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Pilum로마군 군단병의 제식 장비였던 투창이다. 영어식으로 읽어 필럼이라고도 한다. 길이는 1.5~2.2m로 창날은 50~70cm, 손잡이는 1~1.5m다. 무게는 2~5kg 정도. 매체에서 보이는 전형적 로마군은 스쿠툼과 필룸을 들고 글라디우스를 허리에 차고 있는 걸로 묘사된다.
중투척병기의 일종으로 가늘고 긴 창날은 상대방 방패에 박힌 후 휘어지며 창날과 손잡이를 잇는 추 부분이 매우 무거우므로 이것이 박힌 방패는 너무 무거워지는 데다가 박힌 필룸을 쉽게 뽑아낼 수도 없어서 방패를 버릴 수밖에 없어진다. 접근해오는 적들에게 필룸을 던져서 짤짤이를 넣다가, 상황이 유리해지면 돌진해 접근전으로 들어가는 것이 로마군 전술의 기본이었다.[1] 참고로, 필룸은 투창치곤 매우 크고 무거운 축에 속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창처럼 근접 전투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2] 즉, 검으로 도저히 커버가 불가능한 부분인 대기병 대응력과 중거리 견제를 이 무기로 해결하는 것이며, 군단병은 접근전과 중장거리 공격까지 폭넓게 대응하는 것이 가능했다.[3]
필룸이 최초로 도입된 시기는 산악민족이었던 삼니움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우디움의 평화라 불리는 불명예스런 강화를 해야 했던 기원전 321년 이후다. 이후 삼니움족의 전법을 도입하여 군단병의 전법을 보다 유연하게 개량한 로마군은 여기에 삼니움족과 에트루리아인들이 사용하던 창날 부분이 긴 던지기 창을 새롭게 도입했으며 전체 군단의 4/5의 병사[4]에게 필룸을 장비시켰다.
이후 필룸은 제정 말기에 베르툼이라는 다트로 무장변경하기 전까지 계속 로마군의 제식무장으로 장비된다. 이 베르툼의 경우 표준 규격이 없고 각자 취향대로 만들었는지 무게와 크기가 천차만별이라 무거운 축의 경우 180~200g 정도이고 말이 다트지 정확하게 말하면 대형화살을 손으로 날리는 것과 크게 차이가 안난다. 다트라고 분류할 때는 중다트라고 말해야 할 정도. 어지간한 현대의 DMR 소총이나 경기관총급의 무게인 필룸 하나를 소지할 것을 5~6개씩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투척이 가능해졌으니 화력이 늘었다. 단, 필룸이 가지는 장점인 비상시 1회용 대기병용 창의 역할을 더이상 바랄 수 없게 된 것은 큰 단점이 되었다. 대신 이 부분은 제정시절 파르티아 등과 붙으면서 보강한 원거리 전력과 제정 말기의 기병전력이 커버해 주며, 아예 보병들 자체가 창을 자주 들고 다니며 대기병용으로 사용했다.
2. 종류
필룸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있었다. 가벼운 것은 멀리 던질 수 있었으며, 주로 먼저 가벼운 것을 던져 적의 기세를 누르고, 접근해서 무거운 것을 던져 적이 맞으면 좋고 방패로 막더라도 필룸이 안 뽑히는데다가 걸리적거리고 무거워지기 때문에 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적들의 방어력을 저하시킨 후 글라디우스로 돌격해서 백병전에 돌입하는 것이 로마군의 주 패턴이었다. 물론 양쪽 다 접근전용으로도 사용하는 등 다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훈련되었다.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는 고지대를 이용하여 저지대의 상대에게 필룸 공세를 가하여 유리한 위치에 서기도 했다.
2.1. 개량
공화정기에 알려진 개량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의해 한 것으로, 창날과 손잡이를 고정하는 철못을 목재 리벳으로 바꿨다고 말한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을 입증할 증거가 발견되지 않기에 현재 위 기록의 진위는 알 수 없다.공화정 시기까지는 가벼운 필룸과 무거운 필룸을 가지고 다녔으나, 무거운 것은 점점 가벼워지고 가벼운 것은 점점 무거워져서, 결국 적어도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군들은 중앙에 무거운 추가 추가된 똑같은 모양의 필룸 자루 두 개를 들고 다니게 되었다.
또한 무게추가 하나가 아닌 둘 달린 것도 점차 보이게 되며, 어떤 이유에선진 모르지만 길이가 이전 시기에 비해 약간 짧아지게 된다. 또한, 필룸의 특징인 독특한 창날은 개성을 상실한 채 그냥 뾰족한 송곳 모양으로 변화하게 된다. 가장 마지막 버전의 필룸이 이것인데,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몇 년 전의 오스프리 시리즈에서도 후기 로마군은 벌써 세베루스 황제 이후 시절에서도 필룸을 쓰는 게 보이지 않으나 상대적으로 최근 나온 책에선 이 독특한 필룸이 자주 등장한다.
적어도 율리아누스 황제 때까진 계속 썼던 걸로 보이며, 이후 시기, 즉 동서 로마 분열기라 칭하는 스틸리코 시기 로마군은 필룸 대신 플룸바타[5]로 부르는 마치 현대 스포츠 다트를 크기만 늘려놓은 듯한 짧은 투척 무기를 쓰게 된다. 그러나 당대인들은 이런 작은 투척 무기도 그냥 필룸이라고 자주 불렀다. 영어권에선 다트가 투창 전반을 의미하는 만큼 크건 작건 다트라고 호칭하기도 하니 유럽권에선 딱히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있다.
3. 지급
군단병의 전대인 하스타티와 중반에 있는 프린키페스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모두 소지하지만 후위인 트리알리는 나이에 따른 체력 문제도 있기에[6] 둘 중 하나만 소지해도 되었다.[7]꽤나 위력적인 무기이기는 했으나 일선 병사들은 이 필룸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한 번 던지면 끝인 일회용 무기인 주제에 값이 꽤나 비싼 데다가, 다른 로마군 병장기들과 마찬가지로 병사들이 직접 구입해서 써야했기 때문이다. 가격이 만만치 않은 데다가 1회용이라서 1년에 달랑 3번 받는 빠듯한 봉급(로마의 일반노동자 임금과 동일)으로[8] 자신의 장비를 모두 구매/정비해야 하는 로마 병사의 입장에서 필룸은 돈잡아먹는 괴물인 셈이었다. 거기다 다른 투창이라면 전투가 끝나고 뽑아서 재활용할 여지라도 있지만, 필룸은 명중하면 휘어지거나 부러져서 파손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나마 나중에 공동구매 방식으로 바뀌어서 병사들의 지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더해지기도 했지만, 결국 필룸은 점점 짧아지고 무게도 가벼워지며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플룸바타가 되었다가, 끝내 베르툼 웨루툼이란 다트로 이행하게 된다. 필룸의 후손 격인 이 무기는 동로마군들이 적어도 11세기까지는 자주 애용했고, 중장기병들도 7세기부터는 자주 애용하게 된다. 그전까지 고대 로마 필룸에 비하면 꽤 가볍고 짧아진 콘스탄티누스~테오도시우스 시대의 필룸은 물론 플룸바타도 기병이 활용하기엔 컸으나, 베르툼 단계 이후부터는 로마군 기병도 이 무기를 잘 쓰게 된다.
4. 번외: 필룸 무랄리스
나무의 양 끝을 깎아서 뾰족하게 만들고 중간에 손잡이를 만들어놓은 장병기이다. 가볍고 길어 쉽게 사용할 수 있었기에 진지 방어나 야영지 구축시의 비상용 무기로 사용했다. 그 이름도 '성채용 창'이라는 의미이다.사용법은 던지거나 직접 찌르는 등 다양한 용법이 있었다.
3자루를 합쳐서 묶으면 닌자들이 쓰는 마름쇠의 크기를 늘린듯한 형태가 되는데 이를 바리케이드처럼 쓰기도 했다.
성채용 말뚝 같은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나, 어디까지나 무기이지 도구는 아니었다.
5. 번외: 현대의 필룸
해외 리인액트먼트계에서 로마군은 가장 큰 인기를 자랑한다. 그래서 지금껏 발견된 필룸 종류의 거의 전부를 구입하는 것도 실제로 할 수 있다. 워낙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원조 필룸같이 창목이 휘어지거나 나무 리벳이 부러지는 기능은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 모두 거품을 문다. 리인액트는 재현이지 실전이 아니다. 창을 못 쓰게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필룸 한 자루에 싸게는 99달러에서 보통 150달러 정도 가격인데, 만만한 금액은 아니다.
[1]
여기에 빈틈이 안 보이는 방패를 들고도 상대를 찔러댈 수 있는 검인 글라디우스도 중요한 입지를 가진다. 글라디우스는 칼이 짧기 때문에 초근접전에 매우 유리하다.
[2]
때문에 행군이나 경계근무 시에는 일반적인 창처럼 들고 다녔다.
[3]
이런 탓에 로마군은 장거리 전투원인 궁병의 비중이 생각보다 낮았다. 고대 서양에서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활보다는 투창이나 다트를 많이 사용했다.
[4]
2/5를 차지하는
하스타티와 또 2/5인
프린키페스는 필룸을 장비했고, 나머지 1/5인
트리아리는 일반 장창을 장비했다.
[5]
Plumbata, 이것을 쓰는 병사를 플룸바타리(Plumbatarii)라 불렀다.
[6]
마리우스 개혁 이전 로마군은 나이에 따라서 전위-중위-후위가 결정되었다.
[7]
마리우스 개혁 이전의 트리알리는 가벼운 것 대신 4m쯤 되는 하스타(hasta)로 무장했다. 장창병의 특성상 무거운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8]
도미티아누스가 300데나리우스로 올리고 나서야 동일했지 아우구스투스의 225데나리우스 체계에서는 로마의 노동자보다 더 적은 일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