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클레티아누스의 흉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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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03년 동방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가 주도하고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와 서방 부제 콘스탄티우스 1세가 받들면서 전개된 로마 제국의 마지막 대규모 기독교 박해이다. 수년간의 박해로 기독교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311년 갈레리우스의 관용 칙령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주도 하에 로마는 결국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다.2. 배경
예수의 등장과 12사도, 사도 바울 등의 선교로 기독교가 지중해 세계로 확산된 이래,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껄끄럽고 의심스러운 존재로 여겼고 로마 시민들 역시 기독교인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공공 의례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고대 관습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사회를 증오한다"라고 여겼고, 은밀한 장소에서 만나 예배드리는 행위를 비밀 결사로 간주했다. 특히 로마를 비롯한 지중해 세계의 수많은 신을 헛된 것으로 치부하고 오로지 자기들이 믿는 신만 유일하다고 여기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기독교가 전파된 곳마다 기독교인들이 최후의 만찬 때 "빵은 내 살, 포도주는 내 피"라고 했던 예수의 말을 따라 유월절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눠마시는 것에 대해 "저들은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다"라는 낭설이 나돌았고, 은밀한 장소에 모여드는 것은 '근친상간'이나 '식인'을 즐기려는 것이라는 악의적인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1세기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기독교인들이 사형 도구를 추앙하고 인류를 증오한다며 "부패한 종교"라고 단정지었다.
기독교에 대한 민중의 이같은 반감은 여론을 다른 데 돌림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고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통치자들에게 줄곧 악용되었다. 66년 로마 대화재로 들끓은 민심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피하고 싶었던 네로 황제는 "기독교도가 불을 질렀다"라고 선전하며 그들을 대거 잡아들여 잔혹하게 죽였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살아있는 신을 자처하면서 자신을 신으로 받들지 않는 기독교도들을 본보기로 처형했다. 지방 총독들도 각종 사건이 터지면서 여론이 좋지 않을 때 기독교도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도록 조장했다.
하지만 로마 황제들은 처음 2세기 동안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불법화하는 칙령을 내리거나 총독들에게 기독교도들을 단속하라는 훈령을 내리지 않았다. 110년경 비티니아 총독 소 플리니우스가 기독교도들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 지침을 내려달라고 청하자, 트라야누스 황제는 아래와 같이 지시했다.
로마 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에게 익명의 비난을 무시하라는 구체적인 조언을 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규칙을 정하지 않았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역사가 레너드 L. 톰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기독교인들은 이후로 쫓기지 않았다. 그들은 지방 정부로부터 고발이 있을 경우에만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고발되고 유죄가 확정되면,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로마인들에게 '지고의 황제'로 평가받았던 트라야누스의 이같은 지침은 후대 황제들의 본보기가 되었지만, 모두가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테베레 강의 범람, 파르티아 전쟁, 안토니누스 역병, 마르코만니 전쟁 등 수많은 악재가 터져나오는 상황에서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하고 제국의 단합을 이끌기 위해 올림포스 12신에 대한 숭배 의식을 거행하라는 포고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이 포고령에 불응하자, 여러 지역에서 반 기독교 정서가 폭발하면서 많은 기독교인이 신성모독 또는 '세상을 혐오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마르쿠스는 기독교를 불법화하고 모조리 잡아다가 처형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총독들이 여론에 떠밀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에 이렇다할 제지를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인들에게 사적 재재를 가한 이들에게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로마 장관이자 마르쿠스의 철학 스승이었던 퀸투스 유니우스 루스티쿠스는 당대의 기독교 신학자 유스티누스를 로마 시에서 체포한 뒤 공개 처형했으며, 리옹에서는 현지 총독이 반 기독교 감정이 폭발한 민중의 요구에 따라 무수한 기독교인을 투기장에 보내 짐승의 먹이가 되게 했다. 이러한 박해는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산발적이고 일시적이며 국지적이어서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3세기에 이르러 기독교가 계속 확산되면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무시못할 정도로 불어나자, 황제와 지방 관리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202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로마 시민이 유대교나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235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를 죽이고 황위에 오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잡아다가 처형했다. 250년 1월 데키우스 황제는 모든 신에게 특정일까지 제물을 바치라는 칙령을 반포하고, 이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 '사회 질서를 해치는 범죄자'로 취급해 탄압했다.
257년,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251년 데키우스 전사 후 중단되었던 데키우스의 칙령을 되살리면서, 성직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신자들이 매장된 곳을 방문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258년에는 복종을 거부한 성직자, 원로원 및 기사계급의 평신도들을 처벌하고 계속 믿음을 버리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명예와 재산을 박탈하고 법을 어긴 정도에 따라 추방, 강제노역, 또는 처형한다는 내용의 2번째 칙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사산 왕조군에게 붙잡히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박해는 중단되었고,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갈리에누스는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돌려주고 기독교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관용 칙령을 반포했다. 그 후 로마 제국은 40여 년간 기독교도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를 가하지 않았다.
284년 11월 20일 황제로 선포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다신교 숭배를 확고히 지지했으며, 이 고대 종교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는 자신을 로마 판테온의 수장인 유피테르와 동일시했고, 공동 정제인 막시미아누스는 헤라클레스와 연관되었다. 신과 황제 사이를 연결시키는 작업은 최고 권력을 쟁취한 것이 신의 뜻이라는 걸 만방에 알림으로써 누구도 황제에게 감히 대들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해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유피테르와 헤라클레스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섬겨지던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호의를 누렸다. 그는 로마의 이시스와 세라피스 신전, 코모의 무적의 태양 신전 건설을 허가했다. 또한 276년부터 395년까지 북아프리카의 이교도 사원들의 재건과 관련된 모든 비문의 약 1/4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치세에 세워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전의 아우구스투스와 트라야누스처럼 자신을 "세계를 복원한 자"라고 칭했다. 그는 대중들이 자신이 창조한 정부 체계, 즉 사두정치를 전통적인 로마 가치의 회복과 황금 시대의 부활을 이루려는 시도로 여기도록 유도하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로마로 돌아가는 것보다 3세기의 위기가 다시는 재현되지 않도록 황제 중심의 정치체계와 확고한 질서를 세우기를 희망했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화폐, 세금, 건축, 법률, 국방 등 사회 전반의 모든 측면을 대대적으로 재구성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모든 제국민의 단결과 통합이었다. 그는 295년 다마스쿠스에서 로마 법에 위배되는 결혼을 금지한다고 선언하는 칙명을 발표하는 등, 모든 신민이 로마법에 맞춰서 일괄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거슬리는 존재는 바로 기독교였다.
갈리에누스의 관용 칙령 이래로 급속도로 늘어난 기독교도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에 이르러 전체 인구의 10%에 달했다. 이전에는 도시에 주로 있을 뿐 시골에는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이 시기에는 시골 곳곳에 기독교도가 나타났다. 또한 1~2세기에는 은밀한 장소에서 열렸던 교회는 이 시기엔 공개 장소에 떡하니 등장했다. 특히 니코메디아에서는 기독교 교회가 황궁 앞 언덕을 차지했다.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지의 일부 지역에서는 기독교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동안 기독교도들에 대한 뜬 소문을 덮어놓고 믿던 하층민들은 3세기의 위기 때 당국이 신경써주지 않는데 비해 기독교인들이 자발적인 자선과 봉사 활동을 베푼 것에 감화되었고, 이제는 기독교인들을 별로 적대시하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통치를 시작한 이래 19년 동안 기독교도들에게 이렇다할 탄압을 가하지 않았다. 에우세비우스는 박해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들이 관리와 군대 등 모든 정부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심지어 '궁정 청년' 베드로처럼 황제의 직속 비서로 발탁된 기독교인도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기독교 사학자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아닌 갈레리우스를 박해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다신교를 신봉하면서도 기독교인에게도 관용을 베풀었지만, 갈레리우스는 어머니가 조직한 축제에 기독교도들이 참석하지 않고 비판을 가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 관료였던 락탄티우스는 노년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갈레리우스의 강력한 주장에 버티지 못하고 박해를 단행했다고 주장했다.
학계에서는 박해의 원인을 갈레리우스에게 돌리는 이 주장이 옳은 지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스타드는 락탄티우스의 기록과는 달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오랫동안 계획한 대로 박해를 단행했다고 주장했다. 20여 년간 제국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질서를 확립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을 갖추고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울 줄 알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부황제에게 휘둘릴 정도로 나약할 리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락탄티우스의 주장을 무효로 할 만큼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반론을 펴는 학자들도 여럿 있으며, 갈레리우스가 박해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수락해 박해를 단행했을 것이라는 절충론도 제시되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는 40여 년간 평온하게 지내며 세력을 확장하던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단행한다.
3. 전개
3.1. 박해의 시작
296/297년 겨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는 시리아 안티오키아에서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점을 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사제들은 이렇다할 신탁을 얻지 못했고, 그 원인을 외부인들의 영향으로 간주했다. 락탄티우스에 따르면, 실제로 황실 수행원들 중 일부 기독교인이 행사 도중 성호를 그었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하며 모든 신하에게 희생제에 참여하라고 명령했고, 뒤이어 갈레리우스와 더불어 모든 군인이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 하며 이를 거부한 자는 즉시 군대를 떠나라는 칙령을 전군 사령관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몇몇 기독교인이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군대에서 쫓겨났지만,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 일이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언젠가는 기독교인들을 손봐줘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1]301/302년 겨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집트를 방문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곡물을 로마에 배급하는 사업을 이끌었다. 이때 아프리카 총독으로부터 마니의 추종자들이 활개치며 사산 왕조를 위해 암약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302년 3월 31일 마니교 지도자들을 그들의 신성한 책과 함께 산 채로 불태워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마니교를 믿은 귀족들은 마르마라 해 프로콘네 섬 광산이나 페노의 광산으로 추방하고 전 재산을 국고에 귀속하도록 했다.
302년 8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는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희생제에 참석했다. 이때 로마누스라는 이름의 집사가 "거짓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짓을 그만하라"며 큰 소리로 비난했다. 그는 체포된 뒤 갈레리우스에게 화형을 선고받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 형벌을 혀를 자른 후 몽둥이로 집단 구타해 죽이는 것으로 변경했다. 락탄티우스에 따르면, 이 시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 사이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정책을 어떻게 할 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인들이 국가 기관과 군대에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고, 갈레리우스는 그들의 완전한 파괴를 주장했다. 그들은 디디마에 있는 아폴로의 신전에 전령을 보내 신탁을 받게 했다. 그들은 곧 신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답신을 받았다.
지구상의 불순물이 아폴로의 조언 능력을 방해하고 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도들이 너무 많이 퍼져서 아폴로 신의 뜻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것이라 여기고, 갈레리우스가 원하는 대로 대대적인 박해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3.2. 첫 번째 칙령
303년 2월 23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니코메디아의 교회를 파괴하고 그 안에 보관된 성경을 불태우고 재산을 몰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른바 '첫번째 박해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는 이 칙령에서 기독교의 신성한 글, 전례서, 제국 전역의 사원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으며,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위해 모이는 것을 금지했고, 그들이 법정에 갈 권리와 법정에서 그들에게 취한 행동에 대응할 권리를 박탈했다. 또한 기독교를 믿은 원로원 의원, 기사계급, 시민들은 계급을 박탈당하며, 해방노예들은 다시 노예가 되었다. 이 포고령은 니코메디아 광장에 비치되었는데, 에벤티우스라는 인물이 이를 갈기갈기 찢었다가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화형에 처해졌다.락탄티우스에 따르면, 갈레리우스는 제물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산 채로 불태워버리라고 요구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처벌을 어느정도 제한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지 판사들은 사형 문제가 자신들의 권한 내에 있으면 가혹한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을 산 채로 불태워버리라는 갈레리우스의 권고는 제국의 동방에서 기독교인들을 처벌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칙령의 집행이 시작된 것은 3월로 추정되며, 북아프리카에서는 5월 또는 6월에 칙령을 받았다.
3.3. 후속 칙령
303년 여름 멜리테네와 시리아에서 기독교들의 봉기가 발발했다가 진압되고 니코메디아 황궁 일부가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에 휩쓸린 직후, 모든 주교와 사제들의 체포를 명령하는 두 번째 칙령이 발표되었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이 칙령으로 인해 제국의 감옥들이 수많은 사제들로 넘쳐났으며, 일반 범죄자들은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후 303년 11월 20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세 번째 칙령을 발표했다. 기독교를 배교하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에 동의한 모든 수감된 사제는 석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감옥에서 나오기를 원한 많은 사제들이 제물을 바치고 풀려났지만, 일부 사제들은 끝까지 거부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경비병들은 종종 형식적인 동의만으로 죄수들을 풀어준 것 같다. 에우세비우스는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한 사람이 감옥에서 끌려와서 외부인에 의해 오른 손을 잡힌 채 제단으로 인도된 뒤 악하고 부정한 제물을 그 오른 손에 억지로 찔러 넣었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가 제물을 바쳤다고 증언했고, 그는 조용히 떠났다. 한편 반쯤 죽은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버려졌다가 제사를 드린 사람들과 함께 결박에서 풀려났다. 이때 그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나는 제사에 찬성하지 않는다"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그의 입을 때렸다. 배정된 군중은 그가 제사를 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조용히 시키고 밀어냈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부터 배교의 증거 하나라도 얻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304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네 번째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모여서 로마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하며, 이를 거절한 자는 현장에서 처형되었다. 칙령의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304년 1월 또는 2월로 추정되었다. 이 칙령은 발칸 반도에서 3월에, 테살로니카에서는 4월에, 팔레스타인에서도 4월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막시미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 1세가 관할하는 서부 로마 일대에서는 이 칙령이 적용되었는지에 대해 알려진 바 없다.
3.4. 디오클레티아누스 퇴위 후의 박해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했다.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1세가 정황제(아우구스투스)로 등극했으며,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부황제(카이사르)가 되었다. 이후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 주도하에 기독교 박해가 진행되었다. 교회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사제가 피살되거나 유배되었으며, 군대와 관료 내부의 기독교도들은 숙청되었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이 당시 셀 수 없이 많은 배교자가 있었다고 한다.이렇듯 동방에서는 강력한 박해가 실시되었지만, 서방에서는 박해의 강도가 약했다. 막시미아누스가 통치를 맡고 있던 시절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로마, 스페인에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지만,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한 후 그 지역을 관할한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막센티우스에게 피살된 후 정치적 공백이 발생하면서 박해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한편 콘스탄티우스 1세는 교회를 불태우고 재산을 몰수한 것 외에는 기독교도들을 심하게 박해하지 않았다. 이러한 미적지근한 반응은 서방에는 기독교도들의 교세가 동방에 비해 미약했기에 기독교도들에게 이렇다할 위협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아버지 사후 황위에 오른 뒤 아버지가 빼앗았던 교회 재산을 기독교도들에게 돌려줬다.
3.5. 종결
311년 4월 30일,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던 갈레리우스는 박해를 중단하고 기독교인들이 자유롭게 집회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관용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의 서문에서는 제국의 통치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어떤 원칙에 따라 인도받았는지, 즉 국가의 이익과 선에 대한 열망, 조상의 법에 따라 살고 싶은 열망, 그리고 광기로 여러 민족을 오염시킨 기독교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길로 되돌리고 싶은 열망 등에 대한 설명이 기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며, 순종한 사람들은 형벌이 두려워 그렇게 했고 많은 사람이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갈레리우스는 이에 따라 자비를 베풀어 기독교인들이 질서를 어기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집회를 조직할 수 있게 하도록 허용했다.락탄티우스와 에우세비우스는 갈레리우스가 죽음의 공포로 인해 입장을 바꿨다고 주장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많은 역사가들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보다는 사두정의 내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려는 정치적 동기가 주된 이유였을 거라고 해석한다.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의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는 건 동의했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 달 후 갈레리우스는 온 몸이 썩어가는 증세를 보이다 사망했고, 동방의 단독 황제가 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갈레리우스 칙령을 무효화하고 기독교 박해를 이어갔다.
312년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해 서방의 최고 권력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2월 발칸 반도의 지배자인 리키니우스와 논의 끝에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밀라노 칙령을 합의했다.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꺾고 동방의 단독 황제로 우뚝 선 뒤 313년 6월 13일 니코메디아에서 모든 동방 총독에게 이 칙령을 하달했다. 이리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시작한 기독교 박해는 종결되었다. 훗날 리키니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갈등을 벌이면서 기독교 박해를 일시적으로 재개했지만, 324년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를 꺾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된 후 기독교는 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잡았다.
4. 영향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로 인한 기독교인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이집트에서 하루에 수십 명의 기독교인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티모시 반스가 찾아낸 고대 사료에 따르면, 303년에서 311년 사이에 660명의 기독교인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4세기 초에 이전 박해로 야기된 문제를 다루었던 지방 공의회 문서 등 간접 자료를 통해 피해 규모를 판가름하고 있다. 이 공의회의 주요 의제는 배교자를 어떻게 다룰 지에 대한 것이었다. 동방에서 배교의 주된 형태는 희생제를 드리거나 향을 피우는 것이었다. 314년 안키라 공의회에서 죄의 유형에 따라 배교자들이 기독교 공동체에 재가입하기 위한 다양한 보속을 다룬 10개 조항이 결정되었다. 반면, 거의 같은 시기에 열린 아렐리 공의회에서는 제사 또는 향을 배교의 형태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서방에서는 박해가 일찌감치 끝났기 때문에 이에 관한 징계는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대신, 성경이나 '신성한 그릇'을 박해자에게 넘겨주거나 형제의 이름을 밝힌 자들을 받아들일 지의 문제가 논의되었다.배교했다가 교회로 돌아온 이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장 거세게 제기된 지역은 북아프리카였다. 교황 측에서 배교자가 엄숙한 참회를 한 후 다시 영성체를 할 수 있게 하였으나, 카르타고의 주교 도나투스는 배교자들이 영성체를 한다면 성령이 강림하지 않을 거라며 반발했다. 이에 동조하는 이들의 소요가 일어나자,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개입해 재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첫번째 재판 결과 도나투스파가 패했다. 이에 도나투스가 항소했고, 아를 협의회가 카르타코로 들어와 도나투스의 주장을 검증한 뒤 협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도나투스파는 협상안이 가톨릭에게 유리하다고 여기고 이를 거부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평화를 위협하는 이에 대한 사형과 도나투스파 재산 몰수를 명령해 많은 도나투스파가 추방되고 몇몇은 사형당했다. 그러나 교외에선 여전히 세력을 떨쳐 교회 봉합은 실패하였고, 이들을 이단시하는 법률이 발렌티니아누스 1세때 제정되었다.
5. 후대의 평가
4세기 이후 기독교 역사학에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인해 희생된 순교자 숭배가 갈수록 확산되었다. 교황의 전기를 모은 <Liber Pontificalis>는 박해가 시작된 직후 사흘 만에 17,000명이 피살되었다고 주장했다. <성도들의 삶>의 저자는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즉위 때부터 '순교자의 시대'를 연대기 순으로 다루었다. 이 책에서 적힌 이들 상당수는 박해에서 살아남았지만 순교자로 조작되었고, 실제로 순교한 이들의 생애 역시 미화되었다. 현존하는 순교 사례 중 로마의 아그네스, 성 세바스찬, 펠릭스와 아닥투스, 마르첼리누스, '궁중 청년' 베드로와 관련된 기록만이 역사적 타당성이 어느 정도 있다는 평을 받는다.에드워드 기번은 이러한 점을 근거 삼아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재난의 규모를 지나치게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초기 기독교가 로마의 전통적인 기반을 훼손하여 사회의 건전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했다.[2]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기독교 전통에 의해 대박해가 과장된 건 사실이지만, 박해 규모가 상당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본다. 영국 역사가 윌리엄 프레드는 박해받은 피해자를 3,000 명에서 3,500명으로 추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