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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입헌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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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왕국
Królestwo Polskie Regnum Poloni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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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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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년 폴란드 왕국의 강역 | |||||
1025년 ~ 1795년 | |||||
성립 이전 | 폴란드 분할 이후 | ||||
폴란드 영지 | 프로이센 왕국 | ||||
합스부르크 제국 | |||||
러시아 제국 | |||||
위치 | 동유럽 | ||||
수도 |
그니에즈노,
프워츠크, 크라쿠프, 바르샤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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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입헌군주제 | ||||
국가 원수 | 국왕, 고공(高公)[1] | ||||
주요 국왕 |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1025) 카지미에시 3세(1333~1370) 야드비가(1384~1399) 지그문트 1세(1507~1548)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1548~15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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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중세 폴란드어, 라틴어 | ||||
민족 | 폴란드인, 폴라브인, 루테니아인 등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주요 사건 |
1025년 볼레스와프 1세 대관식 1385년 크레보 동맹 성사 1569년 루블린 합병 성사 1648년~ 1667년 대홍수 1795년 폴란드 분할 |
언어별 명칭 | |||
폴란드어 |
Królestwo Polskie / Polska / Rzeczpospolita[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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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 Regnum Polonia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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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25년부터 1795년까지 동유럽 지역에 존속한 왕국이었다. 1385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크레보 동맹을 체결하고 동군연합 관계가 되었고 1569년에는 루블린 합병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결성, 오늘날 폴란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일부 등지를 지배하였다.2. 상세
2.1. 피아스트 왕조
피아스트 왕조는 966년 미에슈코 1세(Mieszko I)가 주변 지역을 통합하고 기독교( 가톨릭)를 받아들이면서 개창한 왕조이다. 미에슈코는 세례를 받기 전부터 폴란드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예 중 하나로 가톨릭 국가인 보헤미아의 공주 도브라바(Dobrava)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미에슈코의 가톨릭 수용 이후 그의 신하와 주민도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아 폴란드는 가톨릭화 되었다. 미에슈코의 치세 때 폴란드에는 로마 교황청 직속 선교 주교구가 설치되었다. 폴란드는 독자적인 주교구를 가짐으로써 왕국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보다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미에슈코 1세의 사망 이후 992년 미에슈코의 맏아들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Bolesław I)가 즉위했다. '용감왕'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볼레스와프 1세는 치세 동안 권력 기반을 공고히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심지어 1018년에는 볼레스와프 1세의 사위 스뱌토폴크 1세가 장인의 지원을 등에 업고 키예프 대공국의 지위 계승전에 뛰어들어 키예프를 잠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생전 동안 신성 로마 제국과의 외교도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오토 3세가 사망한 후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제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고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의 반대파를 지지하였다. 이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1004년부터 1008년까지 산발적으로 지속전 이 전쟁은 부지신(Budziszyn) 회담으로 종결되었다. 1024년 볼레스와프 1세와 대립각을 세우던 하인리히 2세가 붕어하자, 교황의 동의를 얻어 그니에즈노에서 대관식을 치러 공식적으로 폴란드의 국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1세는 대관식 1년 뒤인 1025년 사망하였다.
볼레스와프 1세의 대관식으로 폴란드 영지는 공식적으로 왕국이 되었고 그의 후계자들은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볼레스와프 1세 사망 이후 그의 차남인 미에슈코 2세가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장남 베즈프림과 그의 동생 오토 볼레스와비치도 왕권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폴란드 왕국은 내분에 빠졌다. 베스프림은 미에슈코 2세의 반대파들을 규합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대공국같은 외세의 지원도 받으며 왕과 대립각을 세웠다. 결국 미에슈코 2세는 1031년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가 동시에 공격하자 보헤미아 공국의 프라하로 망명하여 왕위는 베스프림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베스프림은 외세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통합하지 못했고,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신하가 되고만다. 폴란드 왕국이 통치하고 있던 모라비아가 보헤미아로 넘어갔고,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왕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베스프림은 집권 수 개월 만에 그의 추종세력에게 살해당했다.
베스프림이 죽자 프라하로 망명했던 미에슈코 2세가 다시 복권되었다. 그러나 복권될 때는 폴란드의 국력이 약화됐기 때문에, 그는 기존의 신성 로마 제국과의 군신관계를 받아들여야 했다. 또한 영토 일부를 동생 오토와 사촌 디트리크에게 분할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이후 오토가 살해당하고 미에슈코 2세도 1034년 사망했다. 미에슈코 2세가 죽자 전국 각지에서 폴란드 신화를 믿는 사람들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결국 1039년에 보헤미아 공국의 공격으로 그니에즈노도 파괴되었고 파괴된 그니에즈노 대신 크라쿠프가 폴란드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1039년 즈음에 잊혀진 왕 볼레스와프[3] 가 죽고 회복왕 카시미에시 1세가 즉위했다. 카지미에시 1세는 왕국의 수도를 크라쿠프로 공식적으로 천도하였으며, 폴란드 왕국의 혼란스러운 정세에 학을 뗐던 키예프 루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마조프셰 지방에서 세력을 형성하던 미에츠와프를 굴복시키는 등 이전 영토들을 다시 되찾았고, 봉건제를 도입해 왕실의 군사비 지출을 줄이고 국가를 안정시켰다.
카지미에시 1세가 1058년 사망하자, 그의 장남 볼레스와프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 때 폴란드는 더욱 발전하였으며 각종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그는 베네딕트 수도원과 주교구를 건설하여 보헤미아의 침입 때 파괴된 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또한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사이의 권력 갈등이 심화되자 그는 교황의 편을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에서 탈피하는 한편, 1076년 수월하게 대관식을 올릴 수 있었다. 볼레스와프 2세는 보헤미아와 협상하여 기존에 바치던 조공을 폐지했으며, 헝가리 왕국과 키예프 대공국의 왕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하여 자신의 지지 인물을 왕좌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볼레스와프 2세를 두려워한 폴란드의 귀족들은 그를 축출하였다. 볼레스와프는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하여 1081년 사망하였다.
폴란드 왕위는 볼레스와프의 동생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국의 실세는 시에치에흐(Sieciech, P) 총독에게 있었다. 그는 폴란드 전 국토에 토지를 가지고 있는 대지주 귀족이었는데, 권력을 앞세워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총독의 탄압에 반감을 품은 폴란드 내 반대파 귀족들은 브와디스와프 헤르만의 장남 즈비그니에프(Zbigniew)를 중심으로 뭉쳤고 1093년부터 시에치에흐 총독과 반대파들은 10여 년 동안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은 폴란드 국토를 분할하는 방법을 일단락되었다. 장남 즈비그뉴는 대폴란드를, 차남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Bolesław Krzywousty)는 남부 소폴란드와 실롱스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 형제는 서로 반대되는 정책을 펼쳤는데, 형 즈비그니에프는 주변 국가들과 화친을 맺고 평화를 유지하려 했지만 동생 볼레스와프 크쉬보우스티는 호전적이어서 기사들을 이끌고 북부지방에서 정복활동을 벌였다. 기사들은 호전적인 볼레스와프를 지지했고 즈비그뉴는 결국 동생에게 굴복하여 독일로 추방되었다.
이 사건을 구실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는 폴란드 내정에 개입하였다. 반독일적인 볼레스와프를 몰아내고, 볼레스와프를 대신하여 형 즈비그뉴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하인리히 5세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군은 볼레스와프의 폴란드군에게 패했고 볼레스와프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리고 폴란드 왕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으며, 이에 따라 보헤미아가 실롱스크 지방을 포기하게 만드는 성과도 있었다. 독일로 추방된 즈비그뉴는 이후 볼레스와프의 허락으로 폴란드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으나 이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시력을 상실하게 되는 형벌을 받고 곧이어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 통치 시대 때 폴란드의 내정은 안정되었고 정복 활동을 벌여 북쪽 지방의 영토를 상당부분 획득하였다. 나드비슬란스키에 포모제, 오드라 강 유역 등이 폴란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1122년에는 슈체친까지 폴란드령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사망 전 유언을 남겼다. 그는 자기 형과의 왕위 쟁탈전으로 겪은 비극적 경험을 자식들에게 대몰림하지 않기 위해 자식들에게 동등하게 영토를 분할해주었다. 특히 장남에게는 대공(Maximus Dux)이라는 지위와 함께 외교, 군사, 교회, 사법, 행정, 입법 등을 관할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3세의 바람과는 달리 자식들은 권력 투쟁을 벌였다. 분할된 국토는 각각의 공국으로 변질되었고 폴란드는 볼레스와프 3세 사후 약 200년 동안 끊임없는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이른바 분할 공국 시대가 열렸다.
볼레스와프 3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Wławysław II Wygnaniec)는 혈연 상 처남 뻘이 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의 지원을 믿고 폴란드 통일을 시도하였다. 1146년 동생 볼레스와프 켄지에자비(Bolesław Kędzierzawy, 볼레스와프 4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그는 독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를 다시 왕위에 앉히기 위해 폴란드를 침공했고 폴란드의 저항에 부딪혔으나 절반 정도는 성공하였다.
115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한 프리드리히 1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요청에 따라 1157년 폴란드 원정을 감행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군이 포즈난까지 들어오자 볼레스와프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조공을 바치는 것과 황제에게 알현하겠다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군을 돌려보냈다.
볼레스와프 4세 사망 이후 피아스트 왕조의 권리는 볼레스와프 4세의 동생이자 대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미에슈코 3세에게 돌아갔다. 미에슈코 3세는 중앙 집권화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폴란드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반대파들은 미에슈코 3세를 포모제 지방으로 추방하고 카지미에시 스프라비에들리비(Kazimierz Sprawiedliwy, 카지미에시 2세)를 대공의 자리에 앉혔다. 카지미에시 2세는 1180년 웬치차 회의에서 폴란드 왕위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가톨릭 교회를 부흥시키고, 연장자 우선 제도를 폐지시켰다. 이러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그는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폴란드의 내정을 채 안정시키기도 전에 그는 1194년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 레첵 1세는 크라쿠프 주교들의 지지를 받으며 권좌에 올랐다. 그는 연장자 원칙을 무시했고, 이에 따라 미에슈코의 군대는 대폴란드로 밀려났다. 이후 미에슈코는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잃었던 크라쿠프를 재점령하지만, 곧이어 사망했다. 미에슈코의 사망 이후 폴란드는 세 개의 공국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카지미에시 2세는 정복 활동을 벌여 브제비치를 점령하였다. 갈리치아 공국(Галицьке князівство)의 공작 야로슬라프 오스모미슬(Jarosław Ośmiomysł)이 사망한 후에는 자신의 조카 로만 므시치스와보비츠(Roman Mścisławowicz)가 집권하도록 돕기까지 했다.
그의 정복 활동은 이웃 국가 헝가리 왕국의 왕 언드라시 2세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헝가리와 폴란드의 대립관계는 양국의 지배 가문 사이의 혼인 동맹으로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13세기 이후 동유럽은 몽골-타타르군의 침입으로 일대 혼란을 빚게 되었다. 1240년 키예프 대공국이 치열한 전투 끝에 몽골-타타르군에게 함락되었다. 1241년 바투[4]가 이끄는 몽골-타타르군이 폴란드를 침입하여 레그니차 전투가 발발하였다. 1241년 5월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가 함락당하고, 이어 실롱스크가 함락당했다. 실롱스크에서 휴식을 취한 몽골군은 헝가리로 진격하여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벨러 4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폴란드는 주변 국가들과 함께 연합군을 결성하여 몽골군의 침입에 맞써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실롱스크의 헨리크 2세(Henryk II Pobożny)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몽골-타타르군은 이후에도 1259년, 1287년 폴란드를 침입하였고 이 때문에 폴란드의 전국토가 황폐화되었다. 번번한 몽골-타타르군의 침입에 폴란드 농촌 주민들이 피신하여 농촌은 공동화되고, 토지 소유 형태도 변하여 대농장이 출현하였다. 분열된 폴란드를 다시 통합한 것은 1320년 왕위에 오른 브와디스와프 1세(Władysław I)였다. 그는 1304년부터 차례차례 폴란드 지역을 봉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와 결혼시킴으로써 헝가리와의 관계를 공고히하는 동시에 보헤미아를 견제하였다.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들 카지미에시 3세는 대왕이라 호칭되는 위대한 왕이었다. 그는 보헤미아, 튜튼 기사단과 안정적인 외교 관계를 구축했으며 1340년~ 1349년 동안 루스 지역의 할리츠 공국을 정복하였다. 1351년에는 마조프셰를 합병하면서 폴란드 왕국은 루스 서쪽 지역을 상당부분 차지하게 되었다.
카지미에시 대왕 사후 왕위는 조카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1세에게 넘어갔다. 이로써 러요시 1세는 헝가리의 왕이자 폴란드의 왕 루드비크가 되었다. 루드비크는 자신의 딸에게 폴란드 왕위를 넘겨주고 싶어했다. 이는 폴란드 귀족들의 반발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폴란드 귀족들의 특권을 대폭 늘려줌으로써 둘째 딸 야드비가의 왕위 계승 지지를 얻어냈다. 1382년 루드비크가 사망하고 1384년 야드비가가 10세의 나이로 폴란드 여왕이 되었다.
본래는 루드비크의 첫째 딸 마리어가 폴란드 여왕에 즉위할 예정이었으나, 그녀가 헝가리 여왕이 되었기 때문에 야드비가가 폴란드 여왕이 되었다. 야드비가는 이후 폴란드 귀족들의 바람에 따라 1385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야기에우워와 결혼하여 야기에우워 왕조를 열였다.
2.2. 야기에우워 왕조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부터 루블린 조약으로 두 나라가 연방으로 통일하기까지의 시기. 야기에우워 왕조 문서 참조2.3.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폴란드-리투아니아 문서를 참고할 것.3. 참고 문헌
- 정병권, <폴란드사 (세계각국사)>,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