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8 20:06:11

카지미에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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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카지미에시 1세
Kazimierz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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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zimierz I.jpg
출생 1016년 7월 25일
폴란드 대공국 포즈난
사망 1058년 3월 19일
폴란드 대공국 포즈난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034년 ~ 10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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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어머니: 로타링기아의 리체차
배우자 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
자녀 4남 1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 보편교회)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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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아버지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사후 이교도의 봉기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진 폴란드를 재건하여 '복원자(Odnowiciel)'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2. 생애

1016년 7월 25일 폴란드 대공국 포즈난에서 폴란드 공자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와 로렌의 팔라틴 에존의 딸 리체차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헝가리 국왕 벨러 1세의 왕비인 리헤자, 키예프 루스 대공 이자슬라프 1세의 아내인 거트루드가 있었다. <대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미에슈코 2세 사후 첫째 아들 볼레스와프가 대공이 된 후 어머니에게 많은 모욕을 가한 끝에 동생과 함께 작센으로 쫓아냈다가 곧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과 교차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현대 학계에서는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1026년 수도원 중 한 곳에 보내져서 교육받다가 1031년 아버지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와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의 협공으로 인해 무너지고 베즈프림이 폴란드의 권력을 장악하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작센으로 피신했다. 1032년 미에슈코 2세가 복위했지만 보헤미아로 피신했다가 보헤미아 공작 올드르지흐에게 붙잡혀 거세된 여파에 시달리다 1034년 5월 10일 또는 1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그가 폴란드 여대공이란 호칭을 사용한 어머니 리체차와 함께 군림했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대폴란드 전역에 이교도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 신자들을 학살했으며, 슬라브 족의 고유 종교로의 복귀를 꾀했다. 마조프셰에서는 미에슈코 2세의 전 관리인이었던 미에츠와프가 독자적인 나라를 세워 폴란드로부터 떨어져나갔으며, 포메라니아의 원주민들 역시 독립했다.

1038년,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폴란드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먼저 이교도를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폴란드로 진군하여 수많은 인명을 학살하고 철저하게 약탈했으며, 포즈난과 크루슈비차 주교구를 파괴했다. 이후 폴란드의 수도 그니에즈노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미에슈코 1세가 성당에 기증했던 금 십자가를 비롯한 수많은 귀중품과 보석을 약탈했다.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니에즈노, 포즈난, 크루슈비차는 이후로 오랫동안 버려졌으며 야생 동물들이 은신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여기에 더해 레드니카 호수 위의 섬에 있던 성과 석조 교회를 파괴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한 기츠에 살던 수많은 공예가들을 보헤미아로 이주시켜 헤드차니에 정착히켰다. 이 시기에 실레시아와 소 폴란드가 보헤미아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당시 카지미에시 1세는 폴란드의 대혼란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헝가리 왕국으로 피신해 이슈트반 1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1038년 8월 이슈트반 1세가 사망한 후 어머니 리체차가 있던 독일로 갔다. 103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경의를 표한 뒤 그로부터 중무장한 독일 기사 500명과 재정 지원을 받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하인리히 3세는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과도하게 강해지는 것을 우려했기에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에 키예프 루스 대공 야로슬라프 1세도 그를 지원하기로 했고, 자신의 여동생인 키예프의 마리아 도브로니에가를 그와 결혼시켰다. 이후의 전쟁 과정은 전해지지 않으나, 1041년 레겐스부르크 협약이 체결되면서 보헤미아 측이 실레시아를 제외한 모든 폴란드 영토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카지미에시 1세는 이교도의 대반란과 보헤미아의 침략으로 인해 초토화된 대폴란드를 대신해 소폴란드의 크라쿠프를 본거지로 삼았다. 1046년에는 실레시아를 되찾으려 했으나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양자는 마이센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047년 야로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고 마조프셰를 공격해 미에츠와프를 무너뜨림으로써 마조프셰를 폴란드의 영역에 재귀속시켰다. 뒤이어 포메라니아로 진군해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일대를 재정복했다.

1050년 실레시아를 재차 침공해 일시적으로 공략했지만,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카지미에시가 자신의 정당한 영지를 침략하고 있다"고 제소했고, 하인리히 3세는 그 해 11월 고슬라르에서 카지미에시 1세를 소환해 보헤미아와 적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후 1054년 5월 22일 크베들린부르크 회의에서, 카지미에시 1세와 브르제티슬라프 1세는 하인리히 3세의 중재하에 협상한 끝에 카지미에시 1세가 실레시아를 갖고, 보헤미아는 그 대가로 매년 은 500 그지브나(grzywna)와 금 30 그지브나를 폴란드로부터 제공받기로 했다.

1046년 크라쿠프의 새 주교로 아일랜드 출신의 수도사 아론을 앉혔으며, 1051년 브로츠와프 주교구를 복원하고 리칭을 중심지로 삼게 했다. 또한 헝가리 왕국의 언드라시 1세를 상대하는 하인리히 3세의 원정에 병력을 지원했다. 한편, 그는 정규군을 영구적으로 두기에는 재정이 열악하다고 판단하고, 군 복무의 대가로 기사들에게 땅을 부여하는 봉건제를 폴란드에 도입했다.

1058년 3월 19일 포즈난에서 사망했고,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큰아들 볼레스와프 2세 시초드리가 새 대공에 등극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