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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1525년 4월 10일 ~ 1701년 1월 18일 | ||
성립 이전 | 왕국 승격 이후 | |
독일 기사단국 | 프로이센 왕국 | |
위치 | 중동부 유럽 | |
수도 | 쾨니히스베르크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공작 | |
언어 | 독일어, 저지 독일어, 폴란드어, 고대 프로이센어 | |
종교 | 루터교 | |
종족 | 프로이센 독일인, 발트계 프로이센인, 폴란드인 | |
주요사건 |
1525년 4월 10일 건국 1618년 8월 28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공국 동군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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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25년 튜튼 기사단의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안스바흐가 루터교회로 개종하며 가톨릭 교회와 절연하고 기사단국을 세속화하면서 형성된 국가.2. 역사
2.1. 독일 기사단국의 세속화와 성립
독일 기사단국은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을 체결한 이래로 폴란드 왕국의 신하로 전락하였으므로 1525년에 새로이 탄생한 프로이센 공국도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출발하였는데, 이때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1]는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은 알브레히트의 후손만이 계승할 수 있도록 정하였다.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안스바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랑켄 방계인 안스바흐-쿨름바흐 변경백 프리드리히[2]의 3남으로 역시 본가 안스바흐도 형 게오르크[3]에 의해 루터교회 국가가 되었다.초기에는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골수 가톨릭 신자인 사촌 요아힘 1세 네스토어가 통치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아주 불편한 관계였다. 그러나 요아힘 1세의 아들 요아힘 2세 헥토어가 1539년 루터교회로 개종하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회가 공인되자 브란덴부르크 전체에 종교 개혁을 실시하여 국가단위 개종을 시행하자 관계가 호전되었으며, 1572년부터 알브레히트 공작의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정신병을 앓자, 요하임 2세 헥토어와 요한 게오르크, 요아힘 프리드리히는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사촌형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와 함께 섭정을 맡기도 했다.
2.2.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의 동군연합
1569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는 처남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조약을 맺어 만약 프로이센 공국의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 방계가 절손되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본가에서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을수 있도록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죽기 전 그는 아들, 손자들에게 프로이센 공국의 안스바흐 분가 사람들과 결혼하여 대가 끊기면 확실하게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할 수 있도록 당부하는 유언을 남겼고 요아힘 프리드리히는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4녀 엘레오노레와 재혼을, 요한 지기스문트는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장녀 아나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1618년 8월 27일,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같은 가문 친척이자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맏사위였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국을 승계하였고 이에 따라 호엔촐레른 가문의 통치 하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결성되었다.원칙대로라면 봉신국의 봉신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 종주국인 폴란드 왕국이 그 영지를 회수하는 것이 옳으나 몇 년 전 루스 차르국의 혼란 시대를 틈타 러시아 문제에 개입했다가 혼란 시대를 수습한 로마노프 왕조와의 전쟁의 수렁에 빠지면서 힘에 부치게 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가 선대에 체결된 조약도 있고, 요한 지기스문트가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폴란드의 형식적인 봉신으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공국 승계를 허용해주었다. 요한 지기스문트는 칼뱅파로 개종[4]한 이력이 있어 영지 내의 다른 귀족들이 루터파를 믿는 가운데 왕가는 칼뱅파를 믿게 되면서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인 면을 취했다.
그러나 이후 우유부단하고 무능했던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은 매부인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끌려다녀[5]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30년 전쟁에 개신교편으로 반강제로 참전하였다. 결국 본토인 브란덴부르크는 주 전장이 되면서 많은 인구가 사망하고 도시들이 초토화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프로이센 공국은 멀쩡했고[6] 나중에 대선제후(Große Kurfürst)로 불리게 되는 후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주도면밀한 외교정책으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힌터포메른[7]과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캄민, 민덴 4개 주교령을 확보하였다. 1656년에는 스웨덴편으로 대홍수에 개입[8]하였으며 이후 폴란드에게 전세가 유리해지는 듯 보이니 폴란드편으로 갈아타는 등 기회를 잘 보다가 1657~58년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으로 형식적인 봉신 관계까지 청산하며 폴란드와 완전히 결별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와 프로이센 공국의 신분제 의회를 강압적으로 통합하면서 행정적인 통일을 이루었다.[9]
이후 세력 확장을 위해 왕을 칭하기를 원했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군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로부터 칭왕 승인을 받았다. 1701년 1월 7일, 프리드리히 3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하였고,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완벽하게 통합되어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사실상 브란덴부르크가 주도하는 통합이었으나 브란덴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 산하의 영방국가였으므로[10] 제국 영토 바깥에 위치한 독립 공국인 프로이센을 국명으로 썼다. 즉 프로이센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있는 영토가 아니고 바깥의 독립 지역이기 때문에 독립국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왕 칭호를 사용하기 위해 프로이센 지역의 왕국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프로이센에서의 왕(König in Preußen)' 이라는 작위가 생겼다.
3. 역대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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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촐레른 왕조 | |||
알브레히트 |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 요한 지기스문트 | 게오르크 빌헬름 | |
프리드리히 빌헬름 | 프리드리히 |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
프로이센 국왕 ·
북독일 연방 독일 제국 · 프로이센 자유주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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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이름 | 생몰년 | 재위기간 | 비고 |
1 | 알브레히트 |
1490년 5월 17일 ~ 1568년 3월 20일 향년 77세 |
1525년 4월 10일 ~ 1568년 3월 20일 | |
2 |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
1553년 5월 7일 ~ 1618년 8월 27일 향년 65세 |
1568년 3월 20일 ~ 1618년 8월 27일 | |
3 | 요한 지기스문트 |
1572년 11월 8일~ 1619년 12월 23일 향년 47세 |
1618년 8월 27일 ~ 1619년 12월 23일 |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사위 이때부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임 |
4 | 게오르크 빌헬름 |
1595년 11월 13일 ~ 1640년 12월 1일 향년 45세 |
1619년 12월 23일 ~ 1640년 12월 1일 | |
5 | 프리드리히 빌헬름 |
1620년 2월 16일 ~ 1688년 4월 29일 향년 68세 |
1640년 12월 1일 ~ 1688년 4월 29일 | |
6 | 프리드리히 |
1657년 7월 11일 ~ 1713년 2월 25일 향년 55세 |
1688년 4월 29일 ~ 1701년 1월 18일 | 1701년 프로이센 국왕이 되면서 공작위 폐지 |
[1]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안스바흐의 외숙부였다. 이러한 혈연 관계는 프로이센 공국의 탄생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
[2]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차남. 호엔촐레른 가문 본가가 통치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장남
요한 치체로 아들
요아힘 1세 네스토어와 손자
요아힘 2세 헥토어가 통치했다.
[3]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요한 프리드리히 1세,
헤센
방백
필리프와 더불어 독일
종교 개혁사에서 중요한 제후로 손꼽히는 인물로, 오촌 조카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의 개종에도 영향을 끼쳤다. 젊은 시절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
마차시 1세 밑에서 일했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진 부친을 큰형 카지미어와 함께 몰아내고 카지미어는 쿨름바흐를, 본인은
안스바흐를 나눠먹었다. 덕분에 알브레히트부터는 받을 영지가 없어 외부로 나가 알아서 생존해야했는데, 알브레히트는 튜튼 기사단장이 되었고 혈연을 이용해 프로이센 공국을 창설했다.
[4]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 상속 문제에서
네덜란드에게 잘보여 지원을 얻어낼 목적으로 개종했다.
[5]
게오르크 빌헬름은 자신의 주군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지그문트 3세와 스웨덴 왕위 분쟁이 있던 구스타브 2세를 매우 싫어했다. 구스타브 2세와 여동생 마리아 엘레오노라의 결혼도 그가 즉위하면서 파토난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는데 어머니 프로이센의 아나가 구혼하러 온 구스타브 2세를 보고 무조건 결혼시켜야겠다 마음먹어서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프로이센 공국까지 건너가 협상해서 결혼시켰다.
[6]
전쟁 피해는 입지 않았는데 구스타브 2세가 프로이센의 주요 항구를 대가 없이 임차해버리는 바람에 수입이 확 줄었다.
[7]
원래대로라면 후사가 끊긴
포메른 공국을 브란덴부르크에서 온전히 다 받아야 했는데 구스타브 2세 때문에 절반만 가져갔다. 심지어 중요 항구도시인
슈테틴도 스웨덴에게 빼앗겼다.
[8]
처음에는 종주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으로 참전했으나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개박살나고 프로이센 공국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스웨덴편에 섰다. 다만 스웨덴이 잘나가니 이에 편승해서 폴란드로부터 종주권을 청산할 목적도 있긴 했다.
[9]
이는 꽤나 중요한데,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서는 베를린에서 편하게 통치했지만
동군연합이었던 프로이센 공국 통치를 위해서는
쾨니히스베르크까지 건너가야 했다. 그런데 프로이센 공국의
융커들을 박살내 브란덴부르크 신분제 의회에 프로이센의 신분제 의회를 통합시켜버렸으니, 이제 귀찮게 쾨니히스베르크까지 갈 필요 없이 베를린에 앉아서 통치할 수 있게 된 셈이다.
[10]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왕'이라는 칭호는 차기 황제 후계자인
독일왕, 그리고 선제후인
보헤미아 국왕, 오직 2명만이 왕을 칭할 수 있었다.
[11]
간단히 말해 대외상으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칭하고 왕국 내에서는 왕을 칭했다.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전까지 공식적인 국가 명칭은 브란덴부르크였고, 각국의 외교문서나 신문에서도 브란덴부르크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