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3대 황제
트라야누스 Tra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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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Caesar Nerva Trajanus |
출생 | 53년 9월 18일 |
로마 제국 히스파니아 속주 이탈리카[1] | |
사망 | 117년 8월 11일 (향년 63세) |
로마 제국 킬리키아 속주 셀레누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98년 1월 28일 ~ 117년 8월 11일 (19년 206일) | |
전임자 | 네르바 |
후임자 | 하드리아누스 |
부모 |
친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양부 네르바 모친 마르키아 |
형제 | 울피아 마르키아나 |
배우자 | 폼페이아 플로티나 |
자녀 | 하드리아누스 (양자) |
종교 | 로마 다신교 |
트라야누스의 칭호 | |
비고 | 지고의 황제 (Optimus Princeps)[2] |
존호 |
카이사르 디위 네르와이 필리우스 네르와 트라야누스 (CAESAR DIVI NERVAE FILIVS NERVA TRAIANVS)[3] |
휘 |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Marcus Ulpius Traian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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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로마 제국의 13대 황제이자 최전성기를 이룩한 황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이지만, 사실상 해당 왕조의 실질적 창건자로 볼 수 있다.[4][5][6] 최초의 속주 출신 로마 황제로, 로마인들이 미덕으로 여긴 실질강건한 생활을 보여준 황제였다.
2. 생애
2.1. 출생과 본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즉위 전 본명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7]로, 속주 히스파니아[8]의 도시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대략 서기 53년생인 듯하다.위로는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가 있는데, 황제의 누나는 법무관을 지낸 이탈리아 귀족 태생의 부유한 원로원 의원 파트루이누스와 결혼해 딸 살로니아 마티디아[9]와 외아들 파트루이누스를 뒀다. 트라야누스 사후, 그녀의 혈육들과 인척들은 상호 입양을 통해 안토니누스 황실을 이었는데 그들이 바로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10]다.
트라야누스의 울피우스 씨족 가문은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페루자 근처 도시 토디에서 기원한 라틴 혈통의 이탈리아인 가문이다. 하지만 상술했듯 황제의 직계조는 일찍이 히스파니아의 이탈리카로 건너가 정착했으며, 황제의 가계는 일찍부터 현지 여성들과의 혼혈이 진행돼 사실상 히스파니아인과 다름 없는 로마인이었다고 한다.
트라야누스 가문은 히스파니아 내 지방 소도시의 유력 가문이긴 했으나, 로마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애초에 트라야누스의 부친 이전까지는 로마 중앙 정계에 아예 존재감이 없는 가문이었고, 황제의 외가 역시 오래된 이탈리아의 마르키우스 가문인 것을 제외하곤 중앙 정계 내 입지에선 사실상 히스파니아인 출신 상류 가문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트라야누스 가문은 트라야누스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가문의 이름이 중앙 정계에 처음 나타나게 되는데, 그 시기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트라야누스의 아버지에게 귀족 칭호를 부여했을 당시였다. 그러나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이미 클라우디우스 1세 시절 원로원에 입성한 원로원 의원이었고, 플라비우스 왕조 이전에 등장한 신참자였다. 때문에 그는 결코 연줄 덕분에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 아니었다.
황제와 동명이인이었던 부친 트라야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직속 부하로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네로 시대의 명장인 코르불로 휘하에서 베스파시아누스와 마찬가지로 군단장을 지낸 장군이었다. 그는 제1차 유대 전쟁 당시 베스파시아누스 밑에서 로마군을 지휘하며 상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신임을 받았다고 하며, 네로 사후 혼란기의 로마를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를 따라 전공을 세웠다.
서기 69년,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11]는 자신과 두 아들의 권력 기반을 확대하면서, 네로 시대 동안의 문제[12]를 타파할 해결책을 냈다.
이때 황제는 로마군 개방과 라틴권 확대 정책을 추진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능한 인재를 선발한다는 차원에서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일대의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로마군 입대 자격을 부여하고, 이 일대에게 라틴권 확대 혜택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 속주 출신 로마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그래서 과거 네로 시대와 달리 그동안 소외된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태생 인재들이 대거 중앙 정계로 유입되는데, 이 흐름 속에서 본래 원로원 의원이었던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귀족 칭호를 부여받았다.[13]
트라야누스 부친은 이후 집정관 직과 시리아 총독직[14]을 거쳤으며, 시리아 총독 당시에는 파르티아인의 침공을 격퇴하는 공도 세웠다.
2.2. 즉위 전까지의 경력과 삶
트라야누스 황제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부모, 누나와 함께 고향 이탈리카를 떠나 일찍이 이탈리아로 건너갔으며,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원로원 의원의 아들들처럼 군 복무를 하면서 중앙 정계에 발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트라야누스가 몇 살 때부터 군 복무를 했는지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군 사령관이었고, 대(對) 파르티아 전선의 긴장도가 높은 시리아 등지에서 복무한 것에 미루어 보아 트라야누스도 어렸을 때부터 군 생활에 익숙했을 확률은 높다.
그리고 참모진으로서 그가 시리아에 근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만큼 적어도 10년 이상의 군 복무를 했던 것으로 보이며, 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제국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 로마군 장교로 실력을 쌓았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종종 로마 또는 히스파니아를 오가며 생활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는 간접적인 여러 증거상 확실해보인다고 한다.
서기 86년, 트라야누스는 외사촌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의 유언과 부탁에 따라,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와 함께 오촌 조카뻘이 되는 하드리아누스 남매의 공동 보호자가 됐다. 이후 그는 서기 89년 히스파니아에서 제7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이 해에 라인 강 연안에서 상(上)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이 당시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라인강 연안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고, 트라야누스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경호를 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트라야누스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공석이 되어버린 상(上)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에 그를 임명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트라야누스를 무척 총애했다. 그래서 황제는 트라야누스를 85년 법무관, 91년 집정관에 연이어 오르도록 후원했다. 특히 서기 91년, 트라야누스의 생애 첫 집정관 경험은 이 당시 나이가 30대 후반임을 감안하면, 그가 얼마나 도미티아누스의 총애를 받았는지 단번에 알려준다.
그러나 서기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팔라티누스 황궁 안에서 암살을 당했고, 원로원의 추대를 받아 네르바가 황제가 됐다. 네르바는 나이 지긋하고 명민한 인물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도와 플라비우스 왕조가 세워진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명문가 후예였다. 하지만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사실상 양자였던 조카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잃어, 이 부분부터 군대와 근위대에게 암살 배후로 의심을 샀다. 더해 네르바는 즉위 연설과 맹세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해범과 의심받는 인사 처벌 과정에서 몇 가지 언행으로 군대 내의 거부감을 사게 되었다. 이는 인기가 좋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후 처리를 네르바가 등한시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 선서와 맹세에도 네르바가 11월 열린 국가 축제에서 음모조차 꾸미는데 서툴고 유순한 원로원 의원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와 그의 아내를 어설픈 조작으로 숙청하려고 한 사건 등이 엮여 있었다.
이렇게 민심 동요와 함께 도미티아누스 죽음 배후에 대한 의심 증폭 속에서, 네르바는 왕정 시절부터 내려온 유구한 명문가 피소 가문 출신으로 크라수스, 피소의 직계손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를 본인 즉위 약속을 어기고, 11월 4일과 14일 일을 증거로 내세워 어거지로 티렌툼으로 추방한다. 이 추방형은 원로원 내에서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의 억울함을 알고 있던 이들이 네르바가 민심 회복 과정에서 소극적으로 도운 결정타가 됐다. 네르바가 도미티아누스가 입안해 거의 완성한 포룸 등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게 된 일은 도미티아누스 지지자와 군부를 자극했다.
근위대는 도미티아누스 생전 보결 집정관이었던 사람에게 추방형을 어거지로 내린 이유가 이 사건 등과 연관되고, 네르바가 뭔가를 숨기고 여겼다고 확신했다. 더해 네르바의 관용책과 대규모 시혜는 여론과 군대 지지 모두를 반전시키지 못했다. 결국 네르바는 군심, 민심 모두 회복하고자 근위대장 인사 조치를 단행한다. 그러나 그가 지명해 취임한 근위대장은 공교롭게도 도미티아누스를 존경한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였다. 그는 도미티아누스가 내세운 법 앞의 공평함을 신봉했고, 기록말살형 선고 등의 일련 조치에 불만이 컸다.
결국 근위대가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네르바를 협박해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실행범들인 궁정 관리들을 끌어내 참살했다. 네르바는 궁중 쿠데타로 강제 연금됐고, 아일리아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와 접촉한 원로원 대다수는 제 살 길을 마련하겠다는 이유로 방관했다. 군부와 연이 있어 중재 역할을 해줄 이들은 이미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사건 등을 보면서 네르바가 자업자득이라는 식으로 궁중 쿠데타 세력을 용인했다. 결국 네르바는 고립된 상황이 됐고, 아일리아누스에게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답을 한 후, 유폐된 처지가 되었다. 황제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고, 원로원은 네르바가 무리하게 피소 프루기 등을 공격한 일을 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네르바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뒷짐을 졌다. 그 사이 보결 집정관에는 군부, 프라이토리아니의 입장에 사실상 손을 들어준 원로원 인사들이 오르면서 네르바의 선택지를 없앴다.
네르바의 남은 2~3개월은 결국 군부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황제가 사실상 유폐되고, 모든 면회가 통제된 상황에서 황제의 이름으로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혐의를 받은 자들이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네르바는 군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자신에게 등을 돌린 원로원 내의 뜻인 트라야누스를 서기 97년 후계자에 지명했다. 트라야누스는 군대의 지지와 존경을 받았고, 원로원 인사 중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의 친구이자 인척이었다. 트라야누스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에 있었다.
서기 97년 트라야누스 양자 지명은 "네르바가 오현제에 포함된 이유는 그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골랐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지명 자체가 근위대가 결정하고 실권을 뺏긴 네르바는 친구 아리우스 안토니누스[15] 등이 근위대 손을 들어준 결과로 판단하면서, 완전히 실권을 잃고 연금된 네르바가 추인만 해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를 승인하고 트라야누스를 도운 98년 보결 집정관 중 한 명은 네르바의 친구 아리우스 안토니누스의 사위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16]였다. 그래서 트라야누스의 등장은 선양 조치 속에서 평화롭게 흘러간 상징이자 진정한 안정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여전히 전방에 나가 있었고, 로마로 오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실권을 쥐었고, 원로원은 그에게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서기 98년 초 네르바가 연설 중 뇌졸중 증세 호소 후 쓰러져 유폐된 별궁에서 사망했다. 이후 트라야누스는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였다.
2.3. 황제
2.3.1. 로마 입성
네르바에게 양자로 지명되기 전부터 트라야누스는 꽤 많은 곳에서 특출날 정도로 군 경력이 화려했는데, 네르바 시대에는 현직 총독 신분 상태로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도 받았다.트라야누스는 98년 1월 상(上)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에 있는 상태에서 황제 등극을 통고받았는데,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의 권력을 넘겨받기 위해 즉각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네르바가 죽은 뒤 무려 2여 년간 레누스 강과 다누비우스 강 유역을 시찰하고, 이 일대 국방 체제를 정비하고 강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 시기에 관해, 동시대 원로원 의원이자 사가 소(小) 플리니우스는 "다누비우스 강변에 선 트라야누스는 어떠한 적도 보이지 않자, 그곳을 건널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이는 용기와 절제를 모두 보여주는 행동이었다."고 말하는데, 트라야누스는 이 시기 동안 다누비우스 전선 일대에 주둔 중인 로마군에게 신경을 쓰고 그 지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예방에 힘을 쏟았다.
황제에 오른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도미티아누스 암살 이후 계속되는 소요를 예방하고 새 황제가 로마군의 주력인 레누스-다누비우스 일대 병력에게 확실한 충성심을 받아내기 위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또 여러 학자들은 이 시기부터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전쟁을 미리 계획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후, 그는 서기 99년 늦여름이 되어서야 로마에 입성한다. 그런데 등장 당시 트라야누스의 모습은 철백색 머리를 가진 강인한 얼굴에 당당한 체구, 무뚝뚝한 인상 탓에 로마인들이 흔히 말하는 군인 그 자체로 비춰졌다. 그래서 임페라토르라는 직위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칭송을 받았고, 원로원과 로마인들에게 큰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또 새 황제가 말에서 내려 로마에 들어온 뒤, 자신을 반기는 원로원 의원들을 차례로 끌어안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외모답지 않게 겸손하고 다정하게 대해 순식간에 인기는 치솟았다. 이런 연유로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에겐 따뜻하고 겸손한 황제로, 일반 서민들에게는 무뚝뚝하지만 따뜻하고 수수한 황제로 이미지를 얻게 되는데, 이런 평은 여느 황제들과 달리 생전과 사후 내내 지속됐다.
2.3.2. 원로원과의 관계
99년 늦여름, 로마로 귀환한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에게 신임 황제로 승인받았다. 이때 소 플리니우스는 후일 흔히 《찬가》로 알려진 연설을 발언권을 행사해 떠들었다. 그는 100년 9월 1일 원로원 회의에서 플리니우스가 황제 취임 승인 공표 직후 공개했다. 이 발표 당시,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의 용인 속에서 보결 집정관에 취임한 저자 본인이 트라야누스에 대한 감사 결의를 발의한 일을 기록하면서, 자신과 원로원이 트라야누스의 겸손하고 절제된 인품을 찬사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원로원 안에서 암송된 것을 대략 계산하면, 최소 약 6시간 정도가 된다고 한다(...).흔히 《찬가》로 알려진 이 연설은 로마 도착 후 피곤함이 남아 있을 트라야누스에겐 매우 힘든 순간이었다. 소 플리니우스는 작심하고, 트라야누스 황제 앞에서 전임 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오만하고 비겁하며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묘사하고, 새롭게 등극한 트라야누스가 원로원을 배려하고 반대파 의원들까지 공정하게 대우하며, 숙련된 행정가이며 절제력이 뛰어나고, 인내심이 있고, 관대한 위대한 통치자로 추켜세웠다. 여기에 더해 그는 연설 안에 트라야누스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 아내 폼페이아 플로티나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따라서 최소 6시간동안 소 플리니우스가 열심히 떠든 《찬가》는 후일 로마인에게 아부의 극치로 평가받았는데, 이 대목 중 그나마 약한 축의 아부는 이랬다.
"숲을 돌아다니시며 굴에서 맹수를 몰아내고, 광활한 산 정상을 오르시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길을 안내해주는 이가 없이 험한 바위산을 찾고, 무엇보다도 경건한 마음으로 신성한 숲들을 찾아가시어 그곳의 신들 앞에서 서는 것을 좋아하시는 경건함을 곁들인 인물이시노라."
소 플리니우스는 이 연설을 마친 뒤에는 따로 사람들과 함께 트라야누스 황제의 친구로 누명을 쓰고 네르바에게 티렌툼으로 유배까지 갔던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를 욕하면서, 트라야누스를 따로 또 띄웠다. 따라서 이런 소 플리니우스의 아부와 비열함은 보통 인내심 이상을 가진 황제인들, 충분히 진노할 수 있었고, 황제 입장에선 새로 황제로 승인된 상황에서 부담이 컸다.
그런데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날 지정석에 앉은 채, 꿈쩍하지 않았다. 플리니우스의 기록, 주장과 달리, 칭찬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황제 본인이나 로마인들까지 "끝도 없는 최고의 찬사로 신물이 날 지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길었던 찬사 일색이었다고 평가받는 상황을 떠올리면, 경이로울 정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트라야누스는 이 연설을 다 들어준 9월 1일 직후부터 강력한 권력을 의식하면서도 실질적 덕목을 갖추고 모든 아부까지 인내심 있게 참아준 점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됐다.
어쨌든, 원로원은 공허한 절차를 일일이 지키면서도 간결하고 단호함으로 문제를 해결한 트라야누스에게 진심을 담아 찬양했는데, 황제는 좋거나 싫다는 내색도 안 했다. 이날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허락으로 보결집정관이 되고, 그 신분으로 발언권을 행사해 6시간동안 듣는 동료들까지 신물이 난 나머지 질려버린 소 플리니우스의 《찬사》를 무표정으로 들어줬다. 그는 매우 지쳐 있었음에도, 연설을 끊지 못하게 했고, 연설이 끝나자 무표정으로 소 플리니우스에게 짧게 감사함을 전한 뒤, 곧바로 퇴장했다. 이후에도 비슷했는데, 트라야누스 황제는 소 플리니우스가 자신 앞에서 온갖 아부를 떨고, 뒤에서는 본인의 친구로 자신이 네르바 사망 직후 명을 내려 사면을 내리고 위로해준 친구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를 중상모략했다는 보고에도 모른 척하고, 이후에도 소 플리니우스에게 적대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소 플리니우스는 정적이 되지 않았다. 그는 황제가 자신을 진심으로 신뢰한다며, 매일 온갖 이유로 서신을 보냈다. 로마 도착 직후부터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많은 업무에 시달린 트라야누스 황제 입장에선 귀찮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트라야누스는 자신에게 귀찮을 정도로 온갖 행정 문제를 묻고, 시시콜콜한 개인문제, 정치 자문까지 요구한 플리니우스에게 꼼꼼하면서도 간략하게 모두 답변을 해줬다.
이런 모습은 단순히 소 플리니우스 같은 부류의 인사에게만 국한된 대(對) 원로원 인간 관계가 아니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무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언제나 자상했다. 그들이 한미한 집안 출신이거나 젊거나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행사할 때, 방해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책임감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면서 성실함과 노력을 높이 칭찬했다. 그러니 트라야누스 황제는 언제나 원로원과 사이가 좋았다.
다만, 트라야누스 황제는 원로원과 사이가 좋았지만, 재위 기간 내내 꽤 위엄과 절제 있는 강력한 황제로서 원로원을 다뤘다고 한다. 그 예로 그는 도미티아누스처럼 지나치게 전제적인 태도로 행동하지 않았음에도, 꽤 권위를 추구했으며 원로원은 이런 그를 경건하면서 엄격하게 느꼈다. 그렇지만 트라야누스는 이전 황제들처럼 실권은 황제가 행사하고 공허한 예의범절이나 규칙은 철저히 지켰다고 한다.
또 트라야누스는 자신이 집정관 등 선출직 관직과 고위 관료 등을 선정하면서도, 원로원을 대할 땐 자진해서 법을 지키겠다는 오래된 관행적 맹세를 했다. 이런 황제의 태도는 지루하고 형식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었는데, 과거 티베리우스, 갈바 등과 달리 그런 느낌은 없었다.
왜냐하면, 트라야누스는 집정관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조차 예의를 갖춰, 황제 본인이 집정관 자리에 오른 이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늘 원로원의 한 일원인 것으로 행동하면서 끝까지 상대를 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로원은 자신들이 황제에게 존중받는다고 느꼈다고 한다.
2.3.3. 다키아 전쟁
즉위 직후 그가 가장 우선시한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중단한 다키아 원정이었다. 그가 다키아 원정에 주력한 이유는 첫째, 도미티아누스 암살의 간접적 원인이 다키아 원정 실패에 있었다는 점. 둘째, 로마 제국의 중요한 북방 경계선인 도나우 강 하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서기 99년에 로마로 돌아간 트라야누스는 서기 101년 다키아 전쟁을 시작했다. 다키아 지역 주민들의 주무기인 팔크스, 롬파이아와 투척 도끼 때문에 제법 피해를 본 로마군은 정강이 받이와 검을 드는 오른팔을 보호하는 찰갑, 안면 가리개를 도입하는 식의 중무장화를 통해 다키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2차례의 원정[17]에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완전히 정복했으며, 새로 다키아 속주를 창설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유언한 제국 확장 정책의 금지 원칙을 어긴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례가 되었다. 또한 다키아 원정 과정에서 이전의 로마 정책과는 달리 피정복민들에 대한 잔인하고 단호한 말살 정책을 펴 다키아 지역을 초토화시켜버렸다.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는 사력을 다해 항전했으나 끝내 패망을 면치 못하고 잡힐 위기에 몰리자 자살했다.
트라야누스 기둥에 묘사된 데케발루스의 죽음 |
다키아 원정 이후 줄어든 군비, 다키아의 풍부한 금, 은광으로 인한 예산의 증가, 그리고 다키아로부터 철저히 약탈해온 풍부한 전리품 등으로 인해 엄청난 추가 예산이 확보되자[18] 트라야누스는 속주들과 이탈리아, 로마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실시하고 장려했다. 도로 · 교량 · 수로의 건설, 황무지 개간, 항구 건물의 건축이 이루어졌고, 오늘날 스페인, 북아프리카, 발칸반도, 이탈리아 등지에 유적이 남아 있다. 특히 로마는 트라야누스의 토목 공사로 풍요롭게 변모했다. 이때의 트라야누스의 건축 목록 중 예로 들 수 있는 건 포로 로마노의 트라야누스 포룸[19], 도나우 강 중류에 있는 트라야누스 다리[20] 정도를 들 수 있다. 트라야누스 기둥에 대한 소개
2.3.4. 소 플리니우스와 기독교
< 박물지>의 저자 대(大) 플리니우스의 양자이자 조카인 소(小) 플리니우스는 비티니아, 폰투스 속주에서 총독으로 재임한 동안, 놀라울 정도로 방대한 양의 서신을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 받았고 이를 <서한집>이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그래서 학자들은 트라야누스의 행정 능력과 원수정 시대의 로마 통치 체계 연구를 다루는데, 이 기록을 많이 참조한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들을 보면, 트라야누스의 성격과 행정, 정무 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상당히 유연한 현군임을 수 없이 보여주고 있다. <서한집> 안에 나타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 트라야누스는 저자 외의 다른 총독들과도 비슷한 서한을 주고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이런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늘 책임감있고 단호한 입장에서 일일이 답변을 해줬다.
로마 제정 시대 황제들은 속주 총독들 외에도 현지 유력자, 지식인들의 탄원서 등을 전달받고, 속주 총독과 각지의 군단장들의 보고서 및 동향 보고도 매일 같이 올라왔기 때문에 현대 기준으로도 그 업무량은 살인적인 수준으로 벅찼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황제들은 비서와 고위 관료들에게 일부 사무를 담당하도록 하거나 황제가 지침을 정해 일관된 매뉴얼에 따라 답변하고 때론 명령을 덧붙여 가이드라인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했다.[22]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없는 시간까지 쪼개어 국정을 돌봤던 황제로, 말도 안 되는 보고서와 편지이더라도 성실히 모두 답변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는 행정을 처리하는 것에 있어, 일일이 법으로만 해결하기 보다는 그 테두리 안에서 융통성 있게 해결하도록 단호하게 지시했다. 그래서 그는 상당히 유연하고 지혜로운 모습도 많은 행정가였다.
이는 서기 110년 플리니우스가 보낸 기독교도 처리 문제에 관해 황제가 직접 답변한 것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트라야누스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후대 로마인들에게 착한 이교도 황제로 칭찬받을 정도로 매우 상식적이고 공정하게 플리니우스에게 조언했다. 또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를 비롯한 총독, 관료들에게 마구잡이식 처벌을 피하고, 모든 소송 절차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정을 처리하면 안 된다고 말했으며 익명의 밀고자들은 무시하라는 단호한 답변을 보냈다.
<서한집>에 따르면, 서기 110년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에게 기독교도들의 행방을 굳이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국가 제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은 처벌하라는 국법을 따르면서도, 밀고를 받거나 마구잡이식으로 처벌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당시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고,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에는 기독교 교세가 약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 이전까지 황제들은 로마 제국의 국가 제례를 거부하던 기독교를 사회 불안 요소로 보았기에 이전에는 탄압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 연간에도 기독교인임이 드러나면 처벌을 받았다. 대표적인 순교자로는 110년경 처형당한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를 들 수 있다.
2.3.5. 파르티아 전쟁과 사망
어느 정도 행정적 정비와 개혁이 이루어지자,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장기인 군사 원정을 다시 계획하고 114년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였다.로마는 네로 황제 이후로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파르티아의 뜻에 맞는 인사를 앉히고 이를 로마가 승인하는 형태로 양보해서 파르티아와의 관계를 봉합하고 있었다. 헌데 파르티아의 새로운 왕중왕에 등극한 오스로에스 1세는 서기 110년 이 협정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아르메니아 왕을 페위하고 파르타마시리스를 새 왕으로 앉힌다. 이는 로마의 동의를 받지 않은 협정 파기였고, 트라야누스는 로마에 우호적인 아르메니아 왕이 폐위되자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서기 113년 가을 동방을 향해 출격했다.
전쟁 배경에 관해, 현대사가 개리 K. 영과 같은 이들은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전쟁을 통해 무역로 확보와 직접 세수 확보 목적으로 전쟁을 벌였다고 분석한다. 허나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통관세가 붙지도 않고, 두 국가 모두 사치품 교역망 확보에 열을 올리며 경쟁하는 앙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파르티아는 로마와 중국, 인도와의 무역을 중개만 하면서 이를 방해하지 않았고, 중간에서 폭리를 취하기 보단 자국 상인들에게 오롯이 맡긴 국가였다.
따라서 로마사 학자들은 천상 군인인 그가 오로지 로마 군인들이 갖고 있는 군사적 영예와 정복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이 전쟁을 계획했고 여러 우려에도 이를 밀어 붙였다고 설명한다. 이는 당대의 원로원 의원이자 비티니아 총독이었던 소 플리니우스의 서한들,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가 원로원 관보와 여러 기록을 토대로 기술한 저술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트라야누스는 원로원 연설과 파르티아 전쟁 과정에서 파르티아 원정이 영토 확장과 군사적 위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 시대의 원로원 관보 등을 통해 기술한 1세기 뒤의 디오 카시우스의 증언처럼 황제는 원정을 통해 얻을 군사적 영예에 집착했고 이 원정으로 어떤 로마인보다 압도적인 군공을 세우고 싶어했다.
트라야누스의 동방 출정은 117년까지 계속됐는데, 전쟁 준비는 다키아 원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차근차근 진행됐다. 그래서 실제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소모된 비용은 상당히 컸고, 이 비용의 대부분은 동방의 여러 속주, 지방정부들에게 고스란히 청구돼 상상 이상으로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동원됐다. 이는 소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에 있는 동안 쓴 111년 서신들에서 확인된다.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가 즉위 직후부터 이 전쟁을 신중하고 꼼꼼히 계획했음을 직간접적으로 묘사했는데, 여기에는 황제의 지시로 어떤 물자가 동원되고 총독이 인적, 물적 자원을 비축하면서도 각 속주의 지방의회와 유력자들에게 이에 대한 분담까지 주문한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트라야누스가 동방 원정을 시작했을 때, 10개 군단이 동부 전선으로 집결했고 모든 군대의 보급물자는 로마 제국의 동부 속주들이 분담했다. 여기에는 식량, 무기 외에도 각 속주마다 차출되는 보조병 등도 포함돼 실제 비용은 부유한 동부 일대 주민들도 부담을 가질 만큼 꽤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명분이 파르티아 측의 협정 파기와 파르타마시리스의 즉위인 만큼, 로마군은 트라야누스 지휘 아래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파르타마시리스를 폐위시키고 아르메니아를 병합시킨다. 이어 황제의 지휘 아래 로마군은 코카서스 일대와 흑해 동부 연안까지 모조리 로마 속주로 병합시킨다. 같은 시간, 트라야누스의 명령에 따라 루시우스 퀴에투스를 필두로 한 야전 사령관들이 로마군을 이끌고 파르티아를 일제히 공격했다.
이 결과, 트라야누스 황제는 개전 2년 만에 로마 영토를 티그리스 강 유역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 페르시아 만까지 넓혔다. 이 과정에서 트라야누스는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합병하고,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했다. 크테시폰의 점령 이후 그는 페르시아 만에 당도하게 되는데, 이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유럽 대륙의 군주로서 정복 활동을 통해 가장 동쪽 먼 곳에 도달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나바테아 왕국[23]을 굴복시켜 아라비아의 속주로 편입시켰다.
이 기간 동안 고도 바빌론을 성지순례하기도 하고, 본인이 젊었더라면 알렉산더처럼 인도까지 갔을 것이라고 야망을 표하는 등 모든 게 다 잘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부신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키아 원정 때의 초토화된 다키아 사회를 생각한 파르티아 군소 영주들의 게릴라 활동과 보급선의 장기화, 보급 기지였던 안티오키아의 지진 등으로 말미암아 파르티아 전쟁은 점차 소득은 없고 비용만 많아지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이는 오촌 조카 하드리아누스와 같은 일부 엘리트들이 경고한 부분이었는데, 설상가상 제국 전역의 반란으로 확산됐다. 파르티아는 곧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했고, 아르메니아 역시 로마에게 대항했다. 다뉴브 강 일대에서는 사르마티아인, 록솔라니인들이 꿈틀거렸고, 브리타니아에서는 잠잠하던 칼레도니아 쪽에서 불순한 움직임이 돌고 로마 수비대가 오늘날의 스코틀랜드 접경 지대에서 철수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반란, 소란이 연이어 터지자 셀레우키아,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까지 정신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런 와중에 오늘날 키토스 전쟁이라고 부르는 유대 지역의 반란까지 터졌다. 파르티아로 출정을 나가 있던 로마군의 후방인 키레나이카와 이집트 및 키프로스 섬과 유대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십만 명의 로마 민간인들과 후방에 남겨진 소규모의 로마군 수비대를 대량 학살했다.
특히 로마군에게 식량을 공급하던 대곡창 지대인 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로마군의 식량 보급이 위태로워졌다. 이 때문에 결국 트라야누스 황제는 파르티아 원정을 도중에 포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니 트라야누스는 단호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위기를 넘기려고 해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행히 유다이아 총독을 맡고 있던 베르베르 출신의 뛰어난 야전 사령관 루시우스 퀴에투스(Lusius Quietus)가 키레나이카, 키프로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유대인 이주민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고, 리다를 함락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24]
만약 이때 유대인들의 반란이 없어서 로마군의 후방과 식량 보급이 안정되었다면, 아마 트라야누스 황제는 계속 파르티아를 밀어붙였을 것이고 어쩌면 파르티아가 완전히 멸망했을 수도 있었기에, 로마인들로서는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옆의 링크를 참조 바람. #
따라서 116년 트라야누스와 로마는 동방 원정을 통해 파르티아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재정복하지 못하고,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명목상 자신들의 클리엔테스인 파르티아 왕자에게 넘기는 선에서 사실상 전쟁을 끝마치게 된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아시리아 속주 전체와 대(大) 아르메니아로 불린 지역의 일부를 상실했는데,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간 뒤, 부족한 인적, 물적 자원을 한계치까지 징집해 메소포타미아 재탈환을 준비케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마 수뇌부들은 우려를 재차 표했고, 하트라 공성전까지 실패하고 본인은 열사병으로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결과까지 얻게 됐다.
이렇게 되니, 트라야누스는 점차 파르티아 전쟁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군 내부 분위기 역시 가라앉게 됐다. 설상가상 서방과 달리 일교차가 심한 사막 기후에서 3년간 힘겨운 원정을 하면서, 황제의 건강은 악화된 터라 체시폰에서 돌아오던 중 강철 같은 건강마저 잃고 만다. 하여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키아에서 겨울을 지낸 뒤, 이듬해 봄에 정복했다가 빼앗긴 메소포타미아를 다시 한번 차지할 원정 계획을 미처 실행하지도 못하고 로마로의 귀환을 결정했다.
이때 트라야누스는 자신의 유일한 남자 친족이자, 누나의 손녀 사위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를 동방 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육로를 통해 킬리키아로 향했다. 하지만 귀환 도중, 트라야누스는 중풍 증세를 호소하다가 쓰러졌다. 오랜 긴장감과 원정 실패에 대한 자책, 아쉬움으로 힘겨워했던 몇 달간의 모습 때문에 이렇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쓰러진 황제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며칠 뒤인 117년 8월 9일 킬리키아의 작은 섬 셀레누스에서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64세였다.
사후 장례가 치러졌으며 관례에 따라 신격화되었다. 죽기 직전에 그는 5촌 조카이자 시리아 속주 총독이었던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하여 후임 황제가 되게끔 했는데, 이를 두고 하드리아누스 재위 초반에 논란이 있었다. 트라야누스가 명시적으로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한 적이 없었으며, 양자 지명 자체가 트라야누스 사망 당시 플로티나 황후가 황제의 어명이라면서 대신 전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라야누스가 사망한지 3일 후 트라야누스의 음료 담당 시종이 의문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하드리아누스 항목 참조.
로마 역대 황제 중 가장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세운 트라야누스는, 사후 로마인들에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다키아, 파르티아 원정 계획을 현실에 옮겨 영웅 같은 정복과 승리를 가져다준 황제로 기억됐다.
하지만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다키아 전쟁 승리 이후의 대처 역시 미완인 터라 이는 고스란히 후임 하드리아누스에게 넘어갔다. 다행히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벌인 전쟁으로 발생한 제국 군사 비용과 인적, 물적 소비 관리 측면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에도 트라야누스의 전쟁들은 결과론적으로 3개의 완충국[25]을 없애거나 크게 약화시켜, 끝내 후임 황제들에게 재앙으로 찾아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그 '완충국'이 로마한테 편리하게 완충국에만 머무른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므로 그러한 평가는 결과론적 비난이다.
3. 평가
3.1. 전통적 평가: 이상적인 황제
Optimus Princeps라는 칭호가 지고의 황제라고 번역되었는데 'Optimus'라는 단어는 '완벽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트라야누스를 이미 동시대의 사람들은 완벽한 황제라고 여겼다.이는 고대 사가들의 모든 기록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인데, 트라야누스에 관한 로마인들의 찬사는 황제나 한 인간으로 모두 존경받았다. 따라서 로마 제국이 3세기 이후 쇠락기를 거치는 과정에서도, 후기 로마 제국 시대의 로마인들에게 트라야누스는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원수정 시대의 수많은 황제 중 유이하게 제국의 질서를 유지한 명군으로 찬사받았다.
당대 로마인이자 원로원 의원 소 플리니우스, 후대 사가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살았던 원로원 의원이자 사가 디오 카시우스 모두에게 황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최고의 찬가를 받은 거의 유일무이한 로마 황제였다.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를 " 권위주의 아래의 헌신으로 현명하고 공정한 황제이자 도덕적인 인간의 표본이다."라고 칭송했고, 디오 카시우스는 그가 "항상 고귀하고 공정했다."고 말했다. 이 점은 1~4세기 로마 원로원 내에서 서방 출신[26]과 동방 출신[27] 사이에서 본인과 가문 관념이 상반됐고, 이 점이 갈등 요소였기 때문에, 트라야누스의 평이 원로원 내에서 어느 정도로 훌륭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황제에 대한 평이 양 측에서 서로 갈린 나머지, 후임자 하드리아누스나 이후의 세베루스 왕조 황제들이 서방, 동방 출신에게 그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렸음을 떠올리면, 트라야누스에 대한 디오의 평은 주목해볼만 하다. 더군다나 디오는 당대부터 매우 냉소적이었고, 그리스 중심 성향의 대변자로 표현될 만큼,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증오받은 인사였고, 이 점이 강제 은퇴 이유가 됐기 때문에, 냉소적이었던 디오가 은퇴 후 저술한 기록에서 트라야누스가 본인 일가 조상들과 갈등을 빚음에도 이렇게 평함은 트라야누스가 본인과 갈등을 빚게 된 쪽에게조차 어떤 인물로 평가받았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28][29]
3세기 군인황제시대의 로마황제 데키우스는 원로원에게 트라야누스라는 이름을 받은 뒤, 아예 자신과 아들들의 새로운 성씨로 '트라야누스'를 삼을 정도로 그를 위대한 황제로 여겼으며, 3세기 이후에는 로마 황제가 새로 즉위하면 즉위식에 참석한 군중들이 "Felicior Augusto, Melior Traiano!" (= " 아우구스투스보다 운이 좋고 트라야누스보다 나은 통치를 빕니다!")라고 외치며 황제를 축복하는 관습이 생겼다.
아울러 기독교도들에게도 그는 여느 황제들과 달리 가장 이상적이고 선한 이교도로 기록될 정도로 그 평이 훌륭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곡》의 시인 단테의 작품에도 트라야누스가 림보도 연옥도 아니고 천국에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트라야누스 때 로마의 경제는 풍요로웠고, 군사적으로도 적대국을 모두 격파한 데다 성격까지 모나지 않아 원로원과의 사이도 좋았다.[30] 또한 생활에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없으니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로 완벽한 황제라 불릴 만했다.
3.2. 재평가: 트라야누스 치세의 한계 및 문제점
트라야누스는 최고의 로마 황제를 꼽으라하면 꼭 언급되는 황제일 정도로 훌륭한 황제였다. 하지만 당연히 트라야누스도 인간인만큼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트라야누스에 대한 평가는 1940년대 이후 고고학이 발전하고, 비문 해석이 20세기 이후 옛 로마 영내에서 발굴되면서 안 좋은 부분이 부각돼 재평가 중이다.이는 전통적 관점을 유지 중인 서양학자들도 비슷한 의견인데, 트라야누스가 벌인 대외 전쟁 중 다키아 전쟁이라면 몰라도 파르티아 전쟁은 그다지 후속 결과가 좋지 못했고, 그의 정복 전쟁들은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임에도 투입 대비 효과는 전쟁 특수를 통한 국가 재정 확보 외에는 장기적으로 엄청난 도움까진 주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
동시대 소(小) 플리니우스의 평과 달리 트라야누스는 외정에선 성공적일지 몰라도 국정 운영 방식이나 속주 행정 정책 결정 등이 평균 이상일 뿐 역대 로마 황제 중 가장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트라야누스는 여타 선대 황제들과 달리 속주의 상류층과 민간 징세 청부업자들이 중앙 정부의 수세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부수입을 끌어 올려 그 재원을 확보해 원로원과 황제가 이를 바탕으로 시혜를 베풀고 함께 이득을 얻는 형태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문제점은 온전히 후임 황제들이 뒤집어 쓰는 꼴이 됐다고 평가받을 만큼 로마 입장에선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체제 개편 역량이나 장래 야만족 문제가 제국 전체의 방어선에 큰 부담을 주게 될 것이란 선견지명도 후임 하드리아누스만 못했고, 제국 관리 능력은 오현제 중 가장 떨어지는 황제 중 한 명으로 늘 거론된다.[31][32] 간단히 말하면, 트라야누스의 치세는 도금된 영광이라는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속주 행정 및 세수 확보는 프린키파투스(= 원수정) 시대[33]까지 황제와 속주 총독 / 황제와 속주 내 유력자 간의 상호 소통과 서한 교환에 기반한 방식을 사용하면서, 파견된 세금 징수원과 세금 징수 대행업자들의 협조를 통해 집행됐다. 따라서 황제가 "정부의 조세 징수액이 높아지면 그러한 공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지는 한계"를 방치하면, 지방 세수 체제에 기반한 로마 재정은 속주 재정에 더 의존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위험성이 높아졌다.
또 로마 제국의 재정 정책들은 평화시 제국의 수입과 지출이 그럭저럭 꾸려져도, 트라야누스처럼 황제가 계속된 정복 전쟁을 치르고 기부금을 시혜하면 내란이나 기타 비상 사태에 대처할 자금을 비축할 여력이 없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이런 의견에 관해, 트라야누스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트라야누스가 은광과 금광 생산량이 네로 시대에 이르러 감소한 단점을 보완코자 다키아를 정복한 게 아니냐?", "동방 무역 적자를 해결코자 파르티아와 전쟁 후 무역망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어 전쟁을 강행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고고학 발달과 여타 전문 사회과학 학문 도입에 따른 로마사 연구 발전 동향에서, 현대 학자들은 이런 목적을 백번 양보하더라도 언 발에 오줌 누기 같은 일시적 해결책이었다고 단언한다. 당장 그가 벌인 파르티아 전쟁 속에서 군자금 문제 등으로 트라야누스 본인이 주화 대량 발행을 위해, 은 순도를 18% 줄이게 하여 벌충한 조치만 해도, 그가 군사적 업적, 즉 외적으로는 깊게 전쟁 이후 조치에는 상당히 꼼꼼하지 못하며, 고평가 속에서 제시된 경제적 이유로 파르티아를 침공했다는 논리 역시 일부 맞다고 한들 맞춰 끼우기로 실패한 전쟁조차 포장됐다는 평을 듣고 있다.[34]
트라야누스의 치세가 시작될 당시, 로마 제국은 1세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투스 ~ 클라우디우스 1세 시대까지 취한 서유럽과 이탈리아 일대 경제력 향상 및 황무지 개발, 가이우스[35] ~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연이은 이탈리아 및 로마 일대의 항구 개발과 농경지 확보, 도시 공업 발전 등에 힘입어 경제적 취약성을 극복하는 듯 했다. 가이우스의 남이탈리아 항구 개발, 개보수 계획 및 시행과 중부 이탈리아 일대의 농경지 개발 및 확대 전략은, 후대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돈은 돈대로 쓰고 얻은게 뭐냐?!"고 비난받았다고 하나 이는 이 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이나 동시대 필로, 대 플리니우스, 요세푸스의 기록처럼 그냥 까기 위한 뻘소리에 불과하다고 일찌감치 결론이 났다.
요세푸스로 대표되는 동시대 인들에 따르면, 도리어 막대한 예산을 일시에 사용해 공공 인프라 건설에 쏟은 탓에 우려는 컸지만 도리어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의 기아 문제를 일시에 해결시켜줬다고 한다. 삼촌 필로의 영향으로 칼리굴라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마냥 좋아하지 않은 요세푸스 역시 칼리굴라의 본국 이탈리아 및 서방 속주의 경제 발전 정책과 발 빠른 대처에 대해 아주 현명했다고 평하고 있다. 이는 원수정 초기와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연구한 학자들의 평가도 비슷하다.
그들 역시 수에토니우스나 세네카의 주장에 대해, "그 논리라면 갈리아, 이탈리아, 로마가 고사하는데, 손을 놓고 있으라는 거냐? 세네카와 수에토니우스의 논리는 로마 제국 서방 전체를 고사시키라는 것이다."라며, 이를 뻘소리 중 뻘소리로 취급한다. (요세푸스의 증언처럼) 이때 시행한 이탈리아 항구 및 농경지 개발은 도리어 로마와 이탈리아 곡물 수급 문제를 해결케하고, 이탈리아 내 곡물 자급력을 끌어올렸으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기근 방지 대책 전략 등은 비용 대비 효과가 대단히 훌륭했다. 따라서 21세기 들어 대대적인 칼리굴라의 이탈리아 경제 발전 정책들은 로마 제국의 경제적 취약성 극복 노력과 황제 개인의 행정적 역량 모두에서 좋은 평가받고 있다.
이는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플라비우스 왕조의 세 황제 아래에서 제국의 서방 경제와 속주 징세 조치는 고도화된 행정 시스템과 제국 수요에 맞게 진화했다. 네 황제의 해라는 내란을 수습한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부자는 네로 치하에서 무너진 속주세 논란 문제를 해결하고, 부족해진 군 입영자 문제를 해결했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는 원로원을 개편하면서, 네로 치하에서 방치된 방만한 속주 경영 문제부터 손봤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쌓아 놓은 행정, 군사 역량을 바탕으로 속주 경영 재정비, 라틴 시민권 확대, 로마 시민권 확대 조치 및 군단 기지 주변 경제 활성화 명령을 내리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결과, (동방에 비해) 낙후되고, 지역 유지들의 목소리가 강한 히스파니아, 갈리아, 서부 게르마니아 그리고 일리리아와 달마티아 일대의 세수는 늘어났고, 이들 지역의 성장은 아우구스투스가 청사진을 그리고,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본궤도에 오른 본국 이탈리아와 로마 도시 경제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이탈리아 민생 경제 성장 조치 이상으로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됐다. 이탈리아 도시 경제의 성장기반은 칼리굴라의 루그두눔 개발과 갈리아 ~ 이탈리아까지의 무역망 확대 조치가 그 바탕이 됐기 때문에, 이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처럼 제국 서부와 본국 경제가 끊임없이 발전하고 그 규모를 유지하는데 큰 힘이 됐다.
티투스 시대는 짧았지만,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비약적인 발전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엄격함과 황제 휘하 관료 집단의 전문 행정 실무 처리 능력으로 그 효율성이 증대됐다. 하지만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확보한 세수 및 관리 노력과 결과에도, 로마 제국의 국가 재정은 여전히 속주 경제[36]와 속주민들에게서 징수한 속주세에 의존하고 있었다. 즉,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의 노력에도 제국의 국가 재정은 한계가 명확했고, 이마저도 그 정점에 이르러 돌파구가 필요했다.
더욱이 황제와 제국 관료들의 노력에도 드넓은 제국의 크기와 유지비는 갈수록 고도화되는 제국 행정 시스템과 방위비 문제의 고민을 안겼다. 도미티아누스 시대 후반부터 중앙 정부의 노력에도 국가 재정이 속주 경제에 의존하는 경향을 벗어나지 못해, 경고등이 켜지는 상황이었다. 황제와 원로원의 대립, 원로원 안에서의 여러 변화도 문제로 떠올랐다. 원로원 안에서는 기존 주류인 이탈리아 귀족들의 대항마를 넘어 그들을 경제력과 수준 높은 문화력으로 위협하는 지중해 동부와 푸닉 출신 신참자들이 출현했고, 도미티아누스의 노골적인 전제권력 시도는 황제의 그리스, 푸닉 출신 선호로 인해 지중해 동부 일대에 더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도미티아누스와 지중해 동부, 아프리카 북부 출신 엘리트들이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으나, 이런 경향은 트라야누스가 원로원 의원, 장군, 황제로 있던 시절에 이미 표면화됐다. 따라서 트라야누스 집권 당시, 황제의 국정 파트너인 원로원은 나날이 위상이 하락하고, 인재풀로서의 기능 역시 기사 계급이나 전문 관료, 직업군인들에 비해 질적 하락이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트라야누스에게는 도미티아누스 말기의 외정 실수 외에도 내정 문제 해결이라는 숙제도 놓여 있었다.
로마 황제들은 후임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예처럼 이런 취약성 극복을 위해 트라야누스와 같은 원로원 배려보다는 적극적 명령과 속주 경제 의존성 완화를 위한 법 정비 등 다른 방법을 시행했다. 그런데 트라야누스는 전임 도미티아누스나 후임 황제들과 달리 연이은 정복 전쟁을 통한 전쟁 특수 및 세수 확보에 집중했다.
이는 그가 천상 군인이며 이 당시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외정 실패를 해결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의 영향이 컸다. 허나 트라야누스 시대의 진짜 그늘은 그가 내정을 하는 과정에서, 과거 공화정 시기의 폼페이우스 식의 일 처리로 속주 경영을 통치했다는 부분이다. 즉, 트라야누스 시대의 속주 경영, 세수 확보는 1세기 전의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그 후계자들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반세기 전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보다 뒤떨어진 (좋게 말하면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헌데 이런 트라야누스의 현상 유지적 속주 경영 및 원로원을 배려한 속주세 징수 방식은 공교롭게도, 트라야누스 본인과 당시 원로원 입장에선 너무 이상적이고 완벽한 방법이었다. 원로원 의원들 입장에선, 본인들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었을 때 과거 폼페이우스 시대처럼 총독의 역량에 따라 떨어지는 부수입도 많고, 징세의 폭도 불법만 저지르지 않고 편법적으로 운영하면 합리적인 운영으로 포장되니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가 없었다.
황제 역시 다키아 전쟁, 파르티아 전쟁으로 많은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국정 동반자로 내정을 커버해주는 원로원이 좋아한다면 굳이 시간을 쪼개 세심하게 제국 내정을 관리할 이유가 없었다. 쉽게 말하면, 트라야누스 시대의 진짜 그늘은 당대 황제와 원로원 입장만 생각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고, 이는 그대로 후임 황제들에게 오롯이 짐이 됐다. 따라서 매우 아쉬운 방법이 많았는데, 트라야누스는 원로원 배려와 속주 행정을 전례에 따른 합리적 운영, 현상 유지를 취했을 뿐 다른 후임 황제들과 달리 미래까지 내다 본 결정은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물론,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정복해 풍부한 금광, 은광을 얻고 다키아 포로들을 노예로 만든 부분은, 제국 경제의 기반인 대농장 경영과 국가의 금화, 은화 가치 유지에 도움이 됐다. 그렇지만 트라야누스는 두 후임자[37]와 달리 정복 전쟁을 통한 전쟁 특수와 전리품 확보를 통한 국가 재정 운영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그는 국가 재정 운영을 영리하게 꾸리지 않았다.
이는 현대 학자들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문제인데, 트라야누스의 내정 방향은 제국의 국고를 파산 위기에 몰릴 위험성에 노출케 했다. 대대적으로 벌인 각종 기념비, 공공건물 건축과 구호금 지급, 원로원에 대한 막대한 시혜는 연체 세금 말소, 세금 감면 등이 함께 제공되면서 로마 제국 관료나 군대 실무행정가들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남겼다. 이는 갈수록 관료제 유지, 병사들 임금 등 기본적인 제국 운영비가 증가하는 현실에서 장기적으로 내란, 군사 비상사태, 재해시 비상 자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였다.[38]
당연한 이야기인데, 젊은 시절 하드리아누스로 대표되는 제국 수뇌부 중 일부는 이런 상황을 알고 있어, 이를 크게 걱정했다. 오촌 조카로 10살때부터 당숙 밑에서 양자로 자란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이 트라야누스와 그 측근들에게 찍히는 상황에서도, 국가 재정 건전성과 투입 대비 산출의 비효율을 근거로 파르티아 전쟁을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간곡히 진언한 것이 고대 기록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즉, 트라야누스의 정책들은 원로원과 로마 거주민 중 대다수에게는 인기를 받았을 지라도, 그렇지 않아도 2,000km가 넘는 서방 방어선과 그 못지 않은 다른 방어선 관리로 한정된 예산으로 국가를 꾸려야 할 후임들에게 또 다른 짐을 안긴 악영향이 의외로 꽤 많았다. 따라서 트라야누스 시대 이후 도리어 정복 전쟁을 통한 단기적 특수 외에는 분명 제국의 경제적 취약성이 방치되는 악영향이 됐고,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나아가 세베루스 왕조 연구 과정에서 황제와 속주 총독, 관료들의 정책 및 서한, 비문 등으로 확인되고 있다.
3.2.1. 반론: 트라야누스의 고충
단, 트라야누스가 재정을 아주 도외시했다거나 그의 재위가 도금된 시대라는 비판도 반론은 가능하다.우선 파르티아 원정과 별개로, 다키아 원정의 경우엔 트라야누스가 단순히 전쟁 특수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관념상, 그리고 안보상으로도 불가피한 전쟁으로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차후 다누비우스 방어선에서의 안정과 평화 측면에선 분명 성공적이었다. 데케발루스가 거듭 평화 조약을 어기며 황제 암살까지 시도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파르티아와의 전쟁도 그가 전쟁광이라기보단 로마의 체급을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어, 이 부분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무조건 페르시아권과의 다툼을 피해야 할 수 없고, 당시 명분 중 한 가지가 로마의 국제 정세상 아르메니아, 아라비아 일대와도 묶여 전쟁 수행 자체로는 반박할 점 역시 있기 때문이다.
다만 트라야누스가 실시한 시혜 정책 중 복지 정책은 특성상 재정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이는 현대 미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 문제이다. 그렇지만 현대 관점이 아닌 고대 로마의 정치와 경제 체제에서 그 한계점을 찾아보면, 이 부분은 트라야누스 입장에서도 분명 할 말이 많다. 우선 로마 황제의 인기 유지가 아닌 내정에서 중요한 것은 빵과 서커스와 함께 시혜였다. 괜히 후기 로마 제국 시대까지 유일하게 내치의 기준으로 언급된 아우구스투스가 국고 재정에서 무리가 될 알리멘타를 본인과 황가 이름으로 하면서 선례를 만든 게 아니었다. 또 대규모 토목 공사는 기본적으로 로마 황제에게는 필수였다. 명예로운 경력 중 속주가 아닌 로마에 근무한 재무관, 안찰관(조영관), 법무관, 집정관에게 보수, 유지를 통해 경험을 쌓게 하고, 이를 통해 원로원과 긴밀히 재정 문제를 논하려면, 대규모 공공 건축물이나 인프라 건설 입안이 황제에게는 책무로 인식됐다. 또 이 건축물, 인프라는 황제의 기부 방식이라서, 이를 외면하는 것은 황제 중 티베리우스 같이 인기, 평판 신경쓰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로마 엘리트에게는 공화정 시절부터 모스 마이오룸에 입각한 책무를 외면한 것과 같았다. 괜히 티베리우스 다음으로 즉위한 칼리굴라가 엄청난 유증금을 일시에 지출하면서, 티베리우스가 즉위 이후 중지시킨 아우구스투스 계획 하의 공공 건축물을 다시 건설하게 하고, 본인이 남이탈리아 항구 건설을 비롯한 인프라 건설, 수도 로마의 수도교 체계 완성, 오스티아 항구의 기초가 된 로마 외곽 항만도시 건설, 북이탈리아 일대 개발 등을 추진한 것이 아니었다. 즉, 토목 공사는 단순히 돈 낭비가 아니라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내정 중 중요한 임무이자 당연히 해야 될 것으로서 모스 마이오룸의 수호자인 황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설령 원로원과 황제 사이가 나쁘더라도, 왜 요세푸스, 디오로 대표된 이들이 칼리굴라, 카라칼라의 대규모 공공 건축물 입안과 인프라 건설에 대해서 비난하기 위해 억지로 쥐어 짠 비난이라고 그들 스스로도 이런 시각을 부정적으로 평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즉, 시민들의 지지가 필수적인 로마의 정치 특성상 황제는 군공과 더불어 토목 공사로 로마인들의 자부심을 채워 지지를 얻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트라야누스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 안건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로마의 재정이 악화되기 시작한 건 지중해 농업 기술의 낙후로 생산성이 정체되며 노예 노동도 유입이 그쳤기 때문도 있어, 이 점도 생각해야 한다.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노예를 더 데려와야 하는데, 로마는 이를 극복할 확장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더해 히스파니아 일대의 은광 고갈을 시작해, 황제로서는 본인의 직접 명령을 받는 루그두눔에 위치한 직속 조폐국 등의 운용,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달마티아 일대에 내려진 조치 속에서 괴리 현상으로 지적된 이 일대 출신 인사들의 불만 등도 트라야누스 앞에 놓인 과제들이었다. 따라서 트라야누스는 이 문제을 위해서라도, 그 대책이 절실했고, 그는 이를 전쟁으로만 해결하지 않고, 준비 과정과 전후 조치 아래 그 해결에 불협화음이 없도록 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다키아 전쟁이 전쟁특수라고 현대 관점에서 폄하되더라도, 트라야누스와 로마로서는 다키아 전쟁으로 대표된 정복전쟁이란 전 과정을 주제로 할 때에는, 할 말이 많았다. 은광 고갈, 노예 수급 정체, 늘어나는 방어 상황 속에서 도전하는 외부의 적들이 느는데, 국고 관리하겠다고 한다는 재평가 역시 온전한 정답이 아닌 것이다.
물론 도시 정체기가 도미티아누스 시대 후기부터 눈에 보였고, 트라야누스가 이전의 도미티아누스나 이후 즉위한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보다 속주 총독에게 내린 명령이 단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트라야누스 외에도 하드리아누스나 어떤 로마의 지배층도 농업 기술 발전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본 문서의 재평가 문단에서 비교 대상이 된 하드리아누스 역시 로마의 농업 생산성이나 노예 확충 중 어느 하나 완벽히 해결하지 못하고 재정 지출을 줄이는 데에만 그쳤을 뿐이다.
3.3. 결론
안토니누스가 전쟁 포로, 범법자, 노예들에게 광산 징역 대신 농장 수급에 중점을 두어 이들을 라티푼디움에 투입하게 명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시작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콘스탄티누스 1세 등이 귀순 의사가 명확한 국경 밖 야만족의 제한적 이민과 농노화를 일부 실패 속에서 장려해 노예 확충 한계 보완에서 거둔 점은, 트라야누스의 경제 정책이 한시적이라고 비판하는 요소로 학계에서 논쟁이 오고 가고 있다.그런데 사실 그러한 조치들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로, 결국 해당 황제들 이후에도 로마의 경제적 쇠퇴와 분열은 피하지 못했다. 특히 서로마 제국은 갈리아와 이베리아반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농업 기술 미비와 무역 적자는 끝끝내 해결되지 못했으니, 나름대로 신경썼다는 후대 황제들의 조치도 근본적 해결은 못되었다. 외부적 요인 등으로 인해 역시 고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건 다들 마찬가지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로마의 쇠퇴는 트라야누스 한 명이 초래했다기보다는 고대 로마의 지나치게 긴 국경선과[39] 낙후된 농업 기술, 전염병, 이민족의 발전 등이 그 원인이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 현재 주류 학계의 다수설이다.
그렇기에 트라야누스를 '로마의 쇠퇴를 불러온 암군', '앞뒤 안가리고 전쟁만 한 전쟁광'이라고 지나치게 후려칠 필요는 없다. 비판을 제기하는 학자들조차도 트라야누스가 명군이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단지 '지고의 황제'나 '무결점의 황제'로 고전에서 칭송된 트라야누스 역시 제국의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선대 황제들과 비교했을때 아쉬운 점을 남기며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무결한 것처럼 알려진 강희제에게도 실책이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40]
4. 개인적 면모
트라야누스는 전반적으로 티베리우스와 외모, 체형, 성격 모두 비슷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당대에는 도미티아누스와 항상 비교되는 일이 많았다.그는 티베리우스와 마찬가지로, 키가 매우 크고, 어깨가 넓고, 가슴이 두터웠으며, 체형이 강건했다. 죽는 순간까지 매우 건강했고, 규칙적이고, 성실하고, 놀라울 정도로 부지런했다. 거짓말을 진짜 좋아하지 않았고, 항상 본인과 타인 모두에게 엄격했고, 과묵했다. 즉위 당시 머리는 철회색이었는데, 눈이 컸다. 도미티아누스처럼 상명하복을 중요시했는데, 이는 황제로서 위엄을 갖고 원로원을 압박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랜 세월 군인으로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모습이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를 경험해본 원로원 의원 모두 평하듯이, 미움을 받지 않았다.
이런 특징처럼 트라야누스는 연설과 대화 방법 모두 무언가를 거창하게 덧붙이기를 싫어하고, 직설적이었다. 도미티아누스처럼 위압감 있는 분위기를 느끼게 했지만, 확실히 상대를 배려했다. 1월 1일 세 번째 집정관 취임 연설 당시에도 그랬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에게 국가를 돌보는 일을 자신과 공유할 것을 권고하면서, 모든 임무와 책무는 원로원 동료 스스로 떠맡는 주체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원로원에게 존칭을 붙여주고, 온화하게 행동해,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무례한 독재자 느낌이 없었다고 한다. 트라야누스는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이 황제에게 모든 책임을 지는 식으로 회피하는 것을 진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티베리우스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현대에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트라야누스는 티베리우스처럼 원로원이 소극적으로 구는 것을 "스스로 노예가 되려고 한다."는 식으로 호통을 치지 않았고, 재위 기간 내내 프라이토리아니를 동원해 은연 중 원로원 내 정적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없었다. 그는 황제와 원로원이 동등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공화주의와 원로원의 자발성을 전통과 원로원의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발언해도, 그 다음으로는 황제와 원로원이 사실 동등하지 않음도 항상 인정했다. 이에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가 솔직했다고 평가했는데, 이런 평처럼 원로원은 트라야누스를 미워하지 않았으며,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언행이 분명하다고 평했다.
사생활, 성격으로 보면, 트라야누스는 진짜 조용하고 심심했다. 제국의 영역을 최대로 넓히는 군사적 업적을 이뤘을 뿐 아니라 건실한 성품으로 제국의 번영을 이끈 전성기를 연 현제로 평가받지만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즉, 너무 심심한 나머지, 천성이 군인이라는 평 외에는 별다른 성격상의 특징점을 보여주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가 전쟁을 좋아하긴 했지만 승리를 하면 만족했다면서 천성부터 군인 그 자체의 성격이었음을 간접적으로 기술했다.
트라야누스는 화려하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농담을 하거나, 따뜻한 말을 주고 받는 것에 매우 서툴렀다. 자기 자랑 역시 과묵한 나머지 거의 하지 않았고, 서정시를 짓는 것 등의 모습도 없었다. 사냥, 오락 등에도 흥미가 없고, 여가 일환으로 경기장을 찾아가서 로마인이 좋아한 검투사, 전차 경기를 보는 일도 없다시피 했다. 이는 본인 손에서 10살부터 보호받고 자란 조카 하드리아누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그래서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비비아 사비나와 약혼, 결혼 직후부터 장모를 비롯해 동서 지간인 처제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남편 안니우스 베루스에게 거의 매일 서정시로 정신적 유대관계를 돈독히 한 부분을 하드리아누스의 사냥 취미와 함께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트라야누스의 누나와 아내는 하드리아누스의 이런 재능을 높이 평했는데, 분명 트라야누스는 당대 로마인의 표현 그대로 모범적이고 시간 낭비조차 절제한 로마인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무미건조함은 2대 황제 티베리우스와 비슷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쉽게 친해지기 힘들었고, 깊이 친구가 된 인맥이 적었다. 모두 직설적이었고, 군인으로 즉위 전까지 경력이 상당해 상명하복을 매우 중시했다. 그러면서도 또래 귀족 출신 장군, 원로원 의원들과 다르게, 부하 잘못도 본인 책임으로 규정하고, 가문이 아닌 성실함을 기준으로 성과가 미미해도 열심히 하면 부하를 인정해, 부하들에게 가까이 하기 어려워도 존경받은 사람로 찬사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예의를 진짜 중요시 했다는 점도 판박이였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반드시 상대의 지위를 반영해 상대 비난을 극단적으로 내몰아 붙이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과거 티베리우스처럼 집정관 집무실에 방문한 때에도 화가 나더라도 끝까지 "집정관"이라고 존칭을 붙여주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내심이 대단하다고 평가 받았다.
헌데 트라야누스는 적어도 티베리우스와 달리 극단적으로 과묵하더라도, 상대의 아부도 적절하게 용인해줬고, 무미건조하더라도 낯을 가리지 않았고, 차가운 성격이 아니었다. 황제가 되고 처음 로마에 온 날, 소 플리니우스가 8시간 넘게 온갖 아부를 떤 찬사를 연설로 늘어 놓음에도 티베리우스와 달리 끝까지 들어준 트라야누스였다. 그러나 그는 서정시를 쓰거나 읽는 것은 진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놀랍게도 매우 검소하고 무미건조하더라도 말년 은둔 생활 중에도 소년 시절부터 문학 소년 별명 그대로 좋아한 라틴, 그리스 시인 문체로 서정시를 짓거나 점성술에는 큰 흥미를 느낀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트라야누스는 개인적 특징에서 크게 쓸 것이 없을 정도로 심심하다는 평 아래 기행이라고 할 만한 점도 없었다고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된 고전사가들은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이런 개인적 성격 그대로 트리야누스는 자신의 전공을 뽐내는 것에도 서툴렀고, 큰 관심도 없었다. 이를테면 '홍보'에 약했고, 홍보의 필요성도 관심이 없었던 셈이다. 실질강건이 그의 성격을 지배하는 중대한 요소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닌데, 그렇다고 아예 본인 홍보를 안 했던 것은 아니다. <다키아 연대기>라는 이름의 책을 자신의 일기를 토대로 작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고작 라틴어로 다섯 단어로 된 문장만 남아 있을 뿐 현존하지 않고, 남아 있는 문구들도 보면, "아군은 진군을 하기 위해 필요 군수품을 점검해야 했다." 등 여느 군인이 자신이 그날 했던 일을 사실 위주로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또 후세에게 알리겠다고 쓴 것도 아니고, 본인 업무일지로 쓴 방식이라서, 남은 문구들조차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론>보다도 무미건조한 느낌이 든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그가 지은 유명한 건축물들은 대부분 웅장한 크기를 자랑한다. 사실 트라야누스의 정복 군주로서의 성격을 보면 통큰 건축 공사가 꼭 그와 어울리지 않는 사업은 아니다. 게다가 그가 한 공사는 광장, 다리, 목욕탕 등으로 공공시설의 성격이 강했다. 황제 자신을 위해 한 공사는 그다지 없다.[41] 영토를 넓히는 것, 커다란 건축물이 올라가면서 나라가 강건해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 이 둘은 모두 '실질강건'이라는 그의 성격에 딱 들어맞는 사업이다.
트라야누스에게는 오른팔 격으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수라(Lucius Licinius Sura)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한번은 수라가 트라야누스의 암살을 꾀한다는 참소가 들어왔다. 그러자 트라야누스는 오히려 수라의 집을 먼저 찾아가 함께 만찬을 나누면서 수라의 이발사 노예에게 면도까지 부탁하여, 자신이 수라를 신뢰하고 수라도 자신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온 로마에 직접 보여주었으며, 그를 서기 102년, 107년에 보결 집정관에 임명해줄 정도로 신뢰했다. 수라 또한 서기 108년 사망할 때까지 다키아 전쟁에 군단장으로 참전하는 등 트라야누스에게 충성을 다했다.
완벽하고 재미없었던 트라야누스에게도 의외의 면모나 단점으로 지적된 부분이 있긴 했다. 고대기록에 의하면 지적된 약점은 그가 포도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셨다든지[42] 젊은 남자들과 어울려 식사자리를 즐기고 그 분위기를 좋아했다는 건데[43], 이런 흠 역시 지극히 개인 취향이고 오늘날 기준으로 보더라도 별 문제거리가 없는 부분이었다.
이런 흠을 지적한 기록은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 디오는 이 일화들을 지나가는 말처럼 기술하면서, 미소년과 포도주를 탐닉했다고 해도 문제로 지적하기는 애매했는지 잠시 언급만 하고 넘어갔다. 그러면서 그는 혹시 모를 오해의 여지를 차단하기 위해, "트라야누스 황제가 포도주를 탐닉했음에도 술에 취한 적도 없고, 미소년이나 남성들과 식사를 하면서도 부당한 일이나 도덕적 잘못은 하지 않았다"고 짚고 넘어갔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서술한 내용도 딱 이러한데, 대기업 임원이 신입사원들을 늘 회식에 데려가는 것 정도로 해석하면 이상하지 않다.
이 외에도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는 수수함을 추구했고 상남자 같은 성격임에도 의외로 무언극 배우 필라데스에게 매료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역시 이성으로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팬으로서 이 배우와 그 연기를 좋아했다는 식으로 서술하면서 넘어갔다.
5. 출신 관련 오해와 진실
트라야누스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평범한 속주민이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인데, 이전의 내용에도 모계가 속주민 출신이라 되어 있을 뿐 트라야누스가 정확히 어떤 혈통의 가정환경과 가계를 가졌는지 명확히 설명되어 있지 않았다.결론부터 말하면, 트라야누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가 맞다. 다만, 3세기 군인황제들과 비슷한 속주민도 아니었고, 평범한 신분도 아닌 좋은 가문 출신의 로마황제였다. 트라야누스 가문은 베스파시아누스로부터 귀족 칭호를 부여받았던 가문이었다. 결론적으로 트라야누스의 출신 성분이 일개 평민이었던 것은 아니다.[44][45]
후술하지만, 트라야누스가 태어나고 자란 이탈리카는 BC 2세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건설한 식민도시였고, 이 도시는 히스파니아 최초의 로마인 식민도시였다. 당연한 말인데, 트라야누스 가족은 이탈리카가 건설되기 전부터 이탈리아 태생의 로마 시민권자였고, 대대로 로마시민권을 보유한 일반적인 속주 출신들이 아니었다. 모계 역시 마찬가지인데, 외가 역시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로마시민권자로, 트라야누스의 어머니도 낮은 계급은 아니었고 이탈리아와 속주 내 로마시민권을 가진 평민 중에 명문가 출신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트라야누스의 이모 마르키아 푸르니라는 티투스 황제의 두 번째 아내였고 트라야누스의 외사촌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46] 역시 원로원 의원이었다. 다시 말하면, 고향과 가문의 근거지가 속주일 뿐인 전형적인 1~2세기의 로마 상류층이었다.
그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트라야누스의 아버지와 친가가 네 황제의 해에서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부터 원로원 의석을 얻고 귀족 가문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반만 맞는 이야긴데, 트라야누스의 집안은 트라야누스 아버지 생전에 클라우디우스 1세때 원로원 의원을 배출했고, 1차 유대 전쟁에서는 군단장으로 재임해 있었던 상태였다.
따라서 트라야누스는 태어날 당시부터, 그 출신이 이전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비텔리우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상층부에 들어가 있었던 셈이다.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인 평민으로 제위에 올랐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사실이긴 하지만 로마에서는 '평민(Plebs)'도 상당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여유가 있을 수 있는 계층이었다. 애초에 로마의 황제는 특권을 가진 시민이었으며, 그 특권을 전 황제에게 정당하게 상속받고, 원로원에서 크게 태클 걸지 않는 이상, 이론상 모든 로마 시민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이전까지의 황제는 로마의 명문 귀족, 적어도 최소한 이탈리아 출신들이 독점해 왔다는 점에서, 트라야누스의 즉위는 그 의미가 달랐고 상당한 파격이었다. 속주 출신인 로마인은 출세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트라야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들은 출신지역과 상관없이 권리를 향유한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의의가 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 활약한 뛰어난 인물들은 대부분 속주 출신 로마 시민권자들이었다. 속주 출신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면서 이들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커졌고,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이들의 것이었다. 속주 출신의 평범한 시민이 입신양명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는 '성공 신화'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물론 모든 제도엔 명암이 있기에, 군인 황제 시대에는 과거라면 황제 자리는 아예 꿈도 못 꿨을 속주 출신 장병들이 너도나도 황제를 노리게 되지만, 그건 이 항목에서 다룰 문제는 아니니 생략한다.[47]
6. 여담
- 출신 가문으로 유명한 울피우스(Ulpius)는 움브리아 출신 플레브스 가문으로 뜻은 늑대에서 기원했다. 이 가문은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공교롭게도 그의 오촌조카이자 양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본래 가문인 아일리우스 가문과는 인연이 매우 깊은 집안이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아래에서 일가 사람 일부가 스페인으로 함께 건너간 다음 이탈리카를 세웠다.[48]
- 서기 100년 퇴역병들을 위해 아프리카 속주에 건설한 식민도시를 만들 때, 본인의 부모 이름을 합쳐, 콜로니아 마르키아나 울피아 트라야나 타무가디(Colonia Marciana Ulpia Trajana Thamugadi)라는 매우 긴 이름을 지어 건설했다. 이 도시가 오늘날 알제리의 도시로 고대 로마 제국의 유적지로 유명한 팀가드이다.
- 즉위 전까지 로마에서 사저로 산 곳이 현재의 첼리오 언덕인 카일리우스 언덕에 있었다. 이 사저는 누이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외손녀 소(小) 마티디아(민디아 마티디아)에게 트라야누스 생전 상속됐는데, 그 이유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누나의 세 외손녀 중 첫 남편과 아주 일찍 사별 후 독신을 선언한 그녀를 가장 아끼고 안쓰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 저택과 함께 트라야누스 황제는 그녀에게 영지 딸린 대형 빌라를 지어 함께 줬는데, 소 마티디아는 이 시골 별장에서 주로 살면서, 자신을 자상하게 아끼고 사랑한 트라야누스 황제와 본인 이름으로 마을 주민에게 계속 기부를 했다. 따라서 현재 이 마을은 그때부터 이름이 마티케로 바뀌었다. 참고로 트라야누스 황제가 즉위 전까지 살았던 집은 마티디아를 거쳐, 마티디아가 손수 키우고 정을 쏟은 루키우스 베루스와 마티디아 이부자매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손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돌아갔다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끝난 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명으로 트라야누스 황제의 옛 사저는 경매로 팔리고 그 주변은 부촌으로 재개발됐다.
7. 매체에서
- 신곡 천국편에서는 림보도 연옥도 아닌 천국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선한 이교도 중 한 명으로, 목성천 독수리의 일부분을 맡고 있다. 원래 림보에 있었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기도로 구원받고 천국에 왔다. 실제 트라야누스는 재위 당시 기독교도들을 박해하지 말라고 지시한 황제였기에 이런 대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그가 기독교에 호감을 가진 인물은 절대 아니었음에도.
- 오늘날의 스페인 출신 로마황제인 탓에 18세기 에스파냐의 왕 카를로스 3세는 화가 멩스에게 트라야누스가 담긴 작품을 특별히 요청했다. 그 작품이 바로 마드리드 왕궁 연회장 천장에 그려진, 《 트라야누스의 개선》이라는 작품이다.
- 트라야누스가 정복한 다키아 왕국 주민들과 트라야누스의 정복 이후 다키아로 이주한 로마인들의 후손이 바로 루마니아인으로 때문에 루마니아의 국가 루마니아인이여, 깨어나라!에서도 등장한다.
- 문명 6에서 로마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시리즈 역사상 문명 1부터 문명 4까지는 줄곧 카이사르가 지도자로 나오고 아우구스투스가 4와 문명 5에, 리비아 드루실라가 문명 2에 등장했는데, 6에서 처음으로 간택되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 - 로마의 귀환에 로마 시나리오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첫번째 미션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 휘하의 군단장으로 사투르니누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도미티아누스의 암살과 네르바를 거쳐 황제에 즉위한 후부터는 상기한 다키아, 나바테아, 파르티아를 상대로 한 전쟁을 미션으로 진행하게 된다.
[1]
오늘날
스페인
세비야 근처의 도시인 산티폰세(Santiponce).
[2]
다키아를 정복한 후 원로원에 의해 처음 주어진 존칭이었다. 이때는 트라야누스 스스로가 거부했다가 파르티아 전쟁을 시작한 후 받았다.
[3]
'신격 네르바의 아들인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라는 뜻이다.
[4]
해당 왕조는 트라야누스의 양부였던
네르바가
프라이토리아니 주도 궁중정변 후 유폐된 채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선포하고 제위를 넘기는 식으로 개창됐다.
[5]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정통성 핵심을 트라야누스 황제 일가의 피를 이은 자를 입양해 가문을 잇는 로마 귀족 관습에 따라 유지됐다. (차이가 있다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다섯 황제 모두 입양을 통해 유지된 반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어쨌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대 가면 아들
콤모두스가 즉위해 직계를 통해 부자상속으로 제위가 이어졌다.)
[6]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5촌조카, 트라야누스 고모의 손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외손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 사위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는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외손녀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손자, 증손자로 트라야누스 황제의 몇 안 되는 남계 후손이 된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의 법적 손자
루키우스 베루스는 혈연상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계 후손이나, 루키우스 베루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딸
루킬라와 결혼하면서, 혈연적으로 보면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5대손과 결혼한 인척이었다.
[7]
고대
라틴어로는 MARCVS VLPIVS TRAIANVS
[8]
오늘날의
스페인.
[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증조모.
[10]
콤모두스는 부, 모 모두를 통해 트라야누스의 피를 이어받은 안토니누스 가문의 정통 적자였다.
[11]
그 역시
이탈리아의 소도시 출신이었다. 그 점에서 그의 배경이 그다지 배타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측근이었던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더'는
유대인이었다. 속주민을 중앙 정계에 적극적으로 진출시켜 씨를 뿌렸다는 점에서, 베스파시아누스의
선견지명은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시대의 필연적인 요청이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12]
재정 파탄 외에도
네로의 지나친
그리스계 선호로
지역 차별 문제가 나왔으며, 로마 정규군에 지원할 본국(=
이탈리아) 출신 청년들이 일반 군단병보다 여러 부분에서 대우가 좋은
근위대에 지원하거나, 본국의 경제 성장 등을 이유로 입대하지 않는 현상이 방치되는 문제도 벌어졌다. 따라서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정규군의 질적 악화 등 각종 현안을 타개해야만 했다.
[13]
엄연히 원로원에 입성했다고 해도, 원로원 귀족과
기사 계급은 세금 혜택 등에서 차별이 있었던 터라 트라야누스 아버지가 귀족이 된 것은 그가
플라비우스 왕조의
일등공신인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다.
[14]
로마 제국 동방의 최고 책임자로, 총독들의 총독이었다. 유사시 동방의 속주 총독들은 전부 시리아 총독의 명령을 받았다.
[15]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외조부.
[16]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의붓아버지이다.
[17]
1차: 101 ~ 102, 2차: 105 ~ 106
[18]
이 시기 트라야누스를 가리켜
로마 제국 역사상 어느 황제보다도 풍부한 자금을 확보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이집트라는 부유한 지역을 새로 합병한
아우구스투스를 제외하곤 대적이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서 약탈해온 자금을 보유한
하드리아누스 황제 또한 풍부한 자금을 보유했다.
[19]
현대에는 정중앙의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제외하고 유적이 많이 파괴된 상태다. 무솔리니가 한 짓이 원인이다. [20] 이 다리는 "당시 로마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웅장한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8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이 도나우 강에 기선이 다닐 수 있도록 폭파했다. [21] 현 퀴나 근처 [22] 우리가 폭군, 암군으로 알고 있는 대개의 황 제 들 역시 이와 비슷했는데, 이들의 경우에도 트라야누스처럼 일을 미루지 않았고 중요 문제에 있어 자신의 의사를 적극 표시해 그 지침을 법적 근거를 거론하며 하달했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아예 업무 자체를 방치해버리고 보내는 매뉴얼도 불성실한 콤모두스나 즉흥적으로 업무 결정을 내리고 그리스 일대에 있어 편향적으로 대한 네로는 당대 로마인들에게 가루가 될 때까지 두고두고 빻일 수 밖에 없었다. 이중 콤모두스는 그 경우가 심각했는데, 친정을 한다면서 서신 담당관과 개인 비서에게 매뉴얼조차 “잘 지내라”, “좋은 시간이나 보내라”로 짤막하게 보내라고 했다. [23] 아랍인의 직계 조상인 나바테아인들이 요르단에 세운 왕국이다. [24] 그러나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직후 트라야누스가 죽고 제위를 차지한 하드리아누스에게 최대의 경쟁자로 찍혀 처형당하고 만다. [25] 가까운 게르만족, 파르티아, 나바테아. [26]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판노니아, 달마티아, 일리리쿰, 푸닉 지방 중 아프리카, 브리타니아, 마우레타니아. [27]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 및 푸닉 지방 중 트리폴리타니아. [28] 소 플리니우스의 기록 등에서 밝혀진 것처럼, 그리스 출신 인사들이 자치도시, 속주민 관리에서의 독립 또는 책임은 지지 않지만 권리를 달라는 요구에 트라야누스는 매우 현명하게 대처했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 구성 측면에서 확실히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출신들 입장을 대변한 황제 중 매우 유화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런 요구를 한 이들의 의견을 듣고, 학자들과 토론을 하며 의견을 들어주는 노력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그는 천상 군인 출신으로 행정 전반에서 군무 경험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총독들에게 그리스 유지들이 이런 요구를 함을 로마의 지배와 법 아래에서 질서를 유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따라서 디오가 이런 것을 적으면서도, 최대한 비난을 가하지 않음은 주목하다고 평가받는다. [29] 디오로 대표된 동방 출신 귀족들은 동시대 서방 출신, 남부 출신 귀족들보다 매우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들은 본인과 가문의 성공과 명예에서 폐쇄적이고,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점의 우월성을 강조한 모습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런데 디오는 이런 동부 속주 출신 그리스 귀족 중에서도 훨씬 더 보수적, 폐쇄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로마 제정 전체에서 전형적인 그리스 성향, 중심의 원로원 의원인 디오가 로마 총독에게 그리스 유지들이 자치도시, 속주민 관리에서 독립을 요구함을 트라야누스가 견제하고, 트라야누스가 그리스 출신들이 "발목 잡는다" 식으로 불평을 표한 조치들을 유지시킨 것을 넘어 책임까지 확실히 지게 한 것조차 악평을 퍼부을 수 있었고, 그는 비슷한 조치를 취한 세베루스 왕조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에게는 부정적 의견을 표명했다. 그렇지만 디오는 그 선례를 제공한 트라야누스에 대해선 권위적이다라고만 살짝 불평할 뿐 그가 황제로서는 매우 이상적이었다고 기술했다. [30]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되어 로마에 입성했을 때 성문에서 하마해 원로원 의원과 함께 걸어갔다. 또한 지고의 황제라는 칭호도 일찌감치 받았으나 그는 이 칭호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파르티아를 격파하고 나서야 받기로 했으니 이러한 태도들은 원로원 의원들이 트라야누스에게 호감을 갖도록 했다. [31] 하드리아누스가 군사, 국경 정책에서 큰 업적을 남긴 건 사실이나 모든 걸 혼자 한 것은 아니었다. 카타프락토이의 도입은 다키아 전쟁의 후속 조치 중 하나였으며(= 파르티아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다키아 전쟁 때 다키아 편에 참가했던 사르마티아인들의 중장기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같은 경우, 이미 트라야누스가 그 근처에 나무 방벽을 세운 흔적이 있다. [32] 물론 하드리아누스는 확실히 성격적인 문제가 있었던 데다 자기 절제 능력이 트라야누스만 못했으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웬만하면 전ㆍ후임 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모든 지표에서 앞서는 건 불가능하다.하지만
누구와
누구 후임자는 다르다
[33]
아우구스투스 ~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
[34]
당연한 주장인데, 이 근거들은 트라야누스의 이런 실정을 조기에 해결한
하드리아누스, 장기적 관점에서 대비한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내치 능력과 판단력이 뛰어난 증거로 거론되고 있다.
[35]
별칭:
칼리굴라.
[36]
특히
지중해 동부
[37]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38]
이를 증명하듯,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즉위 직후부터 자신과 두 아들의 외부 일정을 최소화하면서 고정지출을 줄이고,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 같은 막대한 자금을 통한 공공건물 건립을 최소화했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두 아들이 즉위할 당시 국고에 막대한 잉여금을 남겨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잉여금은 아끼고 아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조차 국가 위기 상황에서 사용할 돈도 모자를 정도로 부족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는 이탈리아가 침공받자, 궁전의 보석, 보물, 골동품 등 돈이 될 만한 금은보화를 죄다 경매로 팔아치워야만 했고, 이 비용도 모자라 국가예산까지 쪼개며 원로원에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39]
특히 이 국경선을 방어하는 방식이 방어전술 중 가장 비효율적인 선 방어체계였던 것은 로마의 제정에 부담을 주었다.
[40]
우연찮게도, 근대 유럽 지식층 역시 강희제와 트라야누스를 비교하는 경우가 많았다.
[41]
다키아 정복 기념으로 세운 트라야누스 원주는 황제 본인이 아닌 원로원이 지시한 공사다. 황제가 공사를 지시하고 겉으로는 원로원이 지시한 것처럼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가 원로원과 사이가 좋았던 몇 안 되는 황제라는 걸 생각하면 굳이 원로원과 사이가 나빠질 이런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42]
당시 포도주는 물에 희석해서 마시는 게 정석이었다. 왜냐면 당시의 포도주 원액이 말 그대로 시럽같이 걸쭉한 물건이었기 때문. 그리스어로 야만인을 뜻하는
바르바로이라는 단어의 기준 중 하나일 정도.
[43]
그의 후임인 하드리아누스는 실제로 양성애자였으나, 트라야누스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로마 시대에는
동성애를 고대 그리스 시절처럼 좋게 보는 것은 아니었으나, 공개적으로 공공연하게 행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트라야누스는 동성애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종교인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보다 선대의 인물이라, 만약 동성애 성향이 있다 해도 그게 큰 흠이 될 확률도 높지 않았다.
[44]
물론 공화정 시대의 그 귀족과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지만... 일종의 "신흥귀족으로 받아들였다"라는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사실 제정으로 이행된 뒤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래된 귀족 가문은 계속 줄어들어서 이 당시에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45]
한편으로는 흥미롭게도 로마는 '귀족' 신분도 능력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사회였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귀족 칭호를 부여받은 가문들 중에는 트라야누스가 속한 울피우스 씨족 이외에 갈리아전쟁 때 카이사르에게 율리우스라는 씨족 이름을 부여받은 갈리아의 부족장 가문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였다.
[46]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아버지
[47]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적당히 늘어났던 제정 중기에는 제국 전체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능력에 의해 출세해 황제 자리에까지 올랐다. 차별받는 계층의 인력 낭비를 생각하면 로마는 인재를 가장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활용할 수 있는 구조를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8]
다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직계조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직계조 마르쿠스 울피우스보다 로마군 계급이 훨씬 높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직계조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직속 백인대장으로, 이탈리카 건설 직후부터 로마 중앙의 스키피오 가문과 로마 정부에게 이탈리카 및 현재의
세비야 일대 치안 보고 등을 도맡아 처리한, 식민도시의 시장격 거물인사였다.
현대에는 정중앙의 트라야누스 원기둥을 제외하고 유적이 많이 파괴된 상태다. 무솔리니가 한 짓이 원인이다. [20] 이 다리는 "당시 로마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웅장한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8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이 도나우 강에 기선이 다닐 수 있도록 폭파했다. [21] 현 퀴나 근처 [22] 우리가 폭군, 암군으로 알고 있는 대개의 황 제 들 역시 이와 비슷했는데, 이들의 경우에도 트라야누스처럼 일을 미루지 않았고 중요 문제에 있어 자신의 의사를 적극 표시해 그 지침을 법적 근거를 거론하며 하달했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 아예 업무 자체를 방치해버리고 보내는 매뉴얼도 불성실한 콤모두스나 즉흥적으로 업무 결정을 내리고 그리스 일대에 있어 편향적으로 대한 네로는 당대 로마인들에게 가루가 될 때까지 두고두고 빻일 수 밖에 없었다. 이중 콤모두스는 그 경우가 심각했는데, 친정을 한다면서 서신 담당관과 개인 비서에게 매뉴얼조차 “잘 지내라”, “좋은 시간이나 보내라”로 짤막하게 보내라고 했다. [23] 아랍인의 직계 조상인 나바테아인들이 요르단에 세운 왕국이다. [24] 그러나 루시우스 퀴에투스는 직후 트라야누스가 죽고 제위를 차지한 하드리아누스에게 최대의 경쟁자로 찍혀 처형당하고 만다. [25] 가까운 게르만족, 파르티아, 나바테아. [26]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판노니아, 달마티아, 일리리쿰, 푸닉 지방 중 아프리카, 브리타니아, 마우레타니아. [27]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이집트 및 푸닉 지방 중 트리폴리타니아. [28] 소 플리니우스의 기록 등에서 밝혀진 것처럼, 그리스 출신 인사들이 자치도시, 속주민 관리에서의 독립 또는 책임은 지지 않지만 권리를 달라는 요구에 트라야누스는 매우 현명하게 대처했다. 트라야누스는 원로원 구성 측면에서 확실히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출신들 입장을 대변한 황제 중 매우 유화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런 요구를 한 이들의 의견을 듣고, 학자들과 토론을 하며 의견을 들어주는 노력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그는 천상 군인 출신으로 행정 전반에서 군무 경험의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총독들에게 그리스 유지들이 이런 요구를 함을 로마의 지배와 법 아래에서 질서를 유지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따라서 디오가 이런 것을 적으면서도, 최대한 비난을 가하지 않음은 주목하다고 평가받는다. [29] 디오로 대표된 동방 출신 귀족들은 동시대 서방 출신, 남부 출신 귀족들보다 매우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들은 본인과 가문의 성공과 명예에서 폐쇄적이고,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점의 우월성을 강조한 모습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런데 디오는 이런 동부 속주 출신 그리스 귀족 중에서도 훨씬 더 보수적, 폐쇄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로마 제정 전체에서 전형적인 그리스 성향, 중심의 원로원 의원인 디오가 로마 총독에게 그리스 유지들이 자치도시, 속주민 관리에서 독립을 요구함을 트라야누스가 견제하고, 트라야누스가 그리스 출신들이 "발목 잡는다" 식으로 불평을 표한 조치들을 유지시킨 것을 넘어 책임까지 확실히 지게 한 것조차 악평을 퍼부을 수 있었고, 그는 비슷한 조치를 취한 세베루스 왕조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에게는 부정적 의견을 표명했다. 그렇지만 디오는 그 선례를 제공한 트라야누스에 대해선 권위적이다라고만 살짝 불평할 뿐 그가 황제로서는 매우 이상적이었다고 기술했다. [30]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되어 로마에 입성했을 때 성문에서 하마해 원로원 의원과 함께 걸어갔다. 또한 지고의 황제라는 칭호도 일찌감치 받았으나 그는 이 칭호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파르티아를 격파하고 나서야 받기로 했으니 이러한 태도들은 원로원 의원들이 트라야누스에게 호감을 갖도록 했다. [31] 하드리아누스가 군사, 국경 정책에서 큰 업적을 남긴 건 사실이나 모든 걸 혼자 한 것은 아니었다. 카타프락토이의 도입은 다키아 전쟁의 후속 조치 중 하나였으며(= 파르티아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다키아 전쟁 때 다키아 편에 참가했던 사르마티아인들의 중장기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같은 경우, 이미 트라야누스가 그 근처에 나무 방벽을 세운 흔적이 있다. [32] 물론 하드리아누스는 확실히 성격적인 문제가 있었던 데다 자기 절제 능력이 트라야누스만 못했으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웬만하면 전ㆍ후임 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모든 지표에서 앞서는 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