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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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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든 유럽인은 그리스인이다.
- 조지 고든 바이런, 유럽 각국을 향한 그리스 독립전쟁 지원 호소문에서
고대에는 유럽에서 가장 일찍 발전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을 바탕으로 에게 해에서 찬란한 문명과 강력한 제국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쇠퇴 끝에 결국 이탈리아 반도에서 강성해진 로마에게 멸망당했고 이후 오랜기간 동안 그리스인들은 피정복민[1]으로 살아야했다.[2]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서야 독립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요람으로 그리스에서 시작된 철학은 유럽의 철학, 예술, 수학, 과학 등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민주정 역시 그리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2. 고대 그리스

2.1. 에게 문명 ~ 고졸기 그리스

그리스 문명은 크게 거슬러 올라가면 BC 300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키클라데스 문화와 동시대 육지에서 성립된 펠라고스 문화로 올라갈 수 있다. 키클라데스 문화는 키클라데스 제도를 중심으로 매우 추상적인 인물상으로 상징되는 해양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문자가 없는 관계로 이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의 경우에도 아직 그 문자가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미노스 문명을 무너뜨린 것으로 여겨지는 미케네인들은 원시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의 역사시대는 초기 아카이아계 그리스부터가 시작인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배경이 바로 이 그리스다. 트로이 전쟁의 주체도 아카이아계 그리스인데 이 트로이 전쟁으로 인하여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북쪽에서 온 도리스인들을 막지 못해 대부분의 폴리스들이 멸망했다. 신화에 나오는 스파르타와 실제 스파르타는 달라서 스파르타는 도리아계에 정복된 것이다. 이 격변에서 유일하게 아테네만 살아남아 아카이아계 폴리스로 명맥을 유지한다.[3] 허나 최근의 선형문자 B 해석 결과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기 이전부터 이미 도리아인이 그리스에 들어와 아카이아인들과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미케네 문명이 도리아인 때문에 멸망했다기 보다는 도시들 간의 반목, 가뭄, 질병, 지진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4]

2.2.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대두로 델로스 동맹이 형성되고, 괜히 소아시아의 사르디스를 건드렸다가 페르시아에게 멸망할 뻔한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 델로스 동맹을 중심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해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해 최초이자 최후의 폴리스 연합작전이 이루어졌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에게해 일대에 자신들의 제국을 만든다. 하지만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의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 과정에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 페스트로 사망하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동맹에게 패한다. 아테네는 맹주 스파르타의 휘하에 들어가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귀족정을 세워버렸지만, 1년 만에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복귀하고 스파르타가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여기던 기존의 스파르타 동맹국( 테베, 코린트, 여기에 적국이었던 아르고스 포함)들과 힘을 합처 다시 들고 일어난다. 스파르타는 이들을 제압하나 그리스 전체를 휘어잡을 힘이 없었고, 테베의 사선밀집진형에 완전히 제압당하면서 몰락한다. 하지만 테베 또한 패권을 잡은 지 3년 만에 스파르타-아테네 연합군에게 패배한다. 이때 북쪽에서 바르바로이라 멸시당하던 마케도니아 왕국[5]이 그리스를 정복한다.

2.3. 헬레니즘 시대

이후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끌던 마케도니아를 따라서 헬레니즘의 원류가 된다. 알렉산드로스 제국 디아도코이 전쟁으로 분열하여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나뉘었다. 이때부터 로마의 이집트 정복까지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그 뒤로 본토는 마케도니아에 속하게 되었고,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의 그리스화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이 시대에 안티키테라 기계가 나타났다.[6] 기계공학계에서 최고의 천재로 손꼽히는 헤론이 증기기관( 헤론의 공)을 발명했지만 경제성이 부족하여 폐기되었다. 이밖에 헤론은 증기로 여는 자동 문[7]과 최초의 성수 자동 제작기구까지 만들었다.이후 헬레니즘 세계는 서방을 제패하고 동부로 진출한 로마에 의하여 차례차례 모두 병합된다.

3. 고대 후기~중세: 로마 시대

3.1. 고대 로마

피드나 전투의 패배로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는 포로로 잡히고 왕국은 멸망했다. 이후 폼페이우스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를, 옥타비아누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그리스 세계는 전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리스 민족의 첫 암흑기로, 불과 두어 세기 전만 해도 세계를 제패했다고 자처하던 그리스인들이 신진세력 로마의 노예로 전락한 것이었다.

한때 마케도니아가 지배하던 그리스 본토의 문화와 학문은 여전히 선진적이었지만, 전략적으로는 그다지 중요한 땅은 아니었다. 본토보다는 오히려 그리스화한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기독교 발흥 이후에는 유대인들 이외에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리스인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기독교와 그리스는 연관성이 크다. 한 예로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 요한묵시록>은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었을때 그 곳에서 쓴 책이라고 전해진다.

3.2. 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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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로마 제국의 동서 분할 이후라고 불리는 시기 이후에 그리스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이자 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세에 들어와서는 로마 문화 안에서 민족 구분이란 것 자체가 사라지고 모두가 로마인이 되었다.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소아시아는 고대부터 그리스화가 이루어진 지역이었음에도 이 시기에는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은 희박했다.[8] 이때의 그리스인들은 외부 세력이 자신들을 '그리스인(엘리니스)'이라고 부르면 굉장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정도로[9]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신민인 ' 로마인(로메이)'이라는 사실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져서,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수백 년이 지나서 독립할 때까지도 자신들을 '로마인(로메이)'라고 불렀다.[10] 이 당시 동로마는 세르비아의 전통적인 상징물인 드라코가 군기로 사용되고 페르시아 양식이 군대에 있으며 인명에 아르메니아어에서 온 인명도 주요하게 쓰였던 등[11] 동로마의 권역에 있던 모든 문화를 합쳤다. 후대에 다시 갈라진 이후에도 동로마 문화권은 유지되었다. 제국의 공식 언어도 그렇고 이전부터 그리스를 포함한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에 그리스 문화가 퍼져 제국 동방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다.

한편, 동로마라는 국가 대신 현대 그리스에 해당되는 지역에 집중하면, 7세기 슬라브족의 이동에서 8세기 말~9세기 초 콘스탄티노스 6세~ 니키포로스 1세까지, 불가리아 제1제국 시메온 대제의 침공으로 인한 910-20년대 로마노스 1세~960년대 니키포로스 2세까지는 그리스의 상당 부분 지역이 제국 밖에 있었다. 물론 해안가 도시 등 알짜배기 지역들은 거의 동로마의 관할에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아래의 지도는 시메온의 정복에서 얼마 전이었던 900년경 에게 해 일대의 지도이다.

파일:1920px-Byzantine_Greece_ca_900_AD.svg.png

동로마 제국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기독교 세계의 주요 국가였다. 정치-군사적으로는 이슬람 세계의 공세를 막아내는 최전방의 역할을 했으며, 문화적으로는 정교회의 총본산인 동시에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잔재를 계승-발전시켰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재정 적자와 중앙권력의 약화, 유럽-아시아 양면 전선의 유지, 불가리아, 마자르, 페체네그, 킵차크, 셀주크 제국 등 각종 유목민 세력들의 침입 등에 시달리다가 제4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의 라틴 제국에게 수도를 함락당해 한 차례 멸망했다. 이후 니케아, 트레비존드, 이피로스 등의 그리스계 계승 국가들이 창건되었고, 이 중 니케아가 1261년 십자군들의 봉건 국가인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다. 그러나 라틴 제국으로부터 제위를 수복한 후, 한때 제국의 확고한 기반이었던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는 수많은 영주들과 토착 세력, 침입자들이 뒤엉켜 혼란상을 빚어냈고, 여기에 자체 내분까지 겹치는 바람에 이후의 제국은 아나톨리아 서부와 발칸 반도 동부 일부를 지배하는 소국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보편 제국으로서의 특성도 약해져서 제국 말기에 이르면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멸망 직전에는 테살로니키마저 빼앗겨서, 한때는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회복했었었던 대제국이 마지막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시 자체와 모레아의 일부밖에 없었다.

결국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어 동로마가 멸망해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후 1460년 모레아, 1461년 트레비존드가 차례차례 떨어지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고 있던 일부 영토[12]를 제외하곤 그리스계 인구 전체가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마저도 오스만 제국이 팽창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그리스 내 영토를 대거 상실하여 그리스가 독립하는 그날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는 지역은 이오니아 제도밖에 없게 된다. 이 시기였던 1453년에 그리스 지역의 인구는 1,000,000명 정도였고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한 수십만 명의 인구를 제외하면 모두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다.

4. 근세: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약 450년에 달한 오스만 제국(현 튀르키예)의 통치 시기. 이 시기를 그리스에서는 투르코크라티아(Τουρκοκρατία; 튀르키예 통치)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나 대만일치시기 등의 용어와 비슷한 뉘앙스.

기독교도 봉건 영주에게 착취당하던 발칸 지역의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세금을 덜 내게 해 주는 이교도 지배자를 환영하기도 했고, 그리스인들이 제국의 행정과 지방 통치의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권력를 누리기도 했다. 유럽의 다른 기독교 국가들을 상대하기 위해 무슬림 오스만 지배자들이 그리스인들을 쓰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정교도들이 변변한 예배장소를 찾지 못해 무슬림들의 눈치를 보기도 했고, 오스만 지배자들이 민족 감정을 일으키는 그리스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이슬람을 국교로 삼고 장려했던 오스만 제국도 이교도들을 강제로 개종시키지는 않고 원래 믿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오스만은 종교에 따라 제국의 사람들을 분류한 뒤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밀레트(Millet)라는 공동체로 묶어 각 밀레트마다 다르게 통치하였는데 정교회 신자들은 '룸 밀레트(millet-i Rûm)'로 분류하였고[13] 오스만 당국은 이 룸 밀레트의 관리를 그리스인들에게 맡겼다. 따라서 그리스 정교회는 그리스인뿐만 아닌 다른 정교회를 믿는 민족들까지 책임지고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훗날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다른 민족들이 그리스어를 버리고 각자 민족어를 사용하게 된 것도 이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현재 발칸 반도의 복잡한 민족 갈등 문제가 오스만 지배 체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반대로 그리스인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들 역시 오스만에 의해 폐위, 처형, 감금, 신체 절단 등의 형벌을 많이 당했다.

그러나 명목상 군주의 명령를 받아 권력을 누리는 유력자들이 상황 변화나 지배자들의 변덕에 따라 처지가 민감하게 변하는 것이 흔한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스인 권력자들의 불안한 지위가 특별히 그리스인 전체에 대한 민족적 탄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튀르크 혈통의 정통 귀족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게는 여러 모로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물론 지배층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무슬림이 되어야 했으며, 기독교도는 딤미(Dhimmi)로써 무슬림에 비해 법적으로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이것은 분명한 차별 대우이지만, 기독교도들이 무슬림에 비해 특별히 훨씬 가혹한 탄압이나 착취를 받지는 않았다.[14] 훗날 그리스인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인/기독교도라서가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제국의 신민은 오스만 술탄의 지배에 순순히 복종하면 편애 없이 다른 신민들과(터키인이든, 알바니아인이든, 그리스인이든 간에 상관없이)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알렉시스 조르바스는 터키인 사부로부터 산두리(악기 이름)를 배웠으며, 터키어 노래도 서슴치 않고 부른다. 또한 18세기 그리스를 방문한 유럽인에게 터키인들은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무슬림입니다."[15]라고 할 정도로 두 민족은 완전히 섞여 있었다. 부활절 튀르키예인들이 그리스인 마을에 놀러가고, 라마단이 끝나고 3일간 계속되는 축제기간에 그리스인들이 튀르키예인 마을에 놀러갈 정도로 이들은 큰 갈등 없이 지냈다. 이러던 것이 공화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등의 이념이 확산되면서 이민족 군주인 오스만 술탄의 지배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됨으로써 갈등이 급격화되고 독립 의식이 고취되었다. 발칸 민족들 간의 갈등 역시 그리스-불가리아인들의 경우처럼 오스만 지배 이전부터 있었던 갈등이 오스만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가, 근대 이후 민족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발현되었다.

17세기 이후 서방국가와의 외교교섭 등에 그리스인들이 많이 필요해지면서 오스만 제정은 기독교도인 그리스인들을 무역 담당자나 관료로 대거 기용했다. 이 때문에 ' 파나리오테스'라는 이름의 관료집단이 형성되었다. 이스탄불의 '페네르'[16] 지역에 주로 거주한 상인계층을 따서 이런 별칭이 붙었는데,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인구의 약 2/5는 그리스인이었으며 오스만이 멸망하고 신생 튀르키예가 세워졌을 때에도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그리스 독립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등의 활동도 하였으나 불가리아, 세르비아인들과는 반목했다.

어쨌든 결론내리자면 이는 오스만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민족적 거대제국들 모두에 해당되는 사안이지만 지역적 시기적으로 케바케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5. 근대

5.1. 그리스 내셔널리즘의 발흥

그리스인의 독립시도는 굉장히 자주 있었다. 17세기에는 철학자이자 수도자인 디오니시오스(Διονύσιος ο Φιλόσοφος)가 이끄는 독립군이 펠로폰네소스 일대에서 일시적으로 흥하다가 진압된적도 있고, 18세기에는 이오아니나를 본거지로 한 알리 파샤(알바니아계다)가 휘하의 그리스인들을 이끌고 독립을 꿈꾸며 봉기했다가 진압되었다.[17] 1768년~17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러시아 해군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인들이 오를로프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1814년 파나리오테스 가문들과 오데사의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친우회(Φιλική Εταιρεία)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그리스인의 독립 계획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이후 일어난 내셔널리즘은 그리스인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면서도 유일하게 오스만의 지배를 받지 않던 이오니아 제도를 시작으로 그리스에도 일어났으며, 그리스인들은 선전물을 통해 차츰 민족의식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도 이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결국 그리스어 교육의 금지와 역사교육의 금지, 인쇄물에 대한 검열강화로 맞섰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정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소위 비밀학교(το κρυφο σχολειο)를 통해 그리스인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쳤다.

5.2. 그리스 독립 전쟁 그리스 제1공화국

이후, 독립 비밀결사인 헤타이리아 필리케의 주도로 1821년 그리스 각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어나, 그리스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1월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가 독립 선언을 했다. 독립군은 크게 펠로폰네소스를 중심으로 한 군대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북쪽에서 남하하는 군대으로 구성되었으며,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Θεόδωρος Κολοκοτρώνης)가 지휘한 독립군은 펠로폰네소스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일전일퇴를 거듭하였다.

독립군의 패배가 눈앞에 다가오자 채권 소유자들은 돈을 잃을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채권 소유자의 이해는 나라의 이해였기에 영국은 국제 함대를 조직했고, 1827년 이 함대는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주력인 소함대를 침몰시켰다. 여러 세기에 걸친 복종을 딛고 1829년 그리스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는 엄청난 과 함께 왔고 독립된 그리스는 이를 갚을 방법이 없었다. 그리스의 경제는 향후 수십 년간 영국 등 채권국들에게 저당 잡힌 신세였다.

5.3. 그리스 왕국

그러나 독립 열강들이 거저 시켜준 게 아니었다. 우선 독립에 성공한 지역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티키 지방, 키클라데스 제도 뿐이었으며 많은 항구 이용권을 넘겨줬고, 독립 이후 강대국들의 임시 신탁 통치로 3년 동안 지배받다가 1833년 바이에른 왕국 왕가 비텔스바흐 가문의 오토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왕자가 겨우 18살 나이에 오톤(Όθων)이란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타국에 의해 왕위에 올려진 오톤은 시작부터 그리스 국민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오톤이 애초에 그리스인이 아니었던 것도 한 원인이지만,[18], 그렇다면 자신이 그리스인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왕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텐데 그러기는 커녕 거기에 완전히 배치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특히 정교회가 민족 정체성 중 하나인 그리스에서 끝까지 개종을 거부하고 가톨릭을 고수한다던지, 그리스어를 전혀 하지 못해 통역을 통해서야 이야기가 가능하다던지, 그리스인들을 대표한다고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오랜 갈등 끝에 오톤은 정교회 신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양보를 해야했으나, 그 뒤로도 많은 갈등을 일으켜 왕당파 공화파 세력의 갈등은 오랫동안 그리스를 어지럽혔다. 거기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던 오톤은 유달리 ' 동로마 제국 고토의 회복( 메갈리 이데아)'[19]를 표방하며 크레타 섬과 과거 동로마 영토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크림 전쟁 당시 영국, 프랑스와 손잡고 러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오스만 제국을 치려다가 분노한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그리스 여러 곳이 점령되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휴전과 함께 양국에 막대한 배상금과 여러 굴욕적인 조건을 들어줘야 했고, 이후에도 국민들과 지속적인 갈등을 겪다가 1862년 혁명으로 인해 폐위되어 본국인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차기 국왕을 두고 여러 갈등 끝에 이번에는 덴마크 왕가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크리스티안 빌헬름 페르디난드 아돌프 게오르크 공이 겨우 17살 나이에 요르요스 1세(Γεώργιος Αʹ)라는 새로운 왕으로 제위하게 된다. 이 또한 영국·프랑스·러시아에 의한 강압적인 조치였기에 그리스는 그냥 외국인 왕족을 왕으로 받아들여야 했다.[20] 덴마크 출신 귀족 빌헬름 카를 에핑엔 스포네크(Wilhelm Carl Eppingen Sponneck) 백작이 왕이 어린 탓에 섭정으로 와서 그리스를 지배했으며 이번에는 개신교 종파 중 하나인 루터교회 골수 신도인 스포네크의 강압 정책으로 정교회와 또다른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요르요스 1세가 결혼하면서 후계자인 콘스탄디노스 1세를 얻고 스포네크를 추방하면서 안정을 되찾게 된다. 우선 요르요스 1세는 정교회를 믿었으며 입헌 정책으로 그리스계의 입지를 많이 생각해주는 정책을 취하여 비로소 사람들의 믿음을 얻게된다.

1897년 당시 오스만 제국 지배에 있던 크레타 섬에서 그리스계 크레타인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곧이어 봉기군을 지원하는 그리스와 봉기를 진압하는 오스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유럽의 환자라고는 하지만 그리스보다 훨씬 큰 덩칫값은 하고 있었던 오스만에게 그리스는 패배했고 그리스는 막대한 배상금을 오스만 제국에 물어주며 일부 국경을 오스만에게 유리하게 수정하여야 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군 지휘관이던 티몰레온 바소스(Τιμολέων Βάσσος, 1836~1929) 장군은 패배에 대한 책임으로 군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남은 삶을 지내야 했다. 열강들은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그리스를 비난하고 이 패배로 오스만 제국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그리스에 주둔하며 주둔비용을 그리스에 전가했다. 그런데 정작 전쟁의 원인이었던 크레타는 열강이 크레타에서 오스만군을 철수시키고 명목상 오스만 지배 아래의 자치국가 크레타 자치국[21]을 세우면서 그리스의 외교적 승리로 끝이 났다.

요르요스 1세 치세에서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독립하면서 마케도니아 지배권을 두고 그리스와 불가리아, 세르비아, 오스만이 각자 자국 편입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단체를 동원해 마케도니아에서 전쟁 아닌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끝내 오스만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세르비아,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2번의 발칸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제1차 발칸 전쟁은 오스만과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연합군이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전쟁을 벌여 연합군이 이겼다. 그러나 영토 보상 등의 여러 문제로 불만을 가진 불가리아가 반발해 갈등을 빚다가 다시 전쟁을 벌였다.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적대했던 오스만 제국까지 이들과 연합해 1913년 6월, 제2차 발칸 전쟁을 벌여 불가리아가 이들에게 많은 영토를 잃고 항복해야 했다. 그리스는 테살로니키를 포함한 남부 마케도니아, 이피로스, 에게 해 제도[22] 등 그리스계가 거주하는 유럽의 영토 중 대부분을 확보하였다. 그리스는 원래 차지하고 있는 영토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인구가 많지는 않았다가 이 시기에 상당한 인구를 확보해 1913년에는 5,400,000명으로 늘어났다.

6. 현대

6.1. 1차 대전 튀르키예와의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가 친독 정책을 취하다가 협상국에 가담할 것을 주장하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와 갈등을 빚어 나라가 아예 왕당파 베니젤로스파로 분열되는 국론 분열(Εθνικός Διχασμός)이 일어났고 베니젤로스를 지지하던 협상국의 강압으로 콘스탄디노스가 퇴위하여 둘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해 협상국 편에서 참전했다. 동맹국 편이었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콘스탄디누폴리를 제외한 동부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스미르나( 이즈미르) 지역을 빼앗았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 독일 제국과 손잡은 불가리아로부터도 서트라키아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그러나 쫓겨난 왕 콘스탄디노스 1세, 국왕 알렉산드로스, 큰아들 요르요스가 갈등을 빚을 때 1920년 국왕 알렉산드로스가 원숭이에게 물린 상처가 덧나 죽는 일이 벌어졌다. 암살이란 주장으로 정밀한 조사가 이뤄졌으나 조사 결과는 자연스러운 패혈증이었다. 결국 다시 콘스탄디노스 1세가 재위했고 그는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의 실현이라는 명목으로 1920년 스미르나를 넘어서 아나톨리아 내륙으로 쳐들어갔다가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튀르키예 혁명군에게 참패하고 아나톨리아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이즈미르 지역을 다시 오스만에게 넘겨주고 트라키아도 겨우 12% 남짓을 빼고 불가리아와 오스만에게 모조리 넘겨줘야 했다.여론이 폭발해 국왕은 비난 속에 퇴위하여 큰아들 요르요스 2세가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 당시 그리스가 트라브존 등 여러 곳에서 학살[23]을 벌이기도 했고 1923년 체결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조치에 따라 튀르키예 땅에 살던 150만이 넘는 그리스인들은 추방당해서 그리스로 와야 했는데 또 이들이 그리스 안에서 골치가 되어서 그리스인이지만 오랫동안 튀르키예에 살았고 말투와 여러 가지가 낯설었기에 차별을 받았다. 나중에 이들 상당수가 반정부 세력을 형성하여 그리스 내전에 끼어들었다.

6.2. 그리스 제2공화국 그리스국

튀르키예 독립 전쟁 이후 그리스에는 1924년부터 1935년까지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자유당 등 공화국 체제를 옹호하는 정당들 못지 않게 인민당 등 왕당파 정당들의 영향력도 막강했으며, 군부 쿠데타 시도도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나서 정치적 혼란이 끊이질 않았는데,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 그리스 경제에도 치명타를 먹인 끝에, 1935년 장성 출신 정치인 요르요스 콘딜리스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가 재집권하여 왕정복고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막상 왕정복고를 하고 총선을 치러보니 제2공화국을 강력히 지지하던 자유당 등이 왕당파에 맞먹을 세력을 확보하여 정부 구성이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1936년 국왕 요르요스 2세가 직권으로 임명한 장성 출신 총리 이오아니스 메탁사스(Ιωάννης Μεταξάς)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시킴으로써 권위주의적 독재정부(8월 4일 체제)를 수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이탈리아군 침공을 물리치고 이탈리아가 지배하던 알바니아까지 역습하면서 영토 확장을 시도했으나, 메탁사스 사후에 이탈리아의 지원 요청을 받은 나치 독일 불가리아까지 억지로 참전시키며 개입한 끝에 그리스 국토 전체가 추축국에게 점령되었다. 1941년 그리스는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에게 삼분할되고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점령한 지역은 그리스국의 영역이 되었다. 국왕 요르요스 2세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했고, 우익 왕당파, 중도파, 공화파, 사회주의 좌파 등 다양한 정파들이 추축국에 맞서 레지스탕스를 조직하고 유격전을 벌였는데, 그 중에서 그리스 공산당 계열 파르티잔인 그리스 인민해방전선의 조직력이 가장 막강했다.

1943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미국, 영국 등 서방 연합국에 항복하여 그리스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전황은 그리스 레지스탕스에게 유리해졌는데, 1944년에 이르러서는 가장 조직력이 강했던 그리스 인민해방전선 게릴라들이 북부 그리스를 장악했으며 그리스국은 붕괴되었다.

전후에는 카이로의 왕실 망명정부를 지지하는 왕당파와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주장하는 공산당 사이의 충돌로 그리스 내전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국왕 요르요스 2세는 조국이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지 못하고 카이로에 계속 머물다가 내전이 진행 중이던 1946년에 실시된 국민투표[24]에서 왕정복고가 가결되면서 가까스로 귀국할 수 있었는데, 귀국 1년만인 1947년에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여 동생 파블로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내전 초기에는 공산당이 승기를 잡는 듯 했으나, 공산 진영의 확대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개입하여, 결국 1949년에 내전은 왕당파가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는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도 인구가 계속 빠르게 증가했으며, 도데카니사 제도[25]를 반환받아 현재 영토를 확정지은 1947년에는 인구가 7,600,000명이 되었다.

6.3. 그리스 왕국의 부활과 군사정권

내전 종식 이후에는 군소정당이 난립하다가 1951년부터 육군 원수 출신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총리가 창당한 반공 우익 정당인 그리스 집회[26] 일당 우위제를 구축했고,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총리의 주도하에 국민급진연합[27]으로 당명을 변경한 이후에도 장기 집권을 이어가다가, 1963년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중도 좌파 세력을 결집한 포괄정당인 중도연합[28]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1964년 파블로스 국왕이 사망하자, 선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계승한 콘스탄티노스 2세가 노골적으로 우익을 옹호하며 파판드레우 내각을 불신임했고, 이는 잦은 내각 교체로 인한 정치 혼란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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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Γεώργιος Παπαδόπουλος)
국왕이 이러한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여 치러진 1967년 총선에서 중도연합을 필두로 한 중도 및 좌파 세력의 승리가 예상되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을 주축으로 한 극우 군부가 4월 21일 쿠데타를 일으켜 총선을 무기한 연기하고 군사독재를 시작했다.

파파도풀로스는 콘스탄티노스 콜리아스라는 민간인 총리를 잠시 바지사장으로 옹립했다가 본인이 총리직에 올랐는데, 콘스탄티노스 2세는 취임 선서식에 참석함으로써 이 쿠데타에 적법성을 부여했으나, 군부는 중도 및 좌파 정당들은 물론이고 국민급진연합을 비롯한 기존 우익 정당들마저 금지하며 권력을 독점하려 했다.

콘스탄디노스 2세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같은 해 12월 테살로니키에서 왕당파 군부 역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결국 이탈리아 로마 망명했는데, 1973년까지 군부는 명목상으로나마 그를 왕으로 받들며 왕 없는 왕국을 통치했다.

그리스 군사정권은 1967년부터 1974년까지 ' 대령들의 정권'이라는 군사독재를 했는데 당시 미국 닉슨 행정부는 여전히 반공 성향인 군사 독재 정부를 뒤에서 지원했다.

군사정권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그리스인들은 군사 쿠데타에 조직적 반발을 하지 않았다. 파판드레우 전 총리는 가택에 연금되어 1968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자택에 감금되어야 했다. 군사 쿠데타 정권은 반대파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며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민심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적 정책을 폈는데 대표적인 것이 농가 부채의 상당액을 탕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1973년 1차 석유 파동이 발생하자 군사 정권이 내세우던 경제 성장에 타격을 입고 포퓰리즘 정책을 위해 필요했던 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도입도 더 이상 불가능해져 위기감을 느낀 군부는 군주정을 아예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내세우며 안정을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경제 상황 악화와 함께 미국과 유럽을 강타하던 청년들의 반전운동과 반기득권 투쟁인 68 혁명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반독재 투쟁에 나섰다. 1973년 11월 아테네 국립기술대학에서 수천명의 대학생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반독재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군부는 학생 시위에 대해 탱크까지 동원하며 강경진압을 했는데 11월 17일 아테네 국립기술대학에 진입하면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총을 발포하여 최대 5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11월 25일 파파도풀로스의 심복이었던 비밀경찰 장관 디미트리오스 이오아니디스(Δημήτριος Ιωαννίδης)가 쿠데타로 그를 축출하나 군부 독재라는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독재를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군인들이 국외에서 벌인 사건 때문이었다. 1974년 7월 새로운 군사 정권은 명분을 위해 키프로스 전쟁에 개입했지만 튀르키예가 개입하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아무런 소득이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키프로스 전쟁은 군사독재의 존속에 큰 타격을 줬고, 결국 1967년 4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7년 만인 1974년 7월 24일에 정권이 붕괴하면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6.4. 민주화 이후: 그리스 제3공화국

군사정권이 붕괴된 직후 군부 왕정 시대의 총리였던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에게 정권을 이양했고, 카라만리스 과도내각은 군사정권에서 이루어진 개헌을 무효화했다. 이에 따라 군사정권 이전 헌법에 따라 왕정을 유지할지, 아니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이행할지를 묻는 왕정복고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그러나 1946년과는 달리 그리스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왕정에 대한 신뢰를 거둬버렸고,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가 귀국도 허락받지 못한 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7:3으로 왕정 폐지가 다수를 점해 그리스는 공화국이 되었는데, 콘스탄티노스 2세는 왕정복고를 포기하고 2013년이 되어서야 그리스로 영구귀국할 수 있었다.[29]

1974년 민주화 직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카라만리스 총리는 구 국민급진연합 출신 인사들을 결집하여 신민주당을 창당하고,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전 총리[30]가 이끌던 중도연합 출신 인사들은 요르요스 마브로스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중도연합-새로운 힘[31]을 창당했는데,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의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중도연합-새로운 힘에 참여하지 않고 선명한 사회주의 좌파 노선을 내세운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 그리스 사회당)을 창당하여 선거에 참여했다. 또한 내전 당시에 불법화되었던 그리스 공산당이 재합법화되어 다른 극좌 정당들과 함께 연합좌파[32]라는 정당연합을 구성하여 참여했는데, 카라만리스가 왕정 시절에 반공 우익 내각을 이끌며 공산당을 탄압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놀라운 행보였다. 그렇게 치러진 총선에서 카라만리스의 신민주당은 300석 가운데 220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며 집권했고, 중도연합-새로운 힘이 60석을 얻어 제1야당이 되었으며, 사회당과 연합좌파는 각각 12석과 8석을 얻으며 군소정당에 머물렀다.

카라만리스의 신민주당 내각 의회 임기를 1년 남겨둔 1977년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하는 승부수를 띄웠고, 과반 의석을 유지하며 정권 연장에 성공했으나, 기존 의석(220석) 가운데 49석을 상실하여 171석 확보에 그쳤고, 중도연합-새로운 힘을 계승한 제1야당인 민주중도연합[33]이 기존 의석(60석) 가운데 44석을 잃은 반면,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사회당은 기존 의석(12석)보다 무려 81석이나 많은 93석을 확보하며 민주중도연합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약진함으로써 사실상 최대 승자가 되었다.

또한 석유 파동의 여파로 인해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신민주당 내각의 지지율이 점차 떨어져나갔고, 결국 1981년 총선에서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Ανδρέας Παπανδρέου)가 이끄는 사회당이 172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며 집권에 성공했다. 초기에 NATO 탈퇴[34] 미군 기지 철수, 복지확충 등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1980년대 후반에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이혼한데다가 크레타 은행 비리로 측근들과 각료들이 구속되면서 인기가 떨어졌고 이와중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가 이끄는 신민주당이 재집권을 노리고 선거제도 개편으로 두차례에 걸쳐 추가로 선거를 벌여 1990년 총선에서 가까스로 과반을 확보해 집권했다.

다시 집권한 신민주당 정권은 민영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지만 인기없는 민영화 정책과 교육정책을 펼친 덕택에 지지율이 떨어져 1993년 총선에서 사회당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경제정책은 1993년에 재집권한 사회당 정권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기는 했다. 사회당 정권에서는 아테네 올림픽의 개최를 다시 이끌어내고 경제자유화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며 2001년에 유로존에 가입하는 업적을 세우면서 도합 11년을 집권하였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비용이 말썽이 되어서 2004년 초에 치러진 총선(아테네 올림픽 개최 이전)에서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조카 코스타스 카라만리스가 이끄는 신민주당이 재집권하는데 성공했다.

신민주당 정권은 자산가격 상승과 관광산업 호황을 바탕으로 매년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해나갔지만 2007년 산불사태로 그리스 경제는 큰 손실을 입었다. 신민당은 2007년 총선에서 재집권에 간신히 성공을 거두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 호황의 혜택을 받지못하고 저임금 문제[35]와 고실업 문제[36]에 시달렸다. 결국 2008년에 이르러서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위기에 몰렸는데, 이에 항의하며 일어난 시위 과정에서 과잉진압으로 한 소년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 및 폭동을 벌이면서 신민주당 정권은 궁지에 몰렸고 조기총선이 치러져 사회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이후 신민당 정권 때 재정적자를 대규모로 은폐했다는 게 드러났다. 그리스의 부채규모는 급속하게 불어났고 결국 버티지 못해 IMF에게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아들 요르요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사회당 내각은 신민주당 내각에 실망한 민심과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야심차게 출범했지만, 경제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고, 결국 2011년에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치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치러진 2012년 5월 총선에서 사회당은 과반 의석을 상실하고 41석만 건지는 대참패를 당했는데, 안도니스 사마라스의 신민주당이 승리하는 것은 예상 범위 내였지만, 그렉시트 긴축 반대를 모토로 내세운 알렉시스 치프라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가 사회당을 제치고 원내2당으로 약진하는 이변을 일으켜 그리스는 물론이고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으며, 연정 협상에서 어느 당도 내각을 구성하지 못해서 같은 해 6월에 재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신민주당과 시리자의 양자대결로 치러진 2012년 6월 총선은 신민주당의 승리로 끝났고, 사마라스는 사회당과 민주좌파당을 끌어들여 연립내각을 구성했으나, 3년만에 연정이 붕괴되어 2015년에 조기총선을 치르게 되었다.

2015년 1월 총선에서는 시리자가 승리하여 치프라스 내각이 출범했는데, 시리자는 유럽연합과 긴축을 놓고 갈등을 빚다가, 긴축 수용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해당 투표에 승리하긴 했으나 분당 사태가 일어나 같은 해 9월에 조기총선을 실시했다.

2015년 9월 총선에 승리한 치프라스는 유럽 연합을 비롯한 채권단과 협상하여 긴축을 수용하고 그렉시트를 포기했으며, 이후의 시리자는 친유럽주의 노선으로 선회하여 급진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중도좌파 정당이 되었는데, 2018년에 이르러 IMF 및 EU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경제정책과는 별도로 마케도니아 명칭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2019년에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국호를 변경한다는 타협안을 이끌어내며 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이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계승자는 오직 그리스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 국민들이 치프라스 내각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고, 구제금융이 종료되었음에도 여전히 나아졌다는 체감이 들지 않는 경제 상황도 치프라스 내각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2019년 조기총선에서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 전 총리의 아들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가 이끄는 신민주당이 시리자를 꺾고 재집권에 성공했으며, 2023년에는 라리사 열차 충돌 사고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차례의 총선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연장했다.

[1] 사실 로마 때 기록도 술라가 이끈 아테네와 피레아스 전투, 코린토스 전투, 테살로니키 학살 등을 보면 상당히 살벌하다. 그리스인들도 당시에는 야만적인 면이 있었던 로마인들이나 이민족 야만인 통치자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을 정도였다. [2] 동로마는 당대 서유럽에서도 그리스로 취급하고 현대에도 그리스사로 여겨지는 편이기는 하지만 말대 이전까지 신민들은 로마인만을 자처했다. [3] 그런데 스파르타 문서엔 스파르타도 살아남았다고 나온다. [4] 자세한 건 바다 민족 참조. [5] 이들의 민족구성은 불확실하다. 일단 왕가는 그리스계가 맞는 것 같지만 기록 자체가 적어 피지배민들까지 그리스인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선사시대 유적은 그리스보다는 지금의 터키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의 유적들과 유사하다. 여기서의 아나톨리아 지역은 지금의 투르크계 터키가 아닌 한참 이전의 메디아 등등 고대 소아시아 문화권이다. 이쪽은 페르시아~아르메니아 고원까지 넓게 퍼져있던 아리아계 문화권, 그리고 일부 페니키아 문명권과 흡사하다. [6] 용도를 알 수 없었던 매우 복잡한 기계장치였으나 해와 달의 운행을 계산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7] 헤론이 아닌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이 만들었다고도 한다. [8] 물론 이는 마케도니아처럼 어떻게 보면 외부 출신 민족이거나 그리스가 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혈마 전쟁 때까지는 대그리스인을 칭한 그리스인들도 많았다. [9] 당대 제국 내에서 '그리스인(엘리니스)'이라는 단어는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우스 등을 섬기는 고대 다신교 신앙을 고수하던 사람들을 말할 때나 쓰던 말이었다. [10] 이는 자신들이 세계제국 로마의 정통성을 최후까지 수호하는 집단이라는 데에 대한 자부심의 발로였다. 중국 삼국시대의 촉한이 스스로를 일컬을 때 '촉'이란 표현을 가급적 지양하고 '한'이라고 자처한 것과 비슷하다. [11] 종종 귀족, 황족 인명으로 보이는 바르다스, 바르다네스가 아르메니아어에서 왔다. [12] 당시 많은 그리스의 도시들이 보호를 요청하며 베네치아 공화국에 도시를 바쳤지만 베네치아 공화국도 모두 지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13] 여기서 나오는 '룸'은 로마를 뜻한다. 오스만제국은 당시 그리스인, 정확히는 정교회 신자들을 로마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4] 오스만 제국은 자국의 지배권이 중요했지, 종교나 문화는 의외로 공평하고 관대했다. 일례로 아라비아 반도의 네지드라는 부족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가혹하게 진압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이 훗날 이슬람 극단주의화의 선봉이 되는 그 악명높은 와하브파였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교리에 비춰볼 때 이교도를 봐주는 타락한 국가이므로 종교적으로 올바른 국가를 세워야한다며 들고 일어났던 것. 여담으로 오스만 제국에게 반란이 진합된 후 와하브파는 전략을 바꿔 외세를 끌어들여 독립을 하는 방식으로 선회했고, 대영제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지원에 힘입어 민족주의에 기생해서 독립에 성공,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하게 된다. [15] 다만 예수는 원래 이슬람교에서도 무함마드 바로 이전의 예언자로서 성인으로 우대받는다. 이슬람교의 기본 교리 자체가 야훼가 예수를 내려보냈음에도 아직 완전히 인간이 계도되지 않아서, 최후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16] Fener. 그리스어로 '등불'을 가리키는 단어인 '파나리온(φανάριον)'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페네르는 지명의 유래대로 동로마 제국 시절 보스포로스 해협과 금각만을 항해하는 배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있던 곳인데 1453년 도시가 오스만에게 함락당한 이후 메흐메트 2세가 하기아 소피아에 거주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이곳으로 이주시키면서 도시의 그리스인 또한 총대주교를 따라 페네르로 이주했다. 그후 페네르는 대표적인 그리스인 거주 지역이 되었다. 도시에서 그리스인이 거의 다 쫒겨난 지금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페네르에 거주하고 있다. [17]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등장인물 하이데가 알리 파샤의 딸로 설정되어 있다. [18] 일단 한 국가에 다른 국가 출신 귀족이 왕위에 오르는 것 자체는 유럽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19]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며 그리스인이 거주하는 모든 땅이 그리스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그리스 민족주의 사상. [20] 그리스에 좋은 영향도 있었는데 요르요스 1세의 즉위 선물로 영국은 오랫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였다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이 점령했던 이오니아 제도를 그리스에게 주었다. 요르요스 1세가 친영파인데다 때마침 이오니아 제도에서 그리스와의 통합을 바라는 움직임이 크기도 했다. [21] 자치국이라고는 하는데 국가 수반은 요르요스 1세의 차남인 안드레아스 왕자이고 총리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열렬한 에노시스 지지자라 사실상 설립부터 그리스의 괴뢰국이었다. [22] 도데카니사 제도 제외. 여기는 이탈리아에게 넘어갔다. 다만 2차 대전 이후 여기도 그리스로 편입되었다. [23] 그리스군과 그리스계 민병대는 당시 튀르키예인 말고도 아르메니아인들까지 마구잡이로 학살해버렸다. 오스만의 그리스 지배와 독립운동 탄압, 발칸 전쟁 이후부터 튀르키예 독립 전쟁 시까지 튀르키예 전역에서 그리스인 75만 명이 학살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한 것이었는데 애꿎은 아르메니아계까지 무차별로 학살해버리면서 비난을 받았고 나중에 그리스가 패전하자 터키 내 그리스계 민족들은 튀르키예인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대적으로 학살당했다. 지금도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로 아르메니아와 갈등을 빚는 튀르키예가 이것을 언급한다. 다만 그리스인들 입장에서도 오스만인들에게 붙던 아르메니아인들을 곱게 보기는 힘들다. [24] 그러나 내전 중에 치러진 투표이므로 정부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만 투표가 가능했다. [25]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직후인 1912년부터 1945년까지 이탈리아의 식민지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는 영국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26] Greek Rally [27] National Radical Union [28] Centre Union [29] 2004 아테네 올림픽 기간에 잠깐 귀국하긴 했다. [30] 군사정권 초기인 1968년에 이미 사망했다. [31] Centre Union-New Forces [32] United Left [33] Union of the Centre. 1976년에 중도연합-새로운 힘이 재창당하며 형성되었다. [34] 키프로스 전쟁 당시 나토가 그리스 튀르키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개입을 안 해서 당시 그리스에서 나토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35] 700유로 세대가 화두에 올랐을 때가 이때의 일이다. [36] 2000년대 초중반에 그리스 실업률은 10% 초반 정도의 수준이었고, 청년실업률은 20%를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