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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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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24년 | ||
폴란드 대공국 실레시아 | |||
사망 | 1278년 12월 26일 | ||
폴란드 대공국 레그니차 | |||
재위기간 | 폴란드 공작 | ||
124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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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헨리크 2세 어머니: 아네슈카 프르셰미슬디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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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헤드비히 | ||
자녀 | 4남 3녀 | ||
가문 | 피아스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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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브로츠와프 공국의 볼레스와프 1세(1127년 – 1201년)의 넘버링을 이어 볼레스와프 2세이다.2. 생애
1224년경 실레시아 공자 헨리크 2세와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1세의 딸인 아네슈카 프르셰미슬디카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거트루드, 콘슈탄치어, 미에슈코, 헨리크 3세, 콘라트 1세, 엘리자베타, 아그네스, 브와디스와프, 헤드비히가 있었다. 1238년 아버지가 폴란드 대공에 선임된 후, 그는 폴란드 대공위 계승자로 인정되었다. 그러던 1241년 4월 9일, 헨리크 2세가 몽골 제국군을 상대로 레그니차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폴란드 대공이 되었고, 어머니 안나 프르셰미슬디카가 섭정을 맡았다.몽골군은 실레시아 일대를 약탈했지만 얼마 후 바투 칸이 군사 작전을 펼치고 있던 헝가리 왕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헨리크 1세와 아버지 헨리크 2세가 구축했던 세력은 산산조각났다. 1241년 7월 10일,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는 폴란드 대공국의 수도인 크라쿠프에 입성한 뒤 소폴란드 귀족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여기에 대폴란드에서는 지난날 헨리크 1세에게 대적했던 브와디스와프 오도니치의 두 아들인 프셰미수 1세와 볼레스와프 포보즈니가 대폴란드를 갈라먹고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였다.
볼레스와프 2세는 레그니차 전투의 참상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을 대적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콘라트 1세 마소비에츠키에게 폴란드 대공위를 넘겨줬다. 하지만 소폴란드 귀족들은 콘라트 1세가 정적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해, 전임 폴란드 대공 레첵 1세의 아들인 볼레스와프 5세를 내세워 반기를 들었다. 이후 1242년부터 통치를 직접 하면서 대폴란드를 되찾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초기에는 산토크, 미엥지르제츠 등 대폴란드 서부 지역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대폴란드 귀족들이 프셰미수 1세와 볼레스와프 포보즈니 중 한 사람을 지지할 뿐 그를 얼씬도 보지 않는데다 실레시아 공국 내부에서도 분란이 일었기 때문에, 결국 1247년 대폴란드 공략을 포기했다.
그는 처음에는 형제들에게 영지를 나눠주길 거부하고 실레시아에서 모든 권력을 자기 손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1242년 동생 미에슈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즉시 그의 영지였던 루부슈를 자기 것으로 삼고, 다른 형제들에게 영지를 나눠주지 않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형제들의 추종자들은 1247년 봉기를 일으켜 그를 체포해 레그니차 탑에 가두었다. 결국 그는 동생 헨리크 3세와 임시 협정을 맺고 공동 통치를 하도록 허용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그러나 형제간의 협력은 잘 이뤄지지 않았고, 1248년 실레시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웽치차, 그워구프, 루부슈 일대는 볼레스와프 2세에게 넘어갔고, 브로츠와프는 헨리크 3세에게 넘어갔다.
볼레스와프 2세는 이 결과에 깊은 불만을 품고 헨리크 3세를 타도하려 했다. 이를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루부슈 영지의 절반을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에게 넘기고, 그 대가로 상당한 용병을 고용했다. 이렇게 준비를 갖춘 뒤, 볼레스와프 2세는 헨리크 3세와 전쟁을 단행했다. 그러던 1249년, 콘라트가 파리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 실레시아에 돌아왔다. 헨리크 2세는 생전에 콘라트를 성직자로 삼으려 했고, 파리 대학에 신학 공부를 시켜주려고 보낸 바 있었다. 그러나 이 해에 귀국한 콘라트는 영주가 되기를 원했기에 그에게 영지를 내줄 것을 요구했다. 볼레스와프 2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콘라트는 대폴란드 공국으로 가서 프셰미수 1세의 여동생인 살로메아와 결혼했다.
1251년, 프셰미수 1세가 콘라트의 설득을 받아들여 헨리크 3세 편에 섰다. 여기에 볼레스와프 2세가 특정 가신들만 편애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가시들이 헨리크에게 돌아서면서, 결국 그는 전쟁에서 패배했고, 헨리크 3세에게 체포된 뒤 몇 달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콘라트를 그워구프 공작으로 삼는 걸 받아들이고 레그니차 이외의 모든 영지를 헨리크 3세에게 헌납해야 했다. 이제 그는 레그니차 공작으로서의 권위만 유지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에게 고용되어 영지를 부여받았던 독일 용병 기사들이 자신으로부터 독립하려 들었기 때문에, 그는 남은 영지나마 보전하기 위해 헨리크 3세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볼레스와프 2세는 형제들과의 분쟁에서 항상 동생들을 지지한 브로츠와프 주교 토마시에게 반감을 품었으며, 교회가 과도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여기고 특권 일부를 반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토마시가 이를 거부하자, 1257년 토마시를 납치한 뒤 블렌스키 그로덱 성의 탑에 반년간 가두었다. <유명한 폴란드 왕국의 연대기> 작가인 얀 드우고시(Jan Dł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그는 이후에 토마시를 레그니차로 옮긴 뒤 더 무거운 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분개한 그니에즈노 대주교 펠카는 볼레스와프 2세를 파문하고 브로츠와프 교구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는 이를 무시했지만, 독일의 여러 제후가 이를 빌미로 파문을 당한 자를 심판하겠다는 명분으로 십자군을 일으키려 하자, 어쩔 수 없이 그로이즈노 대주교와 협상했다. 1261년, 그는 막대한 보상금을 브로츠와프 주교구에 지불하고 브로츠와프 대성당의 문에서 공개적으로 참회하는 선에서 파문을 취소받을 수 있었다.
볼레스와프 2세는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그워구프 공작 콘라트를 용서하지 않았고, 콘라트 역시 그를 완전히 몰아내고 레그니차 마저 가져가려 했다. 두 사람의 영지간에는 무력 충돌이 자주 벌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나, 사료가 부족해서 2가지 이야기만 전해진다. 1257년, 콘라트는 레그니차 성에서 볼레스와프 2세를 납치했다. 볼레스와프 2세는 몇 달 후에야 풀려났지만, 그 대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1271년, 볼레스와프 2세는 콘라트로부터 보브르 강 인근의 볼레스와비에츠를 탈취했다.
1273년, 그는 야부르 일대를 아들 헨리크 5세에게 할당했다. 이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277년 독일왕 루돌프 1세와 동맹을 맺고 보헤미아 국왕 오타카르 2세와 동맹을 맺은 나머지 실레시아 공작들과 대립했다. 그는 조카인 헨리크 4세로부터 브로츠와프 영지를 탈취하기로 마음먹고, 헨리크 4세를 납치해 레그니차 성에 가두었다. 이에 그워구프 공작 헨리크 3세와 포즈난 공작 프셰미수 2세가 연합해 헨리크 4세를 구출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고, 1277년 4월 24일 스톨레츠 전투에서 볼레스와프 2세와 그의 아들 헨리크 5세가 이끄는 레그니차군과 맞붙었다.
<실레시아 연대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2세는 이 전투에서 패배를 두려워해 전장을 떠났다. 그러나 헨리크 5세는 포기하지 않고 레그니차군을 지휘했다. 이후의 전투에서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프셰미수 2세와 헨리크 3세가 생포되었다고 한다. 볼레스와프 2세는 비록 승리를 거뒀지만 오타카르 2세가 개입하면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때마침 오타카르 2세가 두 공작들이 루돌프 1세의 궁정에 넘겨지기 전에 실레시아의 상황을 정상화하고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의하자, 볼레스와프 2세는 곧바로 받아들였다.
협상 결과, 그는 헨리크 4세와 스톨레츠 전투에서 사로잡힌 이들 전원을 석방하는 대가로 스로다 실롱스카 등 브로츠와프 공국의 1/3을 받아냈다. 이후 1277년 9월 12일 이전에 모라비아-실레시아 일대의 오파바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오타카르 2세로부터 독일왕 루돌프 1세와의 전쟁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2세는 성취감을 오래 맛보지 못하고 1278년 12월 26일 레그니차에서 사망했다. 사후 레그니차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헤드비히(? ~ 1259): 안할트 백작 하인리히 1세의 딸.
- 아그네스(1243/1250 ~ 1265): 뷔르템베르크 백작 울리히 1세의 아내.
- 헨리크 5세(1248 ~ 1296): 야부르 공작(1273 ~ 1296), 레그니차 공작(1278 ~ 1296), 브로츠와프 공작(1290~1293)
- 헤드비히(1250/1255 ~ 1280년 이후):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2세의 부인.
- 볼코 1세(1252/1256 ~ 1301): 르보베크-야부르 공동 통치자(1278 ~ 1281), 야부르 공작(1281 ~ 1301), 르보베크 공작(1286 ~ 1301), 시비드니차 공작(1291 ~ 1301)
- 베른하르트(1253/1257 ~ 1286): 르보베크-야부르 공동 통치자(1278 ~ 1281), 르보베크 공작(1281 ~ 1286)
- 콘라트(? ~ ?): 요절
- 카테리나(? ~ 1286): 레그니차의 도미니코 수도원에 안장됨.
- 에우페미아(1245 ~ 1309): 포메라니아 공작 삼보르 2세의 딸. 1261년 볼레스와프 2세와 결혼. 1270년 볼레스와프 2세가 디른(Dyhrn) 가문의 귀족 소피아와 불륜 관계를 맺고 야로슬라프(유년기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짐)를 낳자, 이에 마음의 상처를 입고 1275년 포메라니아로 도피한 뒤 교황청에 의해 결혼이 무효화됨. 이후 볼레스와프 2세는 1278년 소피아와 결혼했지만 몇 달 만에 사망했고, 에우페미아는 볼레스와프 2세 사후 살레시아로 돌아가 여생을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