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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수도 로마를 보호하기 위해 270년에서 275년 사이에 건축한 성벽. 건설 당시에는 길이가 약 19km에 달했으며, 현재는 12.5km에 이른다. 비록 오늘날에는 서울 한양도성처럼 일부가 헐렸지만, 로마 제국 시대에 건설된 성벽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성벽으로 손꼽힌다.2. 역사
파란 선 |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세르비우스 성벽 |
빨간 선 | <colbgcolor=#FFF,#000>기원후 3세기에 지어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
기원전 600년경, 로마의 6번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로마 시를 보호하기 위해 '세르비우스 성벽'을 건설했다. 이 성벽은 매우 견고하여 이탈리아에서 승승장구하던 한니발 바르카도 공략을 포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귀환한 뒤 독재관에 취임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시를 확장하면서, "로마는 이제 세계의 주인이 되었으니 성벽 뒤에 숨을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파괴하였다. 이후 로마 시는 200여 년간 성벽 없는 대도시였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침략이 갈수록 거세지고, 내전이 갈수록 격화된 군인 황제 시대에 로마 시의 안보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급기야 서기 271년, 알레만니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이들을 즉각 토벌하려 했지만, 플라켄티아 인근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그의 패배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알레만니족이 로마로 쳐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다고 여겨 절망에 빠진 로마인들은 앞다퉈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며 구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포기하지 않고 군대를 수습한 후 메타우루스 강 근처에서 주둔하고 있던 알레만니족을 공격하여 파노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쳤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는 철수하고 있는 알레만니족을 추격하여 파비아에서 괴멸시켰다.
하지만 게르만족이 로마를 위협했다는 사실은 로마인들에게 심히 큰 충격을 줬고, 아우렐리아누스는 현 상황에서 로마 시의 안보를 확보하려면 새 성벽을 세워야겠다고 판단했다.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이 성벽 건설은 로마시의 취약성을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고 기술했다. 황제는 성벽 건설을 군단병이 아닌 시민들 스스로 수행하게 하였는데, 아마도 그해 펠리키시무스의 반란에 동참한 행위에 대한 징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건설은 271년경에 시작되어 4년 안에 마무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마무리 작업은 프로부스 황제의 지휘하에 279년경에 이뤄졌다고 한다. 306년 황위에 오른 막센티우스는 성벽 보강 및 일부 구역 재편성 작업을 실시하였으며, 그를 꺾고 로마를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해자를 건설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게르만족이 잇달아 이탈리아에 침입하면서 로마의 안보가 위태로워지자,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플라비우스 스틸리코는 성벽을 더 보강하기로 했다. 서기 403년경 성벽의 높이는 거의 2배가 되었고, 탑들은 2층으로 올라갔으며, 많은 문이 보수되었다. 그리고 테베레 강 오른쪽 둑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영묘가 성벽에 통합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강이 부질없게도, 410년 8월 24일 알라리크는 로마의 성문을 뚫고 들어가 사흘간 로마 약탈을 자행하였다. 포로 로마노, 아우구스투스 영묘,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비롯한 과거 황제들의 능들이 파해쳐졌으며 귀중한 물건들이 전부 도굴당했다. 그들은 로마 전역을 약탈하면서 궁전들, 교회들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그리고 많은 시민이 포로로 잡혔는데, 호노리우스 황제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도 이때 붙잡혔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2세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40년 성벽, 탑, 성문을 복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443년 지진이 일어나면서 많은 성벽이 허물어졌고, 455년 북아프리카에서 해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가이세리크는 별다른 저항 없이 로마에 입성한 뒤 2주 동안 재물을 뜯어내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두 딸인 에우도키아, 플라키디아 등을 사로잡아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렇듯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외적의 침략을 잘 막아내지 못했는데, 성벽 자체는 매우 견고한 편이었지만 19km에 달하는 방대한 길이에 비해 수비대는 겨우 25,000명에 불과했고, 당시 로마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시민들의 전투 수행력과 전의 부족 등 여러 문제가 겹쳤기 때문이다.
493년 오도아케르를 물리치고 이탈리아의 군주가 된 테오도리크 대왕은 성벽을 대대적으로 복구하였다. 537년 로마를 수복한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는 해자를 조성하고,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요새화했으며, 테베레 강에 쇠사슬을 설치했다. 이후 동고트 왕국의 비티게스의 공세를 1년 9일간 항전한 끝에 격퇴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비티게스가 수비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수도교를 절단하면서, 로마 시의 수로 시스템이 파괴되었다. 그 후 546년 토틸라가 로마 포위를 개시하자, 수비대는 1년 가까이 항전했지만 그해 12월 17일 아사우리아인 병사들이 아시나리아 성문을 열고 투항하면서 끝내 함락되었다. 토틸라는 로마를 목초지로 바꾸려 했지만 벨리사리우스의 간곡한 편지를 받고 철회했다. 다만 시내에 잔류하던 원로원 의원들과 가족을 인질로 잡고,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1/3가량 파괴하여 성곽 구실을 못하게 하였다.
547년 토틸라가 아풀리아의 동로마군을 섬멸하기 위해 나폴리로 진격하자, 벨리사리우스는 그 틈을 타 로마시로 진격해 로마 시를 탈환하였다. 그는 3주간 성벽의 파괴된 부분을 잔해를 막무가내로 쌓아서 막아놨고, 성문마다 장창병을 배치했으며, 성밖에는 마름쇠를 뿌렸다. 토틸라는 25일만에 돌아와 공격했지만, 짧은 기간내에 상당한 준비를 해놓은 수비군에게 격퇴되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전력 부족으로 인해 토틸라와의 전쟁에서 고전하다가 549년 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토틸라는 즉각 로마 시를 포위했다. 수비대 사령관 디오게네스는 장기간의 포위에 대비하여 미리 라티움 지역의 밀을 수확, 식량을 비축해 놓았다.
그러나 포위가 길어지며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일부 병사들이 고트 진영과 내통하였고 푸짐한 보상에 눈이 멀어 550년 1월 16일 밤중에 성문을 열어버렸다. 토틸라의 군대는 들이닥쳐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던 동로마군을 살육하였고, 남아있던 대부분의 귀족층 시민들과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도주하였다. 로마시는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약탈되었고 남자들은 학살되었는데, 엄명으로 아녀자에 대한 살육은 금지되었다. 토틸라는 기병대를 보내어 도로변에 매복을 시켜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가도를 따라 도주하던 병사, 시민들의 대부분이 생포되었고 장군 디오게네스와 소수의 병사들만이 달아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552년 7월 타기나이 전투에서 토틸라가 전사하고 나르세스가 로마에 입성하면서, 로마는 다시 동로마 제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 후 로마의 역대 교황들은 랑고바르드 왕국의 침략으로부터 로마 시를 어떻게든 사수하기 위해 성벽 보강에 최선을 다했으며, 교황 레오 4세는 846년 사라센 해적의 습격으로 파괴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어하기 위해 '레오 성벽'을 세웠다. 16세기 후반의 교황 비오 4세는 바바리안 해적이 로마를 침공하는 걸 막기 위해 레오 성벽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잇게 하였고, 성벽의 전반적인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대포의 공격을 막는데 적합한 보방 방식의 상갈로 요새가 16세기에 건설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1870년 이탈리아군이 로마에 입성할 때까지 도시를 방어하는 역할을 지속했으며, 로마 시의 경계선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했다. 현재는 로마 시의 랜드마크로서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산 세바스티아노 성문 인근의 '무라 아우렐리아네(Mura aureliane) 박물관'에서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구조와 공성전의 역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