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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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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왕국
Kinereich Bayern 바이에른어
Königreich Bayern 독일어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국(1805년~1806년)
라인 동맹 가맹국(1806년~1813년)
독일 연방 가맹국(1815년~1866년)
독일 제국 구성국(1871년~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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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In Treue fest
확고한 충성심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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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 1918년
역사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바이에른 선제후국 바이마르 공화국
뷔르츠부르크 주교령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1806년 설립
1871년 독일 제국 가맹
1918년 군주제 폐지
지리
위치 바이에른, 라인란트팔츠
수도 뮌헨
인문환경
언어 바이에른어, 독일어
종교 가톨릭
민족 바이에른인
정치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루트비히 2세
경제
통화 바이에른 굴덴(1806년 ~ 1873년)
골트마르크(1873년~ 1914년)
파피어마르크(1914년 ~ 1918년)
1. 개요2. 역사
2.1. 바이에른 선제후국 시절2.2. 바이에른 왕국 시절
3. 기타4. 군사5. 역대 국왕
5.1. 왕위 요구자

[clearfix]

1. 개요

독일 바이에른 지역에 존재하던 왕국. 독일 제국 시절에는 프로이센 왕국의 뒤를 이어 제국 내 2인자격인 왕국이었으며 수도 뮌헨이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치했으며 1910년 기준으로 면적 75,865 km², 인구 652만가량이었다. 오늘날 독일 바이에른주의 모태가 되는 왕국이다.[1]

2. 역사

2.1. 바이에른 선제후국 시절

바이에른은 중세 시절 부터 독일의 5대 공국의 하나였던 유서 깊은 공국이었다. 비록 카를 4세의 견제로 금인칙서 발표 당시 장자 계열이었던 라인 궁정백국에 밀려 선제후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30년 전쟁으로 줄을 잘서 바이에른 선제후국으로 승격되었다.[2]

18세기 초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한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노리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반대진영인 프랑스에 서서 참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카를 7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가 팔츠와 바이에른을 통합하면서[3] 루트비히 4세 황제 사후 500년 만에 팔츠와 바이에른이 재통합되었다. 그리고 카를 테오도르는 팔츠 선제후국의 수도 만하임에서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수도 뮌헨으로 옮겨가면서 뮌헨은 명실상부한 비텔스바흐 가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당시 선제후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의 줄타기로 비록 팔츠의 하이델베르크 만하임 바덴 대공국에 상실했으나,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라는 오스트리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1801년 프랑스와 단독 강화 조약을 맺고, 라인연방에 가입하여 메밍겐 등을 얻으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하며 유럽을 평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협력해 준 바이에른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 뷔르템베르크 선제후국 3개의 나라를 1806년 왕국으로 승격시켜줬다.[4]

2.2. 바이에른 왕국 시절

1808년 바이에른 왕국 최초의 헌법이 반포되었으나, 이후 프랑스 제1제국의 입맛에 맞게 여러차례 개정되었다.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 후 맺어진 쇤브룬 조약(Friede von Schönbrunn)에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서부의 티롤 후백국 잘츠부르크 공국을 바이에른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 바이에른 왕국군도 참가했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고,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지자 작센과 함께 영토 보장을 조건으로 대프랑스 동맹 측에 가담하였다. 비록 티롤과 잘츠부르크는 원 주인인 오스트리아 제국에 반환했지만, 나폴레옹이 넘겨준 북부 프랑켄 지역과 서부지역은 계속 바이에른의 영토로 인정받았으며 왕국으로까지 승격됐으니 바이에른 입장에서는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1818년엔 막시밀리안 1세가 왕족과 귀족, 대주교들로 이루어진 상원과 지주, 대학교, 사제와 시민들로 이루어진 하원을 형성하는 양원제를 골자로 한 헌법을 도입했다. 또한 이 헌법에선 가톨릭의 반발이 있긴 했지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개신교도 받아들였다.

1825년, 막시밀리안 1세가 죽은 후 즉위한 루트비히 1세가 즉위했다. 루트비히 1세는 여러 신고전주의의 건물을 세우거나 도시를 세우고 독일 최초의 철도를 세웠고 외치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독립전쟁을 지원하는 등 여러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왕비를 버려두고 롤라 몬테즈라는 배우에게 빠져 정부로 두고 바이에른 왕국 국적을 주는것도 모자라 귀족 작위를 수여하거나 막대한 연금을 주는 등의 지원을 해주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혁명이 일어나자 결국 1848년에 맏아들인 막시밀리안 2세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나폴레옹 전쟁 후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에 이은 3번째 국가가 되었다. 이후 대독일주의를 지지하며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으나, 오스트리아가 패전하면서 영향력이 크게 축소하여 결국 1871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 제국에 가맹했다. 이때 줄을 잘 섰기 때문에 바이에른과는 반대로 영국 뒷배를 믿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을 들며 프로이센에게 대항하다 풍비박산난 하노버 왕국과는 달리 독일 제국의 구성 제후국으로 왕실도 유지되고 많은 이권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프로이센이 하노버 왕국 국고의 금을 털어 전부 바이에른 왕국에게 선물했기 때문에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는 그 돈으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지었다.

그래도 독일 제국에서 프로이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기 때문에 바이에른 왕국군을 여전히 보유하는 등, 다른 지역에 비해 폭넓은 자율권과 자치권을 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바이에른 사람들은 모든 게 프로이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불만이 많았다.[5]

1918년 독일 제국이 붕괴하면서 한때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이 들어서기도 했으나, 곧 바이에른 자유주(Freistaat Bayern)가 되었고, 이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3. 기타

바이에른 왕국은 독일 제국 성립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왕국의 군대를 육성하고 보유할 수 있도록 하여 평시 정규군으로 바이에른 1군단~3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다.[6] 아돌프 히틀러 제1차 세계대전 때 바이에른 왕국군에 들어가 참전한 것도 유명한 이야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Rupprecht von Bayern) 공은 바이에른 왕국이 소멸한 뒤 반나치 성향을 나타내서 이탈리아 왕국으로 추방당했고, 이후 피렌체에서 잠적 생활을 했다. 루프레히트의 가족들은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 갇혔고, 이후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옮겨졌다. 이들은 이후 미군에게 석방되었으나, 왕세자빈인 안토니아는 이 때 건강을 해쳐서 1954년에 사망했다.

근대 독일의 주도권을 놓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알력은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선제후-왕국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놓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대립했으며[7], 19세기에도 3인자 위치로 1차 세계대전 독일의 한 주로 편입될 때까지 유지된만큼, 독자적인 지역색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4. 군사

바이에른 왕국은 바이에른 왕국군이라는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바이에른 왕국군은 프로이센군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나름 강한 군대였다. 1682년 창설되었으며, 루트비히 2세의 도움으로 수많은 개편이 이루어졌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5.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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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스바흐 왕조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루트비히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트비히 2세
오토 루트비히 3세
바이에른 공작 · 바이에른 선제후 }}}}}}}}}

5.1. 왕위 요구자



[1] 바이에른 왕국의 영토는 오늘날 바이에른주 영역 대부분과 라인란트팔츠주의 일부분(팔츠)을 합친 영역이다. 단, 현재 바이에른주에 속하는 코부르크 지역은 원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영토였다. [2]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보헤미아인 귀족들의 제의를 승낙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 국왕으로 즉위했다가 페르디난트 2세와 갈등을 빚은 끝에 패퇴하였기 때문에, 선제후 지위가 일시 박탈된 사이, 바이에른이 선제후가 되었다. 다만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팔츠 선제후국은 복권되었다. [3] 중간에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라는 소동이 있었으나 카를 테오도어의 바이에른 선제후국 상속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어느 한쪽의 대가 끊겨 다른 한쪽이 물려받을 경우 황제 선거권을 1표로 제한하도록 규정되어 팔츠-바이에른 선제후로서 1표만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4] 물론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맹주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합스부르크 가문, 북독일의 강자 프로이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5] 이런 특징은 독일연방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바이에른 왕국의 후손격인 바이에른주는 독일 내 다른 연방주들과 달리 고도의 자율권을 보장받고, 거의 별개의 독립국 수준으로 지역색이 강하다. 과거 프로이센에 속하던 연방주들과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덤. [6] 다른 제후국들의 군대는 편제 독일 제국군에 흡수되었다. 작센 왕국군은 제국군 12군단, 뷔르템베르크 왕국군은 13군단, 바덴 대공국군은 14군단으로 운용. [7]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힘이 약했던 루트비히 4세 루프레히트 때나 제위를 얻었을 뿐, 합스부르크 가문이 강대해진 이후로는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나 카를 알브레히트처럼 이득보다 손실이 컸다. [8] 참고로 루이트폴트 공은 자신의 조카들이 정신적으로 불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폐위될 정도로 정신질환이 심각한 것은 아니라며 변호한 바 있다. [9] 국왕이 10년 이상 섭정없이 국사행위가 불가능할 시, 섭정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내용의 헌법 개정을 통해 즉위. 폐위된 오토는 왕으로써의 예우는 그대로 받았다. [10] 2번 결혼(사별후 재혼),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의 여동생인 마리 가브리엘레와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으나 차남 알브레히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왕정 폐지 후 기욤 4세의 4녀인 룩셈부르크의 안토니아 공녀와 재혼해 1남 5녀를 두었다. [11] 루프레히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한 1919년에 이론상의 자코바이트 계승권을 물려받았는데, 이에 따라 루트비히 3세가 사망한 1921년부터 바이에른 왕위 요구자가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를 겸하게 되었다. 다만 명목상의 바이에른 왕위가 살리카법을 따르는 반면 자코바이트 계승권은 아들 우선 상속법을 따르기 때문에, 자코바이트 계승권은 리히텐슈타인의 공세자비인 조피를 통해 리히텐슈타인 공가로 넘어가 장기적으로는 바이에른 왕위 요구권과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권이 다시 분리될 예정이다. [12] 크로아티아계 귀족의 딸인 마리아 드라슈코비치 여백작과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다. [13] 동성애자이고 토마스 그라인발트(Thomas Greinwald)라는 동성 파트너가 있다. [14] 스웨덴 백작의 딸과 결혼해 5명의 딸을 두었다. 장녀 조피는 현재 리히텐슈타인의 공세자비이며, 차녀 마리카롤리네는 뷔르템베르크 왕가 수장 카를의 3남 필리프 공작과 결혼했다. 3녀 헬레나 오이게니는 미혼, 4녀 마리 엘리자베트는 평민과 결혼하였으며, 5녀 마리아 안나 역시 평민과 결혼했다가 이혼 후 남작과 재혼했다. [15] 루트비히 3세의 3남 프란츠 왕자의 손자이다. 어머니 이르밍아르트가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의 3녀(후처 안토니아 소생)이기 때문에 프란츠와 막스의 고종사촌이기도 하며,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와도 6촌간이다. [16] 평민과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다. (당초 귀천상혼으로 간주되었으나 1999년에 동등결혼으로 승인받았다) 세 아들 중에는 차남 하인리히 루돌프에게 2021년생 아들 한 명이 있고, 나머지 두 아들은 아직 미혼이다. [17] 루이트폴트의 자손들보다 더 먼 계승권자로는 루이트폴트의 사촌형제 세 명(모두 숙부 라소 왕자의 아들들이다)과 그 아들 6명, 루트비히 1세의 4남 아달베르트 왕자의 자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