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18:26:54

신성 로마 제국/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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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대제와 황제 지기스문트(Karl der Große und Kaiser Sigismund) 알브레히트 뒤러
왼쪽 그림은 카롤루스 대제 이야기할 때 많이 쓰는 그 그림이다.[1][2]

1. 오토 1세가 초대 황제?2. 불안정한 나라?3. 독일인만의 나라?
3.1. 초기 구성국3.2. 이탈리아3.3. 당시의 ' 민족' 개념에 대해서
4. 로마 제국과 그 어떤 연관도 없다?
4.1. 서론4.2. 로마인의 지배자가 로마 황제4.3. 거룩한 성지이자 가톨릭 이념의 중심지4.4. 정리
5. 볼테르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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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토 1세가 초대 황제?

'신성 로마 제국의 수립'이라는 사건은 어느 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지도 위에 불쑥 생긴 것이 아니다. 오토 1세의 대관은 독일 국왕이었던 오토 1세에게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추가적으로 부여한 것일 뿐이며, 이 대관식이 없던 나라를 탄생시킨 것이 아니다. 이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고대 서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를 교황 권위를 통해 복구하는 의미이므로, 이 정치체제의 군주는 정식으로 말하자면 초기에는 프랑크 국왕, 후에는 로마왕이며, 이 직함을 얻은 사람이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황제로 취임했던 것이다.

따라서 오토 1세를 제국의 초대 황제로 간주하는 시각은 800년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고 축성된 뒤 서유럽 지역의 '황제'로 선포된 사건을 흑역사 취급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카롤루스 이후에도 '황제'의 지위는 계승되었으며, 924년 베렝가리오 1세의 암살 이후 제관 수여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962년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제관을 수여받으며 황제의 지위가 복원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이란 제국을 최초로 건립한 초대 황제가 아니라 단지 서유럽에 재건된 제국의 황제 지위를 작센 왕조로 복원시킨 군주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이후 실질적으로 독일 왕국의 또다른 이름처럼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며, 프랑크 왕국의 분열 이후 이탈리아 왕국을 지배했어도 프랑스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과의 연관성이 강화된 서유럽의 제국'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토 1세는 프랑크 왕국 분열 이후 사실상 실질적 역량을 상실한 제국을 독일 왕국 중심으로 재편시킨 군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며, 이 기준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독일적 성격과 연관지어 정의한다면 오토 1세를 창업 군주로 평가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기점을 962년이 아닌 800년으로 잡는 의견은 현재까지도 사학계 내외에서 존재하는 논쟁이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성격을 독일적인 것으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로마적인 것으로 파악할 것인지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논쟁으로, 단순히 연도의 문제를 벗어난 민감한 사안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나라의 교육 과정에서는 962년을 공식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의 중등 교육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전술했듯이 924년 이후 중단되있던 서로마 제위가 오토 1세 이후 단절 없이 지속되었고, 이 오토 왕조를 계승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대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이 확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프리드리히 1세 이전에는 독일 왕이 서로마 제위를 겸하는 형태였다.

또한 다른 관점에서는, 프랑크 왕국이 843년 이후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로 갈라졌고 처음에는 양쪽 왕이 형제였지만 세대를 거듭해 감에 따라 친연관계가 옅어지고[3] 그러다가 또 동프랑크에서는 911년에 부계후손이 절손되어 콘라드를 왕으로 뽑음에 따라 카롤루스 왕조는 끝났다. 콘라드가 카롤루스 가문의 외손이긴 했다. 독일계 국가에서 이후로도 나타나는 선거군주제의 선거 후보들은 다 이렇게 전 왕(가)의 외손, 사위, 먼 부계 친척 등으로 직간접적 혈연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이 살리카법의 본가인 만큼 부계가 바뀌면 왕조가 바뀌는 거다.

서프랑크에서는 987년까지 좀 더 오래 갔고, 동프랑크와 마찬가지로 새 왕으로 뽑은 위그 카페 또한 구 카롤루스 왕가의 외손이었다. 이에 따라 프랑크-로마의 정통성을 둘러싼 대결구도가 생겼고, 여기서 교황의 눈에 서프랑크보다 먼저 든 독일의 오토 왕이 정통성을 선점했다고도 볼 수 있다.

2. 불안정한 나라?

결론부터 말하면, ' 중세'라고 불리는 10세기~ 15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은 주변국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나라였다. 하지만 중세 후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은 근대에 접어들어서도 중앙집권에 실패하고 하나의 국민국가로 통합되지 못하면서 분열의 길을 걷게 되는 씨앗을 남기고 만다.

이건 굳이 저연령층 대상인 먼나라 이웃나라를 들먹이지 않아도 세계사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들이 잘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중세사의 여러 관념은 사람들이 잘 이해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단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신성 로마 제국은 그 자체로 중세 초기~후기 동안 서유럽에서 제일 크고 부유한 나라였으며, 황제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동원하면 동로마 제국과도 비견될 수 있었고, 황제는 명실상부하게 전 유럽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필리프 2세 전만 해도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은 전 유럽을 통치하는 나라였다. 더욱이 교황까지 멋대로 갈아치울 수준의 권력도 있었다.

군사력도 당대 기준에서는 강력한 축이었다. 제국 전역에서 불러모은 제국군과 황제 가문의 사병인 황제군은 이를 뒷받침했다. 프리드리히 1세 때에는 10만 대군을 모아 십자군 원정을 시도했을 정도. 이 병력이 참전한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이었다. 단 현대 역사가들은 10만은 뻥이고 1만 5천 정도로 보고 있다. 물론 잉글랜드에 프랑스 절반을 가진 리처드 1세가 총동원을 내린 병력이 1만 남짓이란 걸 생각하면 원정에 1만 5천 명을 데려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다만 이 부분은 좀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중세 유럽의 군대는 귀족적인 성격이 강해서 군대를 따라오는 하인과 잡역부(여러가지 일을 대신 해주는 노동자들)들의 수는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동아시아는 취토군이니 철장군이니 국가에서 동원하면 전부 군인으로 쳤다). 그래서 하인과 잡역부의 수를 모두 합치면 실제로 프리드리히 1세를 따라 3차 십자권 원정에 나선 군대의 총 인원수는 1만 5천 명보다 약 2~3배 정도 더 많았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4] 즉, 외부의 침입에 대한 방어전이 아닌 해외 원정, 그것도 유럽에서 중동으로 넘어가는 초장거리 원정에 최대 4만 5천의 인원을 투입했다는 소리로[5] 10만 대군은 아니지만 단순히 1만 5천 데려온 수준을 넘어서서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제국 내에서는 대영주-황제-교황은 서로를 견제하며 세력의 균형을 이루었고 그 세력 균형이 깨질 때는 프리드리히 1세 때처럼 황제가 황권을 확대하기 위해 선수를 칠 때나 제위 계승이 불안정할 때뿐이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너무 자주 일어났다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본다면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이 오히려 높은 축에 속함을 알 수 있다. 당장 프랑스 왕국의 경우 위그 카페 시절에는 주교가 대놓고 왕을 무시하고 국왕을 선거제로 뽑아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카페 왕조 초기에는 프랑스 국왕 역시 신성 로마 제국과 마찬가지로 선거군주제였다. 다만, 왕조가 오래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이 많았던 초기 신성 로마 제국과는 달리 프랑스 왕국은 운좋게 혈통을 보존하는데 성공했고 부자계승이 여러 세대 동안 지속되면서 카페 왕조의 지위가 공고해진 것이다. 그나마도 백년전쟁 때까지 프랑스 국왕 자체의 세력은 오히려 다른 대영주들에 비해 크게 못미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루이 7세 시절에는 옆나라 잉글랜드가 잉글랜드+노르망디+앙주+아키텐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단 한 사람, 그것도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국왕보다도 프랑스 내에 차지한 땅이 넓었다(...) 그나마 이때는 루이 7세의 뒤를 이은 필리프 2세가 뛰어난 명군이었던 덕에 그의 온 능력을 발휘해 잉글랜드 왕실을 개판으로 만들고[6] 무능한 존 왕으로부터 이기는데 성공하여 아키텐 빼고 다 뜯어내서 나아졌지만...

게다가 프랑스는 카롤링거 왕조랑 관련 없는 웬 듣보잡 파리 백작 위그 카페[7]가 왕위를 계승한 바람에, 국왕이 다른 대영주들의 눈치를 보느라 왕국 전체에 적용되는 칙령이나 법을 선포할 수도 없었으며 의회( 삼부회)를 소집하기도 어려웠다.[8] 그에 비해 샤를마뉴식 봉건관료제의 고향인 독일-이탈리아 지역은 군주 개인의 카리스마와 선거로 뽑는다는 정통성, 교황에게 대관 받았다는 정통성을 통해서 지방 영주들을 반쯤은 관료제처럼 통제할 수 있었다.

프랑스 왕국 외의 10~13세기 당시의 주요 나라를 보자면 동으로는 폴란드와 헝가리, 북으로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 잉글랜드 정도가 있겠다. 동로마야 이미 2천년을 앞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강력한 관료제와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정을 채택한 상태였다. 귀족들한테 빌빌거리기 쉬웠던 서유럽과 동유럽의 여타 군주들과는 권력의 수준에서 격이 달랐던 것. 다른 나라들을 보자면 대부분 갓 부족제에서 벗어나 봉건주의를 도입해서 왕권이 신성 로마 제국보다 훨씬 약하거나(헝가리, 폴란드), 분할 상속과 남쪽 이슬람 세력과의 상시적인 전쟁 상태 때문에 나라 자체가 안정적이지 못한(이베리아)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특이한 케이스는 잉글랜드나 스칸디나비아로, 잉글랜드는 노르망디 정복자 윌리엄의 정복으로 일종의 '정복 왕조'를 세운 입장에서 군주가 귀족에 비해 훨씬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강한 수준은 아니었다. 잉글랜드는 분할 상속으로 몸살 앓기도 했고 왕과 교회와 귀족 간의 갈등이 있었다. 예시로 헨리 2세 시기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지만 헨리 2세와 리처드 1세의 갈등, 존 왕의 실정에 이를 파고든 필리프 2세가 합쳐져 결국 아키텐 빼고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 내 영토는 다 뜯기고 그 와중에 정신 못 차린 존 왕이 주위에서 말리는 거 안 듣고 프랑스에 덤볐다가 깨지는 바람에 참다 못한 귀족들은 마그나 카르타를 내밀었다. 또한 에드워드 2세도 계속 실책을 저지르다가 결국엔 참다못한 귀족들에게 폐위되고 살해된다. 그래도 로마와 거리가 워낙 머니까 교회와의 갈등에서는 왕이 유리하긴 했고, 그랬기에 튜더 왕조의 헨리 8세가 교황한테 개기면서 성공회를 설립하는 것이 가능했다. 스칸디나비아의 경우는 봉건제를 실시하지 않았으나(심지어 스웨덴은 귀족이 공식적 제도로 도입된건 1240년이다.), 원래부터 인구가 많지 않았던 지역이였기에 국력이 그리 강하지는 못했다.

또한 먼나라 이웃나라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허울에 즐거워하고 (북) 이탈리아 반도에만 신경을 쓰느라 독일 지역의 영주들이 힘을 키우는 것을 방관했다'고 써놓은 부분은 맥락을 무시한 굉장히 왜곡된 서술이다. 사실 황제의 입장에서 북이탈리아는 허울에 즐거워하기 위해 신경쓰는 곳이 아니라,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경제의 대부분을 담당했던 핵심적인 지역이자 자신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실제로 후에도 북이탈리아 지역은 대항해시대 전까지 동방과의 무역 등으로 잘 나간다.

경제 측면에서만 접근해도, 13세기까지도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내에서 알프스 이북 지역에는 주민 1만 명 이상의 도시가 리에주, 쾰른, 겐트 단 세 군데뿐이었는데 북이탈리아에는 15개에 달했다. 게다가 화폐를 유통하려고 해도 금은이 전부 동유럽이나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로 유출되는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상황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사치품을 생산하고 대외교역으로 금은을 유입시킬 능력이 있는 지역이 북이탈리아였던 것이다. 즉, 제국의 입장에서 북이탈리아는 단순한 면적을 떠나 단위 면적당 영토적 가치가 충분히 막대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독일(게르마니아) 지역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아예 제국의 국경선 바깥으로, 그나마 로마의 주요 속주였던 갈리아 지역보다도 개발 진행이 훨씬 더딘 상태였다.[9]

정통성면에서도 로마가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성 로마 제국은 그 정체성을 교황이 왕관을 씌워준 황제가, 가톨릭교회의 보호자로서 군림하는 것에 두고 있었다. 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호자인 황제'라는 관념은 중세를 넘어 근세까지도 유럽에서 공고히 유지되어서 다른 나라의 군주들은 감히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심지어 근세에도 로마와 1도 관련없으면 황제 칭호를 함부로 사용 못했고 사용해도 '인도 황제' 같이 유럽과는 전혀 관련없는 칭호를 사용했다. '황제' 칭호에 대한 동로마와의 분쟁에서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로마인(=로마라는 나라)의 황제는 아니지만 '로마 땅의 황제'(=로마라는 지역을 다스리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동로마는 처음에는 황제라는 칭호조차 고까웠지만 이슬람 세력이 커져가는 상황이었기에 대충 타협해준 거다.

말하자면 이탈리아 반도 북부~중부의 로마 근처라는 영토를 다스린다는 점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정통성에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는 것. 그런데 북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잃으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 '로마랑은 상관없는 황제'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더해, 보통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사이의 관계를 '교황권과 세속 군주권의 우위를 두고 갈등을 벌이는' 적대적인 라이벌 관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있어 '교황의 보호자'라는 입장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세속 1인자'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교황의 보호자'로써 다른 세속 군주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았고, 대내적으로도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영주들을 통제하고 영토 내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보호자=종교(가톨릭 신앙)의 보호자라는 지위와 신성 로마 제국 영토 전체 및 서유럽 전체에 걸친 교회 조직이 필요했던 것.

애초에 황제들이 주교공을 임명하여 영주들의 세력을 견제한 것이나, 전성기에는 황제와도 우열을 다툴 정도로 강성했던 교황권의 신장 자체가 황제의 황권 강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황제와 교황은 서로 세력을 다투는 라이벌인 동시에 '그리스도교(가톨릭) 로마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정치체를 유지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해야 하는 관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교황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황령이자 으뜸 주교좌인 로마와 신성 로마 제국 영토의 연결 역시 필수불가결했다. 만약 북이탈리아 영토를 상실한다면 일차적으로 교황 및 로마 시와의 물리적인 연계 자체가 약해지고, 심하면 중세 초기의 동로마 라벤나 총독부나 중세 중후기의 노르만계 오트빌 왕조 같은 다른 세력의 손아귀에 교황이 들어가 버릴 가능성도 있었던 것.

이런 맥락을 자르고 황제가 북이탈리아에만 몰두하느라 본국 격인 독일의 기둥 뿌리가 썩어가는지도 몰랐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부당한 처사다.

요약하자면, 중세 신성 로마 황제들이 종종 독일 지역에 대한 통제를 방기하기까지 하면서 북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 확보에 골몰했던 것은, 신성 로마 제국에 있어 북이탈리아는 독일 못지 않게 핵심적인 영토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독일 및 알프스 이북의 영토를 조금 잃더라도 북이탈리아만은 꽉 쥐고 있어야 제국의 존속이 가능했기에 다른 무엇보다도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 보존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런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집착은 중세 이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사실상 세습한 뒤에도 크게 변하지 않아서, 30년 전쟁으로 북독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확장 방향을 동유럽 지역으로 변경한 뒤에도 어떻게든 이탈리아 지역을 차지하려 노력했다.

애초에 이런 오해를 널리 퍼트린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경우, 한국 내에서 유럽에 대한 관심사를 불러일으킨 좋은 책이지만 기본적으로 당대 한국인의 눈높이에서, 당대의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쓴 책임을 감안해야 한다.(그렇지 않았으면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결국 먼나라 이웃나라의 초기 버전에서 다룬 유럽사(신성 로마 제국사)는 민족국가 개념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편하게 어느 정도 ' 번안된' 내용임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

3. 독일인만의 나라?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들이 통치의 중심이었으며 아헨, 레겐스부르크 등 주요 도시도 현 독일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사 국가로 보는 경향이 강한 것은 맞다. 서양사 학술서에서 아예 '독일 제국'(Deutches Reich)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인 외에도 보헤미아인, 이탈리아인, 남프랑스인, 네덜란드인, 벤트인, 유대인 등 여러 족속들이 존재한 다민족 국가였다. 1485년에 지정된 신성 로마 제국의 정식 국호는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지만, 이 국호가 지정된 때는 부르고뉴와 이탈리아 등 비독일 지역에서 제국의 영향력이 줄어든 시기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10]

선성 로마 제국이 독일인들만의 나라가 됐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어 네덜란드, 스위스를 완전히 상실하고 느슨한 형태의 연방체제가 되고 나서이다. 다만 이때마저도 보헤미아 왕국 같은 비독일 지역이 남아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자칭했던 오리지널 로마 제국만 하더라도 라틴족뿐만 아니라, 그리스인을 비롯한 온갖 민족들이 모여 살던 다민족국가였다. 로마시에서는 라틴어가 통하지만, 제국의 동부는 그리스어 문화권이었고 그 외에도 지방마다 고유한 언어가 통용되었다. 당장 팔레스타인 지역만 하더라도 아람어가 쓰였다. 그 동부 반쪽의 동로마 제국 그리스인을 비롯하여 불가리아인, 이탈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아랍인, 튀르크인, 페르시아인, 유대인 등 온갖 민족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옛 제국들을 현대의 민족국가에 대입하여 보는 것은 분명히 오류이다. 비슷한 예로, 동로마 제국을 보고 '라틴어를 안 쓰다니!', '그리스인이 주축이라니!' 하면서 로마의 정통성을 이어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당연히 오류다. 제정 초기까지 로마는 이탈리아적 성격이 강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민족국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식의 극단적 민족주의, 내지는 혈통주의(종족주의)적 사관은 오히려 고대 로마의 정체성과도 차이가 난다. 역사적 신빙성에는 의문이 있다고 한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연원을 트로이, 곧 아나톨리아 출신의 아이네이아스와, 이탈리아 라티움 지방의 토착민 로물루스라는 이중적 구조에서 파악하였으며, 자신들의 조국을 재건된 트로이라고 자처하였다. 외국 논문들 중에서는 로마가 나중에 트로이에서 상당히 가까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간 것에서 착안하여 이쪽을 깊게 연구한 논문이 있다.

3.1. 초기 구성국

파일:Holy_Roman_Empire_11th_century_map-en.svg.png

신성 로마 제국의 당시 체계를 보면 민족 세계를 알 수 있다. 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을 구성하던 하위 국가는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 보헤미아 왕국, 부르군트 왕국이 있었다.

독일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나 보헤미아 왕국과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에 선제후 회의에서 독일 왕국의 국왕( 독일왕)으로 선출된 자가 교황의 대관을 받아 황제가 되었다. 교황은 대관을 거부할 수는 있어도 선거를 물리고 다른 사람을 황제로 앉힐 수는 없었다. 교황이 정치적인 이유로 대관을 거부한 경우에는 명목상 황제가 아니라 독일왕이었지만 실질적인 황제로 인정받았다.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 중 거의 절반이 교황 대관을 받지 못한 독일왕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 없이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와 있다.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는 이런 명목과 실질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왕 선출과 동시에 스스로 황제를 칭했고, 이후 황제들은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황제가 되었다. 독일 왕국은 인구 등 규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위에 있어서도 제국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과 사실상 동일시되었다. 후대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의 관계와 비견할 수 있다.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 건국되던 962년부터 독일 왕국과 더불어 함께 제국을 구성하던 하위 왕국이었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은 랑고바르드 왕국이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6세기경 게르만족의 일파인 랑고바르드족 이탈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세운 나라였다. 이탈리아에서 수백 년간 세력을 유지했던 랑고바르드 왕국은 다른 게르만 국가인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1세에게 정복되었고,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족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남이탈리아에선 베네벤토 공국 등 랑고바르드 잔존세력이 한동안 존재했다. 그래서 밀라노를 포함한 북이탈리아 지역의 한 주이자, 넓게는 역사적 지리적 맥락에서 북이탈리아 전체를 의미하는 롬바르디아와 혼동의 여지가 있으나, 동로마의 남이탈리아 지역 중 한 테마의 이름이 Longobardo였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후 북이탈리아는 장남 로타르가 관할하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고, 또 메르센 조약을 통해 중프랑크는 북쪽의 영토를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에게 사이좋게 떼어주고 북이탈리아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북이탈리아를 가지는 자가 황제를 겸하게 되어서 북이탈리아의 대접은 나름 좋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북이탈리아 지역은 서로 황제가 되려 하는 카롤루스 왕가 방계의 프랑크 귀족들 간의 혼란에 빠졌고, 결국 960년 교황의 요청으로 이탈리아에 원정온 독일 왕국의 국왕 오토 1세에 의해 합병된다. 북이탈리아의 위협으로부터 교황령을 보호해준 대가로 오토 대제는 이탈리아 국왕과 더불어 황제가 된다. 이로서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의 창단 멤버가 된다. 이탈리아 국왕직은 독일왕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자동으로 부여받는 타이틀이 되었다.

보헤미아 왕국 체코인이 다수인 제후국으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와 더불어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보헤미아는 처음에 공국으로 출발했지만 12세기 말 오타카르 1세가 스스로 왕국이라 칭했다. 지리한 논쟁 끝에 정치적인 타협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은 보헤미아가 왕국을 칭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나 애초에 공국이었던 보헤미아는 왕국으로 승격된 후에도 독일 왕국 내에 있는 하위 선제후국(공국)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외왕내공?? 보헤미아 왕국 국왕이 독일 왕국 국왕을 뽑는 7명의 선제후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독일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의 관계가 동등한 왕국이 아닌 주종의 관계임을 보여준다.

3.2.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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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바르디아 철관. 로마왕 이탈리아 국왕 대관식을 치를 때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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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엔슈타우펜 가문 치하 신성 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 단, 시칠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따로 통치하는 독립된 영토일 뿐이었다.[13] 시칠리아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은 신성 로마 제국을 표시하는 붉은 선 바깥으로 표시된 걸 알 수 있듯이 단 한 번도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에 들어간 적이 없다.

이탈리아 왕국 독일 왕국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왕국이다. 신성 로마 제국 초기의 중세 황제들( 작센 왕조, 잘리어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은 로마와 로마가 상징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가톨릭 신앙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거기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이탈리아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부유해서 제국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1세를 비롯한 초기의 많은 황제들이 이탈리아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이유는 교황과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부 중세 황제들은 로마에 집착하여 지나칠 정도로 이탈리아 경영에 골몰했지만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을 평정하며 그 이름을 전유럽에 떨쳤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도 이탈리아 원정에서는 무능할 정도로 연패를 거듭하며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경영의 실패는 독일 국내 정치에서 제후들의 여러 도전과 위협으로 이어졌다. 강력한 황권과 진정한 신성 로마 제국을 추구했던 호엔슈타우펜 왕조 황제들의 황권은 프리드리히 2세 사후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고 결국 대공위 시대로 귀결되고 말았다.

대공위 시대 이후 황권이 약해졌기 때문에 어느 한 가문에서 황제를 독점적으로 세습하지 못하고 합스부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 가문 등이 한동안 번갈아가면서 황제를 배출했다. 이시기 황제들은 초기 황제들과 달리 독일 내에서조차 영향력이 미미했기 때문에[14] 독일 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주력했고 각각 오스트리아[15], 바이에른[16], 보헤미아[17] 등 자신들의 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했다. 그렇다보니 교황의 대관을 받으러 로마로 가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하인리히 7세, 루트비히 4세 정도나 교황의 대관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권위는 있으나 실익은 크지 않았던 이탈리아는 제국과 점점 멀어졌고[18] 14~15세기 신성 로마 제국은 북이탈리아 지역의 영토와 영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어 이탈리아는 명목상으로만 제국의 봉토로 존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세기 중반부터 신성 로마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된 합스부르크 왕조는 아예 국호를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바꾸었다.

3.3. 당시의 ' 민족' 개념에 대해서

중세 제국들의 특성상 나라는 민족들 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영주 계급 및 왕족들의 지배로 생겨난다. 이 당시 우리가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이것들은 단순히 영지를 소유한 봉건적 지배 계급들의 이해관계에 의한 복합적인 분할관계에 해당하는 일련의 '영지'들이며, 절대로 지리학적 문화적 연결성을 토대로 한 민족분류 개념에 기초한 나라 개념이 아니다. 이 시대는 영주 계급들의 봉건적인 질서에 의해서 영지들이 임의적으로 분할된 시대로서 지배권력 하에 있는 피지배 계급들 역시도 자신들을 하나의 영지에 속한 개체로 인식할 따름이었고, 그들을 대표하는 것도 사실상 민족개념이라기보단 단순히 상상된 권력에 지나지 않는 지배계급들의 표상일 뿐이었다. 민족의 개념은 중세의 폐쇄적인 생활방식이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또 봉건적 질서가 옅어지기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는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라센인이나, 본격적으로 개종하고 카르파티안 분지에 정착하기 전인 9세기 즈음의 마자르인이 아니라면 서방인들끼리는 딱히 이질감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경우 결코 현대 민족적인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중세 유럽의 유일무이의 진리나 아니면 정주민이 아닌 기마 유목민이라는 딱 봐도 눈에 보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화적 관점에서 배제된 것이다. 실제로도 마자르, 폴란드 등 저러한 생활 문화적 관점에서 이질감을 유발했던 이민족 또한 10세기를 넘어 점차 정주민화 되어 가고, 그리스도교와 봉건제를 받아들이며 중세 보편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융화되어 갔다. 심지어 국가간의 국경조차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민족적 관점에서 '독일인'이란 개념이 정립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한 19세기의 일이니. 조금 느슨하게 봐도 루터가 독일어로 된 성경을 쓰고 이어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16세기 정도다.

참고로 독일인들이 자신의 조상을 토이토부르크 전투 게르만족들에게 찾으려고 한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이 망하면서 로마와의 연계가 끊어지자 새로운 표상을 찾고자 한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 빌헬름 1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등 근현대에 들어서 시작된 것이다. 다만 이걸 단정적으로 보면 또 안되는게 게르만족들 조차도 로마의 통치 아래서 로마인으로써 살아갔었던 이들이 있었던가 하면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낸 이들이 존재했다는걸 감안하면, 민족주의 대두 이전에도 복합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을게 틀림없다. 로마와도 싸웠었던 민족이 한편으로는 로마의 후계를 자처했었다는 이 상황 자체가 이걸 설명해준다. 로마 하에 있었던 게르만족과 게르마니아에서 살던 게르만족은 서로 다른 민족이 된게 아니며, 분명 로마라는 국가는 로마 이후의 서유럽의 석권자가 보았을때 궁극적 목표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허나 그렇다고 자기 민족이 자기 정체성을 지키게 된 전투는 분명 존재했기에, 그 정체성이 남아있는한 그 전투는 잊혀질리는 없다. 이 전투가 독일 민족의 새로운 표상을 차지하게 된건 이 민족이 더이상 로마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독일 제국으로써 재편되었고, 주도적인 지배층에만 안주하는걸 벗어나 독일인만의 나라를 지향하게 된것이다.

본격적으로 유럽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나폴레옹의 등장 이후부터라고 하지만, 나중에 온 민족 국가 독일의 관점에서 역사적 전례이기는 하지만, 근대민족국가 독일과 직접적으로 법통이 이어진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을 분석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관점에서 오류이다. 다만 중세 시대에도 민족 개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에서도 수많은 제후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독일 족속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존재했다.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하기 수십 년 전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후 세로 왕위에 오른 하인리히 1세는 스스로 '독일인들의 왕'이라 칭했고, 이는 독일 왕국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근세로 넘어가서는 15세기에 생긴 독일 '족속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가 아니더라도, 외국인 출신의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 문제를 다루며 '숭고한 독일 국가'의 국민들이 종교적으로 단합하기를 촉구했다.

4. 로마 제국과 그 어떤 연관도 없다?

저는 부인들과 기사들, 전쟁과 사랑,
궁정 예절, 대담한 위업을 노래하리니,
무어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와
프랑스를[19] 황폐하게 만들었을 때였는데,
그들은 로마의 황제인 카롤루스에게
트로야노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겠다고
장담하는 자신들의 왕 아그리만테의
분노와 젊은 혈기를 뒤따라왔습니다.
- 광란의 오를란도 제1곡,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이탈리아인)

동시대의 다른 지역[20]에서 어떻게 생각했건, 서유럽 가톨릭 사회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국으로 취급받았다.

현대인들이 보기엔, 고대 로마와 별개의 정치체인, 그것도 로마의 주된 외부 세력이었던 게르만족[21]에게서 재건된 신성 로마 제국의 정체성은 매우 기이해보일 수 있다.[22] 그러나 이는 현대인들의 관점을 바탕으로 당대를 해석하는 행위(anachronism)이며, 당대인들의 세계관에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4.1. 서론

프랑크 왕국은 물론이고 많은 서방의 게르만계 세력들은 황제를 칭하길 간절히 바랐다. 언제나 서신이 오가는 일이 있거나 하면 아직도 건재한 동로마보다 급수가 낮은 신분임을 별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9세기 카롤루스 1세 교황 레오 3세를 반대파들로부터 구출하고 황제를 칭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지역에서는 교황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해당 지역의 게르만 왕국에게 대관식을 통해 명목상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부여하는 일이 있었으며, 이러한 관습이 결국 중세 서로마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탄생을 낳았다. 옛 서양은 물론 옛날 서양 학계에서는 이 신성 로마 제국을 진정한 로마 제국이라고 중시했으며 동로마 제국을 소위 그리스 제국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물론 이러한 시각은 당시 로마 제국, 중동, 동유럽권의 시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한계점을 지니나, 이런 이데올로기적 주제들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신성 로마 제국을 파악할 수는 없다. 이는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중화권 제국의 역사를 파악할때, 당시 중국인들의 이데올로기와 그와 연관된 나라들의 이데올로기를 균형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기에 대해서 외부인이 코멘트를 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무시하고는, "내가 보기에는 신롬이 로마와 상관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러시아는 로마와 상관이 없다"고만 이야기하는 건 곤란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사실 비단 신성 로마 제국 뿐만 아니라 소위 '제3의로마'를 포함한 서양권 역사상 국체 연속성 관련 논쟁 전반이 그렇다.[23]

소위 제3의 로마 논쟁을 대표적으로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 중심으로한 한국의 온라인 역사 평론, 담론은 오히려 나라에서 직접 정사 편찬을 주도할만큼 특이하고도 심오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문맥에서 통하는 '정통성'이란 잣대로 평가하려는 측면이 있다.

4.2. 로마인의 지배자가 로마 황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간과해서는 안되는 건, 서유럽에 잔존해있던 서로마인들의 보호자들의 구심점은 도시인 로마시였으며, 서방인들의 주류 이데올로기에선 로마市와 로마 시민들을 보호하는 독일의 군주들이 '로마 황제'였다는 점이다. 이는 성경 다니엘서에 기반한 당대의 제국 이데올로기에 따라 서방인들이 보편 제국이 역사에 끊임없이 존속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서유럽인들은 서로마의 세력이 쇠한 공백 지역에 카롤루스, 오토 및 후계자들이 보편 제국을 복원했다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도시와 제위를 떠났을 뿐 아니라, 로마의 사람들과 언어를 잃어버리고 다른 도시와 제위, 민족, 언어로 옮겨갔던 것입니다.
루도비코 2세, 바실리오스 1세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루도비코 2세의 답장의 실제 저자는 답장의 번역자 찰스 웨스트에 따르면 로마 출신의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이다. 즉 이 답장의 내용은 단순히 루도비코 2세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로마 시민들의 시선을 담고 있기도 하다. 즉 얼마나 보편적인 의견이었는진 불명이나, 분명 당대의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우릴 버리고 떠난 그리스인 황제보단 우릴 보호해주는 프랑크인 황제야말로 진짜 로마 황제다"라는 시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와 같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내려오는 근거를 찾기보다는,[24] 자신들의 전통성의 주축인 가톨릭 교회와 그 총본산이자 성지인 로마시(市)의 수호와 함께 로마 시민들로부터 보호자이자 황제로 인정받는 것에 더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교황령은 그 성립에 대한 이데올로기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공생관계였다. 교황령은 독립국이기는 하지만, 관념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과 거의 '부부'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때문에 교황을 비롯한 로마 시민, 그리고 서유럽인들은 독일의 군주들을 '로마 황제'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는 12세기의 로마 코무네 폭동 당시, (당연히 이탈리아인이었던) 폭도들이 1155년에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낸 문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 인내심이 많으시며 은혜가 풍성하신 군주여, 폐하와 우리들의 권리에 대한 몇 마디 말을 들어주소서. 폐하께서는 한 사람의 방문객이었습니다만, 우리가 폐하를 시민이 되게 했습니다. 폐하는 알프스 너머에서 온 이방인이었습니다만, 우리가 폐하를 통치자로 받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속했던 권리를 폐하에게 바쳤습니다.
Knut Schulz, <중세 유럽의 코뮌 운동과 시민의 형성>에서 인용

물론 이 글은 폭도들이 황제를 구슬리기 위해 쓴 글이니만큼 여러 가지 감언이설이 들어갔다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독일의 군주가 이탈리아 및 로마 시민들에게 '이방인 출신이지만 어쨌든 우리의 통치자'로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도 출신지가 황제 자격을 제한하진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이베리아 반도 출신이었고, 나중에 가면 북아프리카 출신 로마 황제도 출현한다.

4.3. 거룩한 성지이자 가톨릭 이념의 중심지

로마市는 로마 제국의 입장에선 로마 제국의 역사상 단 둘만 존재했던 도시 중 하나이자, 안타깝게도 로마 제국의 지배권에서 떨어져나간 도시였다. 로마市는 아직도 나름의 규모를 자랑했지만, 6세기경에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게 최대도시의 자리를 빼앗긴 상황이었다. 6세기 중반의 동로마와 동고트 간의 고트 전쟁을 보면, 로마 시의 주인이 여러 번 왔다갔다했는데, 그러던 중 로마 시의 상주인구가 다 피난가거나 굶어죽어서 하나도 없었던(영어 위키백과 'Gothic war (535-554)에서 'Uninhabited'라고 나온다.) 시절도 있었으니 뭐 최대 도시의 위상은 진작에 사라졌다.

또한 행정적으로도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후 점차 의미를 잃어갔으며 종국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며 제국과 관련된 모든 행정적 위상을 상실했다. 심지어 서로마가 있었을 당시에도 서로마의 행정은 밀라노와 라벤나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로마 시는 제국의 도시, 황제의 도시에서 교황의 도시로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옮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市에서 으뜸 사도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순교하였고,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의 중심지인 로마의 사도적 전통은 후발 주자로 제국의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 강력할 수 밖에 없으며,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로부터 으뜸 주교로 인정받았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어디까지나 동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위상에 의해 성장할 수 있었던 후발 주자였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교 박해기에 동방 주교들 중 가장 으뜸으로 취급받던 자리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였다. 후일 비잔티움 천도 이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의 위상이 급상승하였고,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조에서야 "왜냐하면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명예상의 특권으로 로마 교황 다음을 누리기 때문이다."라고 언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는 서유럽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로마市는 단순한 로마 제국의 옛 수도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영적인 수도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으며, 동시에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로마 제국의 문화적 유산들을 보존하는 곳이었다. 이에 따라서 서유럽에선 로마市의 보호자·지배자가 곧 로마 제국의 황제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는 정교회와 합을 맞춰온 동로마 제국에서 여러 성지-주축 도시 중 하나일 뿐인, 심하게 말하면 발상지고 옛 수도지만 어쨌든 이제는 우리가 수도고 그 지배 아래의 점령지로 전락한, 로마市를 보는 시각과는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

종교적 시각과, 나라를 운영하는 행정적 시각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로마라는 국가적 행정 체계가 무너지게 된 뒤의 서유럽에서는 당연히 종교적인 상징이 무게가 실리게 될 수밖에 없다.

4.4. 정리

기본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시에서 시작한 그 로마와는 별개의 정치체이다. 로마시에서 시작된 로마는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옮겼고, 동로마는 서로마처럼 고대 로마와 직접 연결된 정치체이다. 그러나 교황의 일관성있는 주장과 정치적 입김이 카롤루스 시대의 프랑크와 오토 시대의 독일과 맞아떨어저 이들 게르만 군주들을 '로마시'가 인정한 서방 세계의 황제로 인식한 것이다.[25] 곧, 당대 서방 사람들도 당연히 신성로마가 로마와 별개의 정치체임은 인식했으되, 이들 게르만 군주들을 옛 서로마 황제에 대응되는 황제로 인식한 것이다.
  • 1.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의 인정을 통해 으뜸 사도인 베드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사도 계승을 손실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사도 안드레아로부터 이어짐이 인정받기는 했지만 베드로보다는 권위가 떨어졌고 그마저도 그 근거가 로마에 비해 불안정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비해서 우위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 2. 신성 로마 제국은 로마 시민 및 지배자들의 인정이 있었다. 영토의 통치에 있어서는 비록 교황령이 베네치아 조약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로마를 잃고,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도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이 공유하다 루돌프 1세가 교황에게 통치권을 전부 돌려줬지만, 밀라노 프랑스 혁명 전쟁 중인 1801년까지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정복을 통해 적국인 동로마 제국의 영토와 백성을 강제로 흡수했고, 러시아 제국은 로마 제국의 신앙과 일부 유민만을 흡수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서방 가톨릭 세계에서 로마 제국 서방 영토 상실 이후 로마가 물러간 서로마 지역의 문화와 종교를 수호한 신성 로마 제국은 서유럽인들에게 로마 제국의 신앙적 적통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5. 볼테르의 발언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었다."
볼테르,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글(Essai sur l'histoire générale et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중 챕터 70
볼테르의 이 말이 간단하면서도 워낙 강렬하기 때문인지 마치 신성 로마 제국의 표어인 것처럼 유명해졌다. 이 발언만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허울뿐인 국가로 치부하기도 하는데, 볼테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체제에 대해서 비난한 것이 아니다. 볼테르의 말은 카를 4세 시대의 제국에 한한 것인데, 1346년 금인칙서를 반포한 이후 제국 내 황제의 권력이 제한되고, 카를 4세 본인이 신성과 로마의 근원인 교황과 이탈리아에 무관심하였기에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의 농담조로 사용하였을 뿐이었다. 오히려 볼테르를 비롯한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체제를 일종의 공화정이자 제한 군주정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몽테스키외 1729년 제국을 방문한 이후 효과적으로 잘 작동하는 연방으로 결론내린 바 있다.
  • Joachim Whaley, The Holy Roman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10-11페이지


[1] 카롤루스 대제 생전에 그려진 그림은 아니고 독일(신성로마제국)의 국가수리 문장과 프랑스의 백합 문장을 배경으로 하여 후대의 신성 로마 황제관을 씌운 상상화다. [2] 당대 사람들이 카롤루스 대제를 신성 로마 황제로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3] 고대 중국 주나라에서도 춘추전국시대의 도래는 희성(姬姓) 동성제후국들 간의 친척관계가 세대를 거듭해가면서 멀어졌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더이상 주나라를 같이 떠받칠 친척이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적으로 본 것에서부터 시작한 것인데 그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다. [4] 이런 점은 근대 이전의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임진왜란 때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의 수는 15만 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 수는 전투원만 포함된 것으로 군대에 딸린 잡역부(노동자나 선원들)의 수는 넣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잡역부의 수를 모두 넣는다면 실제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의 수는 15만 명보다 약 2배 정도 많다고 보아야 적합하다. [5] 초장거리 원정인 만큼 행군을 버텨내기 힘든 노약자나 여성의 수는 적고 대부분 청장년층 남성이었을 것이다. [6] 사실 이는 헨리 2세의 실책 탓이 크긴 했다. 그래도 줘도 못 먹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기회를 살려내는 건 결국 사람의 몫이기에 이에 대해 필리프 2세가 그냥 거저 먹었다고 할 순 없다. [7] 사실 정말로 듣보잡은 아니고, 카페 가문은 모계로나마 카롤링거 왕조와 연관이 있던 명문가이다. 다만 세력이 거대한 공작 제후들이 자기들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카페 가문을 왕으로 뽑은 건 사실이다(...) [8] 프랑스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것은 15세기부터였다. [9] 물론 중세 성기까지는 정작 이탈리아에서도 황제가 딱히 세금을 걷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도시가 발전했다고 황제의 재정을 책임져주는 땅은 아니었다. 흔히 중세의 세금 제도로 생각하는 '영주에게는 군사를 얻고 도시에게서는 돈을 얻는' 도식은 중세 후기부터 발전해서 근세와 중앙집권으로 나아가는 징표로 꼽히는 것이지, 중세 초기나 성기에는 아직 그런 구조가 발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작 그런 도식이 발전하기 시작한 중세 후기에 북이탈리아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성이 더 강해져서 황제에 직접 맞서 싸워서 완전한 자치를 얻어버린다. 그래서 저 '영주에게서는 군사를 얻고 도시에게서는 돈을 얻는' 도식에 맞는 신성로마제국 자유 도시는 전부 독일 지역에 있다. [10] 다만, 이 명칭이 처음 공문서에 사용된 건 13세기이다. [11] 로마 시와 그 주변 + 볼로냐, 라벤나(표시 안 되어 있지만) 등 북동부 해안 + 둘을 연결하는, 페루자(Perugia) 중심의 길고 좁은 회랑 모양의 영역. [12] 중프랑크의 분할 과정에서 부르군트는 독립된 국가였다가 1032년 콘라트 2세 때 신성 로마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이 부르군트 왕국에서 떨어져 나온 사보이아 백국이 바로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이다. [13] 유튜브의 유럽 역사 지도 영상을 보면 교황령 이남의 남이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 색깔의 연한 색으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다. [14] 역으로 독일 내에서 한미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황제로 선출될 수 있었다. [15] 합스부르크 가문 스위스의 자그마한 백작 가문이었다가 루돌프 1세 오타카르 2세를 패사시키고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회수하여 맏아들 알브레히트에게 분봉하였기 때문에 초창기에는 이방인으로서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통제하기에도 벅찼다. [16]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는 라인 궁정백령과 오버바이에른 공국, 니더바이에른 공국으로 분열되었는데 루트비히 4세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를 모두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생전에 라인 궁정백령은 형 루돌프의 아들 루돌프 2세와 루프레히트 1세에게 물려주었고 그가 죽은 후 바이에른도 다시 분열되어 15세기 초 바이에른뮌헨 공작 알브레히트 4세에 의해 통합되기 전까지 갈라졌다. [17] 룩셈부르크 가문 룩셈부르크에 기반했으나 하인리히 7세가 아들 요한을 보헤미아 왕국 프르셰미슬 왕조의 마지막 혈손 엘리슈카 공주와 결혼시키면서 요한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시킬 수 있었고 본토 룩셈부르크는 방계 가문에게 넘겨주면서 보헤미아 왕국으로 이주했다. [18] 훗날 기반을 다지는데 성공한 카를 4세는 로마로 가서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을 치렀고, 루프레히트도 꾸준히 로마로 대관식을 치르러 가려 했으나 북이탈리아 세력에 막혀 번번히 실패했다. 대공위 시대 이후 황제들이 결코 북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19] 한편 이 표현은 프랑크 왕국을 프랑스로 대우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국호가 프랑크 왕국에서 왔으며 프랑스의 유래가 서프랑크 왕국이기 때문. 여담으로 서프랑크의 이웃인 동프랑크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유래이며 중프랑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인 이탈리아 왕국과 로타링기아 왕국, 부르군트 제2왕국이 된다. [20] 동로마 제국, 동유럽 슬라브권, 아랍-이슬람권 등. [21]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기점으로 로마와 게르만 세력의 경계가 라인강으로 굳어졌으며 로마는 게르만족 활동 영역 전역을 장악한 적은 없었다. 다만 로마 후반기에는 로마에 포섭된 게르만족들도 매우 많았다. 또한 로마와 대치했던 것으로 치자면 그리스인들은 로마 제국 이전의 로마 공화국과 70년 가까이 패권을 다투어온 숙적이었고, 로마 이외의 이탈리아인들 상당수는 도시국가 로마에 정복당한 피정복민들이기도 했다. [22] 사실, 신성로마제국이 세워지기 이전에도 딱 한번, 게르만족이 로마제국 황제가 된 적이 있다. [23] 예시를 들자면 현실적으로야 당연히 현대 독일 연방국의 실제 창시자들이나 기반은 당연히 나치 독일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어쨋든 공식적인 기관 입장에선 현대 독일은 아예 군대 전통까지 싹 갈아 엎을만큼 나치뿐만 아니라 전근대 독일 전반하고 단절을 중시하듯이 역사상 국체간 연속성은 구체적인 특정 문맥에서 파악해야 하는 문제이다. [24] 즉 기진장은 진짜면 더 좋지만 가짜라도 뭐 아무래도 큰 상관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1204년까지는 동로마 제국이 강대국으로 건재해 있었고, 수도 이름이 다름아닌 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직접 세웠고 그의 이름이 후대에 붙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이기 때문에, (종교와 대응되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로마 제국 및 콘스탄티누스와의 연결성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오히려 신성 로마 제국의 존립 정당성은 약해진다. [25] 정확히 말하면, 당대인에게 인지되지 않았던 어떤 권리를 로마 주교가 창조하였다기보다는, 서로마의 붕괴 이후 로마 주교에게 점진적으로 인정된 (동시에 역사적 기원이 불분명한) 관습상의 기존하던 권리가 위조라는 형식을 통해 문서화되고, 이것이 서방의 게르만 황제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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