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9 09:18:23

푸블리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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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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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ni( 라틴어)

societas publicanorum

1. 개요2. 시작과 번영3. 선정과 관리4. 악행과 몰락

1. 개요

고대 로마 로마 공화정 시대 동안 번성한 원시적 민간기업의 경영자 내지 운영주체를 뜻한다. 단수형이자 그 소유 경영자를 푸블리카누스(Publicanus)라고 한다. 라틴어 그대로 뜻은 공공 계약자.

로마 정부로부터 조세 징수, 공공 사업, 공공 시설 건축 등의 업무를 대행한 원시적 민간조합기업 소키에타스 푸블리카노룸(societas publicanorum)을 소유하고, 운영한 사람들로 에퀴테스 중 가장 많은 재산을 불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그라쿠스 형제 중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에게 합법적으로 지위와 활동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각종 비리, 속주민 착취, 불법 자금 후원 등으로 인해 공화정 후기부터 사회 문제를 초래했다. 따라서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1], 호민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등은 물론, 총독 중 합리적이고 속주민 착취를 혐오한 키케로 같은 인사들에게 "지독한 강도질을 저지르는 작자들"로 불리며 미움을 받았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불리게 되면서 시작된 제정 시작 이후, 아우구스투스의 개혁 속에서 몰락했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속에서 많은 돈을 쓸어 담던 푸블리카니 경영자와 푸블리카니의 특권은 황제 휘하 관료가 차지하면서, 사장된다.

2. 시작과 번영

로마는 공화정 아래에서 포에니 전쟁 이후부터 지중해, 흑해 연안의 패권국이 됐다. 그들의 영토와 영향력은 전(全) 지중해에 뻗쳤다. 하지만 여전히 로마 공화국의 정부는 방대한 영토 대비 소수집단에 불과한 원로원이 집단 지도 형태로 제국화된 공화국을 통치했다.

푸블리카니의 등장은 기록상 기원전 390년 로마가 켈트족에게 그들 영토인 이탈리아가 공격받은 해부터였다. 다만, 기원전 390년 로마 약탈 전부터 푸블리카니와 이들이 경영한 민간 조합 기업체(소키에타스 푸블리카노룸)이 있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추정이 많다.

이 해, 원로원은 처음으로 오늘날의 특허권 형태로 민간에게 공공 분야의 업무 일부를 독점적으로 대리한 계약을 체결했다. 이때 원로원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있는 신성한 암컷 거위에게 모이를 지급하게끔 하는 계약을 맺었다. 여기에서 언급된 신성한 암컷 거위란 기원전 390년 켈트족이 알리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박살내고 로마를 약탈하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고립된 로마군을 상대로 야습을 감행할 때, 쿨쿨 잠이 들거나 겁에 질린 들과 달리 요란하게 울부짖어 로마군이 켈트족의 야습을 격퇴한 공을 세웠던 거위들을 말했다.

푸블리카니와 소키에타스 푸블리카노룸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막대한 재산을 쓸어담으면서 그들 일부가 에퀴테스를 넘어 노부스 호모로 원로원에 입성하게 된 사건은 한니발 전쟁으로 불린 2차 포에니 전쟁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가 전쟁터가 된 상황에서 각종 특허를 따냈고, 당시 집정관, 전직 집정관, 법무관, 전직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 등이 줄줄이 전사하거나 큰 부상을 입는 로마 상황 속에서 이런 점을 파고 들었다. 그들은 로마 정부에게 군수계약을 맺으면서 여러 특권과 보상을 대가로 요구했고, 손해배상, 손실보상까지 계약서에 넣었다.

그 결과, 푸블리카니와 그들의 사업체 소키에타스 푸블리카노룸은 2차 포에니 전쟁 말기부터는 로마가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얻어낸 속주들이던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시작으로 악명 높은 징세 대리 사업을 시작으로 하여 각종 간접세를 만들어 막대한 이윤을 취했다. 이들의 악랄함은 로마군의 승패보다 철저히 이윤 추구에 맞춰졌다. 따라서 기원전 215년에는 로마군이 계속 패배한다는 구실로 국가 존속을 놓고 고민에 빠진 로마 공화국 정부를 분노케 했다. 그렇지만 로마 정부는 상황상 이들을 처벌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히스파니아 일대(오늘날의 스페인, 포르투갈)의 로마군에게 군수품을 조달하는 대가로 사업주들인 푸블리카누스와 그 가족, 소키에타스 푸블리카노룸의 전(全) 직원 및 가족들의 징병 면제를 보장하고, 자연재해와 카르타고군의 공격으로 인한 모든 피해 및 로마군의 패전까지 로마 정부가 손해배상, 손실보상을 하도록 한 계약을 따냈다. 또한 이들은 저질 군수품을 공급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도록 계약을 미리 맺거나, 로마가 속주를 차지하면 은광, 금광, 철광 등을 개발하는 권한을 약속받는 등 로마 공화국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몰두했다. 따라서 기원전 2세기 전후로 이렇게 성장한 푸블리카니와 그들 사업체 직원들은 곧 기사계급으로 알려진 에퀴테스의 대두 속에서 그 선두주자가 됐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도 당시 로마는 원시적인 행정체제, 부족한 인적 자원, 과두체제 하의 원로원 내부 문제 등으로 인해 푸블리카니와 소키에타스 푸블리카노룸과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먼저 원로원은 이들을 버릴 수 없었다. 각종 법과 모스 마이오룸 아래에서 원로원 의원과 그 가족, 가문은 어떤 상공업 및 공공 도급 계약 참여가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대체로 원로원 의석이 없는 플레브스가 푸블리카니가 됐다. 이때 원로원 안에서는 암암리에 푸블리카니로 불릴 자들을 대리인으로 내세우거나 이들의 뒤를 봐주면서 함께 돈을 버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물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대 카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등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옛부터 많았다.[2] 그러나 대체로 집정관까지 오르는데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원로원 의원에게 푸블리카니에게 주식 형태의 파르테스(partes)를 통해 서로 엮이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키케로 등도 파르테스를 사들이고 되팔았다. 그러니 키케로는 대놓고 이렇게까지 말했고, 이 발언은 키케로마저 간접적으로나마 푸블리카니와 공생관계였던 것이 확인이 될 정도라는 평을 듣는다.
"부실한 푸블리카니의 파르테스를 사는 건 돈을 낭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로마 정부로서는 광활해진 속주 관리 속에서 부족한 인적 자원을 떠올리면, 속주에 파견할 푸블리카니를 보통 최저가를 제시해 뽑는 경우가 이익이었다. 물론, 유혈사태 직전까지 벌어질 경쟁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최저가를 제시한 자들이 선정된 이후, 못 쓰는 수준의 군수품을 제공하거나, 부실 공사, 과도한 징세 등으로 물의를 벌이는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푸블리카니 선정 후 계약을 맺을 때, 원로원이나 총독은 로마 정부에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 주면 그만이었다. 푸블리카누스가 용역 활동을 하면서 동원된 노예들을 고대 기준으로도 최악의 환경에 혹사시켜 처참하게 죽어나가게 하면, 경고하거나 계약 파기만 하면 됐다.

또한 원로원이나 총독 입장에서는 낙찰 후 계약 변경을 하면서 뇌물을 받아내면 되는 식으로도 이익을 볼 것이 많았다. 재산을 불리는 과정의 일부로 치부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모든 로마 원로원 수뇌부가 부패하지는 않았다. 대 카토,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당신이 이미 내뱉은 말이다. 약속을 지키고, 제대로 된 계약 내용을 최고 수준으로 준수하라."며 계약 수정은커녕 똥값 수준의 용역을 제공한 푸블리카니들을 강력하게 처벌했다. 루틸리우스 루푸스나 후일의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될 옥타비아누스와 그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이들을 법정에 세워 추방하거나 처형했다.

어쨌든 이런 배경과 이유로 푸블리카니의 위세는 높아졌는데, 그 절정을 찍게 된 것은 로마가 헬레니즘의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승리하고, 부유한 지중해 동쪽을 속주로 삼으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푸블리카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로 대표된 실력자들 아래에서 차례차례 속주가 된 이 일대로 함께 들어갔다. 이들은 폼페이우스 등과 공생하면서, 무시무시한 온갖 간접세를 고안해 만들고,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그들은 오늘날의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반도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지에서 항만세, 통행세, 교통세 등 잡다한 것을 만들어 징수하고, 자신들을 봐주는 총독과 원로원 권세가들을 돈방석에 앉혀줬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푸블리카누스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에퀴테스 중 가장 부유한 집단이 됐다.

3. 선정과 관리

푸블리카니는 통상적으로 민간인이 공개 입찰을 통해, 가장 저렴한 금액을 제시한 경우 감찰관에게 선택받는 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공공계약자로 불린 푸블리카니로 불렸고, 이들은 계약 직후부터 원로원 감독 하에서 특허로 받은 사업을 대리하고, 그 대가로 로마 공화국에게 보수를 받았다. 이들이 이때 맡은 분야는 도로, 상하수도, 공공 건축물 개보수 등을 전문으로 하는 공공사업, 로마군의 군수품, 군납품, 공공 용역이었는데, 이 중 가장 유명하고 악랄하기로 유명한 쪽은 이탈리아 밖에서 담당하게 될 군납 보급 분야와 세금 징수 용역이었다.

4. 악행과 몰락

로마 공화정 아래에서 가장 큰 희생자는 당연히 푸블리카누스 손에서 온갖 무거운 속주세, 잡다한 세금 등으로 노예가 되기까지 한 속주민이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와 속주 내 식민도시 내 로마시민권자와 다르게 억지로 부과된 세금에 짓눌렸다. 따라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본 대 카토,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등 극소수의 원로원 내 실력자들이나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스카이볼라 등은 이를 시정하거나 자신들이 임지에 있을 때 속주민 착취를 엄금하고 푸블리카니의 뒤를 봐주지 않았다.

이중 가장 유명한 쪽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종조부,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여동생의 남편,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고모부인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와 그를 아시아 총독 시절 휘하에 두고 함께 노력한 스카이볼라가 있다. 이들은 함께 총독과 부총독 격의 관료로 아나톨리아에 간 뒤, 전임 총독들 아래에서 묵인 하에 속주민들을 쥐어 짜내고 경우에 따라서는 노예로 만들어 팔던 공공 징세 분야의 푸블리카니들을 전부 때려 잡았다. 특히, 처남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처럼 푸블리카니의 이런 행태를 혐오해왔고 검소하고 청렴했던 루틸리우스 루푸스는 집정관 시절 로마군 안에서 벌어진 군기를 이유로 한 폭행, 폭언 문제를 엄하게 처리하고 개혁안까지 발표해 로마군의 질적 향상을 이룬 공로 그대로 이를 봐주지 않았다. 그는 스카이볼라 총독과 함께 푸블리카니들이 속주민과 충돌하면 속주민에게 승소판결을 내렸고, 착취한 돈을 로마법상 이자까지 뱉어내지 않으면 처형한다는 조항을 내세운 다음, 일정기간의 변제 기간이 지나도 푸블리카니가 무시하면 이를 그대로 적용했다. 그 결과, 밀린 세금을 받아낸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함부로 살상한 푸블리카니들은 전부 십자가형으로 줄줄이 처형됐다. 이 조치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 속에서 민심을 잡는 효과도 있어, 당시 로마 원로원에게는 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스카이볼라는 모종의 이유로 9개월만에 강제 소환됐고, 루푸스는 강제 소환 직후 푸블리카니 등 에퀴테스들이 장악한 법정에 "속주민들을 착취했다."고 모함받아,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 속주민들의 탄원에도 결국 추방됐다.

루푸스가 추방된 일은 이후 로마의 젊은 파트리키, 노빌레스 그리고 키케로와 같은 노부스 호모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재판과 추방생활 내내 떳떳한 루푸스의 모습은 귀감이 됐고, 이는 곧 루푸스의 처조카였던 고결한 호민관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의 개혁 속에서 푸블리카니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하지만 젊은 드루수스 호민관은 모든 이탈리아 안의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하려는 법안을 제기했다가 자택 근처에서 암살됐다.

그러다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실력으로 최고 권력자가 된 뒤, 공화정 수호를 선포하고, 두 번의 조정 헌법 아래에서 실질적인 로마 제국을 열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2인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공식적으로 포문을 연 푸블리카니 처벌을 시작했다.

옥타비아누스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는 형편없는 군수품을 납품받으면 용서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는 정적들에게 여러 후원금을 내면서 골치 아프게 한 푸블리카니의 온갖 문제를 혐오해왔다. 따라서 그는 아그리파와 함께, 내전 기간 중 푸블리카니가 거둔 세금이 법 테두리 안에 있어도 해석에 따라서는 불법이라는 구실을 들어, 그들이 거둔 세금을 국고나 내전 비용으로 되돌려, 자신의 내전 자금으로 유용하게 사용해왔었다. 그러니 푸블리카누스들로서는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의 승자가 되고, 본래부터 청렴하고 푸블리카니를 벌레 보듯이 생각한 아그리파가 버틴 상황 속에서 위기에 내몰릴 수 밖에 없게 됐다.

당시 시대 분위기는 기원전 31년 이래, 공화정 말부터 내전이 일상화되면서 각 속주에서 만연한 여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2년 12월 31일 자신과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권력을 부인하고 합법적으로 수립된 삼두정치 체제를 소멸시킨 뒤, 오롯이 개인의 것으로 모든 지위를 만들었다. 그는 이탈리아 대다수 주민과 각 속주의 식민도시 출신 로마시민권자들, 동방과 서방 전역의 자치 지역 속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이들에게서 푸블리카니의 문제를 듣고, 그 시정을 약속했다. 이보다 6년 전인 기원전 28년 1월 1일,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한 뒤, 만장일치로 아그리파와 나란히 감찰관에 취임해 과거의 대쪽 같은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를 교과서 삼아 시민들을 명부에 등록시키고, 원로원 명부 개정을 선포하고, 정상적인 국제 회복 속에서 새로운 공화국을 안정시키겠노라고 밝혔다. 이 조치 아래에서 1천명까지 늘어난 원로원은 200명 감축된 800명 가량으로 줄이기로 했고, 이후 단계적으로 600명으로 줄이겠노라고 밝혔다. 동시에 기원전 28년부터는 재무관의 숫자를 40명에서 20명으로 정상화시키면서, 에퀴테스 출신들의 공직 진출은 재산 규모, 이탈리아 내 평판 외에도 그들이 대대로 어떤 직업을 통해 재산을 쌓았는지 등을 면밀히 조사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고리대금업자, 경매업자와 마찬가지로 칼만 들지 않은 강도라고 손가락질 받은 푸블리카니는 위기에 몰린다.

설상가상,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고 두 번의 조정헌법을 치밀한 각본 아래 추진한 일은 대놓고 언급되지 않을 뿐, 부패와 내전의 폐해로 찍힌 푸블리카니를 더 큰 위기로 내몰았다. 로마는 이제 안정적인 1인자 아래에서 행정체계를 각 속주까지 내실있게 만들어갔다. 그동안 푸블리카니와 결탁했던 원로원은 기원전 13년까지 200명이 줄어들 정원 600 ~ 800인 원로원 명부 안에서 살아남고자, 아우구스투스가 혐오한 일을 삼갔고, 자발적으로 제국 행정으로 후일 불릴 새로운 공화국 아래에서 복원된 관료제에 편입을 자처했다. 기원전 12년에 임명되기 시작한 각 로마 수도교 관리를 총책임진 아그리파가 원로원 의원 2명을 지원받겠다고 했을 때, 원로원 의원들은 푸블리카니의 합법적인 주무대인 공공분야 공공계약을 자신들의 제국행정 경력으로 만들었다. 야심 있고, 자신과 가문을 명문으로 올리겠다는 생각에 부푼 원로원 의원들은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5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테베레 강 범람 문제 해결 부서, 집정관급 원로원 의원 2명이 맡게 될 이탈리아 항구 관리 등의 발표 속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이들은 어쩌면 황제보다 푸블리카니를 더 철저히 때려잡았다. 아우구스투스가 훈련된 노예, 해방노예 기술자들을 붙어주면서 원로원을 돕게 했다면, 합류했거나 합류를 원한 원로원 의원들은 본인이나 아들, 조카, 사위 등을 위해 푸블리카니의 역할을 축소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2차 조정헌법 체제가 들어서고 후일 프린키파투스라고 부르는 원수정의 안착 이후부터 원로원 의원들은 푸블리카니가 그나마 깨끗한 도급계약으로 돈방석에 앉던 특허를 무효화하고 제국 행정의 업무로 차지했다. 이는 곧 푸블리카니의 역할이 세금 징수 대행 같이 지저분한 것 외엔 없게 됐다는 것을 뜻했고, 원로원 가문들은 공공계약 업무를 자신들의 출세 길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의 치유와 팍스 로마나를 내세웠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와 그가 임명해 파견한 총독들이 가장 신경을 쓴 일은 안정적인 세수 체계, 세금 제도 법제화였다. 그러니 로마 정부는 이를 위해서 푸블리카니 손아귀 속에서 억지로 부과한 무거운 속주세에 짓눌리는 속주민들이 희생되고,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아야 될 분명한 목표를 세웠고, 푸블리카니는 복원된 공화국 안에서 제국의 속주 행정과 안정을 해치는 걸림돌로 명확히 인식됐다.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 친구이자 사위 아그리파, 조카사위 아헤노바르부스를 연달아, 푸블리카니들의 놀이터로 신음한 지중해 동부 속주 총책임자로 내보낸 일은 푸블리카니에게 사형선고가 됐다. 이들 중 아그리파, 티베리우스는 애초부터 아우구스투스나 과거의 대 카토, 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루틸리우스 루푸스,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처럼 푸블리카니를 인간 말종으로 혐오한 터라, 이들은 그들의 일탈을 말 그대로 때려 잡거나, 보호국 왕이나 자치도시의 푸블리카니 처벌을 당연한 조치로 인정해줬다. 더해 로마 총독들은 아우구스투스 뜻 그대로 아우구스투스가 새롭게 설계하면서, 고무줄을 늘이고 줄이듯 만든 반역법과 새롭게 만든 간통법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푸블리카니를 철저히 박살냈다.

아우구스투스는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황제 속주로 불리는 범위를 확대시키면서, 푸블리카니를 옥죄였고, 사회 분위기와 로마인 및 각 속주 유력자들이 푸블리카니를 인간 말종으로 보는 여론까지 겹치니, 푸블리카니는 완전히 설 자리를 잃게 됐다. 로마는 부유한 푸블리카니 경영자들인 푸블리카누스와 그 회사 직원들을 반역, 간통 등 각종 범죄로 기소해, 처형하거나 추방 후 재산을 황제 국고에 모두 몰수했다. 그리고 그들의 특허를 모두 거둬들이고, 이들이 하던 일을 전부 황제가 파견한 관료, 재무관에게 넘겼다.

이런 흐름은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베스파시아누스, 도미티아누스 아래에서도 계속됐다. 특히, 냉혹하기로 유명했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는 푸블리카누스와 이들이 경영한 푸블리카니를 처벌할 때, 처벌 받는 주변의 푸블리카누스까지 기겁하게 만들었다.[3][4] 이들보다 온화했지만 부패와 속주민 착취에는 냉혹함을 선보인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 속주 편입 후의 명령, 오스티아 항구 특별법 등을 만들어 살짝 발 붙일 수도 없게 했다. 따라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시대 중기부터 에퀴테스 중 많은 돈을 쓸어 담던 푸블리카니 경영자와 푸블리카니는 공화정 체제와 함께 몰락하게 되었다.

다만, 트라야누스 황제의 속주 세수 관리 등에서 확인되듯이, 일부나마 푸블리카니가 세금 징수 분야 등에서는 존재하긴 했다. 이들은 총독 대리인 자격으로 징수를 떠맡았고, 트라야누스 황제처럼 푸블리카니를 활용한 경우도 꽤 많았다. 그렇지만 이들의 역할은 사실상 황제나 총독이 보낸 정부 관료의 수족으로 세금을 받을 때, 이를 받고, 온전히 세금 전량을 로마까지 수송하면서, 정해진 계약금만 받는 정도였다. 더해 이들은 공화정 시절의 푸블리카니와 달리, 중간에 사고가 터지거나 그들이 일부를 가로채면 반역죄로 처벌받을 정도로 과거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1]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외종조부로, 당대 로마인과 후대 로마인 모두에게 청렴하고 도덕적인 로마 엘리트의 전형으로 추앙받은 사람이다. 그의 철학, 개혁방향은 처조카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외종손 카이사르는 물론 아우구스투스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2] 술라는 이미지상 의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푸블리카니와 공생관계를 깊게 맺지 않았다. 우스개소리가 아니라 애초부터 성격과 삶을 떠올리면, 공생보다는 이들이 눈에 거슬리면 박살내고 그 재산을 강탈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3] 섹스투스 마리우스가 모함을 받아 반역법, 간통법으로 일가 전체와 몰살당한 점을 떠올리면, 티베리우스의 악행으로 타키투스에게 소개되나, 어떤 점에서는 선대 아우구스투스처럼 티베리우스의 푸블리카니, 푸블리카누스 혐오를 엿볼 수 있는 일화는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다. 이때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야누스의 반역 음모를 진압한 뒤, 대대적인 국가 기강 잡기 속에서 공포정치를 펼쳤다. 그러던 중, 히스파니아 일대에서 은광, 금광 경영을 하면서, 로마 최고의 부자 반열까지 오른 섹스투스 마리우스가 델라토르들에게 "딸과 근친상간을 했을 수도 있다."는 고소장이 접수됐다. 이때 티베리우스 황제는 서한을 보내 곧바로 재판을 열게하고, 그에게 유죄 선고를 직접 내리면서, "하던 일도 강도 같은 짓거리를 했던 사업가였는데, 사생활은 짐승보다 못하다."며 벼랑에 던져 죽이라고 지시하고, 그 일가 모두를 남녀노소 상관없이 똑같이 벼랑에 던져 죽이라고 명했다. 동시에 그가 경영한 푸블리카니 직원들까지 줄줄이 반역죄로 처형하고 이들 재산을 모조리 국고에 집어 넣었다. [4] 칼리굴라는 자신의 최측근 베스파시아누스가 조영관이던 시절, 그에게 일부러 새하얀 토가를 입고 오라고 한 뒤, 황제와 황제 측근들이 담당한 공공분야 개보수와 푸블리카니가 도급계약으로 맺어 처리한 도로 개보수를 비교하면서, 푸블리카니들이 하던 쪽에 가득한 진흙을 새하얀 토가에 바르면서 푸블리카니가 얼마나 저열하고 공공에 대해 이윤만 추구하는지 맹렬히 비판했다. 동시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노력한 성과를 밝혔는데, 이후 칼리굴라는 푸블리카니를 곧바로 계약 미이행 등으로 기소해 모두 처벌하고 그들 재산을 압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