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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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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발 카모니카의 암각화
Incisioni rupestri della Val Camonica
1980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도미니코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Chiesa e convento domenicano di
Santa Maria delle Grazie con
l'Ultima Cena di Leonardo da Vinci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Centro storico di Roma, le proprietà extraterritoriali della
Santa Sede e la 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1982년

피렌체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Firenze
1987년

베네치아와 석호
Venezia e la sua laguna
1987년

피사의 두오모 광장
Piazza del Duomo di Pisa
1990년

산지미냐노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San Gimignano
1993년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
I Sassi e il parco delle
chiese rupestri di Matera
1994년

베네토의 비첸차 시와 팔라디오 양식 건축물
Città di Vicenza e le ville palladiane del Veneto
1995년

시에나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Siena
1995년

나폴리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Napoli
1995년

크레스피 다다
Crespi d'Adda
1995년

르네상스 도시 페라라와 포 삼각주
Ferrara, città del Rinascimento,
e il suo delta del Po
1996년

몬테 성
Castel del Monte
1996년

알베로벨로의 트룰리
Trulli di Alberobello
1996년

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기념물
Monumenti paleocristiani di Ravenna
1996년

피엔차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Pienza
1997년

카세르타의 18세기 궁전과 공원,
반비텔리 수도교, 산 레우초
Palazzo Reale del XVIII secolo di Caserta con il Parco ,
l' Acquedotto di Vanvitelli e il Complesso di San Leucio
1997년

사보이아 궁중저택
Residenze della Casa Reale di Savoia
1997년

파도바 식물원
Orto botanico di Padova
1997년

포르토베네레, 친퀘테레와 섬들
(팔마리아 섬, 티노 섬, 티네토 섬)
Portovenere, le Cinque Terre e le isole
(Palmaria, Tino e Tinetto)
1997년

모데나의 대성당,
토레치비카, 피아차 그란데

Cattedrale, Torre Civica e
Piazza Grande di Modena
1997년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그리고
토레 아눈치아타 고고 지구

Aree archeologiche di Pompei,
Ercolano e Torre Annunziata
1997년

코스티에라 아말피타나
Costiera amalfitana
1997년

아그리젠토 고고 지구
Area archeologica di Agrigento
1997년

카살레의 빌라 로마나
Villa romana del Casale
1997년

수 누락시 디 바루미니
Su Nuraxi di Barumini
1998년

아퀼레이아의 고고 지구와 가톨릭 성당
Area archeologica e
Basilica patriarcale di Aquileia
1998년

우르비노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Urbino
1998년

칠렌토 ・ 발로 디 디아노 국립공원,
파에스툼과 벨리아 고고 유적지
Parco nazionale del Cilento e Vallo di Diano con i siti
Archeologici di Paestum e Velia e la certosa di Padula
1999년

티볼리의 빌라 아드리아나
Villa Adriana, Tivoli
2000년

베로나 시
Città di Verona
2000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유적

Assisi, la basilica di San Francesco e
Altri siti Francescani
2001년

빌라 데스테, 티볼리
Villa d'Este, Tivoli
2002년

시칠리아 남동부 발디노토의
후기 바로크 도시
Città tardo barocche del
Val di Noto (Sud est Sicilia)
2003년

피에몬테 롬바르디아의 사크리 몬티
Sacri Monti del Piemonte e della Lombardia
2004년

체르베테리와 타르퀴니아의
에트루리아인 네크로폴리스
Necropoli etrusche di Cerveteri e Tarquinia
2004년

발 도르차
Val d'Orcia
2005년

시라쿠사와 판틸리카 바위 네크로폴리스
Siracusa e la necropoli di Pantalica
2006년

제노바
: 르 스트라다 누오보와 팔라치 데이 롤리

Genova: Le Strade Nuove ed il
Complesso dei Palazzi dei Rolli
2008년

알불라 ・ 베르니나 지역의 래티셰 철로
Ferrovia Retica nei paesaggi
dell'Albula e del Bernina
2008년

만토바와 사비오네타
Mantova e Sabbioneta
2011년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
: 권력의 장소 (568년 ~ 774년)
Longobardi in Italia
: I luoghi del potere (DLXVIII al DCCLXXIV d.C.)
2011년

알프스 주변의 선사 시대 호상 가옥
Siti palafitticoli preistorici attorno alle Alpi
2013년

토스카나의 빌라 메디치와 정원
Ville e giardini medicei in Toscana
2014년

피에몬테의 포도밭 경관
: 란게 - 로에로와 몬페라토
Paesaggio vitivinicolo del Piemonte
: Langhe-Roero e Monferrato
2015년

아랍 - 노르만 팔레르모 그리고
체팔루 대성당과 몬레알레 대성당

Palermo arabo-normanna e le
Cattedrali di Cefalù e Monre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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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rea, città industriale del XX sec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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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 개선문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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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룸의 바실리카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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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국가·위치 이탈리아 나폴리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7년
등재기준 (iii)[4], (iv)[5], (v)[6]
지정번호 829

1. 개요2. 역사3. 폼페이 최후의 날4. 발굴5. 관광6. 기타

[clearfix]

1. 개요

Pompeii

이탈리아 캄파니아 나폴리 근처에 위치한 도시이자,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대 로마 제국의 도시.

'멸망한 도시들' 가운데 손꼽히는 도시로,[7] 본래 농업을 통해 생산한 포도를 포도주로 만들어 상업이 활발했으며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매우 번성했던 도시였다. 하지만 서기 79년 8월 24일[8]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단 18시간 만에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오랫동안 역사에서 소멸한 도시 중 하나로 1592년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작품들이 발굴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탈리아에서 관광업계 관련이 아닌 이상 그냥 '폼페이'라고 부르면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폼페이 신 시가지를 가리킨다. 유적 쪽 폼페이는 폼페이 발굴지(Scavi di Pompei, 스카비 디 폼페이)라고 부르며, 캄파니아 지역 사철인 치르쿰베수비아나로 방문시에도 반드시 폼페이 역이 아닌 스카비 디 폼페이 역에서 내려야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2. 역사

파일:폼페이 로마 3.jpg 파일:폼페이 로마 22.jpg
옛 폼페이 주민인 테렌티우스 네오 부부의 초상화 로마 시기 이전부터 세워진 성벽

본디 폼페이는 로마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도시국가였다. 최소한 기원전 8~7세기 폼페이는 그리스인들의 세력하에 있었는데, 이는 로마의 건국 시기와 비슷했다. 에트루리아를 기원전 6세기에 몰아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폼페이·헤르쿨라네움·스타비아이가 속했던 동맹을 누케리아(현재의 노체) 시가 주도했다. 이 시기 그리스 식민지 출신들이 다 그랬지만 로마보다 문명도가 높았던 상업도시였던 듯하다.

폼페이 지역에 전해지는 전설에 따르면, 폼페이와 이웃한 자매도시 헤라클라네움은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12가지 과업 가운데 하나인 게리온의 소떼를 몰아오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게리온이 사는 곳은 서쪽 끝이기에 헤라클레스의 행로에 자연스럽게 이탈리아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여행 도중 헤라클레스는 오늘날의 캄파니아 지방에서 자신에게 적대하는 거인족의 무리와 만났는데, 영웅답게 그들을 모조리 격파하고 쇠사슬에 감아 거대한 산 밑에 감금한 후 산기슭을 따라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어 도시를 두 개 건설했는데, 폼페이는 영웅의 개선식(그리스어로 폼페pompe)에서 이름을 땄고, 헤르쿨라네움은 자신의 이름을 땄다는 것이다.

폼페이가 역사 기록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기원전 310년 제2차 삼니움 전쟁 때 로마의 함대가 사르누스 항에 상륙하여 누케리아를 공격하려다가 실패한 일이었다. 삼니움 전쟁이 끝날 무렵 캄파니아는 로마 동맹의 일부가 되었고, 그곳의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시(同盟市)가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완전히 종속되어 로마화된 것은 동맹시 전쟁을 치른 후였다. 결국 기원전 89년 술라에게 정복되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물고기 모양이 되도록 설계한 계획도시로, 원형경기장을 물고기의 눈으로 보고 왼쪽 위의 "미스테리 빌라"를 꼬리 지느러미로 보면 된다. 현재의 관광이나 당시의 도시 입성, 퇴성도 모두 입으로 들어와서 꼬리로 나오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mariamilani.com/map_pompeii.jpg

원수정(元首政) 시대에 와서는 포도주 가룸[9] 생산으로 번창했으며,[10] 2만 석의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 경기가 상설적으로 열리고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을 모시는 신전과 인도인,[11]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될 정도로 작지만 번화한 도시였다.[12]

도시 행정은 본국인 로마 정부의 시스템을 모방하여 자치 원로원인 '데쿠리오'[13], 시민 집회에서 선출되는 자치 집정관 '두움비르'[14] 직책 2명,[15][16]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자치 조영관(造營官)[17]을 두었으며, 자치 집정관과 조영관 선거가 있을 때는 치열한 선거운동이 있었음을 유적에 남은 선거 운동 벽보로 알 수 있다.

서기 59년에는 폼페이에서 열린 검투사 경기 도중 폼페이 시민들이 인근 도시인 누케리아 시민들과 패싸움이 붙어 사상자가 많이 나는 바람에 그 처벌로 로마 당국에게서 10년간 검투경기 금지령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 유력자들이 포파이아 사비나 황후에게 로비를 하여 3년만에 금지령이 풀렸고, 검투경기가 재개될 때 도시의 두움비르 출신인 그나이우스 알레이우스 니기디우스 마이우스가 자기 재산을 털어 무려 416명의 검투사가 출전하는 큰 경기를 열었다는 것이 마이우스의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서기 62년에는 큰 지진이 캄파니아 일대를 휩쓸면서 폼페이도 유피테르 신전과 대형 공중목욕탕 등 여러 공공건물이 붕괴되는 피해를 입었고, 17년이 지난 베수비오 화산 대분화 때까지도 복구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네 황제의 해를 수습하고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캄파니아 지역에서 네로나 비텔리우스 지지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해 프라이토리아니 병력을 파견하였는데 레가투스 티투스 수에디우스 클레멘스는 파견군 본부를 폼페이에 두고 한동안 계엄통치를 했다고 한다.

3. 폼페이 최후의 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52px-Mt_Vesuvius_79_AD_eruption_3.svg.png
폼페이로 쏟아진 베수비오산 화산재의 영향권 추측 지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된 폼페이 최후의 날(멜버른 박물관 제작)
플라비우스 왕조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던 서기 79년 8월 24일, 폼페이 근처에 위치한 베수비오산에서 갑작스러운 화산 대분화가 발생했다. 분화로 인해 급작스럽게 닥쳐온 막대한 화산재 한방으로 폼페이 도시는 하루 아침에 멸망해버렸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도 폼페이는 하룻밤 만에 사라진 것으로 유명해진 도시가 되었으며, 화산의 위험성을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된다.

통념과는 달리 고대 로마인들도 화산의 위험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데, 당시 로마령이었던 시칠리아 섬에 당시 활화산이었던 에트나 화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베수비오 화산이 수백 년 동안 폭발하지 않았기에, 로마인들이 겉으론 화산이 아닌 듯 보이는 화산이 잠에서 깨어 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르다. 게다가 폼페이는 이탈리아 최대의 화산인 베수비오 화산과 대략 10km 거리에 위치한 도시였으므로, 사실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껴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폼페이는 화산 폭발이 일어나기 17년 전인 서기 62년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포룸, 유피테르 신전, 목욕탕 등 공공건물을 포함한 대부분의 건물이 지진 피해를 입었고, 화산 폭발 당시에도 그 피해가 다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다. 오죽하면 지진 직후 네로 황제가 이곳을 시찰하면서 가망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날, 즉 서기 79년 8월 24일은 불의 신 불카누스[18]를 기념하는 축제일이어서 도시 내에서 축제가 진행 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상한 구름이 밀려오자 시민들이 동요했으며, 이에 대 플리니우스 등이 해변으로 가서 조사를 하던 중 화산이 폭발했다. 분화로 화산재가 하늘을 덮은 뒤 18시간 동안 무려 수백억 톤에 달하는 뜨거운 화산쇄설류가 도시로 쏟아져 내려왔고 폼페이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도시는 3m 가량이나 되는 화산재에 뒤덮였고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이탈리아-영국 공동 연구진은 화산 폭발 당시 화쇄류(Pyroclastic Flow)의 지속 시간을 연구했는데, 초고온의 화산재와 유독 가스 등이 약 15분 동안 분출되었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

이 분화로 폼페이 주민들이 모조리 몰살당했다고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오해다.[19] 실제 당시 폼페이 주민 수는 16,000명~20,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그중 사망자는 대략 2,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나머지 주민들은 어떻게든 도시를 빠져나와 피신했다는 뜻이다. 재앙이 급작스럽게 닥쳤다는 것은 피해를 최소화하기엔 시간이 역부족이었다는 뜻이지 눈깜짝할 새에 도시가 파묻히고 그랬다는 뜻은 아니다. 베수비오산에서의 분출 이후 화산재 도달까지는 그래도 수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하늘에 검은 연기가 다가오는 낌새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따라서 당대 사망자들은 대부분 대피하기엔 몸이 불편했거나 연로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하고자 재난 현장으로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대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인구 중 적어도 10%는 사망하고 부상자는 더 많았을 테니 궤멸적인 피해라는 사실임은 변함없긴 하다.[20]

사실 인명피해는 폼페이 옆의 도시인 헤르쿨라네움 쪽이 더 컸는데, 이쪽은 분화 직후 화산재 구름 방향에서 빗겨갔으나 나중에 화산쇄설성 밀도류 화산재에 묻혀버려서 덜 유명하다. 폼페이 유적에 화산재가 2~3m 정도 쌓인 반면, 헤르쿨라네움은 두께가 20m나 되는 화산 쇄설물에 파묻혔다. 이 화산재와 화산쇄설물은 근 2,000년 동안 쌓여있으면서 굳어져 딱딱한 암석이 되었기에, 지금도 헤르쿨라네움은 암석을 파내 가며 발굴하고 있다. 또 폼페이가 시내의 시민들이 발굴된 반면, 헤르쿨라네움은 1980년대에 바닷가에 서 있던 아치 밑에서 해골 수백 구가 발견되었기에, 주민들이 해안으로 피난했다가 밀려온 화산재와 가스로 한꺼번에 죽었다고 추정된다. 이 두 도시와 인근에 있었던 오플론티스와 스타비아이도 함께 화산 폭발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화산 분출물이 남동쪽으로 집중되어서, 네아폴리스( 나폴리)를 비롯한 북서쪽 지역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또 다른 천운으로, 당시 화산 분출물을 제외한 기상 상태는 양호했고 화산 폭발의 충격파로 인한 쓰나미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대피할 수 있었다. 만약 쓰나미까지 발생했다면 더 많은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물론 고대 로마에서도 이 폭발에 대해 연구했던 사람은 있어서, 백과사전 격인 《 박물지》를 남긴 문인이었던 대 플리니우스 제독이 이 폭발을 보고 기록한 것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大플리니우스는 당시 폼페이 인근 미세눔에 주둔하고 있었던 해군 함대 사령관이었는데, 폭발을 기록한 후 휘하 함대를 이끌고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주민들을 구조하다가 화산 가스에 중독되어 향년 56세로 현장에서 순직했다. 후에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가 쓴 편지를 보면 그의 시신은 수습된 듯하다. 大플리니우스가 가스 중독으로 사망해서 특별한 외상이 없다 보니 '너무 평온해서 주무시는 것 같았다'고 적었다. 그 외에 나폴리 만 건너편에서 화산 분화를 지켜보던 18세의 조카 小플리니우스[21]가 이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겨 현재까지 전해졌다. 그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에 대한 글을 타키투스의 《역사》에 기고했다.

시기적으로는 10년 동안 로마 제국을 안정화시켰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붕어하고 티투스가 황제가 된 지 2개월 만에 벌어진 참사였다. 티투스 황제는 2년이라는 짧은 재위기간 동안 베수비오 화산 폭발, 로마 화재 등의 여러 재앙 속에서도 콜로세움을 완성시키는 등 재건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즉위했다. 그리고 그가 암살당한 후 오현제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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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베수비오 화산의 모습.

그 후로도 베수비오 화산은 몇 번 분출했다. 마지막 분출은 제2차 세계 대전 말이었던 1944년의 분출이었으며, 이후 더는 분출이 없다. 마지막 분출 때는 인근 폼페이 비행장에,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제340폭격비행단(340th Bombardment Group)이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주둔하고 있었는데, 78~88대의 B-25 폭격기가 화산재를 뒤집어 쓰고 고장이 나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다행히 큰 인명 피해는 없었으며, 도리어 현장을 조사하러 온 미군 헌병들이 아직 굳지 않은 용암을 보고 식빵을 나뭇가지에 꿰어 토스트를 구워 먹는 사진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 분화로 인해 베수비오 화산을 등산하는 강삭철도가 파괴되어 폐선했다. 이 철도는 이전에도 화산 분화의 위험성 때문에 사람들이 우려했고, 정부는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홍보 노래까지 만들었다. 이탈리아 가곡으로 잘 알려진 < 푸니쿨리 푸니쿨라> #가 그것이다.

베수비오 화산은 활화산으로,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베수비오 화산 연구센터를 만들어 마그마 굄의 축적 상황 등을 수시로 관측하고 있다.

4. 발굴

화산 폭발로 한 번 멸망한 이후, 장장 서기 15세기까지 폼페이의 존재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졌다. 그러다가 서기 1592년 이탈리아에서 수로 건설을 목적으로 땅을 파다가 폼페이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무려 1,400년만에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1748년 카를로 국왕[22]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여러가지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한창 전성기였을 때 갑자기 멸망해버려 전성기 로마 제국의 유물과 유적들이 잔뜩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있어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3분의 2 정도밖에 발굴되지 않았다고 할 정도이다. 관광 중 펜스가 쳐져 들어갈 수 없는 지역들이 보일 텐데, 이들이 발굴 관련 장소이다.

좋지 않은 이야기도 있는데 빙켈만이 발굴 현장으로 갔다가 인부들이 제멋대로 파헤치는 것도 모자라 장신구가 나오면 몰래 빼돌리거나 국왕에게 진상을 하는 바람에 간언을 했다가 쫓겨난 뒤 인부를 매수하여 기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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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망한 로마인들의 화석



화석이라고 표기했지만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형태의 화석과는 다르다. 기존의 화석은 압력에 의해 뼈나 외골격 같은 신체의 단단한 부분에 광물이 흡수되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폼페이 화석은 본래는 빈 공간이었고 사람이 거기에 석고를 채워 만든 것이었다. 화산재에 묻힌 시체가 부패 등의 과정을 거쳐 유기물이 사라진 후 뼈만 남지만 화산재가 비교적 단단하게 퇴적되어 속 빈 공간에 사람들의 형상이 남는다. 그 빈 공간에 거푸집처럼 석고를 부어 만든 것이 폼페이의 화석이다. 즉, 일종의 석고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사진의 사람 형체는 진짜 사람의 남은 잔재가 아닌 그 형태의 본을 뜬 것이다. 물론 그 내부에 뼈 같은 부분은 남아 있다.[23] 그리고 때때로 사람이 아닌 동물의 화석도 발견된다고 한다. 그 외에 나무, 문, 가구, 수레 등의 물체들을 되살릴 때도 응용되고 있다.

이 석고상을 만들게 된 과정도 극적이다. 폼페이 발굴 당시 오랫동안 묻혀 있어서 건물이나 도로, 물건 등의 보존 상태는 매우 좋았는데 사람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던 중 1860년 이탈리아 국왕이 발굴 책임자로 임명한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흙더미 사이사이에서, 주로 건물마다 발견되는 빈 공간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 석고를 부어보자 사람의 형상이 드러난 것이다. 최근에는 석고 대신 유리섬유를 부어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하면서도 내부의 유골이나 공반유물도 같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내부가 투명하게 비치는 크리스탈 조각상 같은 모습은 아니며, 작업공정상 그렇게 깔끔하게 나오지 않는다.

이런 석고들 외에도 탄화되어 표면에 빵집 도장까지 생생히 찍혀 있는, 벽돌 오븐에서 발견된 빵과 탄화된 호두, 탄화된 무화과 열매가 그릇째로 담긴 채로 발견되기도 했으며, 달걀이나 화려한 보석류도 발굴되었다. 특히 보석류는 유난히 같은 모양이 많아서 당시 인기있는 형태는 대량생산되어 팔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이 발굴지역은 관광지로 보존되어 있는데, 1,000년 넘게 화산재에 뒤덮여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던 관계로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당시 죽은 사람의 모습 또한 남겨져 있는데, 사망 당시의 자세를 비롯해 옷주름과 표정까지 고스란히 남겨져 있어 비극성을 더한다. 당시 화산재에 말 그대로 순식간에 뒤덮여서 그때의 그 표정 하나까지 전부 남게 된 것이다.

발굴된 사람들의 형체 중에서 유명한 것은 두 사람이 껴안은 모습의 유해로 '폼페이의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후 밝혀진 바로는 두 사람 모두 남자였고, 죽어가면서 우연히 서로 가까이 붙었을 뿐이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무분별한 관광객 유치와 관리 소홀로 2010년에 들어 유적 중 '검투사의 집'이 무너지는 등 여러가지 악재를 겪고 있다. 현재 이탈리아 유럽연합과 '폼페이 복원 프로젝트'를 공동 추진하기로 결정하고, 전문 복원 기술은 독일이, 고고학과 역사적 고증은 이탈리아가, 그리고 지리와 환경 자문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 팀이 책임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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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내에 술집이 매우 많다. 집 내부에 세면대처럼 생긴 바(Bar)가 있는 집이 전부 술집이다. 굉장히 외설적인 벽화가 그려진 매음굴도 많은 편이니 어린아이와 동행시 주의가 필요하다. 2015년 상반기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었던 <폼페이전>에서도 성행위를 묘사한 벽화 몇 점을 가져와 전시했는데, 초등학생도 입장이 가능한 전시회인 만큼, 이 홍등가 관련 벽화들은 어린이들의 관람을 방지하기 위해 커튼을 친 별도의 공간에 몰아서 전시했다.[24] 이곳에서 나온 19금 유물들 중 일부는 나폴리 국립박물관의 '비밀의 방'에서 전시하고 있다.

2014년에 폼페이의 음식점 유적에서 기린의 다리뼈와 성게가 발굴되었다. 검투 경기에서 희생된 동물들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실제로 도축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2018년 5월에 화석이 아닌 유골이 발굴되었다. # 10월에는 신전이 발굴되었다. #

2018년 12월에 당시 장군 소유로 추정되는 온전한 형태의 말 화석도 발굴되어 동물 화석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 #

2020년 10월에 뇌세포가 두개골 안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됨에 따라 고대 인류에 대한 연구가 진척될 것으로 보인다. #

2020년 12월에는 로마식 간이식당들 중 가장 상태가 양호해보이는 간이식당이 발굴되었는데, 가판대의 벽화도 온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

2021년 2월에 온전한 형태의 사륜마차가 발굴되어 고대 교통수단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었다. #

2021년 8월에 2,000년 된 석관과 그 속에서 흰 머리카락이 생생히 남아있는 사람 유골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왼쪽 귀의 형상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폼페이고고학공원 측은 화산이 폭발하기 전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며 '지금까지 폼페이에서 발굴된 것 중 가장 잘 보존된 유골'이라고 평가했다. #

2021년, 연구자들이 1980년대 헤르쿨라네움 근방의 해변에서 배의 잔해와 함께 발견된 300여 명의 병사들 중 한 유골이 프라이토리아니의 고위 장교였다고 결론내렸다. 같이 발견된 주화들이 근위대의 월급 액수와 일치하고 각종 호화로운 장비를 걸치고 있었으며, 타원형 방패가 이들이 사용하는 제식장비였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된다고 하는데, 당시의 사건이 너무나 처참한 나머지 프라이토리아니 같은 정예부대도 방재임무에 투입되었음을 시사한다.[25] 소 플리니우스 타키투스와 주고 받은 서간문에서 같은 구조 임무를 수행했던 외삼촌 대 플리니우스가 화산에서 쏟아진 재와 바위더미로 인해 바다가 너무 거칠어져서 해변에 배를 댈 수 없을 정도였고 대 플리니우스 본인도 유독가스로 인해 숨졌다고 기록했기 때문에, 그의 부대도 같은 피해를 입어 배와 함께 전멸한 것으로 보인다. 유골은 40~45세의 남성으로 정예답게 매우 건장한 인물이었다고 하며, 검게 그을린 주검의 상태로 볼 때 손쓸 새도 없이 한순간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

2023년엔 폼페이 유적의 벽화에서 파인애플 피자로 보이는 그림이 발견되면서 파인애플 피자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특히 파인애플 피자를 전통을 벗어난 시도로 취급하던 이탈리아인들의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다. #[26] 단 2024년 더 현대 서울에서 열린 <폼페이 유물전>에서 도슨트들은 최근의 추가 발굴 결과 지중해에서 잘나는 과일인 무화과와 복숭아를 올린 파이 혹은 빵으로 밝혀져서 해프닝으로 끝났다는 말을 남겼다.

2023년 말, 노예와 짐승들을 볕이 안 드는 밀실에 가두고 제분에만 종사하게 한 '빵 감옥'이 발굴되어 충격을 주고 있다. #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가 만나는 모습을 담은 프레스코화 벽화가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5년에서 서기 40~5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

폼페이에서 화산재에 묻힌 고문서를 AI로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

5. 관광

주로 나폴리에서 가는 편이다. 사실 폼페이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폼페이를 방문하는 김에 나폴리를 들렀다가 오는 경우가 많다. 나폴리 광역권에 속하는 동네라 차로든 철도든 넉넉잡아 40분 거리면 도착한다.

나폴리의 피아차 가리발디역에서 사철인 치르쿰베수비나를 타고 가면 되는데, 노선을 잘 보고 타야 한다. 소렌토 방면 열차를 타고 Pompei Scavi역에서 내리면 된다. Pompei 방면으로 가는 열차는 추천하지 않는다. 선로 구조가 폼페이 시가지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Oplonti 역에서 갈라져 하나는 Pompei Scavi 역으로, 하나는 Pompei 역으로 가는데 Pompei 역은 유적과 상관없는 현대도시인 신 폼페이기 때문이다. 열차가 굉장히 오래되어 상태가 좋지 않은 점은 감수해야 한다.

역에서 내리고 조금 걸어가면 입구가 나온다. 관광 가이드 투어가 있으나 꽤 비싸다.

6. 기타

  • 영국의 소설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이 1934년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소설을 쓴 바가 있다. 이후 같은 제목을 달고 무려 6편의 영화가 나온 바가 있는데, 가장 최근작은 2014년에 나온 <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로서, 대략적인 내용은 검투사와 높으신 분 따님과의 로맨스 겸 재난이야기이다. 하지만 로마 시대 검투사는 이젠 진부한 소재인 데다가, 제대로 된 재난 영화도 로맨스 영화도 되지 못해서 반응은 좋지 않다.
  •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가 《폼페이》라는 소설을 썼다. 작가가 작가인 만큼 역사적 고증에도 신경썼으며, 남자 주인공이 상수도 전문가이고, 화산 폭발의 조짐을 수돗물의 변화로 미리 알아내는 등 상당히 특색있는 작품이다.
  • 최신 발굴 성과를 통해 폼페이에 대해 잘 설명된 책으로 영국의 유명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가 쓴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이라는 책이 있다.
  • 영국 밴드 바스틸의 곡 <Pompeii>가 폼페이 화산 폭발에 대한 가사를 담고 있다.
  • 만화가 양여진이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순정만화를 그린 바가 있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지만, 교보문고에서 ebook으로 판매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찾아보자.
  • 닥터후에서는 원래 일어날 예정이 없는 사건이었지만, 10대 닥터 도나 노블 파이로바일들을 막기 위해 베수비오 화산을 폭발시켰다고 나온다. 화산 폭발이 임박해오자, 닥터는 "역사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며 모두 버리고 떠나려 하지만, 도나의 애원으로[27] 카이킬리우스라는 사람의 가족을 살려준다. 닥터후 설정상으로는 volcano(화산)라는 단어도 이때 카이킬리우스가 만들어낸 듯하다. 즉 카이킬리우스 가족을 살리는 것이 원래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에서 조연인 "카이킬리우스"로 출연한 피터 카팔디 훗날... 같이 출연한 카렌 길런. 그리고 이때 카이킬리우스를 구한 일을 마음 깊히 새기기 위해, 즉 ''나는 닥터다, 나는 사람을 구한다."라는 메세지를 자신에게 남기기 위해 12대로 재생성할 때의 얼굴로 카이킬리우스의 얼굴을 정했다는 설정까지 덧붙혀졌다.
  • 유벤투스 FC의 울트라스가 SSC 나폴리와의 경기에서 원정온 나폴리 팬들을 상대로 베수비오 화산 걸개로 팬들을 도발하다가 조치를 받은 적이 있다.
  • < 마리오 오딧세이>에서 요리 왕국의 모티브가 되었다.
  • < 다크스트 오브 데이즈>의 마지막 캠페인 배경으로, 로마 제국 시민들과 병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뒷전이고 후손들이 한 사람을 두고 치고 박고 싸우느라 화산쇄설류에 죽기 전에 총격전이나 폭발에 희생양이 생긴다. 지속적인 지진으로 조준이 힘들 때가 많다.
  • 록 음악 팬들에게도 나름 친숙한 공간이기도 하다.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인 핑크 플로이드가 1972년 폼페이 원형극장에서 무관중 공연을 했기 때문이다.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과 알고 지내던 영화 감독 아드리앙 마벵(Adrian Maben)이 폼페이를 여행하다가 여권을 잃어버려(...) 하루동안 폼페이에서 꼼짝 못하고 갇혀있던 도중, 폼페이의 폐허를 배경으로 박쥐와 곤충 등 자연이 내는 배경 소리에 인상을 받아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에게 폼페이 라이브 공연을 제안한 것이다. 폼페이 라이브 공연은 핑크 플로이드의 라이브 공연 중 역대 최고라고 평가받으며, 2016년 데이비드 길모어가 폼페이 원형극장에서 다시 라이브 연주를 했다. 2002년에 멤버들의 인터뷰나 스튜디오 레코딩이 추가된 감독판이 2005년 발매되었다.
당시 재미있는 비화가 있는데, 폼페이는 당시에도 세계적인 관광지였기 때문에 무관중으로 공연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우연히도 근처에 위치한 나폴리 대학교의 한 교수가 핑크 플로이드의 광팬이었기 때문에, 핑크 플로이드의 무관중 공연을 위해 문화재청에 6일 동안 폼페이 원형 극장의 관광객 출입을 통제해달라고 요청했고 매우 수월하게 라이브 공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이 당시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은 상당히 많은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인지 원형극장 내부에 당시 공연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 < 푸니쿨리 푸니쿨라>는 베수비오 화산에 있었던 관광용 강삭철도를 홍보하는 노래였는데, 사람들이 베수비오 산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관광을 오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요즘으로 치면 CM송까지 만든 셈이다. 그러나 정작 강삭철도는 이후 사람들의 우려대로 폼페이마냥 화산폭발 때문에 결국 문을 닫았고, 노래만 남게 되었다.
  • 대한민국에서는 1997년 7월 24일~1997년 10월 5일[30] 예술의 전당에서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이름의 유물전을 개최하면서 세간에 크게 알려졌다. 내부에 구내식당이 있으며, 가격은 약간 비싼 수준이었다.
  • 폼페이의 유물을 훔쳐가는 관광객들이 많은데, 이들이 저주에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갑자기 유방암에 걸려 반성의 편지와 함께 돌려준 이도 있었다. #

[한국어] 폼페이·헤르쿨라네움·토레 아눈치아타 고고 지구 [영어] Archaeological Areas of Pompei, Herculaneum and Torre Annunziata [프랑스어] Zones archéologiques de Pompéi, Herculanum et Torre Annunziata [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6]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7] 다만 고대 폼페이가 멸망했을 뿐이지, 도시 자체는 유적 옆에 재건되어서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 현대 폼페이 시를 화산 폭발 당시의 황무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한국으로 치면 옛 신라시대 월성 옆에 경주읍성이 있고 현재의 경주 시가지가 있는 것과 비슷한 셈이다. [8] 2018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10월 중순일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9] 생선을 발효한 발효 식품으로, 로마인의 식사에서 필수품이었다. [10] 폼페이에서 가장 호화로운 저택들 중 하나의 소유자인 아울루스 움브리키우스 스카우루스는 가룸 공장의 주인이었다. [11] 락슈미 여신상이 출토되었다. [12] 여기서 생산된 가룸 항아리들 중 코셔 푸드라고 쓰인 항아리가 출토되었고, 번화가의 낙서 중에 "이곳은 소돔, 고모라와 같다."라고 쓰인 낙서가 발견되었다. 당시엔 그리스도교가 엄청 마이너한 종교였으므로 해당 구절은 아마 유대인들이 썼을 것이다. [13] decurio: 100인회 [14] duumviri: 두 남자 [15] 본국 로마의 집정관이 '콘술'인 것과 구별하기 위해 다른 칭호를 썼지만, 로마 집정관처럼 권표( 파스케스)를 든 호위병( 릭토르)까지 두었다. [16] 영국의 역사학자 톰 홀랜드에 따르면, 본국 로마 집정관의 경우 다른 해와 구별되는 권한을 가진 '특별한 해'의 집정관이 없던 반면, 두움비르의 경우 5년마다 한 번씩 로마의 감찰관처럼 동료 시민의 도덕적·재정적 현황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지위를 부여하는 임무를 맡은 '5년 두움비리'가 존재했다고 한다. 이들의 조사에 따라 시민들의 투표권과 피선거권 여부가 가려졌으며, 데쿠리오에 새로운 인물을 임명하는 것도 이들 '5년 두움비리'의 권한이었다. [17] Aedilis. 안찰관이라고도 하며, 주로 공공건축과 제사를 관리했다. [18] 그리스 신화 헤파이스토스에 해당한다. 화산을 뜻하는 영어 단어 volcano(볼케이노)의 어원이 된다. 좀 더 정밀하게 따져보면, 불칸 신의 이름에서 화산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vulcanus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이탈리아어 vulcano로 이어졌다가, 다시 프랑스어를 거쳐 영어로 차용되어 volcano가 되었다고 한다. # [19] 1980년대 초•중•고 국내 과학 및 지리 관련 교과서에서 화산 폭발을 설명할 때 '폼페이에서 약 16,000명이 거의 몰살되었다.'고 나오던 적이 있었다. 7차 교육과정 당시 두산동아 중학 영어 교과서에서는 20,000명까지 나왔다. [20] 한국 최악의 태풍으로 꼽히는 1959년 사라호 태풍보다도 인명피해가 더 크다. [21] 트라야누스 황제의 신임받는 신하로 유명하며, 비티니아 총독 재직시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받은 편지가 지금까지 많이 남아있다. [22]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 자녀가 없었던 이복형 페르난도 6세의 승하로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기 이전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었다. [23] 화산재가 시체를 덮어서 높은 온도로 시체를 녹여 없애고 그 대신 화산재가 시체 겉에 딱딱한 껍질 형태로 경화되어 화산재 덩어리가 시체 형태로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도 퍼져 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즉, 석고상이 아닌 화산재 덩어리 형태로 오해하고 있다. 실제로 석고가 충분히 입혀지지 않은 부분에 인골이 노출된 경우도 쉽게 볼 수 있다. [24] 실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는 욕설과 음란함으로 가득한 외설적인 낙서들이 가득 발견되어 후세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자신의 테크닉으로 여성들이 절로 신음하게 된다고 자랑하는 검투사의 낙서나, 매춘굴에 다녀간 프라이토리아니의 낙서, 창녀 아무개는 얼마 주면 무슨 행위까지 한다고 광고하는 낙서, 여기저기에 노상방뇨를 하지 말라고 써놓은 경고문이나 노상방뇨를 했다고 자랑하는 낙서, 술집에서 사기 도박이 들통나 도박꾼들이 싸우고 주인이 말리는 내용을 그린 만화 등, 로마인들의 저속한 서민 정서를 가감없이 볼 수 있다. 심지어 바실리카에는 "이렇게 (벽에 새겨진) 낙서가 많은데 네가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하구나!"라고 벽면에 새긴 낙서도 있다. [25] 물론 프라이토리아니, 즉 근위대가 정예여서 투입된 것도 있겠지만, 애시당초 이탈리아 반도에 주둔한 유일한 정규 군대가 프라이토리아니였기 때문에 신속한 투입을 위해서는 프라이토리아니 말고는 다른 부대를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6] 다만 파인애플이 유럽에 전래된 시기는 대항해시대 이후라는 것이 정설이므로 이 벽화가 사실이라면 기존 학설이 수정되어야 할 판이다. [27] 울면서까지 "단 한 가족만이라도 살리자"고 애원했다. [28] 재미있게도 흉상의 모델은 본인과 같은 옥타비아누스의 흉상이었다. [29] 사실 옥타비우스가 자신의 위치가 폼페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화산 폭발을 예측할 수는 없다. 그가 죽고 60년 뒤에 화산이 폭발했으니 화산 폭발을 예측했을 리가. [30] 본래 9월 3일까지로 계획되었으나, 당시 200,000명 이상이 관람을 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나머지 전시기간을 1개월 연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