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0대 황제
프로부스 PROB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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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Marcus Aurelius Probus |
출생 | 230년 ~ 235년 사이 |
로마 제국 판노니아 시르미움 | |
사망 | 282년 9월 (향년 50세) |
로마 제국 판노니아 시르미움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76년 6월 ~ 282년 9월 (6년 3개월) | |
전임자 | 플로리아누스 |
후임자 | 카루스 |
부모 | 아버지 : 달마티우스 |
자녀 | 도메티우스, 폼페이우스 프로부스[1] 외 이름 미상의 자녀들 |
종교 | 로마 다신교 |
프로부스의 칭호 | |
제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 (즉위 당시)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즉위 후 제호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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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40대 황제. 순수 군인 출신 황제임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도미나투스(전제정)와 다른, 전기 로마제국의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에 따라 제국을 통치한 사실상의 마지막 임페라토르다. 따라서 그의 치세는 로마 원로원과 백성들에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원로원과 로마 시민권자들의 권위와 권익 보호를 오랜만에 제대로 지킨 시대였다고 극찬을 받았다.즉위 전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황제가 된 이후 취한 존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Probus Augustus), 이후의 새롭게 바꾼 황제로서의 최종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Probus Pius Felix Invictus Augustus)이다.
오늘날의 세르비아 출신으로 판노니아 일대에 살던 농부(혹은 로마군 하급 장교) 달마티우스의 아들로 태어나 성인이 된 직후부터 로마군에 입대해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상당히 어린 나이부터 군행정, 군사적 능력과 실적만으로 승진을 거듭했고, 이를 눈여겨 본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직접 장군으로 발탁해 또래 군인 출신 장교들보다 일찍 부대 지휘관이 됐다. 이후 그는 갈리에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276년 7월 타키투스가 병사하자 플로리아누스를 제압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6년 동안 게르만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내부 반란을 모조리 제압했으며, 원로원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정치적 안정을 이뤘다. 재위 내내 전쟁과 외세의 침략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은 속주 재건에 상당히 노력했다. 전쟁 기간 중에도 서방 일대의 국경을 재정비하고 하드리아누스 방벽 재건 등을 하면서, 농촌 사회 재건과 무너진 서방의 경제, 사회 재건에 힘을 썼다. 이때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토목 공사를 실시했고, 그의 치세기동안 나일강, 다뉴브 강 정비사업, 이집트 일대의 신전, 다리, 공공건축물 보수 공사 등이 활발히 진행됐다. 따라서 프로부스 치세기는 이후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속주 경제, 사회 재건 사업에 큰 토대가 됐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국가 재건 정책들은 병사들에게 일방적인 명령과 그들의 희생 아래 진행됐다. 따라서 사산조 페르시아 정벌을 위한 전쟁 준비 도중, 토목 공사에 동원된 군인들의 폭동으로 어이없게 살해되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프로부스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230년에서 235년 사이에 일리리아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에 따라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속주민 출신 로마인들처럼 프로부스의 본명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인 점을 생각해보면, 조부 혹은 부친 시절에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발칸반도 태생 로마인이 확실하다. 알렉산드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프로부스는 232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대제 시절의 로마 최고위 행정관료이자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프로부스 황제 아버지의 이름은 달마티우스라고 한다.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아 분명하지 않지만, 프로부스는 일리리아의 건실한 로마인 농민 가정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성년이 됐을 시기인 250년대에 군대에 입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료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어린 병사였던 프로부스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그를 군단 하위부대 지휘관에 임명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부스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인 승진으로 군 사령관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프로부스는 일리리아 속주 국경 일대에서 사르마티아인들과 전투를 치르는 내내 승리를 거뒀다. 따라서 얼마 안 가 황제와 로마군 전우들에게 자신의 진가를 여실히 보여줬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의문을 표한다. 왜냐하면 쌩농부 아들이 입대 후 시찰나온 황제 혹은 명문귀족 출신 원로원 고위직 사령관에게 곧바로 눈에 들어, "이 청년 능력이 병졸답지 않게 군계일학이구먼"이라며 뜬금없이 연줄도 없는 병사를 특급승진시켜주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고대 로마 사회 집단 중 가장 현실적이고 실력위주 집단이었고, 평민 출신들이 상류층이 되는 출세코스였다고 해도, 기록상 프로부스처럼 병사가 하급지휘관에 임명됐다가 서른도 안 되어 장군까지 꿰차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오른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처럼 부모와 친인척까지 죄다 쌩평민인 경우에도 공화정 말 ~ 원수정 초 시기동안 간혹 파격승진을 거듭한 특출난 천재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내전 기간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아그리파가 기회를 잡고 고속승진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집안이 예전부터 카이사르 가문과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은 클리엔테스였기 때문이다. 실제 아그리파가 로마 사회에서 출신배경부터 서로 접점이 없던 카이사르누나의 외손자 옥타비아누스와 친구가 된 것도 카이사르가 그를 자신의 막사로 직접 불러 친구로 소개하고, 아폴로니아로 함께 유학보내면서 시작됐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아버지 달마티우스는 과거 농부로만 알려져 있다고 해도, 의외로 발레리아누스 휘하의 하급장교 출신이라는 의견도 있다. 당장 프로부스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 확실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프로부스가 죽은 뒤 그 자녀와 가족들이 불안한 로마를 떠나 가문의 근거지인 베로나와 이탈리아 시골로 떠났다는 말이 있기에 의외로 프로부스가 속주에서 태어난 쌩 속주민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보통은 프로부스의 부친 달마티우스 직업을 현재까지는 농부로 보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하급장교를 거쳐 퇴역 후 주둔지 근처에서 농부가 된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점은 프로부스가 고속승진하고 로마군 실력자가 된 것은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치세때였다. 이때 그는 일리리아 태생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같은 장교들과 함께 치열했던 일리리아 일대 방어선을 담당하며 뛰어난 군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갈리에누스 암살 이후에도 프로부스는 로마군 장군으로 있으면서 실력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그는 일리리아계 군인황제들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우수한 군 사령관으로서 활약했다. 특히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로마 재통합 전쟁에서 팔미라 제국을 정복할 때, 별동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해 단숨에 평정함으로써 팔미라 제국의 배후를 없애버리고 밀이 공급되지 않아 곤경에 처해 있던 로마를 구원했다.
275년 9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비서 에로스와 마찰을 빛다가 에로스의 농간에 속은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프로부스는 이미 명망높은 군인 이상의 군부 내 최고 거물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그의 역량과 명성은 이미 아우렐리아누스와 비슷했고, 일리리아 방어선 일대에 있을 때부터 병사들의 신망이 상당했다. 하지만 프로부스는 어찌된 일인지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황제의 갑작스런 사망에 충격받아서 황위에 오를 야심을 품을 겨를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아직 황제를 칭하기에는 동료들의 지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시르미움에서 열린 긴급 군사회의에서 원로원에 차기 황제 선출을 맡기자고 결의했을 때 프로부스도 동의했다는 것이다. 제위 공백 9개월 후, 원로원의 추대로 황위에 오른 타키투스 황제는 프로부스를 동방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외적의 침략을 경비하게 했다. 이후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알 수 없지만, 그가 동방 국경을 책임지는 동안 제국 동방이 평온했다고 한다.
2.2. 황제
2.2.1. 제위 등극
276년 7월 타키투스 황제가 열병에 걸려 카파도키아 남부에서 사망했다.[2] 이때 타키투스의 이부 동생인 플로리아누스는 근위대장 신분이었는데, 그는 근위대 지휘권을 이용해 소아시아 원정군의 수뇌부를 장악한 다음 제위 계승을 선언했다. 근위대를 등에 업은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원로원에 종용했고 원로원은 일단은 플로리아누스를 새 황제로 인정했다.이렇게 플로리아누스가 제멋대로 황제를 참칭하자 제위계승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전방 군단들이 즉시 반발했다. 특히, 어느 정도 내막을 알고 있던 동방 주둔 로마군들이 가장 크게 반발해, 타키투스 황제의 다음 서열은 야전군 총사령관 프로부스라고 주장했다. 이때 프로부스는 국경방어와 치안 뿐만 아니라 오랜 내전과 전쟁으로 망가진 동방 속주들의 평화와 질서유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부하들에게 옹립됐다는 말을 듣자마자 급히 자신의 뜻이 담긴 서한을 원로원에 보냈다.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와 타키투스 아래에서 엄청난 군공을 두루 세운 장군으로 명성이 대단했고,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교양을 갖추고 있어 원로원은 그를 좋아했다. 따라서 그가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뜻을 편지로 전달했을 때, 원로원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면서 프로부스를 즉시 타키투스 후임 황제라고 선포하고 아예 황제로 승인해줬다. 아무리 타키투스 황제가 원래 원로원 쪽 인사였고 플로리아누스가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었다고 해도, 야전 출신도 아닌 주제에 찬탈자들이 흔히 하던 것처럼 근위대로 협박하며 지지를 강요하니 플로리아누스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원로원은 차라리 군인이어도 자신들을 존중하는 프로부스가 훨씬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되니, 플로리아누스는 당연히 반발했고, 그는 로마 제국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게르마니아 일대 로마군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시리아 코일레 속주의 주도 안티오키아로 진군했다. 이 도시는 프로부스가 머무는 도시 중 하나로 프로부스군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부스는 일전을 치르기 위해 진격한 플로리아누스 측과 정면대결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제국의 다양한 환경에서 오랜 전쟁 경험을 가진데다,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군사적 역량이 뛰어난 아우렐리아누스보다는 못해도, 그에 버금가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용장이었다. 그래서 경쟁자의 실력은 극과 극이었는데, 이런 현실에도 전력상 프로부스군은 플로리아누스군보다 열세였다. 하여 그는 플로리아누스 측이 근거지로 쓸 수 있는 이탈리아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아이깁투스를 장악하면서 곡물 수출입을 통제하는 조치와 동시에, 병력을 게릴라 전술로 운용해 플로리아누스군을 괴롭혔다.
게르마니아의 추운 날씨에 익숙했던 플로리아누스의 로마군은 덥고 건조한 소아시아에 적응하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열사병에 걸렸다. 병사들은 오랜 세월동안 뛰어난 군공을 세우며 명성을 쌓은 프로부스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상황은 안 좋게 흘러갔다. 이렇게 상황이 흐르자 플로리아누스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프로부스는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2.2.2. 반역자 처벌
프로부스는 상술했듯 공통분모가 많은 아우렐리아누스처럼 군사적 역량, 공훈은 당시 로마군 최고 수준급의 순수군인 출신 장군이었으며,[3] 교양적인 측면과 정치, 행정 능력 등 통치술은 아우렐리아누스보다 훨씬 뛰어났다. 따라서 제국의 모든 군대가 단독황제가 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음에도 곧바로 원로원에 전갈을 보냈다. 이때 프로부스는 원로원에게 경의를 표하며 자신이 황제를 칭한 것은 부하들의 억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라고 밝히고, 자신은 황위에서 물러날 테니 원로원이 다른 사람을 황제로 추대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원로원은 이런 프로부스의 말에 고마워 하면서 그를 재차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제로 인정했다.유일한 황제가 된 프로부스는 로마로 돌아온 직후, 아우렐리아누스와 타키투스를 살해한 이들을 관용으로 용서하지 않고 모조리 처벌했다. 이는 원로원, 군부, 민중들이 모두 원한 조치이기도 했지만, 조시무스에 따르면 아주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황궁, 원로원, 근위대, 군대 곳곳에 있었고 정의를 가장하고, 민중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버티고 있어 아우렐리아누스, 타키투스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다고 해도 큰 처벌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프로부스는 과거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하드리아누스 같이 교묘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으로 아우렐리아누스를 암살하거나 반역한 자들, 타키투스에게 반역을 일으키고 원로원 안에서 쪽수로 밀어 붙이는 위험인물들을 일망타진했다고 한다. 새 황제는 먼저 그들을 황궁 내의 요직에 임명해, 한 곳에 몰아 넣었다. 물론, 이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좋은 자리를 주고 앞으로 중용할 수 있다는 제스쳐를 취해 그들이 반란을 모의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프로부스는 그들을 황제가 여는 연회에 초대했다.
살생부에 오른 이들은 모두 황제의 친구라는 타이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어서, 혹은 황궁 요직에 배치된 터라 강제로 연회에 참석해야만 했다. 초대를 받은 사람이 모두 모이자, 프로부스는 황궁 내 연회장이 내려보이는 발코니에 올라 연회 축사를 낭독했다. 이는 근위대에게 보낸 몰살 신호였다. 따라서 프로부스의 신호에 맞춰 근위대는 제국의 계속된 불안을 가중시킨 위험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때 살생부 명단 내 최상단에 오른 단 한명은 죽이지 않고 체포 후 연행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를 모두가 보는 가운데 단죄하고, 산채로 화형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따라서 이 사건 직후 로마인들은 프로부스가 마침내 정의를 실현했다고 환호했다.
2.2.3. 게르만족과의 전쟁과 제국 재건
이렇게 군대와 원로원 모두의 지지를 얻은 프로부스는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후 혼란을 틈타 제국 서방의 중심부인 갈리아 전역을 약탈하고 있던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등 게르만족들을 서둘러 토벌하러 277년 출정했다. 갈리아를 침략한 게르만족들은 이미 부유한 갈리아 일대의 70여개 도시들을 점령하고 갈리아 일대의 농경지들을 황폐화시킨 터라 프로부스는 일년 가까이 전투를 치렀다. 이때 프로부스는 라인강 서쪽 일대에 새로이 요새들을 쌓고 뚫린 라인 방어선들을 재정비했으며, 자신에게 복종한 게르만 청년 1만 6천 명을 로마군에 입대시킨 후 이들을 50~60명 단위로 나눠서 제국 전역에 분산시켰다. 또한 그는 다뉴브 강을 도하하여 발칸 반도에 침입한 고트족을 무찌르고 고티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조시무스에 따르면 278년, 프로부스는 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니족과 롱기오네스족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끝에 격퇴했고, 그가 파견한 장군들은 프랑크족을 격파했다. 그는 거침없는 공격전술과 추격전을 펼쳐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일부 자료에는 그의 군대가 게르만족 40만 명을 학살했다고 하지만 역사학계는 이것을 과장으로 간주하고 있다. 갈리아에서 게르만족을 격파한 프로부스는 여세를 몰아 라인 강을 건너 여러 부락들을 불태우고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이후 프로부스는 라이티아, 판노니아 일대로 처들어온 반달족, 알레만니족 등 제국 각지의 반역자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황제는 여러 전투 중 단 한개만 다른 사람에게 맡겼는데, 두 번의 큰 전투 중 프로부스가 담당한 게르만족과의 전투는 완벽한 승리였다. 그리고 여러 전투를 치르는 내내 황제와 로마군은 기근으로 군량미까지 부족해진 상황에서 모두 이를 이겨내고 승리했다고 한다.
이렇게 서방 일대를 안정화시킨 프로부스는 트라키아 지방의 황폐화된 변경 지대에 야만인 포로나 도망자를 정착시켜 새로운 식민 도시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러시아 남부 일대에서 다른 게르만 군대의 공격, 식량난 등으로 로마 국경까지 밀고 내려오던 게르만족의 분파 바스타르나이족 10만명을 로마 국경 내 트라키아 황무지에 살도록 해줬다. 게르마니아에서 붙잡은 포로들과 그 가족들에게 자유를 주는 대가로 황폐해진 브리타니아로 보내 이곳을 일구게 한 것도 프로부스의 작품이었고,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일대의 농촌 부흥, 광산 사업 재개 역시 프로부스가 붙잡은 게르만 부족민들에게 로마인이 될 자유를 주는 대가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이때 프로부스는 과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러했듯 이들에게 땅, 가축, 농기구, 기타 유인책을 주고, 이들의 자녀들을 로마인으로 만들어 그들이 장차 제국에 로마군에 복무할 군인의 재목을 길러내길 기대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이후 로마 제국의 국경 방어와 지역 복구에 큰 도움을 줬다.
프로부스는 소아시아 남부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던 게르만족들을 토벌한 뒤, 전역한 퇴역병들과 그 가족들을 새로 건설될 식민도시에 정착하게 했다. 이런 제국 재건 정책들과 동시에 그는 군대를 수차례 동원해 갈리아, 판노니아 및 기타 지역에 끊임없이 '유익한 노동'을 부과함으로써 군대의 일탈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집트에 주둔할 때는 식량의 원활한 공급망 재건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나일 강의 준설 공사를 했다. 또 갈리아와 판노니아에서는 구릉 지대에 포도밭을 일궜다. 이처럼 프로부스는 전쟁에만 힘을 쏟던 인물이 아니라 행정가로서도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면서 오랜 내란과 외침으로 황폐해진 제국과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자 했다.
280년 보노수스, 율리우스 사투르니누스, 프로쿨루스가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지만, 프로부스에 의해 모조리 진압되었다.
서기 281년, 프로부스는 로마에서 수많은 외적과 반역자들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것을 기념하는 개선식을 개최했다. 이때 프로부스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포로가 된 이들을 검투사 경기에 투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날 80명의 검투사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조리 체포되었고, 프로부스는 그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2.3. 암살
프로부스는 서방에서 거둔 훌륭한 공적을 기념하는 개선식을 마친 후, 즉위 전까지 담당한 동방 문제를 완전히 끝내고 싶어했다. 따라서 서기 282년, 프로부스는 모든 동방 일대의 안전을 위협하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정벌에 착수했다. 이때 그는 정벌을 위한 전쟁 준비에 착수하던 중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시르미움을 원정 중 처음으로 들릴 도시로 정하고 행군했다.그해 8월, 프로부스는 군대를 동원해 시르미움 근처의 습지를 메꾸고 배수로를 건설하는 공사를 실시했다. 평시에도 군사훈련을 실전같이 강하게 실시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불만은 계속되는 토목공사 투입으로 인해 높았다. 그러던 중에 병사들은 무더운 여름날에 황제의 질책을 받아가며 습지를 메꾸던 중 자신들이 왜 이런 고생을 하냐며 불만을 품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티아에서 자신들의 처지에 분통이 폭발한 병사들이 무기를 집어들고 폭동을 일으켰다.
반란 참가자들은 프로부스의 엄격한 훈련방식에 불만을 표출하면서 원로원 의원 출신의 근위대장 마르쿠스 누메리아누스 카루스를 황제로 선포한 뒤[4], 프로부스가 있던 시르미움 배수로 공사 현장으로 전갈을 보냈고 시르미움 일대의 병사들에게도 그 뜻이 전달됐다. 예상대로 시르미움 주둔 병사들은 그동안 쌓인 설움과 불만이 폭발해 무기를 들고 반란에 동참했다. 뒤늦게 위험을 깨달은 프로부스는 작업 감독을 위해 세워진 높은 탑으로 피신했지만, 그 탑은 곧 병사들에게 허물어졌고 프로부스는 수많은 창과 칼에 찔려 사망했다. 그 후 새 황제가 된 카루스는 프로부스를 죽인 병사들을 처형하고 프로부스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2.4. 사후 이야기
프로부스 이후 집권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대제 아래에서 작성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원로원은 프로부스가 어이없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침통해 했다고 전한다. 이는 다른 고대 기록들도 비슷하게 서술되어 있다. 왜냐하면 로마 원로원은 프로부스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제국 각지의 로마인 모두도 그를 무척 존경했기 때문이다.프로부스는 군인 황제 시대의 대표적인 '순수 군인' 출신 로마 황제임에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이후 황제 중 치세 기간 내내 로마 원로원의 헌법적 권위를 엄격히 유지한 황제였다.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네르바 안토니누스 왕조 황제들처럼 군을 이끌고 승리할 때마다, 원로원에 꼬박 꼬박 승전 보고서를 보내면서 원로원에게 승인 여부를 물었다. 황제의 모든 승리는 늘 황제 본인과 로마 원로원의 이름으로 정식 보고됐다. 그의 치세기 동안 황제가 음모를 꾸며 정적을 숙청한 일이 없었다. 이런 시기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이후 처음이었다.[5] 이렇게 행동한 세베루스 왕조부터의 로마 황제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그래서 병사들의 폭동으로 프로부스가 어이없게 피살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로원은 큰 충격에 빠졌다. 원로원과 정부의 발표를 들은 로마, 이탈리아, 제국 각지의 로마인 모두 로마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준 황제가 어이없게 암살됐다고 이야기를 듣자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원로원과 민중들은 이날 카루스가 새 황제로 선포됐다는 소식도 이때 함께 들었다. 이때 원로원과 로마인 모두는 "카루스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선량한 황제가 될 것이지만, 항상 악습에 젖어 있는 불량한 성품의 아들 카리누스가 걱정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프로부스는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도메티우스, 폼페이우스 프로부스, 이름 미상의 자녀들을 뒀다고 한다. 프로부스 죽음 소식을 듣자 유가족들은 병사들 손에 프로부스가 어이없게 죽었다는 점에서, 귀환할 군대 혹은 새 황제 가족들이 자기들에게 반드시 보복할 것이라고 생각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한다[7]. 이는 '프로부스의 생애' 편에서 황제와 저자들에게 프로부스의 아들 중 하나인 폼페이우스 프로부스와 그 아들 및 조카들이 황궁 집무실,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탕 등에서 직접 증언한 내용이기에, 사실로 평가받는다. 어쨌든 프로부스 가족들은 프로부스 죽음 소식이 전해진 직후 로마를 떠나, 그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이탈리아 베로나로 이주했다고 한다[8]. 또한 그들은 이탈리아 베로나 근처와 이탈리아 각지에 여러 가묘, 기념물을 사비를 털어 설치했다고 한다. 이는 프로부스의 명예회복 절차로 진행된 노력이었는데,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프로부스라는 사람은 큰 존경을 받은 황제이자 애국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효과가 있었던 듯 하다. 이는 황제에게 반기를 든 병사들 외의 근위대, 군대도 생각이 비슷해 큰 반발이 없었다. 더군다나 프로부스 가족들은 타키투스나 카루스 일가처럼 논란거리도 없던 터라 존경심을 잃지 않았고 적도 없었다. 그래서 프로부스 자녀들은 곧 원로원에 복귀했다고 한다.[9]
3. 평가
황제이자 고결한 인간이며, 모든 미개한 국가와 반란자들의 정복자인 프로부스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로마황제열전> 중 프로부스의 비문에 기록되었다는 문구
<로마황제열전> 중 프로부스의 비문에 기록되었다는 문구
프로부스는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공정한 사람이었고, 군사적 명성에서는
아우렐리아누스에 필적하면서도 고귀한 성품이라는 덕목에서는 그를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에우트로피우스, <약사> 중 프로부스 편
에우트로피우스, <약사> 중 프로부스 편
프로부스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고결함’ 또는 ‘미덕’을 뜻한다, 그런데 그는 이런 자신의 이름 뜻처럼 후세 로마인들에게 “이름처럼 고결한 영웅”으로 평가받았다. 즉, 사후 프로부스에 대한 평가는 그가 어이없이 사망한 직후부터 4, 5세기 이후의 후대 시대에도 로마인들에게 일관되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근대 이후 학자들에게 콤모두스, 세베루스 왕조 이후 가속화되고 있던 로마제정 체제의 폐단으로 희생된, 유능하지만 불운한 황제 중 한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 3세기의 위기라고도 불리는 군인황제시대동안 즉위한 순수 군인 출신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와 더불어 ‘이 세기의 가장 유능하고 양심적인 황제’로 불린다. 즉, 프로부스에 대한 인물됨과 업적에 관한 평가는 단순히 근대 이후 나타난 재평가가 아니라 프로부스 생전부터 나온 평가였다.
그렇지만 이런 세간의 평가와 별개로 정작 폭동을 일으켜 프로부스를 살해한 병사들과 일부 병사들에게 프로부스의 평은 동의도 없이 “이리저리 뺑뺑이 돌린다”, “훈련도 빡세고 전투는 매일 치르는데 온갖 공사일까지 노예부리듯 부린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사건 당시부터 좋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프로부스는 이런 측면에서 너무 명백한 치명적 실수로 어이없이 사망했다고 일관되게 평가받는다. 실제 사건 당일 로마군은 자기들 방식으로 기록말살형을 연상시키는 모양새를 취했다. 카루스의 명에 따라 프로부스의 유해를 무덤을 만들어 매장했음에도 로마군 병사들은 비문에 프로부스의 이름을 넣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병사들은 비문 일부를 지우기도 했다. 또 로마군 병사들이 프로부스 죽음에 죄책감을 가졌다고 해도 그들은 프로부스를 자기들 방식대로 행동했다. 따라서 로마군 중 일부는 죽은 황제의 무덤이나 기념비 앞에서 헌화를 하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프로부스를 기릴 기념비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즉, 프로부스는 적어도 휘하 페르시아 원정군 내에서는 엄격하고, 제국 각지에서 황폐해진 지역 재건과 노동에 병사들의 기본적인 동의없이 투입하는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황제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부스는 상술했듯 공통분모가 많은 두 전임자처럼 군사적 역량이 뛰어나고, 공훈이 많아 당대와 후대 모두에게 평이 상당히 좋았다. 원로원과 로마군 대부분 그리고 민중들은 프로부스가 재위 내내 묵묵히 국가를 처들어온 외적을 막고, 최대한 주민들의 생업에 지장이 생기지 않게 노력한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따라서 후대 로마인 중 에우트로피우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등은 프로부스를 “근면하고 묵묵했던 영웅”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고 군대의 불만에도 사람들은 프로부스를 추앙했다고 한다. 또 당대, 후대 로마인들은 프로부스를 그의 두 전임자 중 아우렐리아누스와 공통점이 많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이때 에우트로피우스로 대표되는 로마인들은 아우렐리아누스와 비교해 프로부스는 성격적, 교양적인 측면은 훨씬 괜찮았고, 정치, 행정적 능력은 아우렐리아누스보다 확실히 뛰어났다고 말했다. 이런 까닭에 그의 암살 사건은 어이없게 벌어진 참사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국은 프로부스 암살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장 전까지 또 다시 혼란한 상황들을 경험하게 된다.
4. 여담
- 3세기의 위기에 재위한 로마 황제 발행 동전 중 프로부스 시대 발행된 주화만 모으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는 황제다. 그 이유는 군인 황제 중 평판이 좋은 황제라는 점, 발행주화 뒷면이 다양하고 발행을 하면서 해당 시대 로마 제국에서 있던 일을 홍보, 기록한 이유 때문이다.
- 로마 제국에서 팍스 로마나의 전유물로 평가받을 정도로 고평가 받는 프린키파투스(원수정)의 마지막 황제답게, 에드워드 기번으로 대표되는 근대 이후 고전적 로마사 연구자들에게 극찬을 받고 있다. 이는 현대 이후 3세기의 위기가 재연구된 21세기 이후의 평도 비슷하다. 왜냐하면 프로부스의 제국 재건 방식, 기존의 대농장 체제를 대체한 병농일치+장원제 형태의 경제 체제 등에 있어서 이정표를 제시한 황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적 로마 제국의 마지막이라고 평가받는 콘스탄티누스 왕조까지의 로마 황제들 중 양쪽 모두에서 극찬을 받는 로마 황제 명군 모델로 불리기도 한다. 어찌보면 전임자인 아우렐리아누스와는 반대되는 방향성으로 오래 살았더라면 로마제국의 앞날을 바꿀 수 있었을 만한 인물이었다.
[1]
서기 4세기 원로원 의원이자 로마 귀족인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의 아버지인데, 외조부라는 말도 있다.
[2]
주장이 두 개로 갈리는데, 판노니아 내 군영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와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암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
실제로 황제로 선언되기 전까지 프로부스처럼 제국 국경 전역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인물은 아우렐리아누스 외에는 없었다.
[4]
카루스의 황제 선포는 카루스가 프로부스를 살해하기 위해 계획한 결과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직후 카루스는 원로원에게 “병사들이 나를 황제로 선포했고, 나 역시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러 가는 중이니까 로마에 못 간다”는 식의 통보를 한 탓에 카루스의 이미지는 프로부스의 좋은 이미지와 겹쳐 최악 수준 가까이 떨어졌다고 한다.
[5]
프로부스 역시 즉위 직후 아우렐리아누스, 타키투스 암살범들이 즐비한 당시에는 그들을 연회장에 초대해 일거에 제거했다. 물론, 이 과정 전후 원로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승인까지 얻었지만.
[6]
모후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이끈 시절, 티메시테우스의 메노필루스 숙청을 생각하면 이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소년 황제의 정통성을 세워주려는 목적에서 나온 주장일 것이다.
[7]
갈리에누스 몰락 당시, 갈리에누스의 동생 소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의 아내, 어린 막내아들이 원로원과 군부의 지시로 처형된 사례, 즉위 직후 아내와 아들, 딸들의 재산까지 헌납하고 황제에 오른 타키투스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판단이었다고 평가받는다.
[8]
프로부스 아들들이 베로나로 이주했고, 그 후손인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가 베로나 태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중 사실인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9]
프로부스와 그 아들들, 손자 중 로마 원로원 핵심 인사로 이름을 날린 섹스투스 클라우디우스 페트로니우스 프로부스는 로마와 원로원에서 평판이 좋았다. 다만 그 후손들은 거만하고 다혈질이라서 그 평가가 좋지 않아 악평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