게도 각 지방을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니케아 제국의 라스카리스 가문 또한 아나톨리아 서부의 군벌로, 니케아를 주변으로 한 영토는 그들의 홈그라운드였다.처음에는 라틴 제국의 군대 앞에 각 지방의 분열된 제국들은 멸망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라틴 제국이 패배한 틈을 타 재빨리 세력을 확장하였다. 라스카리스 황제들은 아나톨리아를 튼튼한 경제 기반으로 삼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없는 제국을 건실한 국가로 재건하였다. 소농민들을 보호하는 정책 덕분에 도시의 성장과 상업적 농업의 발달이 이어졌다. 거기에 아나톨리아에서는 몽골의 침략기에는 룸 술탄국이 몸빵을 해주면서 비참하게 와해된 덕분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룸 술탄국 이외의 경쟁국들인 라틴 제국, 트라페준타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테살로니키 왕국, 불가리아 제2제국, 세르비아 왕국 등도 모두 외우내환으로 휘청거렸기 때문에 어부지리도 챙길 수 있었다. 단, 거듭되는 성공과는 별개로 니케아 제국은 옛 동로마 제국과는 제도의 근본부터가 달랐다. 니케아 제국은 명망높은 가문들의 집단지도체제에 가까웠는데, 엄격한 중앙집권체제인 옛 제도와는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지방분권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 니케아 제국의 군주들은 국방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서유럽의 봉건제도와 유사한 프로니아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후에 동로마 제국의 행정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이전에 입력이 되어있었지만 잘못된 정보이다. 프로니아 제도는 이미 니케아 제국 이전인 콤니노스 왕조 시절부터 서서히 정착되어 가고 있었으며 니케아 제국으로 내려오면 이미 테마군은 박살날대로 박살난 상황이었기에 프로니아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리고 세습이 제도화 된 것은 미하일 8세 시절인지라[68] 니케아 제국 시기에 프로니아와 봉건제도와의 유사성은 생각보다 없었다. 결정적으로 테오도로스 1세가 8천의 정예병을 키워내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것이 프로니아 제도임을 감안하면 프로니아 제도가 멸망할 뻔한 제국을 지켰으면 지켰지 제국을 약화시켰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69]
명군 요안니스 3세가 죽은 직후의 니케아 제국, 사실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하면 로마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
1254년에 즉위한 테오도로스 2세는 선임 황제들과는 다르게 이전까지 국가의 중역을 맡고 있었던 명망높은 대귀족들을 대놓고 적시하였다. 5년이라는 짧은 통치 동안 그는 과민하고 병적인 수준으로 명사들을 탄압했으며, 특히 장군들을 불신했다. 이에 니케아 제국의 결속은 단기간에 와해될 위기에 처하였다. 결국 1258년 황제가 급사한 이후 그 아들인 요안니스 4세가 제위에 오르나 곧 명망높은 장군이었던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창시자 미하일 8세가 소산드라 쿠데타로 섭정단을 제거하고 마치 350년 전쯤의 로마노스 1세처럼[70] 공동황제 형식으로 제위에 올랐다.
명목상으로는 테오도로스 2세의 일곱 살짜리 아들 요안니스 4세의 공동 황제였으나, 3년 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복되고 요안니스 4세는 실명된 후 유폐되었다. 한편 테오도로스 2세 사후 니케아 제국의 혼란을 틈타 세르비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양 시칠리아 왕국이 삼자동맹을 맺어 전면전에 들어갔으나, 미하일 8세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고 뒤이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했다. 이에는 운이 따라주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해 있던 라틴 제국 군대가 베네치아의 원정에 차출되어 잠시 떠나있던 참에 이를 포착한 정찰대가 수도를 점령했다.
9.3.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닌 제국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과 로마 재건 직후의 영토 |
1265년 제국의 영토. 외견상 이전의 동로마 제국을 그럭저럭 회복한 듯 보이나,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
특히 소산드라 쿠데타로 정통성 없이 즉위 한 뒤 라스카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요안니스 4세를 눈까지 뽑아 비참하게 유폐시킨 것에 대해 아르세니오스 분열이 일어났고 아나톨리아가 분노하면서 미하일 8세를 지지하지 않아 미하일 8세 입장에서는 더더욱 새로운 지지층 확보를 위해서라도 유럽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이 당시 즈음에 활동했던 사르디스의 안드로니코스 주교(Andronikos of Sardis)가 정작 우리가 아는 그 그리스는 발칸 반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칸 반도에서 아나톨리아로의 항해를 그리스(Hellas)로 귀환한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콘스탄티노플을 뺏긴 상태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 4차 십자군 계열의 정치체들, 동로마 계열이지만 지휘계통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여러 분국들이 난립해 있던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발칸 반도 대신, 아나톨리아 지역이 확실히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이다.[71]
이는 근본적으로 미하일 8세가 정통성 없이 소산드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것 때문이었는데 아나톨리아는 테오도로스 1세- 요안니스 3세를 거치며 라스카리스 왕조의 영향력이 강력한 곳이었고 이러한 아나톨리아의 세력들이 어린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으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한 미하일 8세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거기다 예산 마련을 위해 유대인들을 우대하는 행위나 동서교회 통합을 들먹이는 행위는 서구 세력에게 유대인 우대하면서 허세만 부리는 놈이라는 안좋은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카를루 1세가 이용한 명분 역시 이단을 징치한다였으니 서유럽에게 있어 미하일 8세 시기 동로마의 이미지는 징치해야 할 이단에 불과했던 것. 또한 저 들먹이고 있던 교회 통합은 종교계의 동의 없이 무작정 진행된지라 반감을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방식도 교황에게 무릎꿇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밝혀져 종교계뿐 아니라 전 대중에게 있어 반발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내부건 외부건 미하일 8세의 적을 더 늘릴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국력은 계속 빨아먹히는 악순환이 지속된 것이다.
요안니스 4세에게 했던 잔인한 행동은 결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와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미하일 8세가 제국을 재건한 이후 했던 행동들을 보면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짓들을 많이 했다. 당장 재정 악화만 보아도 군사 활동을 줄였으면 아나톨리아를 보전하여 충분히 극복 가능한 수준이었다. 중앙군도 전대 황제들 덕분에 충실했고 지역 방위를 위한 요새와 이를 지킬 수비군 역시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외교적 고립을 자처하여[72] 사방으로 적을 만들었고 나중엔 군사활동을 줄이고 싶어도 상황 자체가 악화되어 그러지를 못했다. 멀쩡한 방어선의 자원을 유럽 수복한다고 쪽 빨아냈으니 그게 무너지는 건 당연지사. 미하일 8세가 요안니스 4세의 신변을 보장하고 군사활동을 줄이고 내정에 치중하면서 제국의 국력을 키워갔다면 후일 제국의 처참한 몰락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종교계 건도 마찬가지였다. 미하일 8세가 조금만 신중하고 더 자존심을 굽혔다면 파문 사태는 막을 수 있었고[73], 통합건 역시 외교적인 이득을 위해 섣불리 진행하다 더 큰 손해만 봤다. 주교들이 당시에는 지역민들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뼈아픈 실책이었다. 얼마나 교회의 신망을 잃었는지, 사망 당시에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하고 일단 암매장했다가 나중에서야 이장할 정도였다.
그리고 미하일 8세의 이런 대책없는 정책들은 결국 재정 파탄으로 이어졌다. 미하일 8세 치하에서는 수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제국을 지키고 있었으나,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2세 치하의 제국은 이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군대를 대폭 축소했는데, 기록만 살펴봐도 1/5 이상으로 줄어들었으며, 해군은 아예 해체되고 제노바에 위임하였다. 덤으로 아나톨리아 지방의 상비군을 해체했다. 나중에 군사력이 지나치게 약해지고 베네치아나 카탈루냐 용병대에 제대로 데이면서 자신이 군사력을 지나치게 줄인 게 실수였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약해진 군사력을 복구하기 위한 노력을 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 무렵엔 중무장한 보병과 기병을 볼 수는 있었지만 계속되는 내전과 흑사병으로 제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군사력은 줄어들고 만다. 이런 짓은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는데, 라스카리스 왕조가 피땀으로 일궈놓은 아나톨리아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 속주가 다시금 중요해지면서 황제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아나톨리아 해안지대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미하일 8세도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서유럽의 진격을 완전히 돈좌시킨 이후에 뒤늦게나마 아나톨리아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뒤를 이은 안드로니코스 2세나 안드로니코스 3세도 아나톨리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아나톨리아 해안지대는 가장 방어하기 취약한 곳이었고, 옛 콤니노스 왕조 시기와 비슷하게도 룸 술탄국의 잔해 위에서 튀르크 부족들이 대거 침입하여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국방력이 와해된 제국으로서는 아나톨리아의 상실을 막을 수가 없었다.
9.4. 1299년, 오스만 베이국의 등장
니케아 제국의 세력 기반이었던 아나톨리아 지역에 새로이 자리잡은 소국가들은 주로 튀르크인들이 세운 나라들이었는데, 이중에 오스만이라는 장군이 세운 나라가 있었다.이 나라는 곧 이어 튀르크 세력을 규합하며 전 동로마의 아나톨리아를 침공, 점령하기 시작했고, 아나톨리아를 영구 상실한 동로마 제국은 여기저기 용병을 쓰면서 국방을 땜빵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아라곤의 내분에 휩싸여 본국에서 뛰쳐나온 카탈루냐인 용병부대를 고용했는데, 확실히 이들은 실력이 있어서[74], 그러나 이 당시의 제국은 이런 강력한 용병을 제어할 힘도 돈도 없었고, 당연히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국은 1년 예산을 짜는데 다른 나라에서 돈을 빌리거나 부유층에 돈을 구걸해야 했다. 러시아 대공이 보낸 성 소피아 대성당 수리금은 튀르크인 용병들을 고용하는데 쓰였다.[75] 남은 발칸반도에서도 불가리아 제국과 새롭게 등장한 세르비아 전제국이 세력을 확장하여 제국이 발뻗을 곳은 없어졌다.
9.5. 팔레올로고스 내전의 시작
안드로니코스 2세 치세인 1307년 |
이 와중에 삼대에 걸쳐 팔레올로고스 황실 내부에서 한 세기 가까이 내전이 계속되는데 후세 학자들은 이 내전을 두고 제국을 결정적으로 말아먹은 내전이라고 평가한다.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이름을 따서 ' 팔레올로고스 내전'(Palaiologan civil wars)라고 칭하는 이 일련의 내전들은 제국의 국력을 지속적으로 갉아먹었다. 첫 번째 내전은 1321년부터 1328년까지 이어졌으며, 안드로니코스 2세와 그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 사이에 일어났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동로마계 정권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을 합병하였으나, 아나톨리아에서는 오스만에 패해 필라델파에아를 제외한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던 모든 영토를 잃고 말았다. 다만 아나톨리아를 잃었어도 아카이아 공국이 항복을 타진하는 등 그리스 지역에서 확실히 성과를 내고 있었고 오스만도 마르마라 해를 넘지 못하고 있는 등 상황은 생각보다 썩 나쁘진 않았다. 즉, 이 상태만 유지해도 그리스 지역을 확보해 국력도 어느 정도 보충해서 다시금 아나톨리아를 되찾아볼 시도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제국은 다시금 내전에 휩싸이고 흑사병이 터지면서 그 기회를 살릴 수가 없게 된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사망 1년전 동로마 제국. |
9.6. 술탄의 봉신이 되다
오스만 베이국의 세력은 나날히 강성해져 미하일 8세의 후계자 안드로니코스 2세 시절인 1326년경 오스만 1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오르한 1세가 즉위하고 나서 곧바로 동로마 제국의 지방도시 부르사[76]를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1330년 아나톨리아 판도. |
1341년의 동로마 제국. |
1341년은 안드로니코스 3세라는 유능한 지도자가 급사한 해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동로마 부흥의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아직 오스만 베이국은 아나톨리아에서 보스포루스와 갈리폴리를 넘어오지 못하고 있었고, 아카이아 공국이 알아서 항복을 타진해 왔다. 그럼 아테네 공국도 자연스럽게 손에 들어올 수 밖에 없었으니 제국은 그리스를 석권하면서 국력을 보충해 아나톨리아를 재수복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섭정자리에 취임하자마자 세르비아-불가리아-사루한의 3면전선을 막아낸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아카이아 공국의 항복을 접수하러 수도를 떠난 동안, 태후-총대주교-해군원수가 힘을 합쳐 그의 뒤통수를 치고 칸타쿠지노스의 세력을 축출했다. 항상 공동제위에 오르라는 제의를 거절해온 칸타쿠지노스였지만, 가족이 해를 당하자 결국 군대의 추대를 받아 요안니스 6세로 즉위했다.
이후 1347년까지 내전이 지속되었다. 6년간의 내전동안 태후는 동로마 제관의 보석들을 저당잡히고, 칸타쿠지노스는 튀르크 베이국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등 막장스러운 상황이 펼쳐졌다. 결국 칸타쿠지노스가 승리하여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들인 요안니스 5세와 공동황제를 맡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이미 헝클어진 제국은 더 이상 반등할 기미를 보일 수 없었다.
1354년의 동로마 제국. |
설상가상으로 1354년 엄청난 지진이 갈리폴리를 강타했고, 이때를 틈 타 오스만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어 갈리폴리를 합병했다. 이것은 훗날 17세기까지 이어질 오스만 제국의 동유럽 정복의 첫걸음이었다. 요안니스 5세는 1354년 말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를 폐위시키고 단독 황제로 복위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내전으로 제국의 국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세르비아는 이 내전을 틈타 동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던 발칸 반도 서부의 영토를 차지했다.
1365년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상실한 동로마 제국. |
이후 오르한 1세의 아들 무라트 1세가 즉위하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도나우 강 유역을 잇는 중요 거점인 아드리아노폴리스(오늘날의 에디르네)를 점령하여 1365년에 수도로 삼고 오스만 베이국에서 오스만 술탄국이 된 시점에 이르면 제국은 오스만의 속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가 된다. 그나마 남아있던 모레아는 요안니스 6세의 가문이던 칸타쿠지노스 가문이 장악해서 사실상 독립국인 상태였다.
이렇게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한 후 요안니스 5세가 즉위했으나 무려 세 차례에 걸친 내전과 복위를 겪었으며 오스만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강성해지면서 제국을 압박했다. 설상가상으로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중세 흑사병까지 일어남으로써 제국의 힘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발병한 흑사병은 당시 수도 인구의 1/3을 죽게 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혔다.
1400년대에 이르면 오스만 술탄국은 티무르 제국의 공격을 받아 잠시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종래는 아나톨리아 지역을 장악하고 발칸반도의 슬라브 국가들과 동로마 제국도 거의 종속시켰다. 티무르 제국의 침공 직전 제국은 이미 그리스 영토도 펠로폰네소스 반도(모레아) 등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오스만 술탄국에게 빼앗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근방 지역만 남아, 사실상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나마 오스만이 티무르한테 쳐맞은 이후 오스만과 동로마 제국이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영토를 좀 돌려받긴 했는데 그래봤자 제국 영토는 테살로니키+모레아+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의 흑해 연안 도시 몇 개(바르나, 메셈브리아 등등) 정도에 불과했다. 제국의 황제는 오스만 술탄국 술탄의 봉신이었으며, 제위 계승도 술탄의 마음대로였고 술탄의 군사 원정에도 따라가기도 했다. 바예지트 1세의 사후 오스만에서 벌어진 왕위 계승권 분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속국 신세는 면했지만 이미 제국은 멸망을 눈앞에 둔 상태였다.
이제 거의 모든 영토를 잃고 인적, 물적 자원이 완전히 고갈된 동로마 제국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제국의 생명을 연장시킬 방법은 오스만의 계승분쟁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처절하게 몰락했음에도 노회한 외교력만은 남아있었던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왕자들의 계승 분쟁에 개입하면서 생명을 연장했다. 이는 그나마 가장 성공적인 방법이었는데, 예컨대 마누일 2세는 15세기 초에 시작된 오스만의 내전에 개입하여 오스만을 거의 붕괴시킬뻔하기도 했으며, 무라트 2세의 거듭된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외교적으로 물러가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편법을 가지고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일단 오스만 술탄국의 계승구도가 안정적으로 확보되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들은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가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것으로 유명한 메흐메트 2세 또한 살아남은 유일한 계승자였기에[77] 동로마 제국이 계승 분쟁에 개입하려고 했음에도 실패했다.
9.7. 서유럽에 지원을 구하다
1410년, 오스만 공위기 시기의 동로마 제국.[78] |
당시의 황제인 마누일 2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유럽 곳곳을 방문하며 지원을 요청하고, 동유럽 국가들 역시 나름대로 오스만 술탄국에 위협을 느끼고 십자군을 조직하여 공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1396년의 니코폴리스 십자군인데 여기서 서유럽 군대와 헝가리 군대가 각개격파당하며 실패로 끝나고 만다. 거기다 이런 도움을 받은 것 자체가 별로 없기도 했는데 황제는 유럽의 왕들에게서 지원을 약속만 받았을 뿐, 그 약속을 지키게 하지는 못했다.[79] 이렇게 동로마가 수작질을 부림에도 오스만 술탄국은 한동안 동로마 제국을 복속시킨 채로 두려고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3중성벽을 공략하기는 아직까지 무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9.8. 모레아의 짧은 중흥
갈수록 몰락해가는 중앙정부와 달리, 이제는 모레아로 불리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성공을 거듭했다. 모레아의 데스포티스들은 십자군 국가들의 잔해와 옛 경쟁 그리스 국가들을 차례로 격파했고, 마누일 2세는 코린토스 지협에 헥사밀리온 티호스 (Εξαμίλιον τείχος - 6마일짜리 장벽)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성벽을 지었다. 마누일 2세의 아들이며 후에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되는 데스포티스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는 20년간 현지를 지배하면서 1443년 남부 그리스 전역을 세력권에 넣었다. 당시 번영하던 모레아와 쇠락해 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었다. 당시 모레아의 수도 미스트라스 궁정에서 기거하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모레아를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비교해서 삶의 기쁨이 넘치는 곳이라고 평했다.그러나 모레아를 오스만 술탄국이 경계하게 되면서 무라트 2세가 대원정을 시작했다. 전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세력권에 넣은지 3년만인 1446년, 튀르크의 대군 아래 모레아가 자랑하던 헥사밀리온이 대파되었다. 사실 헥사밀리온은 소형 대포의 위력을 감당해낼 정도로 탄탄하지도 못했다. 곧이어 반도 전체가 황폐화되었으며, 수십만 명의 포로가 노예로 끌려갔다. 그리고 1449년, 폐허만 남은 모레아에서 데스포티스 콘스탄티노스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로 끌려가듯 즉위했다.
10. 최후의 순간
1453년 멸망 직전의 동로마 제국.[80] |
결국 요안니스 8세 치하에서 제국은 서구 십자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1439년 이루어진 피렌체 공의회를 통해 교회 통일령을 내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파격적인 개종은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여력을 교회 통합파와 반대파로 나누어져 반목하게 만들었고, 슬라브 국가들의 지지마저 잃어버렸다. 이전까지는 한결같이 제국에 지원을 아끼지 않던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마저도 이에 격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제국 제 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는 이미 1431년에 함락되었으며[81] 제국에게 남은 건 이제 모레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에게 해의 몇몇 섬들 뿐이었다. 그래도 이를 통해 바르나 십자군이라는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오스만에 패하며 제국은 살아날수조차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만다.
10.1.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요안니스 8세가 사망했고, 1449년에 동생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자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반드시 정복해야 한다고 결정짓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2개월간의 전투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 서유럽 출신의 선원과 상인들[82][83], 일부 기사들과 용병[84],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초라한 나머지 병사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 최후까지 성을 지켰다.
그래도 난공불락의 요새가 허명은 아니었는지 제법 잘 버텨갔지만 어이없게도 오스만군의 마지막 총공세 때, 성 안팎을 오고가며 유격전을 펼치던 동로마군이 피곤에 지쳐 문을 걸어 잠그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오스만군은 15만인데 반해, 동로마군은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남자의 수가 7천. 결국 오스만군이 인민 웨이브를 펼치자 휴식시간 없이 서너 시간을 연속으로 싸워야 했고, 결국 컨트롤 미스가 나온 것. 물론 쪽문 이야기는 거짓이라는 주장도 있다. 방위군 대장을 맡고 있던 제노바 출신의 용병대장인 주스티니아니가 부상으로 갑작스럽게 전열을 이탈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85] 게다가 결국은 인해전술로 정면을 뚫었다. 이 공세가 마지막이었다. #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난전 중에 전사했으며[86], 이후 사흘 간의 약탈로 제국이 쌓아올렸던 많은 문화재가 훼손되었다.[87], 그렇게 동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이로써 기원전부터 2,206년을 이어온 한때는 위대했던 왕국, 공화국, 제국이었던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10.2. 1479년, 제국의 마지막 잔재가 사라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뒤, 그리스 남부 지역에서 제국의 속령으로 남아있던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1460년 메흐메트 2세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당시 모레아는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동생들인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와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가 공동 통치를 하고 있었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88], 디미트리오스가 오스만 제국의 힘을 빌려 토마스를 제거하려 했던 것. 그리고 메흐메트는 이것을 명분으로 모레아 정복에 나섰고, 결국 토마스는 교황령으로 망명하고, 디미트리오스는 에디르네의 왕궁에 갇혀 그곳에서 죽었다.[89]
또한, 동로마 제국과 밀접한 연관을 가져 동로마 제국의 봉신을 자처했던 제노바 공화국의 가문인 가틸루시오 가문이 지배하고 있던 에게해 북동부의 섬들도 모두 점령했다.
그리스 전역을 세력권에 넣은 후 메흐메트 2세는 스스로를 '메가스 콤니노스(위대한 콤니노스)로 지칭한 트라페준타 제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트라페준타 황실은 조지아 왕과 다른 튀르크 부족들에게 구원을 청하고 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수백 년을 이어온 위대한 콤니노스 왕조는 1461년에 오스만에 항복한 후 그동안 저항한 대가로 일부는 처형당하고 일부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오스만 제국의 일개 백성이 되었으며, 그 외 나머지는 조지아 등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흔적을 남긴 사람은 없어, 왕조로서의 역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트라페준타가 망한뒤로도 제국의 잔재는 아직 남아있었다. 이 잔재의 정체는 크림 반도에 남아 있던 테오도로 공국이었고 이들은 제국이 망한 1453년부터 지속해서 오스만에 저항하고 있었다. 특히 트라페준타가 멸망하자 오랜 라이벌이던 카파의 제노바 식민지와 평화협정을 맺고 공동연대를 하기까지 하는 등 골칫거리로 남아있었다. 메흐메트 2세는 이들을 정복하기까지 트라페준타가 멸망한 뒤로부터 꼬박 14년을 매달려야 했고 마침내 1475년 테오도로 공국의 수도 도로스를 함락시키고 1479년에는 이탈리아계 귀족이 지배하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마저 멸망시킨다. 이로써 2,2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그 잔재마저 완벽히 사라지고 만다.
한편 교황령으로 망명했던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교황에게 형식적으로나마 황제로 대접받다가, 망명한 지 5년째 되던 해인 1465년에 로마에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아스가 뒤를 잇자 기다렸다는 듯 교황이 지원금을 줄여버렸고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로마 황제의 칭호를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돈이 부족했는지 죽기 직전에는 스페인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부부왕에게 다시 한 번 팔아넘기기까지 했고[90], 1502년에 로마에서 사망했다.
이때 안드레아스는 후손을 남기지 않았고[91], 황제의 칭호를 사들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들은 허울 뿐인 로마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아우구스투스 이래 1,500여년을 이어온 로마 황제위는 그렇게 명목상 계승권마저 흐지부지되며, 허무하게 소멸되었다.[92] 한때 지중해 전역을 호령했던 로물루스의 후예들이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반면, 토마스의 딸이자 안드레아스의 누이인 조이 팔레올로기나는 안드레아스와는 달리, 순탄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그녀가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로 개명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반 3세는 이 결혼을 계기로 차르를 자칭하고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칭했으며, 러시아가 차르국임을 선언하였다.[93][94] 이후 류리크 왕조는 1598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때까지 등장한 차르들이 모두 소피아의 직계 후손들이라 러시아에서는 로물루스의 후예들이 그나마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95]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변경백국을 지배하고 있던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분가[96]는 살아남아 약 백년을 더 이어갔다. 1530년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시오 4세가 만 13세로 요절하고 마지막 남성 구성원이자 보니파시오 4세의 숙부였던 조반니 조르조 팔레올로고가 1533년에 죽은 이후 부계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지만,[97]마지막 후계자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1510~1566)가 만토바 공작 페데리코 2세와의 결혼에서 자손을 남기는데 성공했다. 이쪽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단절된 본가와는 달리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그 족보를 정확히 추적할 수가 있는데, 그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동명이인)가 로렌 가문과의 결혼을 통해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조상[98]이 되었다. 그러므로 좀 뜬금 없지만 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약 800년 전 조상은 동로마 제국의 안드로니코스 2세가 되고, 또 2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알렉시오스 1세가 있다.
11. 관련 문서
[1]
단 스코드라-시르미움을 잇는 선 너머는
아드리아 해의 해안 일부를 제외하면 직할령으로 통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2]
테오도로스 1세는 제국의 망명 정부 중 하나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국을 재건하는
니케아 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주류 역사학계의 정설은 니케아 제국을 제국의 정통 정부로 간주하기에 이렇게 기재한다.
[3]
영어 위키백과
Proskynesis 등을 참조하면 좋다. 이후 가장 이르면 유스티니아누스 때 혹은 그 이후에 나오는, 발가락에 신하들이 입을 맞춘다느니 하는 궁정예법의 시초가 디오클레티아누스 때다.
[4]
까딱 잘못하면 서로마와 비슷한 운명이 될 수도 있었다. 루피누스,
가이나스,
아스파르 등 게르만-켈트계 장군·권신이 동로마에도 몇 있었지만 잠식되지 않았다.
[5]
그리고 그의 두번째 치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다 (476년)
[6]
니카의 반란.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때 도망치려 했는데 아내인
테오도라가 말려서 진압을 시도한다.
[7]
이 지역들의 탈환 역시 영토의 중요성과 인구, 세수 등을 감안해서 결정한 계획적인 확장이었다.
[8]
어떻게 보면 옛 본국, 그 중에서도 로마 시 바로 다음으로 핵심이었던 곳이(북이탈리아보다 남이탈리아가 이탈리아 내 소지역에 넘버링이 붙던 제정 초기 당시 넘버링이 앞섰던 점 등에서 더 중요하고 우대받았던 것으로 넉넉하게 판단할 수 있다.) 이런 용도로 전락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9]
대강 "우리 로마 제국은 로마 시와 이탈리아 땅에서 출발했기에 그곳은 옛 수도와 옛 본국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동방으로 와서 새 둥지를 틀었고, 그렇기에 그곳은 이제는 다른 일반 속주들보다야 의미가 깊지만 그냥 속주일 뿐이다.' 정도
[10]
즉 예전에는 서로마의 본국 내지는 중심지였다가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정복 이후로는 동로마의 한낱 지방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11]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yzantine Empire' 215쪽에 'Italy's integration into the empire did not imply reversion to the position of independence from the east which it had enjoyed before the advent of barbarian power, nor were its Roman inhabitants able to enjoy the positions of influence they had held under the Goths.'
[12]
즉 옛 로마인으로서 문화, 문명적 역량, 행정능력 등
소프트파워를 보유한 집단이라는 이점이 게르만 치하에서 있었기 때문에
보에티우스 같은 숙청과 불협화음도 있었지만 어쨌든 나름 적응하여 입지를 확보해서 살고 있었는데, 동로마도 로마인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대적인 이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이는 엄밀한 의미에선 틀린 것이다. 기껏 아는 게 원수정 로마까지고 그 이후 시기엔 요즘 넷상에서 말기 동로마 연구 붐이 분 탓에 역시 그 시기밖에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이 3~10세기에 걸친 그 중간 과정 및 다름아닌 기원전 2세기 이전 공화정 로마가 밟은 '그리스화'과정을 모르는 탓에 고대 로마적 전통이 곧 '라틴적 전통'인 거라고 잘못 알고, '그리스화'라면 무조건 로마 아닌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관념은 당대에도 없었다. 이는, 로마 제국이 영토가 크게 줄면서 옛 로마 제국 시절에는 같은 나라였던 서유럽과 독자적 역사발전을 하게 되다보니 서유럽과 동유럽 양측이 서로를 타자화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화'되면서 로마 아니게 되는 시기가 아니란 얘기다.
[14]
동로마의 행정체계의 수준이 높았던 만큼, 그 행정체계를 지탱하기 위한 세금도 높았다.
[15]
다만 1453년
오스만 술탄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무덤을 밀어서 사라졌다. 현재 알려진 무덤은 19세기 이탈리아 왕국에서 무덤이 있던 자리를 찾아 거기에 돌판을 새겨 표시한 것이다.
[16]
이 때부터 동로마인을 그리스인이라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17]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5p, 원문: 'the 'Romans' complain to Narses about his harsh rule, threatening that it would suit them better to serve the Goths than the Greeks.'
[18]
다만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경우 이슬람 세력과 치열한 밀고당기기를 하면서 1071년 노르만 인들에게 최후의 거점 바리(Bari)가 함락될 때까지는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바리가 함락된 이후에도 마누일 1세가 남이탈리아를 일시 회복하고 이탈리아 중부의 상업 도시인 앙코나(Ankona)를 돈으로 매수하는 등(저렇게 자금지원을 한 곳이 앙코나뿐이 아니어서, 마누일 시대는 재정수입도 많았지만 재정지출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1180년
마누일 1세 콤니노스 황제가 죽기 전까지 남이탈리아를 수복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19]
전임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다. 티베리우스 2세가 아들이 없어 그가 황제를 이어받았다. 국고가 부족했기에 강력한 긴축 정책을 펼쳤으나 이 때문에 민심을 잃게 된다.
[20]
제국이 얼마나 비틀거리고 있었는지를 제대로 보여줌과 함께 그동안 쌓아온 힘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던 게 확실히 보이는 부분. 또한 윗 각주의 현지
이탈리아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한 시선이 복합적으로 바뀌었다는 서술과 맥락이 통한다. 현지의 이탈리아인 전체가 로마 제국을 제대로 잘 따르고 지지/지원해 준다면 그렇게 뽕뽕 뚫린 지도는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21]
그러나 그래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는 건 현지 이탈리아인 중 일부는 랑고바르드의 지배도 거부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고학적으로는 현지에 이주한
동로마인들이 이탈리아화되거나, 반대로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로마 원로원 계급의 옛 후손들이 그리스화되면서 서로 융합되어가는 양상이 관찰된다. 당연히 이런 부류들은 이탈리아의 잔존한 제국 영토에 있던 부류였고, 가장 동로마 제국을 미워했을 동고트족 군인들은 거의 대부분
동로마군에 남아 랑고바르드와의 전쟁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적어도 이탈리아에 남은 동고트족 군인들은 랑고바르드보다는 동로마 제국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음엔 이견의 여지가 없다.
[22]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의 나르세스와 동명이인.
Narses (magister militum per Orientem) 중 'Besieged by Phocas' troops in the city of Edessa, Narses called for Khosrau to aid him and was rescued by the Persian forces. He attempted to salvage the situation with a diplomatic mission but was burned alive in Constantinople by Phocas' government after having been promised safety.'
[23]
아버지와 이름이 같다.
[24]
포카스를 붙잡았을 때 이라클리오스는 "그대가 바로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 라고 물었는데, 이에 포카스는 "그대가 나보다 더 잘 통치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했다. 이라클리오스가 이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잠깐 당황한 사이, 분개한 주변 군사들이 그의 목을 베고 몸을 마구 난도질했다. 죽은 포카스의 시체는 여러 조각으로 잘려 사냥개들에게 던져졌다고 한다.
[25]
페르시아 전쟁을 마치고 나서는 전쟁터에 한 번도 직접 나가 싸운 적은 없다. 시리아를 뺏기고 떠날 때 시리아에 대한 작별 인사를 남겼다고 하니, 콘스탄티노플 바깥에 아예 안 나갔던 것은 절대 아니지만, 시리아에 가서도 직접 싸웠던 것은 아니었다.
[26]
특히 이집트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싫다고
콥트 정교회를 중심으로 자진해서 이슬람에 항복해버렸다. 이들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교회를 가진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슬람에 의한
세계정복을 외치는 이슬람 세력이 이교도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고, 때문에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이 해군을 보내 알렉산드리아를 잠시 탈환했을 때 이들은 동로마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다만 그 이후에 이집트 등 합성론 교회 신자들이 아랍 해군에 대거 입대한 것을 보면 동로마군에 환영한 사람들은 소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27]
5세기 초중반의 훈 제국이 있지 않나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동서로마를 따로 보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도 있으며, 또한
유목 제국 특성상 실 국력 대비 전투력이 유난히 강했던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역으로 말하면 전투력 대비 실 국력은 형편없었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28]
이는 약 250년 정도 후
시메온 대제의
시메온 전쟁 때 반복된다.
[29]
수상무역·교통의 효율 및 속도가 육상보다 월등히 좋았기 때문에, 그 넓은 영역을 육로로만 가거나 육로 위주로 다니면 한 세월이었기도 해서, 로마가 지중해를 꽉 잡고 있던 7세기 이전 시대에는 지중해 해안가(+지중해로 흘러들면서 배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 있는 강 유역) 근처였는지 여부가 정체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지역 및 종족 정체성에 상관없이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고전적인(classical) 도시문화·귀족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지중해 접근이 어려웠던 내륙이나, 해안 지역이라도 이 당시에는 지중해보다 지정학적 의미가 훨씬 떨어졌던 대서양이나 북해에 면해 있고 지중해와는 멀었던 곳들은(노르망디, 브르타뉴, 갈리아(프랑스) 서해안, 스페인의 북해안(갈리시아, 칸타브리아) 등) 그저 배후지였고 이 지중해 네트워크에서 부차적 역할에 머물렀다. 거칠게 말해 제국은 배로 지중해 접근이 가능한 도시들 및 이들을 군사적으로 지키기 위한 내륙 군사 도시들과 그 배후지들의 묶음이라 할 수 있었다. 'Thersites the Historian' 유튜브의
Byzantine Dark Ages의 초반에 비슷한 논지의 내용이 나오며, 이 외에도 이 점을 적시하는 자료들은 더러 있다. 이는 당연히 지중해가 로마의 호수이며 지중해 해안에 로마를 위협할 만한 세력이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슬람 제국의 등장으로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30]
발칸 반도 대부분 지역의 상실로 이탈리아와 콘스탄티노플 간의 육로의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본국 혹은 본토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아나톨리아 지역도 콘스탄티노플과 육로로 이어져 있지 않지만,
보스포루스 해협의 폭이 좁은 곳은 700m인 곳도 있다고 하니 이탈리아와는 전혀 경우가 다르다.
[31]
영어 위키백과
Arab–Byzantine wars에는 이 시대 즉 중세 초기 이슬람 시대 전문가인 Hugh Kennedy의 저술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the frontier provinces, devastated by war, were a land of ruined cities and deserted villages where a scattered population looked to rocky castles or impenetrable mountains rather than the armies of the empire to provide a minimum of security"
[32]
예컨데 제국 서부였던 고대 이탈리아는 (5세기의 서로마 멸망기가 아니라) 비교적 단시간에 고트, 동로마, 랑고바르드로 주인이 계속 바뀌던 6세기 중·후반부에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을 달고 나온 서적이 있다. (
'Imperial Tragedy: From Constantine’s Empire to the Destruction of Roman Italy AD 363-568') 프랑스 사학자인 Bertrand Lançon 또한 저서
'Rome in Late Antiquity: AD 313-604'에서 이 고트 전쟁기가 로마 시에 있어서 고대 후기 중 가장 암흑기였다고 하였다.[99] 단적으로 포카스 재위기인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시기에 로마시의
원로원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이는 로마적 전통이 사실상 붕괴했음을 뜻한다.
[33]
6세기 전성기 때 제국 세수가 금화 500만~1000만 닢이었는데 8세기 말에는 세수가 160만 닢, 즉 많게 잡아도 200여 년 전의 3분의 1로 줄었을 정도였다.
[34]
인구만 해도 제국이 약화되었음을 잘 알수 있는데 775년의 동로마 제국 인구가 700만으로 최전성기인 2600만에 비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35]
이는 당시 이슬람 제국이 총력전으로 나가서 동원한 병력이었다. 반대로 보자면 이슬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36]
완전히 망한 건 아니고 왕손 한 명이 간신히 탈출해서
알안달루스에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워 할거하였다.
[37]
이 왕조교체 이후 얼마 안 있다가 이슬람 제국 기준으로 동쪽 끝의 중앙아시아에서
탈라스 전투가 일어났다.
[38]
게르만, 슬라브, 이슬람의 침입으로 제국 본토는
타우루스 산맥 이서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리스 해안가 일부의 영토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39]
다만 제국을 칭하는 것은 서방에선 오로지 로마 뿐이라는 개념은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칭하면서 깨지고, 그래서 나온 개념이 혁명제국이다. 다만 영국은 무굴 제국의 제위를 가져오긴 했으나 유럽에선 끝내 제국을 칭하지 않았다.
[40]
당시의 여황제였던 이리니는 여성이었을 뿐더러 여러 행보로 인해 국내외 반발 세력이 작지 않았고 교황 그레고리오 3세 또한 인정하지 않았다.
[41]
라틴어 'res publica'에서 영어 'republic'이 나왔고 그 일반적인 번역어가 '공화국'이기 때문에 편의상 공화국으로 썼지만, 이 '공화국'은 '군주가 없어야만 함'을 함의하는 근현대적인 용례가 아니다. res publica는 직역하면 공공의 것, 의역하면 '국가공동체' 쯤 된다. 분명히 더 깊은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국가'로 번역하면 state, country 등과 구분이 안 되고, 그렇다고 공공의 것이기 때문에 그냥 '공동체'로 번역하면 그 공동체의 종류에는 신앙공동체, 상인공동체 등도 있기 때문이다.
[42]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p, 원문: 'Between the sixth and eighth centuries, the Eastern Empire could still be called res publica or sancta res publica by western authors.'
[43]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p, 원문: 'Then, in the later eighth century, res publica was used for the sphere of political domination that the popes tried to carve out of former Byzantine possessions.'
[44]
콘스탄티노폴리스 기준 서쪽 끝인 남이탈리아가 (이집트, 시리아, 카르타고 등을 상실한 이후의) 동쪽 끝인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테마 등 아나톨리아 동부 내륙보다도 더 먼데도 1071년까지 이탈리아에 영토를 계속 유지했고,
콤니노스 왕조 시절에도 마누일 황제가 재진출을 시도했다.
[45]
배로만 가면
코린토스 운하가 한참 뒤인 1893년에야 완공된 관계로, 펠로폰네소스 남쪽 끝까지 내려가서 통째로 돌아야 하고, 불가리아를 완전히 병탄했었던 1018년~1185년을 제외하고는, 이탈리아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항구인 디라히온(디라키움)까지
테살로니카를 경유해서 거의 직선으로 뚫린 기존의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가 썩 안정적으로 확보되지 못했다.
[46]
아랍인과의 전비 마련이 주목적이었고, 거기에 옛 로마에 있던 모든 것이 천도와 함께 새 로마(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가야 한다는 먼 선대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빙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47]
'
Nikephoros Phokas the Elder'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10세기 중반 황제
니키포로스 2세의 친조부) 문서의 내용이다. '후대 11세기의 역사학자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에 의하면, 니키포로스는 (남이탈리아에 파견된) 동로마 병사들이 귀환하면서 현지
이탈리아인을 약취(carry off)해서 동방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관행(practice: 의역하면 '
악습')을 끝냄으로써 (남이탈리아) 현지 주민에 대한 학대(abuse)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이탈리아인들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회를 봉헌했다.' ('The 11th-century historian John Skylitzes furthermore reports that Nikephoros brought an end to abuse against the local population, by ending the practice of returning Byzantine soldiers carrying off local Italians to be sold off in the East as slaves. According to Skylitzes, the grateful Italians dedicated a church in his honour.') 악습을 끊었다는 것은 최소한 10세기에 이러한 일들이 빈번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48]
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구나 경제력은 증가하기 마련이므로, 이집트도 보유하지 못했던 이 당시의 동로마 제국이 395년 동로마 이상의 세력을 지닌 것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 예로 중세 이슬람 제국의 세수나 경제력은 지중해를 석권했던
고대 로마를 훨씬 상회했다.
[49]
이라클리오스(헤라클리우스)가 622년에 몸소 원정을 나가기 전 12년간 원정을 나가기 싫어서 안 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먼 지역은 어쩔 수 없이 내주더라도 가까운 지역은 최대한 지켰고, 군대를 건사하면서 훈련시켰으며, 또한 쿠데타로 제위에 오른 본인이 원정을 나가며 수도를 비워도 될 정도로 수도의 지도층들과의 유대를 쌓았고, 그 중에서도 제국 교회 측 및 그 대표자인 세르기우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특히 잘 신경써주였으며 그러면서 동시에 본인의 요구사항(교회의 재물을 전비로 내어줄 것)을 요청하여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각계 지도층과의 관계에 시간과 공을 들여야 국정협조를 잘 받고 원활하게 굴러가게 되는데 니키포로스는 이러한 정치적 수완이 부족하여 그 군공을 갖고도 인망을 쌓지 못하다가 급기야 조카에게 암살당했다.
[50]
이 곳은 점령하지는 못했다. 수도인 만큼 점령하려면 함단 왕조 자체를 멸망시켜야 하는데 그럴 정도의 국력은 없었다.
[51]
불가리아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였던
시메온 1세(재위: 893 ~ 927) 시절.
[52]
엄밀히 말해 당시 불가리아 제국에게 인정한 칭호는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바실레프스가 아니라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전의 완전한 로마 제국은 물론 이후의 동로마 제국에서도 앞서 언급한 3개의 황제 칭호보다 낮은 격의 칭호였다. 보통 공동 황제로 임명된 경우, 차기 황위계승자가 부제로 임명된 경우 카이사르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또한 불가리아 민족 한정 범위의 황제 칭호일뿐이지 로마 황제 칭호는 절대 넘보지 못하게 억제했다.
[53]
인구만 해도 700만에서 1200만으로 증가한다.
[54]
아르메니아 고원 일대를 영토로 편입하여 튀르크족의 서진을 경계하였으나 아직은 튀르크족에게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상태였고 시리아를 두고 전쟁을 벌인 파티마 왕조의 경우 파티마 측도 호되게 당했지만 제국도 파티마에게서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55]
니케아와 니코메디아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라고 한다.
[56]
비잔티움사를 전공으로 삼은 역사학자 지망생의 블로그인
#,
##에 따르면 양 측 모두 강군이여서 모두 피해가 컸고, 병력을 내전으로 차출해서 동부 전선에 빈틈이 뚫린 것과 함께, 내전 정리 후에는 다시 본연의 역할로 돌아갈 병력의 피해가 컸던 것이 뼈아팠던 탓에 10여 년 뒤인 만지케르트 전투 때까지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다고 한다.
[57]
정확히 바실리오스 2세가 경계했던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58]
킬리키아의 경우 주요 도시들에 총독 휘하 수비대를 배치하고 그외 지역은 현지 아르메니아계 루펜 왕가에게 맡기는 식으로 직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기타 동로마의 영역에 들어온
헝가리 왕국,
룸 술탄국,
예루살렘 왕국 등은 마누일 1세의 탁월한 외교감각으로 손에 넣은 곳들이다.
[59]
몽골이 초창기 세력을 확장할 때 점령지를 어떻게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60]
십자군이 니케아, 도릴레온, 이코니온 등의 주요 도시를 탈환해 제국에 반환한 것은 맞지만 스미르니,
에페소스 등의 이오니아 해안도시와 코마, 트랄리스와 같은 메안드로스 강 유역 수복은 오직 제국군만이 전담했다.
[61]
후대의 그리스인들은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메갈리 이데아의 이상으로 삼았다.
[62]
요안니스 2세의 아들의 딸의 아들이다.
[63]
동로마 제국에 대한 십자군의 이러한 인식은 어휘 차원에서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Byzantine'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권모술수를 쓴; 복잡한, 미로처럼 뒤얽힌, 헝클어진'이라는 형용사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속이 복잡하게 배배 꼬여 있는, 음험한 능구렁이 같은 놈들이라고 본 것.
[64]
그나마 안드로니코스 1세를 족치고 일어선 앙겔로스 왕조의 두 황제들이 외교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마누일 1세 시기의 외교 수준을 회복하기도 전에 4차 십자군이 터지고 만다.
[65]
십자군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렉시오스 1세 항목에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66]
Judith Herrin의 'Margins and Metropolis: Authority Across the Byzantine Empire' 중 24p, 'What do you lack? Not the wheat-bearing plains of Macedonia, Thrace and Thessaly, which are farmed by us; nor the wine of Ptelion, Chios and Rhodes, pressed by us; nor the fine garments woven by our Theban and Corinthian fingers, nor all our wealth, which flows, as many rivers flow into one sea, to the Queen City.'
[67]
그야말로 모든 곳이 털렸다. 정교회의 총본산 하기아 소피아부터 제국의 정궁 블라헤르네 궁전, 역대 황제들의 묘소인 성 사도 성당까지. 57년 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라틴인들의 손에서 탈환하나 라틴인들의 지배로 인해 입은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손실은 제국이 오스만에게 멸망하는 그 날까지도 복원하지 못했다.
[68]
다만 이 조치도 최초에는 프로니아의 계승자들이 군역을 질 경우나 군인의 유복자에게만 해당되었으며, 이후에도 제국에 충성하며 공직을 수행하는 대상에게만 허용되었다. 즉, 완전 세습이 아니다.
[69]
자세한건 여길 참조하자
[70]
단 로마노스는 당대에 출세한 소위
개룡남이었지만, 미하일은 이미 요안니스 4세와는 알렉시오스 3세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7촌 아저씨뻘의 친척으로 이미 귀족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71]
'Transformations of Romanness'의 120p, 원문 'In a letter to the metropolit of Sardeis Andronikos, he goes so far as to refer to a voyage from the Balkans to his realm in Asia Minor as a return to Hellas', evidently because western Asia Minor was the heart of Greek rule and culture in his time.'
[72]
또한 미하일은 전대 황제들에 비해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우대해 주고 많은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당시 주변 세계에서 굉장히 민감한 존재로, 너무 우대해주면 '유대인 국가'라며 비판당했고 그렇다고 너무 탄압하면 또 그걸 꼬투리 삼아 역시 비판당할 정도였다. 이러한 유대인 우대정책은 미하일의 외교적인 고립에 한 몫 했다.
[73]
당장 이에 대한 적합한 사례가 이미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의 갈등으로 인해 터진
카노사의 굴욕이다. 이때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받자 일단 교황에게 수그려서 파문을 철회한 뒤 다시금 명분과 힘을 모아 역으로 교황을 추방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완벽히 복수에 성공했다. 미하일 8세가 충분히 참고할만한 사례였음에도 미하일은 그 반대로 행동한 것이다.
[74]
이들은
투창을 주무기로 사용했는데, 실제로 투창은 갑옷에 대해 매우 효율적인 무기이며 동시에 기병돌격에도 상당한 저지력을 보여주는 무기다. 고대 로마군이 페르시아의 기병 돌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 지나치게 비싼 필룸 가격 때문에 이를 폐지하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도 있을 정도.
[75]
러시아 대공 측에서도 이에 대해 크게 뭐라고 안했는데 이는 성 소피아 대성당 수리금은 명분일 뿐이지 실질적으로 제국 자체에 대한 지원금이기 때문.
[76]
아시아 쪽 다르다넬스 해협 근처에 있다. 밑 지도의 'Prousa'
[77]
엄밀히 말하면 갓난아기였던 이복동생이 있었으나 아기였던 관계로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다음 순위의 계승자는 사촌인 오르한이었으나 그도 이미 망명해 있었다.
[78]
흑해연안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앙정부,
테살로니키,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동로마의 세력권이다.
[79]
이때 서유럽 국가들의 상황이 좋지 못했던 것도 한 몫을 하는데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백년 전쟁이 한창이었고 이베리아 국가들도 레콩키스타가 현재 진행형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은 여러 영주들의 연합체라 국력을 통합시키기 어려웠다. 그나마 베네치아와 제노바도 있었지만 이들은 돈은 많긴 했지만 태생이 도시국가라 근본적인 체급의 한계가 있어 많은 지원을 해주기가 어려웠다.
[80]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앙정부는
1453년
아테네 공국은 1458년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1460년
트라페준타 제국은 1461년
크림반도의 테오도로 공국은 1475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은 1479년에 멸망한다. [81] 동로마 제국은 테살로니키가 오스만의 공격을 받고 포위되자 베네치아에게 도시를 양도했으나 베네치아도 테살로니키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에게 사기 당했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82]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실상 서유럽 국가들의 자유항 상태가 되어 있었으며, 대표적인 상업국가였던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선원이나 상인들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도 거주할 정도로 '제 2의 고향'에 가까웠다. 참고로, 황제의 요청을 받고 성벽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까지 게양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방전에 임했던 베네치아 거류국과는 달리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는 끝까지 공식적으론 중립을 표명했다. [83] 이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베네치아인들은 튀르크 복장을 하고 오스만의 포위를 뚫고 정찰갔던 베네치아인들이 구원 함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그곳이 생지든 사지든, 그곳에 그리스인이 있든 튀르크인이 있든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라고 다수결을 통해 결정하고 회항했을 정도로 도시와 함께 뼈를 묻을 각오를 했다고 한다. [84] 여기에는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용병대도 포함된다. 로마 가톨릭과의 통합 조건이 서유럽의 지원이었던 만큼, 통합의 주체였던 로마 교황청은 나름대로 지원을 보냈다. [85] 주스티니아니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86]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를 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끔살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 1923~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 다만 동로마인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오스만 측과 서유럽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만 확인했다고. 이는 종교 문제 등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의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동로마를 까는 김에 황제까지 까자!' 는 심보였다는 것 [87] 그러나 하기아 소피아 성당 같은 유명 건축물의 상당수는 메흐메트 2세의 명령에 의해 보존되었고, 서적류 문화재는 고위 공직자들이 베네치아 공화국 등 서유럽으로 망명하면서 가져갔기에 일부는 보존되었다. 애당초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의 새로운 수도로 낙점되어 있던 터라 공공건물 등은 최대한 파괴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별개로 시민들은 메흐메트가 뒤늦게 멈추기 전까지 약탈, 강간, 학살을 당해야 했고 이 와중에 많은 유물들이 소실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 역시 완전 멀쩡하진 않았고 원래 성당에 있던 성화들이 죄다 회칠이 발라져 버렸다. [88] 토마스는 친서유럽에 반오스만적이었고, 디미트리오스는 서유럽 세력에 반감을 가진 한편 오스만에 호의적이었다. [89] 디미트리오스는 메흐메트의 봉신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망명하지 않았는데, 메흐메트는 정복이 끝난 모레아를 그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스만 제국의 직할령으로 선포했다. 당시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이 메흐메트에게 왜 디미트리오스를 공작에 앉히지 않느냐고 묻자,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어떤 나라를 주더라도 과분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90] 이때 샤를 8세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91] 다만 안드레아스 사후, 그의 사생아라 주장하는 인물들이 몇몇 나왔었다. [92] 다만, 토마스와 안드레아스가 교황령으로 망명한 이후 실제로 사용한 칭호는 로마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Imperator Constantinoplitanus)'였는데, 이는 멸망한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아직도 건재했던 서방 제국의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당당하게 로마 황제를 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드레아스로부터 칭호를 사들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들도 실질적인 이득은 없는데 신성 로마 제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불러올 리스크만 있는 로마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93] 교황은 이 혼인을 주선하면서, 아직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지 않은 정교회 국가들 중 가장 강력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을 회유하여 가톨릭 중심으로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이루려 했으나, 이반 3세가 차르를 칭하고 정교회 국가들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94] 그러나 명칭만 조금씩 달랐을 뿐이지, '제3의 로마' 를 칭한 나라는 이전에도 많았다. 먼저 세르비아 왕 슈테판 우로시 4세(슈테판 두샨, 1331~1355)는 1346년에 황제를 칭하면서 '세르비아와 로마니아의 황제'를 자칭하고 세르비아 제국을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려 했고,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1331~1371)도 불가리아의 수도 투르노보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 2세도, '카이세리 룸'. 즉 '로마 황제' 를 칭했다. [95]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이어졌다. [96] 이 쪽은 안드로니코스 2세의 4남인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로부터 시작된다. [97] 다만 조반니가 사생아 아들을 하나 남겨뒀고 그 사생아의 후계가 계속 이어져 2007년 조사 결과 팔레올로고오리운디라는 이름으로 1981년생, 1983년생 남자 후계자가 베네치아에 거주하고 있다는게 확인되었다. 2023년 기준으로 잡아도 이들 모두 40대 초반이라 한창 나이인 만큼 사고만 없었다면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98]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단절되는 합스부르크 본가와는 구분된다.
아테네 공국은 1458년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1460년
트라페준타 제국은 1461년
크림반도의 테오도로 공국은 1475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은 1479년에 멸망한다. [81] 동로마 제국은 테살로니키가 오스만의 공격을 받고 포위되자 베네치아에게 도시를 양도했으나 베네치아도 테살로니키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에게 사기 당했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82]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사실상 서유럽 국가들의 자유항 상태가 되어 있었으며, 대표적인 상업국가였던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선원이나 상인들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도 거주할 정도로 '제 2의 고향'에 가까웠다. 참고로, 황제의 요청을 받고 성벽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까지 게양했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방전에 임했던 베네치아 거류국과는 달리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구는 끝까지 공식적으론 중립을 표명했다. [83] 이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베네치아인들은 튀르크 복장을 하고 오스만의 포위를 뚫고 정찰갔던 베네치아인들이 구원 함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그곳이 생지든 사지든, 그곳에 그리스인이 있든 튀르크인이 있든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라고 다수결을 통해 결정하고 회항했을 정도로 도시와 함께 뼈를 묻을 각오를 했다고 한다. [84] 여기에는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용병대도 포함된다. 로마 가톨릭과의 통합 조건이 서유럽의 지원이었던 만큼, 통합의 주체였던 로마 교황청은 나름대로 지원을 보냈다. [85] 주스티니아니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86]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를 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끔살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 1923~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 다만 동로마인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오스만 측과 서유럽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만 확인했다고. 이는 종교 문제 등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의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동로마를 까는 김에 황제까지 까자!' 는 심보였다는 것 [87] 그러나 하기아 소피아 성당 같은 유명 건축물의 상당수는 메흐메트 2세의 명령에 의해 보존되었고, 서적류 문화재는 고위 공직자들이 베네치아 공화국 등 서유럽으로 망명하면서 가져갔기에 일부는 보존되었다. 애당초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의 새로운 수도로 낙점되어 있던 터라 공공건물 등은 최대한 파괴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만 별개로 시민들은 메흐메트가 뒤늦게 멈추기 전까지 약탈, 강간, 학살을 당해야 했고 이 와중에 많은 유물들이 소실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 역시 완전 멀쩡하진 않았고 원래 성당에 있던 성화들이 죄다 회칠이 발라져 버렸다. [88] 토마스는 친서유럽에 반오스만적이었고, 디미트리오스는 서유럽 세력에 반감을 가진 한편 오스만에 호의적이었다. [89] 디미트리오스는 메흐메트의 봉신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망명하지 않았는데, 메흐메트는 정복이 끝난 모레아를 그에게 돌려주지 않고 오스만 제국의 직할령으로 선포했다. 당시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이 메흐메트에게 왜 디미트리오스를 공작에 앉히지 않느냐고 묻자,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어떤 나라를 주더라도 과분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90] 이때 샤를 8세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91] 다만 안드레아스 사후, 그의 사생아라 주장하는 인물들이 몇몇 나왔었다. [92] 다만, 토마스와 안드레아스가 교황령으로 망명한 이후 실제로 사용한 칭호는 로마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Imperator Constantinoplitanus)'였는데, 이는 멸망한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아직도 건재했던 서방 제국의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당당하게 로마 황제를 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안드레아스로부터 칭호를 사들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들도 실질적인 이득은 없는데 신성 로마 제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불러올 리스크만 있는 로마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93] 교황은 이 혼인을 주선하면서, 아직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지 않은 정교회 국가들 중 가장 강력했던 모스크바 대공국을 회유하여 가톨릭 중심으로 동서 교회의 재통합을 이루려 했으나, 이반 3세가 차르를 칭하고 정교회 국가들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94] 그러나 명칭만 조금씩 달랐을 뿐이지, '제3의 로마' 를 칭한 나라는 이전에도 많았다. 먼저 세르비아 왕 슈테판 우로시 4세(슈테판 두샨, 1331~1355)는 1346년에 황제를 칭하면서 '세르비아와 로마니아의 황제'를 자칭하고 세르비아 제국을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려 했고,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1331~1371)도 불가리아의 수도 투르노보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트 2세도, '카이세리 룸'. 즉 '로마 황제' 를 칭했다. [95]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이어졌다. [96] 이 쪽은 안드로니코스 2세의 4남인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로부터 시작된다. [97] 다만 조반니가 사생아 아들을 하나 남겨뒀고 그 사생아의 후계가 계속 이어져 2007년 조사 결과 팔레올로고오리운디라는 이름으로 1981년생, 1983년생 남자 후계자가 베네치아에 거주하고 있다는게 확인되었다. 2023년 기준으로 잡아도 이들 모두 40대 초반이라 한창 나이인 만큼 사고만 없었다면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98]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단절되는 합스부르크 본가와는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