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의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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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전경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아프로디시아스 |
영어, 프랑스어 | Aphrodisias | |
국가·위치 | 튀르키예 아이든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2017년 | |
등재기준 | (ii)[1],(iii)[2],(iv)[3],(vi)[4] | |
지정번호 | 1519 |
최근 복원된 세바스티온
1. 개요
튀르키예 남서부의 유적지. 고대 그리스의 주요 신 중 하나인 아프로디테에 헌정된 신전 도시로, 옛 카리아 지방의 중심지였다. 아이든 주에 속했지만 동북쪽 25km의 데니즐리에서 더 가까워 파묵칼레와 함께 둘러보는 관광객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유적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화려하게 장식된 테트라필론 (기념문)과 세바스티온 (재단)이 유명하다. 로마 제국기에 번영했지만 7세기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에는 요새 도시로 전락했으며, 12세기의 전란 후 마을로 남았다. 중세 이후 유적지에는 카리아의 튀르키예식 발음인 게이레라 불린 마을이 있었는데, 60년대 유적지 정비와 함께 서쪽 1km 지점으로 이전되었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현재 튀르키예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써 한국인들도 종종 방문한다.2. 역사
파일:터키 아프로디시아스 1.jpg후일 성당으로 개조되는 아프로디테 신전
카리아 현지 양식으로 표현된 아프로디테 석상 |
청동기 시기부터 마을이 있었고, 기원전 3세기 셀레우코스 왕조 하에 아프로디시아스 (Ἀφροδισιάς)로 명명되어 그리스식 도시가 건설되었다. 카리아 지역은 전통적으로 백색 / 회색 대리석으로 유명했고, 대리석 산지 근처에 자리한 아프로디시아스에는 수준 높은 대리석 건축물이 지어졌다. 다른 그리스 / 로마 유적들과 비교해봐도 확연히 대리석 사용 비중이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아프로디시아스는 기독교 국교화 이후인 서기 5세기까지 아프로디테 숭배가 지속될 정도로 다신교 신앙의 중심지였다. 종교도시로써 경기장에서는 잔인한 결투 대신 제사 의식이 거행되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내전 당시 아프로디시아스에는 카이사르의 노예였다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해방된 노예 출신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졸리오스가 주요 유력자로 있었다.
그는 옛 주군의 편에서 안토니우스에 맞섰다. 승자를 지지한 대가로 아프로디시아스는 로마 황실의 후원을 받으며 번영하였다. 도심부에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조일로스가 후원한 건물들이 남아있다. 한편 아프로디시아스의 아프로디테 석상은 그리스 본토의 역동성 대신 아나톨리아 양식으로 정적인 입상으로 조성되었는데, 서쪽 끝인 포르투갈의 베자에서 발견될 정도로 제국 전역에서 유통되며 사랑받았다. 로마 시기 아프로디시아스는 카리아 지방의 주도가 되었고, 팍스 로마나 이후인 서기 5세기에 대극장이 추가로 세워질 정도로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하였다. 아프로디테 신앙에 따라 '사랑의 도시'로도 불렸던 아프로디시아스는 점차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주교구로 편성되었다. 다만 여전히 다신교가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392년 기독교 국교화 이후 당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다신교 신앙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451년 칼케돈 공의회으로 결국 다신교의 명맥은 끊겼고, 도시 자체는 640년경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위기 속에 제대로 재건되지 못하고 극장을 일대만이 요새화되어 중소 도시로 남았다. 동시에 지명 역시 '십자가의 도시'란 의미인 스타우로폴리스 (Σταυροῡπολις)로 개칭되었는데, 8세기 들어 지역의 이름을 따 카리아로 더 자주 불렸다. 1188년 반란을 일으킨 테오도로스 만카파스, 1197년 룸 셀주크군의 습격으로 도시는 더욱 파괴되었다. 이후 1439년 스타우로폴리 주교 이사이오스가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다가 동서 교회 합병에 반대하여 도주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현지 그리스인 / 기독교 공동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2세기 이후 카리아의 터키어 발음인 게이레라 불리게 된 도시에는 점차 튀르크 인들이 유입되었고, 기존 주민들을 대체하거나 동화시켰다. 게이레 마을과 함께 공존하던 아프로디시아스 유적은 페르가몬이나 셀축에 비해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04-05년 프랑스인 철도 기술자 폴 오귀스탱 고댕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 당시 발굴품 일부는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후인 1957년부터 아프로디시아스에 대한 발굴 계획이 수립되었고, 게이레 마을은 서쪽의 예니 코이 (새 마을)로 이전되었다. 1962년 튀르키예인 고고학자 케난 에림이 뉴욕 대학교의 협조 하에 대대적인 발굴에 착수하였고, 2014년에는 드론을 이용하여 유적지의 3D 지도를 작성하였다. 현재까지도 조금씩 발굴이 진행 중에 있다.
3. 갤러리
3.1. 아프로디테 신전
3.2. 세바스티온
3.3. 테트라필론
- [ 테트라필론 상세 사진들]
3.4. 극장
- [ 극장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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