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Gaius Iulius As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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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로마 제국 리키아 에트 팜필리아 속주 아탈리아(오늘날의 튀르키예 안탈리아) |
사망 | 218년경(추정), 로마 제국 리키아 에트 팜필리아 속주 아탈리아(오늘날의 튀르키예 안탈리아) |
전체 이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Gaius Iulius Camilius Asper |
직위 | 원로원 의원 |
가족 |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손자) |
경력 |
집정관(2회) 프라이펙투스 우르비(212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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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카라칼라에게 누명을 쓰고, 아들과 함께 불명예 추방됐다가 218년경 사망했다.2. 생애
아버지, 아들, 손자 모두 똑같은 전체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함께 212년 집정관을 지낸 동명이인 아들와 구분하기 위해, 212년 집정관 중 아버지는 대(大)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아들은 소(小)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라고 한다. 또는 아버지 아스페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아들 아스페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로 통칭하기도 한다.통상적으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로 지칭하는, 대(大)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는 직계가 대대로 똑같은 이름을 지어 사용했고, 제국 동부에서 상당한 명망가였다. 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할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판시니아누스, 증조할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고조 할아버지와 고조부의 조부 역시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였다. 이중 그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에서 두움비르(duumviri)를 지냈고, 그의 직계는 모두 안티오키아의 귀족들로, 셀레우코스 제국 시절부터 안티오키아 귀족 직위를 세습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튀르키예의 도시 안탈리아 출신이다.
젊은 시절부터 교양이 풍부하고, 당대 최고의 석학 중 한명으로 분류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그럼에도 그는 인품이 바르고, 매우 겸손해, 능력이 뛰어난 원로원 의원으로 명망이 대단했다. 따라서 그는 콤모두스 황제 아래에서 가문 최초로 집정관이 됐고, 이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총독 직을 수행하기 전에 파트리키에 편입되며 신흥 귀족 가문을 개창한 인물로 위엄이 대단했다.
그는 세베루스 왕조 시절인 200/201년 또는 204/205 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냈고,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도 역임했다. 이때 같은 이름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총독으로 파견된 아버지 휘하에서 재무관을 지냈고, 그가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지낼 때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추천으로 아들 아스페르는 아피아 가도 보수 관리 업무 감독을 맡게 됐다.
212년,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와 나란히 부자(父子)가 함께 정규 집정관을 지낸 영광을 누렸다. 이들에게 집정관 추천을 한 사람은 친동생 게타를 모후 율리아 돔나 앞에서 직접 존속살해한 카라칼라 황제였다. 이 사건에 관해, 동시대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 카라칼라가 아스페르의 인품과 명성을 이용해 원로원에게 지지를 끌어 모을 작정으로 아스페르 부자를 집정관에 나란히 추천시켰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스페르는 아들과 함께 카라칼라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행동은 양심적이었고, 동료들에게 더 큰 존경을 받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심기를 크게 건들여, 그는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망명하듯 추방됐다.
본래였다면 카라칼라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원로원 전체에게 존경받아온 지식인이었고, 카라칼라로서는 그를 죽이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크고 강력해 이 정도로 마무리 됐다고 한다.
강제 추방되고 5~6년이 지난 뒤인, 217/218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임명되는 식으로 추방이 해제됐다. 그렇지만 곧 카라칼라는 암살됐고, 마크리누스가 새로운 황제가 됐다. 이때 마크리누스는 추방이 해제된 아스페르가 너무 늙고 병에 걸려 허약한 몸으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될 수 없다며, 이 임명을 철회하고, 퀸투스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를 새로 임명했다. 이후 기록이 없어, 이 무렵 고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