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9:41:58

소 플리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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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 ignotus: 불명
  • incertus: 불확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가 계속 집권하였거나 아니면 불명의 다른 인물이 선출되었는지 불명확함
황제 겸 집정관 }}}
1년 1년 보결 2년 2년 보결 3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발레리아누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3년 보결 4년 4년 보결 5년 5년 보결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클로디우스 리키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6년 6년 보결 7년 7년 보결 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킬리우스 롱구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8년 보결 9년 9년 보결 10년 10년 보결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아울루스 비비우스 하비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포파이우스 세쿤두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11년 11년 보결 12년 12년 보결 13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실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13년 보결 14년 15년 15년 보결 16년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센나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16년 보결 17년 17년 보결 18년 18년 보결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볼루세이우스 프로쿨루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비네이우스 레굴루스
18년 보결 19년 19년 보결 20년 21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빕스타누스 갈루스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1년 보결 22년 22년 보결 23년 23년 보결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막시무스
24년 24년 보결 25년 25년 보결 26년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26년 보결 27년 27년 보결 28년 28년 보결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벨라이우스 투토르
29년 29년 보결 30년 30년 보결 31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수르디누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31년 보결 31년 보결 31년 보결 32년 32년 보결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섹스투스 테디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33년 33년 보결 34년 34년 보결 35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
35년 보결 36년 36년 보결 37년 37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섹스투스 파피니우스 알레니우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케로니우스 프로쿨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37년 보결 38년 38년 보결 39년 39년 보결
아울루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퀼라 율리아누스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푸블리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칼푸르니우스 세라누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카이시아누스
39년 보결 39년 보결 40년 40년 보결 41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ignotus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sine collega 퀸투스 테렌티우스 쿨레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41년 보결 41년 보결 41년 보결 42년 42년 보결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푸티우스 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이우스 바라누스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42년 보결 43년 43년 보결 43년 보결 43년 보결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ignotus 스푸리우스 오피우스
44년 44년 보결 45년 45년 보결 45년 보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아울루스 안토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46년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카메리누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47년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바겔리우스 가이우스 볼라센나 세베루스
48년 48년 보결 49년 49년 보결 50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퀸투스 베라니우스 루키우스 맘미우스 폴리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빕스타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구스 갈루스 퀸투스 알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수일리우스 네룰리누스
51년 51년 보결 51년 보결 52년 52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베투스 카르미니우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52년 보결 53년 53년 보결 53년 보결 54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아누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 퀸투스 카이키나 프리무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
54년 보결 55년 55년 보결 55년 보결 55년 보결
마르쿠스 아이풀라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누메리우스 케스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55년 보결 55년 보결 56년 56년 보결 56년 보결
푸블리우스 팔푸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쿠티우스 킬투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프로쿨루스
56년 보결 57년 57년 보결 58년 58년 보결
루키우스 두비우스 아비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아그리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카이시우스 마르티알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58년 보결 59년 59년 보결 60년 60년 보결
아울루스 페트로니우스 루르코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아울루스 파코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 보피스쿠스
61년 61년 보결 62년 62년 보결 62년 보결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63년 64년 64년 보결 65년 65년 보결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65년 보결 66년 66년 보결 66년 보결 67년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누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67년 보결 67년 보결 68년 68년 보결 68년 보결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아스코니우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베룰라누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69년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세르비우스 갈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비니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70년 70년 보결
파비우스 발렌스 그나이우스 카이킬리우스 심플렉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로시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퀸크티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70년 보결 70년 보결 71년 71년 보결 71년 보결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그나이우스 페디우스 카스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퀴리날리스 발레리우스 페스투스
71년 보결 71년 보결 72년 72년 보결 72년 보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바르바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두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72년 보결 73년 73년 보결 73년 보결 73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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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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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보결 74년 보결 75년 75년 보결 75년 보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트루이누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76년 76년 보결 76년 보결 76년 보결 7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 갈레오 테티에누스 페트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길로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77년 보결 77년 보결 77년 보결 78년 78년 보결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가이우스 아룬티우스 카텔리우스 켈레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데키무스 유니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루푸스) 퀸투스 코렐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ignotus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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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투스 비툴라시우스 네포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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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보결 80년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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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81년 81년 보결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포스투무스 브라두아 섹스투스 네라니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티티우스 프루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노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로스키우스 코엘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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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보결 81년 보결 81년 보결 82년 82년 보결
루키우스 베티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스코에디우스 나타 피나리우스 루키우스 카르미니우스 루시타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세르바이우스 In]noc(ens)
티투스 유니우스 몬타누스 티투스 테티에누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움브리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3년
[…]an(us) [가이우스 아리니우스 Mo]dest(us)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파트루니우스 마르쿠스 라르키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실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ignotus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퀴에투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
83년 보결 83년 보결 83년 보결 84년 84년 보결
마르쿠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가이우스 피시우스 사비누스 테렌티우스 스트라보 에루키우스 호물루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 ignotus
84년 보결 84년 보결 85년 85년 보결 85년 보결
가이우스 툴리우스 카피토 폼포니아누스 플로티우스 피르무스 igno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리카누스 ( 마르쿠스 라이키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글리티우스) 갈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호노라투스
85년 보결 85년 보결 85년 보결 86년 86년 보결
푸블리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아부리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리베랄리스 노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코르넬리우스] 오레스테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페트로니아누스
86년 보결 86년 보결 86년 보결 87년 87년 보결
incertus 섹스투스 옥타비우스 프론토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퀸투스 비비우스 세쿤두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마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티디우스 토시아누스 루키우스 야볼레누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87년 보결 87년 보결 88년 88년 보결 88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가비디우스 테바니아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데키무스 플로티우스 그리푸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타
가이우스 두케니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88년 보결 89년 89년 보결 89년 보결 90년
마르쿠스 오타킬리우스 카툴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푸블리우스 살루스티우스 블라이수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섹스투스 율리우스 스파르수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사이니아누스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푸시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아카이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바이비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알비우스 풀라이에누스 폴리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 가이우스 카리스타니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프로쿨루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90년 보결 91년 91년 보결 91년 보결 92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케리알리스 (또는 마르쿠스 투키우스 케리알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데키무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베게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툴리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마리누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사비누스 네포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92년 보결 92년 보결 92년 보결 93년 93년 보결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몬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아비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섹스투스 루시아누스 프로쿨루스
93년 보결 94년 94년 보결 94년 보결 95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라루스 섹스티우스 Na(so)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투키우스 Ceria]lis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95년 보결 95년 보결 95년 보결 96년 96년 보결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만리우스 발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포스투미누스
푸블리우스 두케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툴루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파이투스]
96년 보결 97년 97년 보결 97년 보결 97년 보결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카이시우스 프론토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폴리나리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섹스투스 헤르멘티디우스 캄파누스
97년 보결 97년 보결 98년 98년 보결 98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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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마테르누스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98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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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 플리니우스.jpg
이름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
(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출생 61년
사망 113년
지위 비티니아와 폰투스 속주 총독, 원로원 의원, 집정관

1. 개요2. 생애3. 서한집(Epistul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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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1세기~ 2세기에 활동한 로마 제국의 정치인, 작가. 트라야누스 황제를 6시간에 걸쳐 찬양하고 도미티아누스를 폭군의 전형이라고 비난한 연설문인 <찬사>,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받은 <서한집>으로 유명하다.

2. 생애

서기 61년 네로 황제 치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노붐 코뭄(Novum Comum: 현재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코모)에서 기사계급 출신인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킬로와 플리니아 마르켈라의 아들로 출생했다. 태어날 당시의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킬로였고, 후일 외삼촌의 양자가 되면서 개명한 이름이 오늘날 잘 알려진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이다.

이탈리아 코모에 세운 기념비를 통해 드러나듯, 위로는 형이 있었다. 형의 이름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발렌스, 푸블리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였다. 이들은 소 플리니우스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가 소년일 당시, 이미 성인이었다. 이들은 어머니 플리니아 마르켈라와 함께 돌아가신 아버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킬로의 유언 집행을 하면서, 코모 시민들을 위해 목욕용 비누 제작에 필요한 기름을 기부했다는 내용의 비문을 남겼다. 이 비문의 관리인이자 제작자는 "루키우스의 아들인 L.카이킬리우스 발렌스, P.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1]"라고 적어 놓았다. 동시에 이들은 로마인 중 군 경력이 있는 경우에 적는 콘투베르날리스(contubernalis)라고 하면서 형제가 (군사교육을 받기 위한) 장군의 측근 견습생이었음을 신분으로 나타냈다. 따라서 이들은 동생 플리니우스와 달리 이미 성인이었고, 못해도 20살 이상이며, 소 플리니우스의 아버지가 이른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소 플리니우스의 형들 중 발렌스의 경우에는 플리니아 마르켈라의 첫 아들이었다고 일부 학자들은 확신 중이다. 그 이유는 이 비문 제작 당시, 발렌스의 신분이 조영관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 플리니우스와 큰형의 나이 차이가 10살 정도였고, 둘째형과의 나이 차이 역시 대략 5살 정도는 났던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런 학자들의 추정처럼 실제로 비문에 적힌 소 플리니우스의 형 중 발렌스는 코모에 기념비를 세울 당시, 조영관 신분이었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원로원 의원으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생 소 플리니우스와 달리 군 경력 역시 꽤 있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 집정관은 경험하지 못했다. 둘째 형 푸블리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의 경우, 비문 제작 당시에는 군대 경력만 표시되어 있는데, 그 역시 평범한 원로원 의원으로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동생 플리니우스처럼 집정관을 지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원로원 의원이자 대지주였던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였고, 어머니의 오빠, 즉 그의 외삼촌은 로마 해군 제독이자 중세 유럽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 박물지>를 집필한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 대 플리니우스)이다. 어렸을 때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 형들과 함께 살면서 어머니의 오빠인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의 도움을 받았다. 이때 그는 그와 형들이 어머니와 함께 따로 재산관리인을 두면서, 외삼촌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았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지만 소 플리니우스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고자, 고향을 떠나, 로마로 건너간 다음,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의 집에 기거했다. 이 시절, 소 플리니우스는 외삼촌의 후원 속에서 좋은 스승을 여럿 만났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일찍이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2]에게 배웠는데, 로마 생활 중에는 외삼촌의 도움 등으로 퀸틸리아누스와 스미르나의 니키타스 사케르도스로부터 수사학을 교육받았다.

서기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 베수비오 화산 인근의 해안 도시들이 위험에 처했다. 당시 미세눔에 주둔하던 해군 제독 대 플리니우스는 즉시 함대를 이끌고 피난민들을 구조하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유독가스가 선내에 흘러들어오면서 결국 질식사했다. 당시 17세였던 그는 나폴리 만에서 상황을 지켜봤고, 사흘 뒤 삼촌의 시신과 대면했다. 그는 훗날 이 사건을 묘사한 서한을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발송했다.

대 플리니우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고, 유언장에 자신이 죽으면 모든 재산을 조카들 중 소 플리니우스를 양자 삼아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는 일찍부터 매우 부유해, 이탈리아 전역에 많은 빌라, 별장을 보유했다. 이 모든 재산은 전부 그의 몫이 됐다. 더해 그는 형 카이킬리우스 발렌스, 세쿤두스와 마찬가지로 대지주였던 할아버지, 아버지에게서도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따라서 소 플리니우스는 평생 부유했고, 이탈리아 전역에 많은 빌라를 보유했다. 이중 그가 좋아했던 곳은 고향 코모에 위치한 별장으로, 그가 " 비극"이라는 애칭을 지어준, 코모 호수 근처의 벨라지오 별장과 움브리아 페루자 근교에 있던 영지 딸린 호화 빌라였다. 이 외에도 그는 형 발렌스와 함께 로마, 오스티아 등지에 공동 명의로 된 저택, 두 형과 함께 소유한 코모 일대의 저택과 부동산 등을 여럿 소유했다.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 순직 이후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을 때, 형과 달리 외삼촌 유언장에 재산 상속 조건으로 친양자로 지명됐다. 이때 그는 로마법에 따라 외삼촌의 아들로 정식 입양되면서, 이름을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로 바꿨고, 외가를 온전히 상속받았다. 이 시기 전후를 기준으로 그는 베키우스 프로쿨루스의 의붓딸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정황상 외삼촌이자 양부 대 플리니우스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소 플리니우스의 첫 아내는 37세에 자녀 없이 병사했다.

형 발렌스, 세쿤두스와 마찬가지로, 외삼촌의 도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역시 외삼촌이 붙여준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순탄하게 공직 경력을 밞았다. 81년경 변호사로서 사법 재판에 참여해 피고인을 변호하였고, 뒤이어 시리아 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참모)로서 1년간 복무하였다. 80년대 후반에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88년 또는 89년에 황제의 검찰관으로 발탁되었다. 91년경 호민관이 되었고, 뛰어난 연설가로서 주목할 만한 명성을 얻었고 속주민들을 수탈한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지방 총독들을 직접 고발했다. 94년부터 96년까지 프라에펙투스 아레아리 밀리타리(praefectus aerarii militaris, 참전 용사 연금을 마련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재무관)를 수행했다.

98년 트라야누스가 집권했을 때 원로원에서 황제에게 찬사를 보내는 긴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문은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의 유일한 연설문으로, 오늘날까지 6 ~ 8시간이 넘는 장문의 아부 연설로 평가받는다. 흔히 《찬가》로 알려진 이 연설은 100년 9월 1일 원로원 회의에서 플리니우스가 황제 취임 승인 공표 직후 공개했다.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 앞에서 전임 황제 도미티아누스를 오만하고 비겁하며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반면,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을 배려하고 반대파 의원들까지 공정하게 대우하며, 숙련된 행정가이며 절제력이 뛰어나고, 인내심이 있고, 관대한 위대한 통치자로 추켜세웠다. 여기에 트라야누스의 누나 울피아 마르키아나와 아내 폼페이아 플로티나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동시에 그는 이를 공표했는데, 그 내용 중 아부의 극치로 평가받는 것은 끝도 없었다. 따라서 이 대목조차 그 내용이 아부 중 약한 편이라고 평가받는다.
"숲을 돌아다니시며 굴에서 맹수를 몰아내고, 광활한 산 정상을 오르시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길을 안내해주는 이가 없이 험한 바위산을 찾고, 무엇보다도 경건한 마음으로 신성한 숲들을 찾아가시어 그곳의 신들 앞에서 서는 것을 좋아하시는 경건함을 곁들인 인물이시노라."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때 자신의 허락으로 보결집정관 신분으로 발언권을 행사해 6시간동안 듣는 동료들까지 신물이 난 나머지 질려버린 소 플리니우스의 《찬사》를 무표정으로 들어주면서, 지루해하지 않았다. 또 로마에 도착한 뒤, 매우 지친 상황임에도 칭찬이 너무 지나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던 그 연설문을 끝까지 방해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를 다 듣고, 소 플리니우스에게 감사함을 전한 뒤 곧바로 퇴장했다.

《찬사》발표 후, 소 플리니우스는 따로 이 연설문을 공포문 형식으로 남겼는데, 이 아부는 트라야누스 황제 주변에게 꽤 인상을 남겼다. 로마에 없던 때, 표면상 황제의 총애에 힘입어 기사계급의 한계를 뛰어넘고 100년 보결 집정관에 취임한 소 플리니우스가 지나칠 만큼 칭찬했지만, 전임자들과 대비된 위엄을 남기는데 큰 점수를 딴 건 덤이었다. 6시간 동안 싫은 내색없이 다 들어준 황제 역시 그랬는데, 트라야누스는 이 연설을 다 들어준 9월 1일 직후부터 강력한 권력을 의식하면서도 실질적 덕목을 갖추고 모든 아부까지 인내심 있게 참아준 점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됐다.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로마에 도착한 뒤부터 매일 같이 온갖 행정, 사법 사무 문제의 자문을 구했다. 이 행동은 비티니아와 폰투스에서 110~111년 총독을 지낼 때에도 비슷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아부 못지 않게, 자신의 성공에 걸림돌이 될 트라야누스 황제의 오랜 친구이자 인척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를 비열하다고 욕하고, 그를 일방적으로 모함하고 헐뜯었다. 이런 행동은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가 네르바 황제에게 누명을 쓰고 추방됐다가, 트라야누스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사면령을 내려 억울함을 풀어준 점에서, 친구를 아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노여움을 살 법 했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황제는 플리니우스를 미워하거나, 그에게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플리니우스는 황제에게 찍히지 않았는데, 이후 그는 맡겨진 업무에 최선을 다해, 이런 행동에도 확실히 황제 지지자로 인정받아 보결 집정관 임기 시절부터 승승장구했다.

그는 104년부터 106년까지 티베리스 강 유역의 감독관을 맡았으며, 사법법정의원을 겸임하였다. 109년 또는 110년부터 비티니아와 폰투스 속주 총독으로 파견됐고,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동방 일대 군수품 확보 등의 중책을 부여받았다. 이 시절, 그는 황제에게 매일 서신을 보냈고, 다양한 사안의 판단을 묻고 그대로 따랐다. 여기에는 당시 세가 넓어지고 있는 기독교도 문제도 있었는데, 그는 트라야누스에게 이전에 기독교도였던 사람과 익명의 고발로 기독교도로 기소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 지 물었다. 이에 트라야누스는 법의 절차와 공정성 아래 사건을 처리하되, 이전에 기독교도였다는 과거나 익명의 고발로만 기소된 자들이 스스로 기독교도임을 부정하거나 억울함을 밝히면, 처벌하지 말고 익명의 델라토르들을 무시하고, 이런 선례가 아주 좋지 못하므로 그런 일처리를 하면 안 될 것이라고 명을 내렸다.

소 플리니우스는 3번 결혼했는데, 상술한 대로 첫 아내는 37세에 자녀 없이 병사했다. 이후, 폼페이아 켈레리나로 알려진 상류층 규수와 재혼했는데, 이 결혼에서도 자녀를 얻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칼푸르니우스 파바투스의 딸 칼푸르니아와 다시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에서도 그는 자녀를 얻지 못했다. 그는 세 번의 결혼 생활 중 마지막으로 결혼한 칼푸르니아에게 애착이 강했다. 그래서 아내 칼푸르니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편지를 비롯해, 칼푸르니아가 아이를 유산했을 때 심히 슬퍼하는 내용으로 쓴 편지를 적어 남겼는데, 현재까지도 전해진다.

113년,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 속주 총독으로 있던 중, 회의를 진행하면서 업무에 몰두하다가 쓰러져 사망했다.

여담으로 그는 수에토니우스의 후원자였다. 그는 수에토니우스를 식객 내지 문객으로 두면서 자신이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 속주 총독으로 갈 때 휘하 관료로 데리고 갔으며, 총독 임기 중에는 트라야누스 황제 쪽 인사들에게 처음 소개했다. 또 정계 진출을 꿈꾼 수에토니우스가 로마에 살면서 좋은 고급 주택을 구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등 수에토니우스를 113년 급사하기 전까지 계속 도왔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비비아 사비나 황후를 대상으로 음란한 농담, 폄하 등을 뒷담화로 하다가 황제에게 걸려 파면되고 그를 추천한 사람들까지 공직에게 축출된 사건을 벌였다. 다행히 이 시절, 소 플리니우스는 이미 고인이었고, 슬하에 자녀도 없어, 소 플리니우스는 당시 살아있던 그의 친구 클라루스 등과 달리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고, 사후 명예가 손상되지 않았다.

3. 서한집(Epistulae)

플리니우스는 14살 때 그리스어로 비극을 썼고 일생 동안 수많은 시를 집필했다고 하며, 많은 연설문을 집필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트라야누스의 즉위 때 찬사를 보내는 연설문 외에는 주변인들과 주고받은 서한집뿐이다. 편지 총 247편이 현존하는데, 그의 사소한 일상 이야기부터 정치적 문제까지 내용이 다양하다. 다만 평범한 편지치고는 강하고 도덕적인 메시지가 명백하게 드러나거니와 형식적인 문체로 쓰였기에, 많은 학자들은 소 플리니우스가 이 편지들을 모아서 9권 저서로 출간할 때 신중하게 편집했다고 본다. 서간집에는 정치적, 사법적 사건들을 종종 언급했는데, 특히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피해를 입은 원로원 의원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내용이 있다.

역사가들이 이 서한집에서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삼촌 대 플리니우스가 순직한 베수비오 화산 폭발 사건 증언이고, 두 번째는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이 편지들은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와 폰투스 퐁독으로 재직할 때 보낸 것으로 법적 분쟁, 의전, 지방 재정 상태, 건축 계획, 니코메디아 수도교, 니카이아 극장, 심지어 황제의 생일이 어떻게 이 지방에서 기념되는지 등 온갖 주제를 다루었다. 플리니우스는 사소하다 싶은 문제까지 황제에게 일일이 문의했는데, 트라야누스는 이에 대해 별다른 짜증을 부리지 않고 세심하게 지시하였다. 플리니우스는 한 편지에서 자유민에게만 개방된 로마군에 입대하기를 원하는 노예들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는데, 황제는 국법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이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편지는 서기 110년 점차 증가하는 기독교 신자들을 어찌해야 하는지에 관해 문의한 것이다. 플리니우스는 기독교의 '동지애'가 비뚤어진, '절제되고 온건한' 미신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황제에게 지침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관례적으로 저는 의문이 가는 모든 것을 폐하께 보고 드립니다. 저의 무지와 불확실함을 지도할 분이 황제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전 아직까지 기독교인들과 관련된 재판에 배석한 경험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로 그들을 처벌해야 할지 혹은 수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들의 연령을 고려해야 할지 아니면 어린 자들이나 장성한 자들이나 동일하게 다뤄야 할지에 대해서도 좀처럼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죄를 뉘우치는 자들을 사면해 줘야 할지, 혹은 한번 기독교인이었던 자라면 더 이상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한다고 해도 사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인지, 결국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범죄 사실이 없어도 처벌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직 그 이름과 관련된 범법 행위만 처벌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한편, 전 기독교인이라고 고발된 자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절차를 따랐습니다. 먼저 그들에게 기독교인인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면 두세 번 거듭해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게다가 사형 선고의 위협까지 덧붙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자는 사형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들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완고함과 강퍅한 고집만으로도 처벌받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들 외에도 그와 같은 광기를 보여준 몇몇 로마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전 그들을 로마로 보내라고 명했습니다. 종종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이 범죄는 점점 더 광범위하게 번져나갔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몇몇 사건이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을 기독교인이라고 고발하며 명단을 첨부한 익명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전 현재 혹은 과거 한때 기독교인이었음을 부인하는 자들이, 만일 제가 제시한 대로 우리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면 - 즉, 그들이 폐하의 상 앞에 향과 포도주(이전에 전 이와 같은 목적으로 다른 신상들과 함께 이것들을 가져오라고 명했었습니다.)를 올리고 그것에 더해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를 욕한다면 - 그들을 석방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임을 자청하는 자들을 억지로 시켜서라도 이와 같이 하도록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저 비통할 따름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처음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했다가 곧 태도를 바꿔 한 때 기독교인이었지만 이젠 더 이상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어떤 이는 3년 전 또 다른 이는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어떤 이는 20여 년 전에 그것에서 돌아섰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폐하의 상과 다른 신들의 상 앞에 제사를 드리며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은 단지 특정한 날 해뜨기 전에 서로 번갈아 가며 모임을 가진 게 전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신처럼 찬양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맹세함으로써 자신들의 그룹을 결집시켰습니다. 이는 어떤 범죄 행위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절도나 강도 그리고 간통을 하지 말 것을 그리고 약속을 지키고 맡겨진 재화가 요구될 때 거절하지 말고 내어줄 것을 서약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임 후 그들은 일단 헤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평범한 식사를 함께 나누기 위해 재차 모이는 것이 그들의 관례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만 두었다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제가 폐하의 명령을 따라 그와 같이 폐쇄적인 모임을 금하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 일 후에 저는 무엇이 과연 진실인가 더 알아내는 것이 더욱 더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시중드는 소녀라고 불리는 두 피의자에게 고문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그리고 거대한 미신 외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수사를 연기하고 이제 폐하께 조언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 문제는 그와 같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막대한 수만 놓고 봐도 분명히 자문을 구해야 할 문제라고 전 생각합니다. 모든 연령층과 각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미 그와 같은 위험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똑 같은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이 미신은 단지 도시 뿐 아니라 지방의 여러 곳까지 전염병처럼 퍼졌습니다. 그럼에도 전 아직 이 일을 억제하고 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트라야누스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로마 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플리니우스의 서신은 초기 로마 제국이 기독교 문제를 어떻게 다뤄주는지를 밝히는 중요한 기록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 서신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기독교인들을 기소하거나 박해하기 위해 추적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에게 익명의 비난을 무시하라는 구체적인 조언을 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정하지 않았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역사가 레너드 L. 톰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기독교인들은 이후로 쫓기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 정부로부터 고발이 있을 경우에만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고발되고 유죄가 확정되면,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1] L(ucio) Caecilio L(uci) f(ilio) Valenti et P(ublio) Caecilio L(uci) f(ilio) Secundo et Lutullae Picti f(iliae)(루키우스의 아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발렌스와 루키우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카이킬리우스 세쿤두스) [2] 서기 68년 네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를 진압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