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라틴어: Marcus Aemilius Lepid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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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기원전 30년경 ~ 33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조부)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버지)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어머니)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형제) 아이밀리아(누이) 빕사니아 마르켈라(첫번째 아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두번째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아들?)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6년 |
전임 |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
동기 |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
후임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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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명문 귀족 집안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동생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민중파의 거두로 떠오르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손잡았으며, 카이사르의 지원에 힘입어 기원전 50년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동생과 함께 카이사르를 지지했지만, 카이사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약한 동생과는 달리 로마에 남아있을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로마 정계가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를 암살한 '해방자파'간의 대립으로 들끓을 때도 중립을 지켰다. 그러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동생이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자 안토니우스와 더불어 '로마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찬성했다. 이로 인해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로부터 숙청 대상으로 낙인찍혔지만 동생이 눈감아준 덕분에 이탈리아를 무사히 탈출하여 그리스 이오니아의 도시인 밀레투스로 망명한 뒤 로마에 복귀하길 거부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아버지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기원전 34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22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어머니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아프리카 원정에서 활약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토와 옥타비아누스의 아내이자 대 율리아의 어머니이기도 한 스크리보니아의 딸이다. 형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서기 1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소 율리아와 결혼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암살 혐의로 처형되었다. 누이 아이밀리아는 서기 12년 집정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와 결혼했다. 아버지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가 사망한 후에는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소 옥타비아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인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해 서기 15년 재무관을 맡아 히스파니아 타라코니아 속주에서 활동한 아들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길루스를 낳았다.
그는 명문 귀족 집안인 데다 아우구스투스와 밀접한 혈연 관계 때문에 일찍부터 가파르게 출세할 수 있었다. 서기 6년 루키우스 아룬티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으며, 루키우스 아룬티우스가 7월 1일에 물러난 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와 함께 집정관 임기를 수행했다. 8~9년 티베리우스의 지휘 아래 레가투스를 맡아 일리리아 대반란 토벌에 상당히 공헌한 뒤 개선 훈장을 받았다. 이후 판노니아 속주에서 총독으로 복무했다. 14년 히스파니아 타라코니아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14년 죽음을 눈앞에 둔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의 마지막 면담에서 3명의 인사를 거론했다. 그는 마니우스 레피두스는 국정을 맡을 만한 능력이 있지만 이를 맡기를 싫어한다고 평했고,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는 기꺼이 그 임무를 감당하려 하겠지만 그럴만한 능력은 없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또는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는 최고의 권력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기회가 오면 감히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로널드 사임은 마니우스 레피두스의 경우, 서기 6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피두스는 로마의 새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의 총애를 받았다. 17년, 티베리우스는 아이밀리아 무사가 상속인을 남기고 사망한 뒤 남겨진 재산을 재무부에 넘기지 않고 레피두스에게 넘겼다. 20년, 레피두스는 법정에서 로마인의 위엄을 모독하고 게르마니쿠스를 살해한 혐의로 고발당한 전직 시리아 총독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변호했지만, 피소가 유죄 판결을 받기 직전에 자살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는 걸 막지 못했다. 21년, 티베리우스로부터 아프리카 총독직을 제안받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자녀들이 집에서 푹 쉬라고 요청했다며 거절하면서, 그 대신 세야누스의 삼촌인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에수스에게 넘겼다.
21년, 시인 클루토리우스 프리스쿠스가 2년 전에 게르마니쿠스가 죽을 때 그를 찬양하는 글을 써서 티베리우스에게 상금을 받은 걸 떠올리고, 티베리우스의 아들 소 드루수스가 중병에 걸리자 그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그러나 소 드루수스는 회복되었고,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나자 당해 집정관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로부터 소 드루수스가 죽기를 바랐다는 불경죄로 고발했다. 이에 레피두스는[1] 그 시는 위험하지 않고 단지 취향에 맞지 않고 품위가 없을 뿐인데 사형은 너무 가혹하며, 프리스쿠스를 자살로 이끌고 황제가 종종 그랬듯이 자비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프리스쿠스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집정관의 주장을 따르기로 하고 프리스쿠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뒤 즉시 집행했다. 티베리우스는 프리스쿠스가 처형된 후 원로원에 편지를 써서 그들의 충성심에 감사했지만, 그들의 성급함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명했다. 이후 형 선고와 처형 사이에 10일의 간격을 두도록 하는 법률 개정이 이루어졌다.
22년 원로원의 동이를 받아 바실리카 아이밀리아를 재건했다. 24년 대 아그리피나의 측근인 소시아 갈라의 재판에서 그녀의 자녀들이 그녀 재산의 4분의 1이 아닌 절반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26~29년 아시아 총독을 맡으면서 스미르나에 티베리우스 사원을 지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33년에 자연사했다. 타키투스는 그가 티베리우스 치세 말기에 황제에 대한 음모를 꾸몄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 높은 지위를 누린 소수의 귀족 중 한 사람이었으며, 현명하고 고귀한 인물이라고 호평했다.
레피두스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2]의 딸인 빕사니아 마르켈라와 결혼했다. 바실리아 아이밀리아의 헌정 비문에는 두 사람의 아들로 보이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빕사니아 사후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 재혼했다. 그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두 여인 중 어느 쪽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인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결혼했다. 칼리굴라 황제의 여동생인 율리아 드루실라의 남편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1]
11년 집정관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라는 설도 있다.
[2]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소 옥타비아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