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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 - 1623 | ||||||
성직 선제후 | 세속 선제후 | ||||||
마인츠1 | 쾰른1 | 트리어1 | 보헤미아 | 팔츠2 | 작센 | 브란덴부르크 | |
17세기에 추가 | |||||||
바이에른3 | 하노버4 | ||||||
1803년 이후 추가 | |||||||
레겐스부르크5 | 잘츠부르크6 | 뷔르츠부르크7 | 뷔르템베르크5 | 바덴5 | 헤센5 | ||
신성 로마 황제 1: 1803년 소멸 2: 1777년 팔츠-바이에른으로 통합 3: 1623년 선제후국 승격 4: 1692년 선제후국 승격 5: 1803년 ~ 1806년 6: 1803년 ~ 1805년 7: 1805년 ~ 180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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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선제후국 Kurfürstentum Bayern |
||
국기 | 국장 | |
위치 | ||
1623년 ~ 1806년 | ||
역사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바이에른 공국 | 바이에른 왕국 | |
<colbgcolor=#0099d5><colcolor=#fff> 지리 | ||
위치 | 독일 바이에른 | |
수도 | 뮌헨(1623~1806) | |
인문환경 | ||
언어 | 라틴어, 독일어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민족 | 독일인 | |
정치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선제후 | |
국성 | 비텔스바흐 가문 | |
주요 선제후 |
막시밀리안 1세(1623~1651)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1679~1726)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1799~1805) |
[clearfix]
1. 개요
오늘날의 바이에른에 존재했던 선제후국.[1]2. 역사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다스리던 바이에른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던 루트비히 4세가 죽으며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하면서 갈라졌으나, 1503년 루트비히 4세의 6대손 바이에른-뮌헨 공작 알브레히트 4세 아래 재통합되었다. 이후 종교 개혁 시기에 알브레히트 4세의 아들 빌헬름 4세는 루터교회로의 개종을 고민하였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가톨릭으로 남으면 트리어나 쾰른 선제후를 보장해주겠다고 회유하여 가톨릭으로 남았고, 이후 후계자인 알브레히트 5세와 빌헬름 5세를 거쳐 바이에른은 엄격한 가톨릭 국가로 남았다.빌헬름 5세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1세는 부친의 뒤를 이어 대항종교개혁을 실시했으며 동생 에른스트는 1583년부터 쾰른 선제후 자리에 오르면서 향후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은 200여 년 동안 쾰른 선제후직을 숙질계승으로 준세습화했다. 1619년 황제 선거에서 막시밀리안 1세는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2]를 지지하여 30년 전쟁 초반 승승장구한 덕분에 1623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선제후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에른은 30년 전쟁의 와중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과 뒤이어 참전한 프랑스군에게 연달아 털리며 결국 잿더미로 변했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선제후 직위를 공인받았으나[3] 페르디난트 마리아는 30년 전쟁의 참화로부터 피해를 복구하는 것으로 치세를 보내야 했다.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아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대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큰 공적을 세웠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스페인의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와 결혼하여 아들 요제프 페르디난트(Joseph Ferdinand von Bayern 1692~1699)를 얻었고,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자녀가 없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이 스페인 제국을 상속받을 길이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불과 7세에 사망했으며 카를로스 2세는 레오폴트 1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와 스페인 제국을 몰래 분할하려 한 것에 격분하여[4]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다. 이 시점에서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두번째로 결혼한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선거에 출마하여 동유럽으로 나아갈수도 있었으나[5], 독일에 집중하여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습화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자신의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으로 대체하려던 야심을 품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편에 서서 참전했으나 오히려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합스부르크- 제국군과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 이끄는 잉글랜드- 네덜란드 연합군에게 블렌하임에서 털리면서 뮌헨을 빼앗기고 두 아들이 포로로 붙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2세의 계획이 헛되지는 않아[6] 그가 죽은 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 맏아들 카를 알브레히트는 황제선거에서 바이에른과 보헤미아 왕국 본인의 2표, 동생 쾰른 선제후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1표,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의 1표[7], 프리드리히 대왕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1표,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의 작센 선제후국 1표, 트리어 선제후의 1표까지 총 6표를 얻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등극했다. 그러나 대관식을 하러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간 사이 본진 뮌헨이 털리며 영지 없는 황제가 되어버렸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이후 바이에른을 물려받은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도전하지 않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바이에른을 돌려받았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이었던 팔츠 선제후국의 카를 테오도어가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물려받았고[8], 이로써 루트비히 4세 이래 분할되었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토가 통합되었다. 그리고 카를 테오도어는 1778년 만하임을 떠나 뮌헨에 정착하여 뮌헨이 명실상부한 비텔스바흐 가문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카를 테오도어도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바이에른-팔츠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막시밀리안 요제프[9]가 상속했고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나폴레옹 전쟁을 이용해 바이에른을 왕국으로 승격시켰다.
3. 역대 선제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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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텔스바흐 왕조 | |||
막시밀리안 1세 | 페르디난트 마리아 |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카를 알브레히트 | |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 카를 테오도어 |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 | ||
바이에른 공작 · 바이에른 국왕 | }}}}}}}}} |
[1]
선제후가 아니었던 이전의 바이에른과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지난 시대를 바이에른 '
공국'이라 구별하지만, 사실 선제후국 시절의 바이에른도 구조상 공국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 강역 내에서는 특별히 허가 받은
보헤미아 왕국, 명목상 작위였던
독일 왕국 이외에 어느 누구도 '왕'을 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도와 칭왕을 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조차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1806년 8월 6일까지 제국 내에서는 프로이센 국왕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 불렸다.
[2]
어린 시절
예수회로부터 교육받았으며 막시밀리안 1세와는
잉골슈타트 대학교 동문지간이었다.
[3]
정작 팔츠 선제후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선제후 자리는 복권되었다. 다만 이때
팔츠 선제후국이 빼앗긴
오버팔츠는 바이에른 영토로 공인되었다.
[4]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를 거치다 보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보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와 혈통상으로 더 가까워지기도 했고, 스페인 귀족들과 카를로스 2세는
9년 전쟁을 버틴
프랑스군의 체급을 보고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스페인의
이탈리아 반도 영토를 지킬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게다가 카를로스 2세는 두번째 부인인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가 자신을 무시하고 사사건건 국정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해
독일인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5]
실제로 얀 3세의 부인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은 띨띨한 아들 야쿠프보다는 사위인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을 선호했고 이때문에 얀 3세와 말년에 자주 다투었다. 결국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의 우려는 틀리지 않아 야쿠프는 얀 3세 사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에게 국왕 선거에서 패배했다.
[6]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그렇게 털리면서도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
영국 국왕
조지 1세와 같이 타국의 왕위를 겸한 선제후들을 보면서 버텼다고 전해진다.
근성
가이
[7]
16~17세기에 치고 박았던 지메른계와 달리 노이부르크계는 가톨릭이어서 그나마 접점이 있었다.
[8]
다만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팔츠계와 바이에른계 중 한쪽의 대가 끊겨 통합된다면
황제선거에서 1표만 행사하도록 단서 조항을 달아놓았다.
[9]
카를 테오도어의 손녀사위이기도 했다. 다만
살리카법으로 인해
독일어권에서 여계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