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9:48:21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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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
Władysław II Wygnani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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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jpg
출생 1105년
폴란드 대공국 크라쿠프
사망 1159년 5월 30일
신성 로마 제국 알텐부르크
재위기간 폴란드 공작
1138년 ~ 11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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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
어머니: 키예프의 즈비슬라바
배우자 바벤베르크의 아그네스
자녀 4남 1녀
가문 피아스트 가문
종교 기독교 ( 보편교회)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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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 대공국 피아스트 가문의 대공. 이복 형제들에게 폴란드 영지를 공정하게 분배해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길 바랐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폴란드를 무력으로 통합하려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복 형제들이 일으킨 반란군에 패배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2. 생애

1105년경 폴란드 대공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 키예프 루스 대공 스뱌토폴크 2세의 딸인 키예프의 즈비슬라바의 아들로 출생했다. 친누이로 무롬 공작 브셀볼로트 다비도비치의 아내인 유디트가 있었다. 그는 1125년에서 1127년 사이에 오스트리아의 후작 레오폴드 3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딸 아그네스 사이의 딸인 바벤베르크의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이후 실레시아를 영지로 수여받았으며, 아버지가 1133년 ~ 1135년 보헤미아 공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 실레시아 방비를 맡았지만 보헤미아군이 오데르 강 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파괴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137년 니엠차에서 폴란드와 보헤미아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을 때 보헤미아 군주 소비에슬라프 1세의 아들인 바츨라프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다.

1138년 10월 28일, 볼레스와프 3세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죽기 전에 일명 <볼레스와프의 승계법>으로 명명된 유언장을 작성했다. 오랫동안 궁정백으로서 국정을 담당하던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가 이 유언장의 수탁자이자 집행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폴란드 공국을 다음과 같이 분할했다.
  • 소폴란드 서부, 대 폴란드 동부, 쿠야비야 서부, 시에라츠는 볼레스와프 3세의 장남이자 폴란드 대공위 계승자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할당된다. 또한 볼레스와프 3세의 아내인 베르크의 살로메아는 웽치차의 영주로 선임되며, 살로메아가 사망한 후에는 브와디스와프 2세가 물려받는다.
  • 1124년부터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였던 실레시아는 그대로 브와디스와프 2세의 통치를 받는다.
  • 마조프셰와 쿠야비야 동부로 구성된 일명 마조프셰 공국은 볼레스와프 3세의 차남인 볼레스와프 4세에게 할당된다.
  • 대폴란드 서부는 볼레스와프 3세의 셋째 아들 미에슈코 3세에게 할당된다.
  • 산도미에시를 중심으로 하는 소폴란드 동부는 볼레스와프 3세의 넷째 아들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에게 상속된다.
  • 폴란드 공국의 수도 크라쿠프를 포함해 폴란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앙 폴란드 일대는 누구에게도 분할되지 않는다.
  • 볼레스와프 3세의 다섯째 아들 카지미에시 2세는 어떤 영지도 상속받지 못했다. 학자들은 카지미에시 2세가 볼레스와프 3세 사후에 태어났거나 애초에 사제로 길려지기로 예정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5개의 공국으로 분할되었다. 이때 볼레스와프 3세는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대공이 나머지 공작들보다 상위의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공의 특권에는 포메라니아 가신들을 봉신으로서 통제하고, 다른 공작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권리, 국경 방어 권리, 외교 정책을 수행할 권리, 성직자 감독, 화폐 주조 등이 포함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이 조치를 통해 모두가 영지를 공정하게 분할 상속받고 서로 협력함으로써, 자신이 과거에 즈비그뉴와 내전을 벌인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희망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폴란드 대공에 선임된 브와디스와프 2세는 1141년 계모인 베르크의 살로메아가 웽치차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한 뒤 볼레스와프 3세가 생전에 낳은 막내딸인 아그네스를 키예프 루스 대공 프세볼로트 2세의 아들들 중 하나와 약혼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에 개입해 결혼이 성사되지 않도록 훼방놓았고, 1142년에 큰아들 볼레스와프와 프세볼로트 2세의 딸인 즈비에니스와바와 결혼시켰다. 이리하여 키예프 루스과 결혼 동맹을 맺게 된 그는 본격적으로 이복 형제들을 몰아내고 폴란드를 독차지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 1142년 겨울, 브와디스와프 2세는 마조프셰를 침공해 체르스크 요새를 파괴했고, 루스군은 많은 포로를 키예프로 끌고 갔다. 이로 인해 그와 두 이복 형제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1144년 7월 27일, 베르크의 살로메아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르면, 살로메아가 관리하던 웽치차는 그녀가 사망하면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 등은 이에 반대했다. 막내 동생 카지미에시 2세가 아무런 영지도 받지 못했다며, 그에게 웽치차를 물려줘야 하니 자신들이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무력으로 두 사람을 침묵시키기로 마음먹고, 프세볼로트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한 뒤 루스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두 이복 형제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마조프셰의 보이보이드인 비세보르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전세가 불리해졌지만, 프세볼로트 2세가 파견한 루스군이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의 군대를 격파한 덕분에 겨우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의 협상 결과, 윙체차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영지로 귀속되었고, 볼레스와프 4세는 위즈나를, 미에슈코 3세는 칼리슈와 그니에즈노를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추가로 넘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프세볼로트 2세에게 폴란드의 여러 거점을 넘겨줘야 했다.

한편,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장을 집행하는 역할을 맡았던 피오트르 블로스토비치는 그와 이복 형제들이 반목하지 말고 볼레스와프 3세의 뜻에 따라 화목하게 지내라고 촉구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런 그가 존재하는 한 자신이 이복 형제들을 밀어내고 폴란드를 통합시키기는 요원하다고 판단했다. 1145년, 그는 피오트르를 돌연 체포한 뒤 실명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한 뒤 국외로 추방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이 사건에 반감을 품었고, 피오트르는 키예프 루스의 세력권에 속한 루테니아로 망명한 뒤 루스 공자들을 설득해 브와디스와프 2세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게 했다.

1146년 초, 브와디스와프 2세는 루스군의 지원 없이 이복 형제들을 몰아내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그의 군대는 마조프셰를 석권하고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가 포즈난으로 피신하게 했다.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쿠브를 포함한 교회 인사들은 당장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중단하라고 촉구했지만, 그가 무시하자 파문을 선고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가 포즈난으로 진군해 두 형제와 대치했을 때, 그의 휘하에 있던 폴란드 귀족들이 대거 두 형제의 편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두 형제가 그의 영지를 쳐들어오고 수많은 귀족들이 반란에 동참하자, 그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아내 아그네스와 자식들과 함께 크라쿠프로 간 뒤 그곳에서 농성했으나 끝내 함락을 피할 수 없게 되자 프라하로 망명했고, 뒤이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3세의 궁정에 도착한 뒤 경의를 표하면서 자신이 권좌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폴란드가 신성 로마 제국의 완전한 봉신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콘라트 3세는 이에 혹해 폴란드로 군대를 파견하려 했지만, 오데르 강이 범람한 데다 브란덴부르크의 알베르트 1세와 마이센의 콘라트가 자신을 상대로 반기를 들자 원정을 중단했다. 그후 그는 알텐부르크 성과 그 주변 지역을 영지로 수여받았고 콘라트 3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잠자코 지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권좌를 되찾을 꿈을 포기하지 않고 교황청에 사절을 보냈다. 교황 특사 귀도는 이에 호응해 정당한 통치자를 불법적으로 몰아낸 그의 이복 형제들과 폴란드 주교들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폴란드에서 그를 복위시키려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52년 콘라트 3세가 사망한 뒤 프리드리히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에 등극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아내 아그네스의 간절한 설득에 폴란드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1157년 폴란드로 군대를 파견했다. 원정군은 볼레스와프 4세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폴란드의 주권자임을 인정하고 수천 그지브나(grzywna)를 벌금으로 지불해야 하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마그데부르크에 출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볼레스와프 4세가 폴란드 대공으로 남는 걸 받아들였으며, 브와디스와프 2세 문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2세는 권좌를 되찾으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59년 5월 30일 알텐부르크에서 사망했고, 페가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바벤베르크의 아그네스(1108/1113 ~ 1160):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드 3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딸인 아그네스의 딸.
    • 볼레스와프 1세 비소키(1127 ~ 1201): 실레시아 공작(1163 ~ 1172), 브로츠와프 공작(1173 ~ 1201)
    • 미에슈코 4세 플롱토노기(1131년에서 1146년 사이 ~ 1211): 실레시아 공작(1163 ~ 1173), 폴란드 대공(1210 ~ 1211)
    • 리체차(1140 ~ 1185): 갈리시아, 카스티야, 레온의 국왕 알폰소 7세와 초혼,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렝게르 2세와 재혼, 에버스타인 백작 알베르트 3세와 삼혼.
    • 콘라트 라스코노기(1146년 또는 1157년 ~ 1190): 글로구프 공작(1177 ~ 1190)
    • 알베르트(1158):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