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9:48:32

볼레스와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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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볼레스와프 4세 켄지에자비
Bolesław IV Kędzierza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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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볼레스와프 4세.jpg
출생 1122년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사망 1173년 1월 5일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146년 ~ 11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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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
어머니: 베르크의 살로메아
배우자 노브고로드의 비아체슬라바
마리아
자녀 2남 1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 보편교회)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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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2. 생애

1122년경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와 베르크 백작 하인리히의 딸인 베르크의 살로메아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이복 형으로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가 있었고, 친형제로 미에슈코 3세,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 카지미에시 2세 등이 있었다. 1136년 노브고로드 공작 프셰볼로드 므스티슬라비치의 딸인 노브고로드의 비아체슬라바와 결혼했다.

1138년 10월 28일, 볼레스와프 3세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죽기 전에 일명 <볼레스와프의 승계법>으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오랫동안 궁정백으로서 국정을 담당하던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가 이 유언장의 수탁자이자 집행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폴란드 공국을 다음과 같이 분할했다.
  • 소폴란드 서부, 대 폴란드 동부, 쿠야비야 서부, 시에라츠는 볼레스와프 3세의 장남이자 폴란드 대공위 계승자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할당된다. 또한 볼레스와프 3세의 아내인 베르크의 살로메아는 웽치차의 영주로 선임되며, 살로메아가 사망한 후에는 브와디스와프 2세가 물려받는다.
  • 1124년부터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였던 실레시아는 그대로 브와디스와프 2세의 통치를 받는다.
  • 마조프셰와 쿠야비야 동부로 구성된 일명 마조프셰 공국은 볼레스와프 3세의 차남인 볼레스와프 4세에게 할당된다.
  • 대폴란드 서부는 볼레스와프 3세의 셋째 아들 미에슈코 3세에게 할당된다.
  • 산도미에시를 중심으로 하는 소폴란드 동부는 볼레스와프 3세의 넷째 아들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에게 상속된다.
  • 폴란드 공국의 수도 크라쿠프를 포함해 폴란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앙 폴란드 일대는 누구에게도 분할되지 않는다.
  • 볼레스와프 3세의 다섯째 아들 카지미에시 2세는 어떤 영지도 상속받지 못했다. 학자들은 카지미에시 2세가 볼레스와프 3세 사후에 태어났거나 애초에 사제로 길려지기로 예정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5개의 공국으로 분할되었다. 이때 볼레스와프 3세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대공이 나머지 공작들보다 상위의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공의 특권에는 포메라니아 가신들을 봉신으로서 통제하고, 다른 공작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권리, 국경 방어 권리, 외교 정책을 수행할 권리, 성직자 감독, 화폐 주조 등이 포함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 조치를 통해 모두가 영지를 공정하게 분할 상속받고 서로 협력함으로써, 자신이 과거에 즈비그뉴와 내전을 벌인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초기에는 마조프셰 공작으로서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복종했다. 그러던 1142년, 키예프 대공 프세볼로트 2세의 딸 즈비에니스와바와 자기 아들 볼레스와프를 결혼시킨 브와디스와프 2세는 키예프 루스의 힘을 빌려 이복 형제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폴란드를 완전히 통합할 음모를 꾸몄다. 1142년 겨울, 브와디스와프 2세는 마조프셰를 침공해 체르스크 요새를 파괴했고, 루스군은 많은 포로를 키예프로 끌고 갔다. 이로 인해 형제들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144년 7월 27일, 베르크의 살로메아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르면, 살로메아가 관리하던 웽치차는 그녀가 사망하면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 등은 이에 반대했다. 막내 동생 카지미에시 2세가 아무런 영지도 받지 못했다며, 그에게 웽치차를 물려줘야 하니 자신들이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무력으로 두 사람을 침묵시키기로 마음먹고, 프세볼로트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한 뒤 루스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두 이복 형제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마조프셰의 보이보이드인 비세보르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전세가 불리해졌지만, 프세볼로트 2세가 파견한 루스군이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의 군대를 격파한 덕분에 겨우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의 협상 결과, 윙체차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로 귀속되었고, 볼레스와프 4세는 위즈나를, 미에슈코 3세는 칼리슈와 그니에즈노를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추가로 넘겨야 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프세볼로트 2세에게 폴란드의 여러 거점을 넘겨줘야 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는 두 이복 형제를 완전히 축출하려 했지만,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을 집행하는 임무를 맡았던 궁정백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가 거세게 반대하며 볼레스와프 3세의 뜻에 따라 화목하게 지내라고 촉구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런 그가 존재하는 한 자신이 이복 형제들을 밀어내고 폴란드를 통합시키기는 요원하다고 판단했다.

1145년, 브와디스와프 2세는 피오트르를 돌연 체포한 뒤 실명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이 사건에 반감을 품었고, 피오트르는 키예프 루스의 세력권에 속한 루테니아로 망명한 뒤 루스 공자들을 설득해 브와디스와프 2세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게 했다. 1146년 초, 브와디스와프 2세는 루스군의 지원 없이 이복 형제들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의 군대는 마조프셰를 석권하고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가 포즈난으로 피신하게 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를 포함한 교회 인사들은 당장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중단하라고 촉구했지만, 그가 무시하자 파문을 선고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가 포즈난으로 진군해 두 형제와 대치했을 때, 그의 휘하에 있던 폴란드 귀족들이 대거 두 형제의 편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두 형제가 그의 영지를 쳐들어오고 수많은 귀족들이 반란에 동참하자, 그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아내 아그네스와 자식들과 함께 크라쿠프로 간 뒤 그곳에서 농성했으나 끝내 함락을 피할 수 없게 되자 프라하로 망명했고, 뒤이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그후 볼레스와프 4세가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폴란드 대공을 칭했고,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였던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인수했다. 여기에 웽치차는 그와 미에슈코 3세,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에 의해 분할되었다. 아직 미성년자였던 카지미에시 2세는 영지를 배분받지 못했고, 볼레스와프 4세의 보살핌을 받았다.

한편, 브와디스와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의 궁정에 도착한 뒤 경의를 표하면서 자신이 권좌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폴란드가 신성 로마 제국의 완전한 봉신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콘라트 3세는 이에 혹해 폴란드로 군대를 파견하려 했지만, 오데르 강이 범람한 데다 브란덴부르크의 알베르트 1세와 마이센의 콘라트가 자신을 상대로 반기를 들자 원정을 중단했다. 그 후 콘라트 3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브와디스와프 2세를 더이상 돕지 않았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알텐부르크 성과 그 주변 지역을 영지로 수여받고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여전히 권좌를 되찾을 꿈을 포기하지 않고 교황청에 사절을 보냈다. 교황 특사 귀도는 이에 호응해 정당한 통치자를 불법적으로 몰아낸 그의 이복 형제들과 폴란드 주교들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폴란드에서 그를 복위시키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교황청의 처벌을 무시한 폴란드 주교들을 엄중하게 질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153년 에우제니오 3세가 사망하고 새 교황에 오른 하드리아노 4세는 폴란드에 걸었던 저주를 무효화하고 1155년 4월 브로츠와프 주교구와 체르빈스크의 수도원 대학을 보호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1152년 콘라트 3세가 사망한 뒤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에 등극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아내 아그네스의 간절한 설득에 폴란드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1157년 폴란드로 진군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포즈난으로 피신한 뒤 곧 제국군에게 포위되었다. 이후 황제와 협상한 끝에 목에 십가자 형태로 밧줄을 묶은 채 큰 가방에 넣어져서 황제 앞으로 간 뒤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굴욕적인 의식을 해야 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폴란드의 주권자임을 인정하고 수천 그지브나(grzywna)를 벌금으로 지불해야 하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마그데부르크에 출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그가 폴란드 대공으로 남는 데 동의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약속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며, 이를 보증하고자 남동생 카지미에시 2세를 인질로 보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가 돌아간 후, 그는 약속과는 달리 마그데부르크에 출두하지 않았다.

한편, 볼레스와프 4세는 대공이 된 후 고대 프로이센을 정복하고 기독교화하려는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다. 1147년부터 군사 원정을 지속적으로 벌여 많은 프로이센 부족들의 조공을 받아냈다. 그러나 1166년 친히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으로 진군했다가 마수리아 늪지대에서 프로이센인들의 매복 공격으로 인해 전군이 궤멸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때 동생인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가 전사했고, 그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헨리크가 가지고 있던 영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지만, 산도미에시 귀족들이 이에 반발해 1167년 가을 얀제이우프(Jędrzejów)에서 의회를 소집해 산도미에시 공국 전체를 카지미에시 2세에게 넘기고 미에슈코 3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려 했다. 그는 프로이센인들에게 참패해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은 상황에서 반란군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보고 그들과 협상했다. 그 결과 카지미에시 2세는 비실리카를 수여받았고, 미에슈코 3세는 알려지지 않은 영지들을 받았으며, 그는 산도미에시 지방을 게속 가질 수 있었다.

1163년, 볼레스와프 4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두 아들인 볼레스와프와 미에슈코가 실레시아와 루부슈로 돌아와서 영주로 군림하는 걸 허락했다. 그 대신 실레시아와 루부슈의 주요 도시인 브로츠와프, 레그니차, 글로구프, 오폴레, 라시보르즈를 계속 지배함으로써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계속 통제했다. 두 조카는 초기에는 삼촌에게 공손하게 대했지만, 삼촌이 프로이센인들과의 전쟁에서 완패하자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볼레스와프 4세가 통제하고 있던 도시들을 모조리 확보하고 볼레스와프 4세를 따르던 관료들을 축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볼레스와프 4세는 진압군을 파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두 조카가 실레시아와 루부슈를 완전 지배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1172년 미에슈코와 볼레스와프의 장남 야로스와프가 볼레스와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실레시아가 혼란에 휩싸이자, 볼레스와프 4세는 반군을 지원해 조카 볼레스와프가 국외로 도망치는 데 기여했다. 1173년, 조카 볼레스와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지원을 받고 실레시아로 돌아와서 브로츠와프 공작으로서 실레시아를 계속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형제 미에슈코와 장남 야로스와프에게 자신의 영지를 떼어주는 것에 동의해야 했다. 또한 볼레스와프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8,000달란트 상당의 벌금을 지불하고 실레시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59~1178년,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 내세운 대립교황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복종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가 내세운 교황들을 일관되게 지지했다. 1160년 2월 그가 보낸 사절들은 대립교황 빅토르 4세가 개최한 파비아 공의회에 참석해 빅토르 4세를 교황으로 인정했다. 1164년 빅토르 4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른 파스칼 3세 역시 폴란드 측의인정을 받았다. 프워츠크의 베르너 주교는 파스칼 3세가 아헨에서 주관한 카롤루스 대제의 시성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파스칼 3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내세운 갈리스토 3세를 지지했는지는 문헌상에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1172년 프리드리히 1세가 폴란드로 진군해 그로부터 복종을 재차 받아낸 뒤 갈리스토 3세를 인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1172년 큰아들 볼레스와프가 22살의 나이에 사망해버리자 깊은 충격을 받았고 1173년 1월 5일 크라쿠프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영지를 유일하게 살아남은 레첵에게 마조프셰를 상속하고 카지미에시 2세가 그를 돌봐주며, 레첵이 조기에 자녀 없이 사망할 경우 카지미에시 2세가 레첵의 영지를 물려받으라고 밝혔다. 그가 사망한 후 형제 미에슈코 3세가 폴란드의 새 대공으로 등극했다.

3. 가족

  • 노브고로드의 비아체슬라바(1125 ~ 1158년에서 1166년 사이): 노브고로드 공작 프셰볼로드 므스티슬라비치의 딸.
    • 볼로스와프(1150 ~ 1172): 요절
    • 레첵(1160 ~ 1186): 마조프셰 공작(1173 ~ 1186)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 슘스크 및 드로히친 공작 바실코 이아로폴코비치의 아내.
  • 마리아(? ~ 1167년 이후):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일부 학자들은 키예프 루스 대공 로스티슬라프 1세 므스티슬라비치의 딸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1167년 볼레스와프 4세와 결혼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