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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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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26년 6월 21일 | ||
폴란드 대공국 스타리 코르친 | |||
사망 | 1279년 12월 7일 | ||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 |||
재위기간 | 폴란드 공작 | ||
1243년 ~ 127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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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레첵 1세 어머니: 루츠크의 그지미스와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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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쿠니군다 | ||
가문 | 피아스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보편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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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2. 생애
2.1. 폴란드 대공이 되기 이전
1226년 6월 21일 폴란드 대공국 스타리 코르친에서 폴란드 대공 레첵 1세와 루츠크 공작 잉와르 야로스와비츠의 딸인 그지미스와바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나로 살로메아가 있었다. 1227년 11월 24일, 대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간의 내전을 중재하기 위해 고싸바에서 회담을 열었던 폴란드 대공 레첵 1세가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포메라니아 공작 시비엥토페우크 2세가 피아스트 왕조의 지배로부터 포메라니아를 독립시키기 위해 암살했다고 밝혔다. 반면 후대의 여러 학자들은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암살을 주도했을 거라고 주장한다.브와디스와프 3세는 레첵 1세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일전에 맺은 합의에 근거해 레첵 1세의 영지를 승계받았다고 선언했다. 1228년 초, 그는 실레시아 공작 헨리크 1세의 지원군을 받고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를 공격해 단숨에 격파하고 생포했다. 이후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레첵 1세의 후계자인 볼레스와프 5세가 아직 1살에 불과한 점을 들어 자신이 볼레스와프 5세를 대신해 폴란드 대공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는 자신이 레첵 1세의 형제인 점을 내세우며 이에 불복하고, 대공위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크라쿠프로 진군했다. 이후 1228년 5월 5일 비실리차에서 열린 회의에서 진행된 선거 결과, 대부분의 폴란드 귀족들과 주교들은 브와디스와프 3세를 폴란드 대공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그 대신, 브와디스와프 3세는 교회에 몇 가지 특권을 보장하고 레첵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 5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했으며, 소폴란드 귀족과 성직자들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법률을 도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폴란드에서 처음으로 군주가 선거에 의해 선임되었다. 이후 볼레스와프 5세는 어머니 그지미스와바와 함께 산도미에시 공국을 받았고,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다.
1229년, 감옥에 갇혀 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가 감옥에서 탈출해 프워츠크로 도피한 뒤 브와디스와흐 3세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조카를 토벌하러 가야 했지만,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가 언제라도 크라쿠프로 쳐들어와서 대공 직을 탈취할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실레시아의 헨리크 1세를 크라쿠프 총독으로 세우고, 대폴란드에 대한 상속을 약속했다. 이는 그가 앞서 비실리차에서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 볼레스와프 5세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정하겠다는 약속을 위반한 것이었다.
1228년 여름, 콘라트 1세가 군대를 일으켜 크라쿠프로 쳐들어갔다. 이에 헨리크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헨리크 2세가 반격을 가해 바위 전투, 브로치에레즈 전투, 미엥지보르제 전투 잇따라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콘라트 1세는 포기하지 않고 1229년 재차 원정을 개시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급기야 스피트코비체에서 평화 협상을 논의하기 위해 찾아온 헨리크 1세를 사로잡았다. 이후 헨리크 1세의 아내인 실레시아의 헤드비히의 간절한 청원에 따라 헨리크 1세를 석방했지만, 소폴란드 대부분을 공략하고 폴란드 대공을 칭했다.
콘라트 1세는 처음에는 볼레스와프 5세가 산도미에시 공국을 계속 다스리게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산도미에시를 자신의 아들인 볼레스와프에게 넘겼다. 그러다 1231년 브와디스와프 3세로부터 폴란드 대공위와 대폴란드, 소폴란드를 다스릴 권리를 물려받은 실레시아 공작 헨리크 1세가 공세를 개시하자, 그지미스와바는 헨리크에게 아들을 맡기기로 하고 그를 지지했다. 여기에 콘라트 1세의 강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품은 소폴란드 귀족들이 대거 호응했다. 이리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한 헨리크는 1232년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폴란드 대공으로 선포되었다. 콘라트 1세는 웽치차와 시에라츠만 간신히 지배할 수 있었다.
1233년, 콘라트 1세는 그지미스와바와 볼레스와프 5세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두 사람은 회담에 참석하러 갔다가 현장에서 콘라트 1세의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심한 구타를 당한 뒤, 처음에는 체르스크에 투옥되었다가 나중에는 시에시에호프의 어느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지미스와바는 포로 생활 동안 콘라트 1세에게 뺨을 얻어맞는 등 많은 굴욕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가 루부슈의 클레멘스를 비롯한 그라피치 가문이 경비원들이 술에 취하게 만들어준 덕분에 수도원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헨리크 1세에게 피신한 뒤 스카와의 성에 은거했다.
1234년 8월, 바르타 강변의 루카나에서 헨리크 1세와 콘라트 1세간의 평화 협약이 이뤄졌다. 이에 따르면, 콘라트는 헨리크 1세가 폴란드 대공이 되는 것을 인정했고, 그 대신 웽치차와 시에라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폴란드에서 양측간의 크고 작은 충돌은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산도미에시가 콘라트에게 공격당해 라돔 성채가 함락되었다. 1238년 헨리크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헨리크 2세가 폴란드의 새 대공이 되었다. 그는 부친처럼 볼레스와프 5세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1239년, 13세의 볼레스와프 5세는 보이니치에서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딸인 5살된 헝가리 공주 쿠니군다와 약혼했다. 정식 결혼은 1247년에 이뤄지기로 에정되었다. 1239년 7월 9일에 프셰드보르츠에서 피아스트 가문 일원들의 회의가 열렸다. 이때 콘라트 1세는 산도미에시 공국 내 점령지를 볼레스와프 5세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2.2. 폴란드 대공
2.2.1. 대공위 쟁탈전
1241년 1월, 몽골 제국군이 산도미에시 공국 내의 루블린과 자비코스트를 파괴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약혼자와 함께 할리치나 공작 칼만의 아내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살로메아에게 망명했다. 그해 2월 13일, 몽골군은 산도미에시를 점령하고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4월 9일 레그니차 전투에서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가 전사하고 폴란드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뒤이은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참패했을 때 칼만이 전사하자, 볼레스와프 5세는 누이 살로메아와 함께 모라비아로 갔다가 폴란드로 돌아왔다.헨리크 2세가 전사한 후, 헨리크 2세의 장남인 볼레스와프 2세 로가트카가 폴란드 대공이 되었고 루부슈의 클레멘스가 볼레스와프 2세를 대신해 통치했다. 하지만 콘라트 1세가 이 때를 틈타 크라쿠프로 진군했고, 1241년 7월 10일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몇 달 만에 클레멘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러나 콘라트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볼레스와프 5세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클레멘스를 위시한 소폴란드 귀족들은 이에 격분해 볼레스와프 5세를 받들어 봉기를 일으켰다. 1243년 5월 25일, 콘라트는 수호도우 전투에서 대폴란드 공작 프셰미수 1세와 오포에 공작 미에슈코 2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클레멘스가 이끄는 볼레스와프 5세의 군대에게 참패했다. 이리하여 콘라트 1세는 소폴란드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 볼레스와프 5세는 17살의 나이에 폴란드 대공이 되었다.
콘라트 1세는 어떻게든 볼레스와프 5세를 몰아내고 폴란드 대공이 되려 했다. 1246년, 콘라트 1세는 리투아니아와 오폴레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뒤 아들 카지미에시와 함께 소폴란드를 침공했다. 자리슈프 전투에서 볼레스와프 5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를로프(Lelów), 티니에크(Tyniec), 크라쿠프를 공략하고 루다와 강 어귀에 요새를 건설했다. 그러나 더 진군하는 것을 망설이다가 시에리츠로 철수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약혼자 쿠니군다로부터 대출을 받고 노비 송치(Nowy Sącz) 일대를 그녀에게 제공했다. 그 해 가을, 보레스와프 5세는 반격을 가해 를로프를 탈환했다.
1247년 8월 31일, 콘라트 1세가 사망했다. 이해에 약혼자 쿠니군다와 정식으로 결혼한 볼레스와프 5세는 콘라트 1세의 아들로서 폴란드 대공이 되려는 야망을 물려받은 카지미에시를 상대로 항전했으며, 1254~1255년에 카지미에시에게 사로잡힌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와 그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데 일조했다. 1258년,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가 헨리크 2세가 카지미에시에게 양도했던 카스탤란을 도로 빼앗기 위해 카지미에시와 전쟁을 시작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즉시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 편에 섰고, 카지미에시의 본거지인 쿠야비야를 약탈했다. 양자는 1259년 11월 29일에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260년, 카지미에시가 그의 영지를 급습해 를로프 요새를 공략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1260년 12월 12일, 볼레스와프 5세는 프셰드보르츠 회의에서 카지미에시와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여 평화 협약을 맺도록 했다.
2.2.2. 헝가리 왕국과의 동맹
한편, 볼레스와프 5세는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사위로서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245년, 볼레스와프 5세는 헝가리 왕자이며 할리치나 공위 계승 후보였던 로스시스와프의 원정을 지원했으나 그 해 7월 17일 야로스와프 전투에서 다니엘 1세 로마노비치에게 패배한 뒤 웽치차에서 다니엘 1세를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인정하고 전쟁을 종식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1253년 6월과 7월 초, 볼레스와프 5세는 키예프 루스에서 파견한 군대와 함께 헝가리의 오스트리아 원정을 지원하고자 모라비아를 공격했다. 이 전쟁은 별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폴란드-루스군은 많은 전리품을 탈취했다.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는 크라쿠프 주교 파벨의 도움으로 볼레스와프 5세를 설득해 보헤미아 포로들을 돌려받았다.1260년 헝가리 왕자 이슈트반이 카린시아 일대를 약탈하면서 헝가리와 보헤미아간의 또다른 갈등이 일어났다. 그 해 6~7월, 볼레스와프 5세는 시에라츠 공작 레첵 2세와 함께 보헤미아에 맞서 싸우는 헝가군을 지원했으나 7월 12일 크레센브룬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패배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262년 1월 29일 이와노비체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보헤미아를 지지하는 실레시아의 헨리크 3세에 맞서 싸우는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6월 7일에는 단쿠프에서 회의를 열고 헨리크 3세와의 평화 협상이 이뤄졌다. 이때 오포예 공작 브와디스와프가 볼레스와프 5세와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를 납치해 보헤미아로 끌고 가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와 이슈트반 왕자간의 내전이 벌어지자, 볼레스와프 5세는 1266년 3월 아니 쿠니군다와 함께 부다에서 열린 평화 회의에 참석해 두 사람간의 갈등을 중재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이 자리에서 볼레스와프 5세, 레첵 2세,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 그리고 오타카르 2세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1270년 벨러 4세의 뒤를 이어 헝가리 왕이 된 이슈트반 5세가 볼레스와프 5세가 있는 크라쿠프로 찾아가 영구적인 평화 협약을 맺었다. 같은 해에 이슈트반 5세가 바벤베르크 땅을 놓고 보헤미아와 전쟁을 재개했으나 패배하자, 볼레스와프 5세는 1271년 루스 공작들과 함께 보헤미아 왕국을 지원하는 브로츠와프 공작 헨리크 4세를 공격했다. 1272년 4월 6일 이슈트반 5세가 사망한 뒤, 헝가리 왕국이 심각한 내우외환에 휩싸이자, 볼레스와프 5세는 1277년 오파바에서 보헤미아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볼레스와프 5세는 소폴란드 북동쪽 국경지대 너머에 있는 요트빙거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1248~1249년, 그는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가 요트빙거족에 대항하는 원정을 지원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후 1256년과 1264년에 요트빙거족이 소폴란드를 침략하고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자, 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64년 원정군을 파견해 요트빙거 지도자 코마트를 사살했다. 이후 우쿠프에 주교구를 조직하고 누이 살로메아와 함께 요트빙거족을 상대로 기독교 포교에 힘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2.3. 킵차크 칸국의 침략
1258년, 킵차크 칸국의 통치자인 베르케 칸이 부하 부룬다이가 이끄는 군대를 서쪽으로 파견했다. 할리치나 공작 다니엘 1세 로마노비치는 즉시 귀순했고, 부룬다이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루테니아를 상대하는 원정에 동참했다. 부룬다이는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를 순조롭게 복속시킨 뒤, 루테니아인들을 대거 징집한 후 1259년 11월 폴란드로 쳐들어가 산도미에시, 루블린, 크라쿠프를 초토화했고, 볼레스와프 5세는 레첵 2세가 통치하는 시에라츠로 피신했다. 1260년 2월 몽골군이 소폴란드를 떠나자, 볼레스와프 5세는 소폴란드로 귀환했다.볼레스와프 5세는 1262년 타르나와에서 몽골을 도왔던 다니엘과 평화 협약을 맺었지만, 1265년 다니엘이 사망한 뒤 리투아니아-루테니아 군대가 소폴란드를 재차 침공하여 스카르셰프, 타르체크, 비실리카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1265~1266년, 그는 루테니아 공작들, 다니엘의 아들인 스즈와른, 와실레크의 2번째 공세에 맞서 싸웠지만 1266년 6월 19일 스즈와르노 전투에서 패배를 면치 못했다. 1266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고, 그는 요트빙거 족에 대한 지배권 주장을 포기했다. 1273년 7월, 리투아니아인들이 루블린 일대를 침공해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레첵 2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73년 12월 리투아니아를 공격했다. 1278년 리투아니아인들은 재차 루블린을 공격했지만 레첵 2세에게 패배했다.
2.2.4. 내치
볼레스와프 5세는 도시 개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253년 2월 27일 보흐니아에 도시 특권을 부여했으며, 1257년 6월 5일 크라쿠프 시에게 마그데부르크 법에 의거해 특권을 부여했고, 1258년 노비 코르친 시, 1264년 스카리셰프, 1271년 옌제이우프 시에 특권을 부여했다. 이들 도시들은 이에 힘입어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1251년 보흐니아에서 소금 광산이 발견되자 즉시 자신의 영지에 통합시켜 영구 수입원으로 삼았다.그는 통치 기간 동안 교회에 많은 후원을 했다. 1252년 8월 28일 오글렌도프에서 열린 회의에서 어머니 그지미스와바와 함께 크라쿠프 주교직에 대한 면칙 특권을 발령해 경제 및 사법 문제에서 성직자들의 폭넓은 독립성을 보장했다. 1253년 9월 17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볼레스와프 5세와 크라쿠프 주교의 탄원을 받아들여 슈체파노프의 스타니스와프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1254년 5월 8일 스타니스와프를 기리는 축하 행사가 크라쿠프에서 거행되었다. 그 해 6월 18일에는 오글렌도프의 크라쿠프 주교단에게 부여된 면제 특권을 승인했다.
1257년 웽치차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주교를 납치한 통치자는 자동으로 파문을 선고받고, 그가 통치하는 구역에서는 성무 금지령이 발동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1258년 6월 11~13일 산도미에시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소폴란드 교회에 대한 특권을 승인했다. 한편, 그는 누이 살로메아와 함께 자비코스트에 가난한 성 클라라 수도원을 세웠고, 바벨 성의 목조 및 흙 요새를 대대적으로 재건하기도 했다.
2.2.5. 말년
볼레스와프 5세의 아내인 쿠니군다는 어렸을 때부터 순결을 평생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녀는 비록 정치적인 이유로 그와 결혼하기는 했지만, 하느님에게 맺은 맹세를 어길 수는 없다고 선언했고, 신앙심이 투쳘했던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후계자를 볼 가망이 없었던 그는 1265년 시에라츠 공작 레첵 2세를 양자로 삼고 크라쿠프-산도미에시 공국의 정당한 후계자로 삼았다.1273년, 오포예 공작 브와디스와프가 폴란드 대공위를 노리고 크라쿠프로 쳐들어갔다. 크라쿠프의 귀족들은 엄격하기로 유명한 레첵 2세가 폴란드 대공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브와디스와프에게 호응했다. 그 해 6월 4일, 볼레스와프 5세는 보구친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의 군대와 귀족들의 반란군을 격파했지만, 흐샤누프를 포함한 크라쿠프 일대의 일부 영토를 빼앗겼다. 이후 볼레스와프 5세와 레첵 2세가 군대를 집결시켜 오포예로 진격할 준비를 하자, 브와디스와프는 협상을 제안했다. 1274년, 볼레스와프 5세와 레첵 2세는 브와디스와프가 폴란드 대공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흐샤누프를 돌려주는 대가로, 브와디스와프가 점령한 크라쿠프 영지를 계속 가지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279년 12월 7일, 볼레스와프 5세가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크라쿠프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레첵 2세가 폴란드 대공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