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31대 황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TREBONIANVS GALL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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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Gaius Vibius Trebonianus Gallus |
출생 | 206년 |
로마 제국 이탈리아 페루기아 | |
사망 | 253년 8월 (향년 48세) |
로마 제국 인테람나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51년 6월 ~ 253년 8월 (2년) | |
전임자 |
데키우스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
후임자 | 아이밀리아누스 |
배우자 | 아피니아 게미나 바이비아나 |
자녀 | 볼루시아누스, 비비아 갈라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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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31대 황제. 즉위 전 휘는 가이우스 비비우스 아프니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즉위 후 취한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비비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1] 정치적 동지인 전임 황제 데키우스와 함께 종종 하나의 왕조로 묶여 서술되는 경우도 있다.명예로운 경력을 모두 거친, 전형적인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이탈리아의 오래된 명문귀족 출신 황제다. 서기 249년 데키우스가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몰아내고 황제가 됐을 당시부터,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데키우스 지지자였다. 250년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으로 재임하며, 명성을 쌓았고 데키우스 황제 최측근으로 명성을 쌓았다. 그러다가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가 고트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했다. 허나 고트족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로마인들의 반발을 샀고, 이 무렵 로마 제국 전역을 다시 휩쓴 전염병 유행으로 민심을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고트족이 재차 로마를 침공하자 완전히 군대의 신임을 잃게 되고, 강경파 장군인 아이밀리아누스가 옹립된다.
253년 8월, 아이밀리아누스와 벌인 내전에서 패한 후 아들 볼루시아누스와 함께 시간을 벌며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가 이끄는 증원군과 합류하려고 하다,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206년경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 페루기아(오늘날의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페루자)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오래된 로마귀족이다. 그가 속한 트레보니아누스 가문은 에트루리아에서 로마로 귀순한 가문으로, 대대로 원로원 의원을 지내며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갈루스가 젊은 시절에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탄탄한 배경을 바탕으로 순조롭게 출세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원로원 의원으로 오래 있었다고 하며 보결 집정관을 역임한 뒤 250년경 모이시아 수페리오르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때 그는 데키우스 밑에서 여러 번에 걸쳐 게르만족과 치열한 전쟁을 펼쳤다. 데키우스 황제가 자신의 둘째 아들 호스틸리아누스를 맡긴 것을 봤을 때 갈루스는 데키우스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2.2. 황제
2.2.1. 즉위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가 발칸 반도를 침략한 고트족을 상대로 몰아붙이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큰아들이자 공동 황제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모에시아 방면 로마군은 갈루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6세기의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갈루스는 황제의 자리를 탐내 고트족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비밀 서신을 보냈고, 데키우스를 지원하지 않아 데키우스의 전사를 유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갈루스가 데키우스를 배신했다는 루머가 돌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고 본다. 갈루스는 군인들에게 새 황제로 선출된 후에도 데키우스의 둘째 아들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받들고 그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또 그가 즉위 이후에도 데키우스의 유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등의 행적을 볼 때 고트족과 밀약을 맺고 데키우스를 죽게 만들었다는 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2.2.2. 고트족과의 굴욕적인 강화
황제에 즉위한 갈루스는 어서 빨리 로마로 돌아가, 자신의 즉위를 알리고 황제로서 필요한 권위와 위엄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는 재위 시작과 동시에 고트족,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위협과 침략 외에도 전염병 창궐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때 그는 먼저 발칸 반도에서 날뛰고 있는 고트족을 돌려보내는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결국 갈루스는 고트족 왕 크니바와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한 끝에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고트족이 본토로 돌아가게 했다. 그런데 그 조약의 내용은 로마에게 매우 굴욕적이었다. 고트족은 그들이 확보한 전리품과 포로들을 그대로 데리고 갈 수 있었고 로마군은 돌아가는 고트족을 건드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트족에게 다양한 편의품을 제공해야 했다. 또한 그는 고트족이 로마 영토를 다시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매년 상당한 양의 황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2]고트족에게 매년 상당한 양의 황금을 주고 포로와 전리품을 그대로 가지고 가게 허용한다는 건 로마 제국의 굴욕임이 분명했다. 비록 데키우스 황제의 전사와 로마군 주력의 궤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사정이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데키우스가 영웅 같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제 지위 강화를 위해 데키우스 죽음을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군대도 비슷했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오랜 기간 장군으로 명성을 쌓았지만, 친구이자 전우인 데키우스 황제 부자의 죽음을 이용했다고 욕을 먹었다. 더욱이 이 일대 병사들은 이런 굴욕적인 협상이 도나우 강 하류의 고트족들이 다시 쳐들어올 빌미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갈루스는 즉위 직후부터 인기가 폭락했다. 하지만 갈루스는 자신이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했고, 데키우스의 숭고한 죽음을 내세워 귀국했다. 그는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황제가 되었다. 이때 그는 아들 볼루시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했다.
251년 6월 24일 갈루스는 데키우스를 신격화했으며, 데키우스의 차남 호스틸리아누스를 양자로 입양해 그를 공동황제로 삼아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아들 볼루시아누스는 데키우스의 딸과 결혼했다. 신부는 호스틸리아누스의 누이였기 때문에, 두 공동황제는 매형과 처남 사이이면서도, 양형제지간이 됐다.
2.2.3. 계속된 위기
그러나 갈루스에게 시련이 다시 찾아왔다. 로마 도착과 동시에 로마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했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때 공동황제였던 호스틸리아누스가 그해 11월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제국 곳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갈루스는 친아들 볼루시아누스를 공동황제로 승격시켜 본인과 아들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전염병 퇴치에 노력하고, 시신 문제 해결에 열을 올렸다. 갈루스는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의 시신 매장에 대해 가난한 이들의 시신도 제대로 묻어주라고 지시한 뒤 이를 엄격히 실행하도록 명했다. 이어 그는 데키우스처럼 대대적으로 기독교도를 탄압하는 것을 멈추고[3] 주변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 국고 안정에 노력했다. 이런 모습은 즉위 직후부터 전임황제의 지지자들을 탄압하고, 온갖 이유 아래에서 폄하에 열을 올린 고르디아누스 3세부터 줄줄이 계속된 상황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갈루스의 진심을 알게 된 민중에게 다시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아브리투스 전투 여파로 군심은 여전히 흉흉했고, 민심 역시 최악까지 떨어지다가 반등의 실마리만 얻을 만큼 회복되지는 않았다. 전염병 퇴치조차 버거울 만큼 갈루스는 즉위 직후부터 이전 황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악을 경험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부에서는 아브리투스 전투와 다시 유행한 전염병으로 인해 이탈리아와 서방에만 발이 묶인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게 반기를 든 사람들이 제국을 혼란으로 몰고 갔다.
안티오키아 출신 귀족 마리아데스가 그 중 한명이었다. 그는 동방에서 흉흉한 민심에 편승해 반란을 일으킨 다음, 시리아 전역과 카파도키아 속주 및 동부 국경을 황폐화 시켰다. 갈루스는 급히 토벌 부대에게 명령해 그를 쫓았다. 다행히 토벌대는 마리아데스에게 승리했다. 그렇지만 안이한 대처 때문에 반역자 마리아데스는 도주했고, 그는 남은 추종자들과 함께 사산조 페르시아로 도망쳤다. 그러니 동방 로마군 안에서도 인기는 빠르게 식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위기는 고작 처음에 불과했다.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 1세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고 253년에는 로마군 주둔지가 있는 시리아 지방 국경을 침공해 로마군대에게 큰 피해를 주면서 지속적으로 제국 동부를 위협한 것이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아르메니아를 침략했고 253년 바르바리소스를 기습하여 그곳에 주둔한 로마 군단을 섬멸했다. 이후 샤푸르 1세는 전력의 공백이 생긴 시리아 지역을 침공하여 안티오키아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을 파괴했고, 로마의 통치 체제와 민심은 박살이 났다. 샤푸르 1세는 254년에도 침략을 개시했다. 그렇지만 이 불씨는 에메사 왕족 출신의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면서 잡혔다. 그러나 우라니우스는 곧 황제를 자칭하고 자신의 모습을 담은 동전을 주조했다.
이렇게 동방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서방에서도 문제가 터졌다. 서방에서 갈루스는 겨우 군대를 달래면서, 자신이 젊을 적부터 명성을 쌓은 다뉴브 강 일대의 군심을 안정시켰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고트족이 연공금 문제를 거론하며 시비를 걸었다. 헌데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은 고트족이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포로를 획득하고 매년 상당한 양의 황금을 얻게 되자 자신들도 같은 권리를 얻기 위해 253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임자 데키우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패전하고, 목숨을 잃으면서 생긴 모든 리스크가 이때 쏟아졌다. 그렇지만 갈루스는 당황하지 않고, 군대에게 이를 막게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조용하나 싶었던 다뉴브 강에서 스키타이 계열의 부족들이 251년 평화조약을 무시하고, 로마 제국의 다뉴브 강 이남인 발칸반도를 침공한 것이다. 국경 근처는 고트족이 이미 다해쳐먹은 뒤라서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제국 영내 깊숙히 쳐들어갔다. 그들은 토벌대의 추격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바다를 건넜고, 로마인 모두가 안전하다고 믿은 아나톨리아 반도로 가더니, 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지나가는 낸 그 주변을 약탈했다. 그러더니 그리스계의 부유하고 오래된 도시 에페수스를 공격했다. 침략자들은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웠고, 수많은 주민을 살육하고, 많은 재물과 주민들을 손아귀에 넣고는 그들 땅으로 유유히 돌아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갈루스는 팔짱끼고 이를 방관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에게 명령해 이를 제압하라고 했고, 에페수스까지 쳐들어온 다음 그들 근거지로 귀환하는 침략자들을 박살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이 모든 명령은 속주 총독, 장군들이 모두 제대로 대처를 못하거나, 명령을 받고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결국 욕을 다 먹었고, 민심은 최악이 됐다.
그리고 이런 상황 아래에서 253년 저지 모이시아가 해가 바뀌자마자 고트족에게 재차 침공당했다. 전임자 데키우스 아래에서 아브리투스 전투 이후, 갈루스가 믿고 맡긴 전직 집정관이자 장군 아이밀리아누스가 모이시아 수페리오르와 판노니아를 총독이 되어 저지하게 됨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미 갈루스의 인기는 바닥까지 추락했고, 군대는 과거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명성이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해 그가 의도적으로 이 모든 것을 방치한 황제라고 충성을 거두기 시작했다.
2.3. 반란과 최후
판노니아와 모이시아의 총독 아이밀리아누스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의 믿음 그대로 곧 로마군을 규합해, 아나톨리아까지 침공한 야만족 본거지까지 공격했다. 다뉴브 강을 건너온 침략자들은 모두 쫓겨 났고, 포로로 끌려간 주민들을 구출하는 성과도 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승리를 거둔 아이밀리아누스는 이미 제위 욕심이 있던 중이었고,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 대한 군심과 민심이 최악임을 그 명분과 기회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병사들이 승전 후 자신을 칭송하자, 이때를 노려 조공 명목으로 거두어들였던 황금을 군인들에게 은사금으로 나눠주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황제로 선포된 아이밀리아누스는 갈루스 부자를 비겁하고 돈으로 평화를 사려고 한 황제라고 생각한 군대의 지지를 얻은 뒤, 과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했던 그대로 몸을 가볍게 한 병사들을 먼저 이탈리아로 출병시켰다. 이때의 일에 관해, 6세기 동로마 제국 관료로 고트족 출신인 요르다네스는 아이밀리아누스가 국경이나 주민을 지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직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만을 노리면서, 이탈리아에서 로마로 가는 내내 같은 로마인의 재물을 빼앗고 약탈했다고 한다.
이렇게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신이 맡은 방어선 일대의 판노니아, 모이시아 일대 군단 거의 대부분을 그대로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진군 내내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자 연공금이 끊긴 상황에서 로마 국경이 느슨해짐을 확인한 고트족은 당연히 다시 제국을 침략했다. 이때 고트족 군대는 도나우 방어선을 쉽게 돌파해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옛 마케도니아의 부유한 도시 테살로니키를 약탈했고, 수많은 로마인이 살육됐다.
아이밀리아누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족들을 막던 이 일대 정규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접한 갈루스는 내전이 불가피함을 직시했다. 그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주축으로 하여 버티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갈루스는 라인강 방면 로마군을 이끌고 있던 발레리아누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발레리아누스는 그 요청에 따라 군대를 준비시켜 남하했다. 하지만 이 시간 동안 발레리아누스는 수비대를 제외한 주력을 이끌고, 장남 갈리에누스와 첫 아내의 동생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 등과 함께 남하함에도 속도를 내지 않았다. 이들은 서둘러달라는 갈루스의 요청에도 모든 준비를 다한 다음 서둘러 움직이는 모양새로 느리게 진군했고, 이들이 도착한 때는 갈루스가 이미 패배한 뒤의 일이었다.
그 결과,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어쩔 수 없이 로마에 주둔 중인 군대와 수도 경비대를 동원하여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를 저지하려 했다. 양군은 스폴레토 들판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승자는 오랜 실전 경험 아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부터 로마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하다는 판노니아, 모이시아 일대 군단을 이끈 아이밀리아누스로 끝이 났다. 병력도 적고, 기습 공격을 받은 까닭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최악까지 몰렸고, 전투 초반부터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휘하 병사들이 그를 버리고 아이밀리아누스에게 가담하면서, 버티기조차 힘들어졌다.
결국 253년 8월, 갈루스는 아들 볼루시아누스와 함께 패전 후 도망쳤고, 배신한 부하들 손에 살해됐다. 그의 수급은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전달되었다.
3. 평가
전형적인 로마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이면서도, 로마 장군으로도 즉위 전까지 평이 평균 이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평가는 황제가 된 이후부터 대체적으로 나쁘다. 재위기간도 지나치게 짧고, 로마군에게 불신임 당하듯이 몰락해 최후도 안 좋게 끝난 황제로 치세가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권좌에 앉은 통치자가 제국을 방어할 능력은 없고, 오로지 로마에만 관심을 두었으므로 고트족, 보라니족 등에게 유럽 도시들이 약탈당한거라고 이 사람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에우트로피우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공격해 제위를 찬탈한 아이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의 치세는 이전보다 더더욱 형편없고 석달 만에 살해되었다고 평하며 “쓰다보니까 이 사람이 아이밀리아누스보다 낫네”식으로 그를 간접평가해주고 있다.다만, 현대에 이르러 군인황제시대에 대한 단편적 연구가 심화되면서부터는 조시무스, 에우트로피우스로 대표된 평가처럼 함량미달자 내지 무능력한 황제로 폄하하는 분위기는 줄고 있다. 왜냐하면 전임자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데키우스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갈루스가 보여준 역량은 후임 중 그래도 오랜 시간 집권한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보다 났다는 평이 있을 만큼, 어려움 속에서도 버텨낸 황제였기 때문이다.
갈루스 재위 기간은 군인황제시대의 난세가 심화된 시간 중 갈리에누스 단독 통치때보다 더 나쁜 상황을 경험 중이었다. 로마와 서방 전역에서는 전염병이 유행하고, 데키우스가 장군들의 반대에도 무리하게 늪지대까지 뛰어들다가 전사하면서 아브리투스 전투 이후 군심과 민심 모두 최악이었다. 동부에서는 그 틈 속에서 안티오키아 출신 귀족 마리아데스가 반란을 일으켜, 시리아 전역과 카파도키아 속주 및 동부 국경을 황폐화하더니 페르시아로 망명한 일이 터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페르시아 황제 샤푸르 1세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고 253년에는 로마군 주둔지가 있는 시리아 지방 국경을 침공해 로마군대에게 큰 피해를 줬다. 이어 서방에서 이런 비상 상황을 틈타 고트족이 다시 쳐들어오고, 조용하나 싶었던 다뉴브 강에서는 스키타이 계열의 부족들이 251년 평화조약을 무시하고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오더니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불태우고 그들 땅으로 유유히 돌아가면서 무능하다는 욕을 다 먹고, 그 과정에서 굴욕까지 겪었다. 그것도 갈루스가 백방 노력하면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253년에는 저지 모이시아가 해가 바뀌자마자 침공당해, 이를 격퇴했음에도 모이시아 수페리오르와 판노니아 속주를 믿고 맡긴 총독이자 장군 아이밀리아누스가 승리 후 이때 얻은 인기 아래에서 나라 팔아 먹은 황제로 욕을 먹고 배신 당한 뒤 살해되는 비극까지 경험했다. 즉, 난도만 놓고 보면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샤푸르 1세의 계략에 말려들어 포로가 되고,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터진 끝에 제국이 3등분된 갈리에누스 시대와 우열을 다툴 수 없는 시절이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재위 기간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임자들과 달리 쉬운 통치도 하지 못하고, 무능하고, 돈으로 평화를 사려고 한 황제라고 악평을 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에는 갈리에누스의 선배격 황제로 비슷한 상황에도 최선을 다한 황제로 재평가받고 있다.
4. 여담
- 역대 로마 황제 중 재위 기간 제작된 실물 크기의 대형 청동 전신상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현재 그 전신상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청동상을 보면 이탈리아에서 발굴된 게르마니쿠스, 네로 카이사르의 것과 달리 나체 차림으로 제작됐다. 하여 일부 학자들은 완전 군장 차림으로 제작된 게르마니쿠스 청동상과 달리, 제국 존속 당시에는 그 위에 토가 등을 입혀 전시했을 것이라고 추측 중이다. 이 전신상은 예술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데 그리스 조각과 미술 조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조각은 이상화된 인간을 표현하려는 성향이 강한 반면 로마는 현실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인간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한다. 일례로 그리스는 청년 모습의 조각은 많지만 중년 남성의 조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로마는 중년 남성들의 조각이 많다. 그들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마와 그리스는 세계관이 완전히 다르다. 실제로 영구에서는 로마와 그리스 중 어떤 문명이 더 위대한가를 가지고 많이 싸운다. #
- 살아 생전 만들어진 청동상을 토대로 그 외모를 살펴보면,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로마인 평균 이상의 꽤 큰 키를 가졌고, 머리가 작고 몸 전체가 균형잡혀 있어 전형적인 로마 귀족다운 풍모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근육질의 우람한 체구보다는 발비누스처럼 몸이 비대한 것이 눈에 띈다는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