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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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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986년 또는 987년 | ||
사망 | 1032년 (향년 45세~46세) | ||
폴란드 대공국 | |||
재위기간 | 폴란드 공작 | ||
1031년 ~ 103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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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어머니: 헝가리의 유디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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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 피아스트 가문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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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미에슈코 2세를 몰아내고 대공에 올랐으나 폭정을 일삼다 자국민에게 피살되었다.2. 생애
986년 또는 987년경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와 헝가리 대공 게저의 딸 또는 트란실바니아 대공 줄러의 딸인 유디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메르제부르크의 티에트마르에 따르면, 볼레스와프는 헝가리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베즈프림을 낳았지만, 얼마 안가 그녀를 쫓아냈다고 한다. 그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어머니가 쫓겨난 뒤 계모 엠닐다[1]과 자식들의 등쌀에 시달려 불운하게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는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라벤나 인근 폰페트리의 은둔자 로무알드가 집필한 <성자의 삶>에 따르면, 1001년경 폴란드 대공의 아들이 성자와 함께 머물며 그에게 말을 주었다고 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아들이 베즈프림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이 사람이 베즈프림이라 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며 다른 사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1025년 폴란드 왕을 자처한 볼레스와프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미에슈코 2세가 두 형제 베즈프림과 오토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두 사람을 추방했다고 하고, 또다른 연대기에는 두 사람이 숙청을 당할 것을 우려해 국외로 피신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오토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를 추종했다가 추방되었지만, 베즈프림은 루테니아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던 103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와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가 서로 연합해 폴란드 왕국을 동시에 공격했다. 콘라트 2세가 루세티아와 미스코를 공략하는 사이, 야로슬라프 1세가 이끄는 루스군은 폴란드 중심부로 밀려들어왔다. 미에슈코는 수도 포즈난을 버리고 도주했고, 미에슈코의 아내 리체차와 자식들은 작센으로 도피했다. 루스군은 포즈난에 입성한 뒤 베즈프림을 권좌에 앉혔다.
베즈프림은 권력을 잡은 직후 폴란드 왕복과 왕관을 콘라트 2세에게 넘기고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폴란드 대공을 자처한 그는 수많은 인사를 살해했다. 그 결과 많은 사회 엘리트들이 피살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크라쿠프 장 연감에 따르면, 로만과 람베르트라는 이름의 두 명의 주교가 1032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두 사람이 이 시기에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로 인해 국가 체계가 파괴되었고, 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었다. 결국 1032년 봄, 그는 폭정에 분노한 자국민에 의해 피살되었다. 학자들은 당시 독일에 있던 이복형제 오토 볼레스와비치가 살인을 의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의 아내와 자식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매장지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1]
모라비아 또는 루사티아 귀족 도브로미르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