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리노 해전(Battle of Navarino) | ||
날짜 | ||
1827년 10월 20일 | ||
장소 | ||
그리스 남단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안의 나바리노 만 | ||
원인 | ||
그리스 독립 전쟁 | ||
반오스만 연합국 | 오스만 제국 | |
교전국 | 영국, 프랑스 왕국, 러시아 제국 |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 |
지휘관 |
에드워드 코드링턴 앙리 드 리니 로힌 헤이덴 |
이브라힘 파샤[1] |
병력 |
영국 왕립해군 전함 3척, 프리깃함 4척,쌍돛대 범선 1척,커터 1척 프랑스 왕립해군 전함 3척,프리깃함 2척 , 커터 2척 러시아 제국 해군 전함 4척,프리깃함 4척 |
오스만 제국 해군 프리깃함 4척 전함 3척 코르벳함 30척 쌍돛대범선 28척 스쿠너선 5척 수송선 수십척 화공선 5척 |
피해 규모 |
178명 전사 선박 0척 피해 |
선박 60척 대파 8000명 이상 전사 |
결과 | ||
반오스만 연합국의 완승 제10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발발 영, 프, 러 3개국이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는 내용의 런던 협약을 채택 |
1. 개요
1827년 그리스 독립 전쟁 과정 중 나바리노 만(現 필로스)에서 벌어진 해전.2. 배경
2.1. 그리스 독립 전쟁
본래 오스만 제국에서 그리스인들은 세력이 강한 민족이었다. 오스만 제국 신민의 1/4이 그리스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계 이거나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해상 물류를 담당하는 부유한 상인 집단이기도 했다. 처음에 그리스인들은 이 이슬람교 제국에 순종적이었는데, 정교회를 파괴하고 개종을 강제하는 주변의 가톨릭 국가들보다는 최소한 신앙의 자유는 인정하는 오스만 제국이 더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정교회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며 남하해 오고, 쇠약해진 오스만 제국의 지방 통치권이 약화되자, 그리스인들 사이에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지기 시작한다. 또한 오스만 제국이 16세기부터 유럽 국가들과 우호 관계가 필요할 때마다 유럽인에게 무역 권한을 조금씩 제공해 왔기 때문에, 원래 그리스인들이 가지고 있던 제국 내의 무역 특권이 침해받고 있는 것에 대해 불만과 불안감도 팽배해졌다.1821년 3월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는 폭동이 벌어지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마흐무트 2세는 격노하여[2] 같은 해 4월 부활절 전야 미사를 집전하던 이스탄불의 정교회 총대주교와 3명의 주교를 포함한 사제들을 사형시키고 시체에 모욕을 주었다. 술탄은 강경대응을 통해 제국 중심부에서 그리스인 반란을 억누를 수 있었으나, 이와 같은 잔혹한 진압은 다른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의 봉기를 부추긴 꼴이 됬다.
1822년 1월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후 공화주의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에 대해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 전역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가하였으며, 그리스인들도 튀르크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이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서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모한 유럽 국가들이 그리스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 가해지는 박해을 알게 된 유럽의 지식인들은 그리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찬성하는 뜻을 비쳤고 조지 고든 바이런의 경우에는 1823년 영국 국회의 승인을 받아 튀르크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기까지 했다.[3] 그러나 구심점이었던 바이런이 메솔롱기에서 열병으로 죽은 후 그리스의 독립운동은 기세가 꺾였다.
한편 당시 오스만 제국군은 그리스의 저항 세력을 쉽게 뿌리뽑지 못했다. 왜냐하면 제국군은 제국에 충성해야하는 지방 총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알바니아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알리 파샤를 제거하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을 하고 있던 중이었으며, 그리스인들이 격렬히 저항했고,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 개혁은 이제 막 시동을 걸고 있는데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에 부친 오스만 제국은 명목상의 지방 총독이자 실질적인 이집트의 군주인 메흐메드 알리에게 도움을 구했다. 얼마 전 셀림 3세의 제국 중앙 정부가 예니체리 반란으로 근대화 개혁에 실패하는 동안 알리가 다스리는 이집트는 근대화에 먼저 성공하여 강성한 육군과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
알리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크레타 섬의 할양 등을 요구조건으로 하면서 1824년 7월에 참전을 결정했고,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를 보내 1825년 2월에 칸소, 크레타 섬을 점령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부에 남겨졌던 오스만 최후의 거점이던 메트니에 상륙했다. 그리고 나바리노, 메솔롱기를 점령하고 1827년 아테네도 함락시켰다. 메솔롱기가 함락된 1826년 2월에는 술탄 마흐무트 2세가 그리스의 반란이 거의 끝난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나, 그리스인들은 메솔롱기의 함락 이후 게릴라전으로 전환해 저항을 계속했다.
위기 상황에 빠진 그리스군은 유럽 열강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그리스 본토에선 게오르기우스 카라이스카키스, 해상에서는 안드레아스미아울리스가 게오르기우스 사크튜리스에게 집결하여 각 세력은 다시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크레타 섬에 상륙한 이집트군(사령관 하산 파샤)은 처음에 크레타 동부에서의 진압에는 성공했지만 서부에선 그리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이에 이집트군 사령관은 후세인 베이로 교체되었는데, 후세인은 동굴로 달아난 기독교도들을 질식시키기 위해 불을 피워 학살하고 가혹하게 다루며 이에 따르지 않는 주민들을 추방시켰다. 이 때문에 그리스군은 크레타 섬 동부로 철수했지만 결국 대다수가 1824년 4월에 붙잡혀 이집트로 연행되었다. 일부 군대는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도주하여 1825년 7월에 크레타 섬 재탈환을 목적으로 900명의 부대가 크레타 섬에 상륙해 요새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집트군의 우세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3. 연합군의 참가
이 사태를 보고 있던 영국의 외무장관 조지 캐닝[5]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끌어들이기 위해 1825년에는 러시아의 짜르 알렉산드르 1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던 웰링턴 공작을 통해 새 황제 니콜라이 1세를 움직이게 했고 그 결과 1826년 4월 4일 “러시아-영국의 중재를 통해 오스만 제국 내에 그리스 자치국을 세운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조인했다.[6] 동시에 이스탄불에 파견된 영국 외교관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이 조약에 대해, 특히 러시아의 위협에 대해 최대한 과장해서 알리도록 조치했다. 캐닝은 영국이 실제 전쟁에 말려들어가는 것보다는 무력 시위만을 통해 그리스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또한 프랑스를 참가시키기 위해서 1826년 9월에서 10월에 걸쳐 파리를 방문했다. 리버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이듬해 4월 총리가 된 캐닝은 자신의 그리스 정책을 새 내각에서 최우선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영국-러시아-프랑스는 1827년 7월 6일 런던 협약을 새롭게 체결한다. 그 전문은 세 강대국이 해적행위를 근절하고 통상활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스 해역에 연합함대를 집결시켜 개입한다는 것이었다.[7]
그런데 위 문단에선 마치 영국이 그리스 문제에 대한 개입을 주도했고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가 주저하다가 영국의 독촉에 마지못해 참여한 것처럼 서술되어있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서술이다. 신성 동맹 참가 때문에 러시아 제국이 왈라키아 반란을 지원하지는 못했지만, 1821 년에 시작된 왈라키아/그리스 반란과 그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오스만군의 잔혹행위가 세상에 알려지자 마자 개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쪽은 당연히 정교회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었던 러시아 제국이었다. 반대로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군의 잔혹행위에도 개입이 이루어지면(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면) 가장 득보는건 러시아 제국이라는 생각에 이를 외면하고 있었고. 그러다가 1825년에 그리스에 상륙한 이집트군의 잔혹행위가 유럽에 널리 알려지면서 같은 기독교인(정교회도 크리스쳔이니까)들이 박해를 받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대체 뭐하고 있냐는 대중의 압력이 커지기 시작했고, 유럽 국가들이 나몰라라 하는 것에 빡친 러시아 제국이 단독으로 전쟁 일으켜서 승리한 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이익과 영향력을 얻어내 단독으로 꿀꺽하면 더 큰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영국이 마음을 바꾼 것이다. 즉 영국이 주도한 런던 협약은 사실 그리스 문제에 개입해줄테니 단독으로 전쟁 일으키지 말고 단독으로 그리스 문제를 결정하지 말라고 러시아 제국의 손을 묶어버린 것에 가깝고, 그래서 최초의 런던 협약 내용을 보면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그리스에게 자치국을 세우되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또한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을 봐도 나바리노 해전 참패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최후 통첩과 공동 제안 모두를 거부하고 성전을 선언하는 등 그리스 문제에 대한 공동 개입은 별 효과가 없었고, 결국 그리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삽질 때문에 단독 전쟁 명분을 얻은 러시아 제국이 1828년 대규모 병력으로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고 여기에서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런던 조약을 통해 영-러-프 연합 함대의 출범을 이끌어낸 조지 캐닝 수상은 여전히 실제 포탄을 발사하기보다는 무력 시위만으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기를 원했으나, 조약 내용이 이스탄불에 도착한 날인 1827년 8월 8일에 사망해 버렸다. 새로 수상에 취임한 고더리치 자작 F. J. 로빈슨은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의 중재안을 무시하자 교전재량권을 함대 사령관에게 수여했다. 이로써 캐닝의 당초 의도와는 다르게 동맹국 함대는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되었다.
4. 전투 경과
1827년 9월 7일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은 영국 함대의 코드링턴 제독은 이슬람 함대를 그리스 해안에 단절시키는 작전을 개시했고 이에 맞서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슬람 함대는 나바리노에 닻을 내렸다. 코드링턴 제독은 해상에 위치를 고정시키고 드 리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여기에 합세했다. 이브라힘 파샤는 술탄으로부터 추가 지시가 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9월 25일 휴전협정에 서명했지만 10월 2일부터 4일에 걸쳐 협정을 깨고 파트라의 그리스 선박을 공격했고 코드링턴 제독은 프리깃함 두 척과 쌍돛대 범선 한 척으로 물리쳤다. 그 후 하이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와 합류한 후 이브라힘이 학살과 방화를 계속하자 코드링턴 제독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제독과 협의해 나바리노 만으로 진입해 이브라힘의 함대를 봉쇄해 버리기로 결론을 내렸다, 연합군은 10월 20일 오후 2시에 나바리노 만에 진입을 개시해 해전을 개시했다.4시간 정도 계속된 나바리노 해전은 화력에서 우세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8] 연합군은 178명만이 사망했지만 오스만 해군은 8천여명이 넘는 사망자와 60척의 선박이 대파되었고 나머지 29척은 전투불능의 상태가 되었다.[9] 결국 해전은 오스만의 대패로 끝나고 만다.
5. 영향
열강의 개입에 격노한 오스만 제국의 마흐무트 2세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그리스와 러시아와 싸울 채비를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1826년 체결했던 아케르만 협정을 번복하고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폐쇄했는데, 이를 빌미로 1828년 4월 러시아가 오스만에게 전쟁을 선포하였다. 유럽 쪽의 발칸 반도 방면과 아시아 쪽의 코카서스로 나뉘어 내려오는 러시아군의 진격은 러시아 궁정이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느렸지만, 예카테리나 2세 시절 크림 칸국을 삥뜯은 이후 오스만의 천적으로 진화한 러시아답게 러시아군은 약체 오스만군을 가볍게 박살냈다. 러시아가 오스만을 박살내는 사이 영, 프, 러 3개국은 1828년 11월과 1829년 3월 두 차례의 런던 협약을 통해 그리스에 오스만 산하의 자치국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결국 1829년 9월 10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여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통해 오스만은 런던 협약의 내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830년 2월 런던 협약에서 3개국은 그리스를 오스만 산하의 자치국이 아닌, 독립된 주권 국가로 세우기로 합의하였고 최종적으로 1832년 런던 회의를 통해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 오톤을 국왕으로 하는 그리스 왕국을 세우기로 결정하면서 마침내 그리스는 독립을 쟁취하였다. 또한 이로써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세운 유럽 대륙의 현상 유지와, 반자유주의와 반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빈 체제는 빈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야 할 열강들이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사실상 개별적 이익 우선을 추구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1]
오스만 제국의 재상과는 동명이인이다. 이쪽은 이집트 총독인
메흐메드 알리의 아들
[2]
마흐무트 2세는
예니체리를 숙청하고 근대화를 이루었으며 이슬람 학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현대
튀르키예인으로부터 ‘공명정대한 마흐무트 대제‘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지만, 성격이 독선적이고 잔혹한 면도 있었다.
[3]
심지어 그냥 온 것도 아니고 런던에서 군자금을 가져왔다. 1824년 1월 6일 바이런은 그리스에서 영국의 미솔롱기로 건너가 영국 외상 캐닝이 참여한 가운데 영국은행으로부터 47만 2000 파운드의 돈을 빌렸고 그 가운데 31만 파운드가 그리스로 송금되었고 이 대가로 그리스는 매년 4만 파운드를 영국으로부터 갚아야 했다. 단 투자자들이 이자나 원금을 빠짐없이 되돌려 받는다는 보증은 전혀 없었다.
[4]
참고로 셀림 3세와는 달리 마흐무트 2세가 1826년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이집트가 근대화를 통해 부강해지는 것을 본 이스탄불 주민들의 여론이 근대화에 호의적으로 바뀐 것이었다.
[5]
캐닝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이 등장한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3국의
신성동맹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신성동맹은 특정한 정부를 강요하거나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 캐닝에게 있어서는 시대적 착오와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캐닝은 강대국인 세 나라가 협력해 러시아가
그리스 정교 보호를 목적으로 멋대로 그리스에 군사 개입을 해 그리스에
러시아가 군사적 기반을 만들어 지중해로 진출해 남하를 하려는 것을 최대한 저지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6]
그 내용은 1.그리스는 자치권이 있지만 오스만 제국의 속주로 남는다. 2.모든 튀르크인은 그리스에서 떠난다. 3.술탄은 영국과 러시아, 그리고 그리스와 협의하여 통치자를 선임한다.
[7]
그리스 독립전쟁의 영향으로 그리스 근해에서는 해적 행위가 대폭 증가하고 오스만과 이집트군이 민간선박을 약탈하거나 침몰시키는 일이 빈번해졌다.
[8]
오스만-이집트 함대의 수가 더 많았지만 연합군이 배마다 50대 이상의 포를 조준하고 10척씩 정렬하고 있는 반면 오스만군은 3척씩 정렬하고 있었으며 또 동맹군 배들은 훨씬 더 크고 높아서 적의 갑판을 향해 아래로 포를 쏠 수도 있었고 특히 영국군은 대구경 포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9]
그 후의 얘기를 좀 더 쓰자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코드링턴은
조지 4세에게 바스 대십자 훈장을,
샤를 10세로부터 생 루이 훈장을 받고
니콜라이 1세에게는 셍트 게오르기 훈장(2등급)을 그리고 마브로코르다토스(
그리스 제1공화국의 초대 총리)로부터 구세주 금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지만 이러한 해전을 예상하지 못했던 영국 정부는 함대사령관인 코드링턴 경을 해임했다. 원래 고드리치 내각은 전쟁을 원한 게 아니라 중재를 원했던 것인데 10월에 내린 이 명령이 전투가 끝난 뒤에야 전해진 것. 어쨌든 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에 박한 대접을 한 것은 사실이므로 1년에 800파운드씩 연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코드링턴 제독은 그전에 우선 부하장병들에게 경제적인 보상을 받게 하고 싶었고 이것은 7년 뒤인 1834년에 휘그당이 정권을 잡고 코드링턴이 데번포트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끓임없이 하원에 문제제기를 한 후에야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