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15:06:55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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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gnotus: 불명
황제 겸 집정관 }}}
101년 101년 보결 101년 보결 101년 보결 101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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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년 102년 보결 102년 보결 102년 보결 1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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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년 보결 103년 보결 103년 보결 103년 보결 1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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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년 보결 105년 105년 보결 105년 보결 105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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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년 106년 보결 107년 107년 보결 107년 보결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수라 (루키우스 또는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미니키우스 푼다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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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년 보결 108년 108년 보결 108년 보결 1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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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년 보결 109년 보결 109년 보결 110년 110년 보결
루키우스 안니우스 라르구스 그나이우스 안토니우스 푸스쿠스 가이우스 아부르니우스 발렌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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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년 보결 110년 보결 111년 111년 보결 111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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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년 112년 보결 112년 보결 112년 보결 112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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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년 113년 보결 113년 보결 113년 보결 1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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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년 보결 114년 보결 115년 115년 보결 115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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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년 보결 116년 116년 보결 116년 보결 116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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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 비비우스 바루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에그나티우스 마르켈리누스 루키우스 Co[…] 가이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데르 베레니키아누스
117년 117년 보결 117년 보결 118년 118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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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년 보결 118년 보결 119년 119년 보결 119년 보결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파키우스 실바누스 퀸투스 코레디우스 갈루스 가르길리우스 안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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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년 보결 120년 120년 보결 120년 보결 1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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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코엘리우스 루푸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루틸리우스 프로핀쿠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세라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아우구르
121년 보결 121년 보결 121년 보결 122년 122년 보결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파우스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안티스티아누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마르쿠스 스타토리우스 세쿤두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카피토
퀸투스 폼포니우스 마르켈루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실바누스 루키우스 셈프로니우스 메룰라 아우스피카투스 루키우스 코렐리우스 네라티우스 판사 루키우스 비트라시우스 플라미니누스
122년 보결 123년 123년 보결 123년 보결 124년
가이우스 트레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티누스 티투스 프리페르니우스 게미누스 티투스 살비우스 루피누스 미니키우스 오피미아누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티투스 칼레스트리우스 티로 오르비우스 스페라투스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아프로니아누스 옥타비우스 프리스쿠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세쿤두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아부르니아누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플라쿠스 토르콰투스 테바니아누스
124년 보결 124년 보결 125년 125년 보결 126년
아울루스 라르키우스 마케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베티나 베루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푸블리우스 두케니우스 베레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루키우스 티티우스 에피디우스 아퀼리누스 푸블리우스 루키우스 코스코니아누스 가이우스 에기우스 암비불루스
126년 보결 126년 보결 127년 127년 보결 127년 보결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프로핀쿠스 루키우스 쿠스피우스 카메리누스 티투스 아틸리우스 루푸스 티티아누스 푸블리우스 툴리우스 바로 퀸투스 티네이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사이니우스 세베루스 마르쿠스 가비우스 스퀼라 갈리카누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파이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켈레르 네포스
127년 보결 128년 128년 보결 128년 보결 128년 보결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윤쿠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루키우스 카이센니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메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 퀸투스 폼포니우스 마테르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호물루스]
128년 보결 129년 129년 보결 130년 130년 보결
아울루스 에그릴리우스 플라리아누스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켈수스 티투스 아우피디우스 호에니우스 세베리아누스 퀸투스 파비우스 카툴리누스 카시우스 아그리파 (또는 아그리피누스)
퀸투스 [플라니우스 사르두스 바리우스 암비불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아페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콰르티누스
131년 131년 보결 132년 132년 보결 133년
세르기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폰티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세리우스 아우구리누스 가이우스 아킬리우스 프리스쿠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히베루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피누스 퀸투스 파비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트레비우스 세르기아누스 아울루스 카시우스 아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뭄미우스 시센나
133년 보결 133년 보결 134년 134년 보결 134년 보결
퀸투스 플라비우스 테르툴루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헤로데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 티투스 하테리우스 네포스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판사
퀸투스 유니우스 루스티쿠스 푸블리우스 수페나스 베루스 티투스 비비우스 바루스 루키우스 아티우스 마르코
135년 135년 보결 135년 보결 136년 137년
루키우스 투틸리우스 루페르쿠스 폰티아누스 마르쿠스 쿠티우스 프리스쿠스 메시우스 루스티쿠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아리우스 프로쿨루스 율리우스 켈수스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파비아누스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칼푸르니우스 아틸리아누스 (아티쿠스 루푸스) 루키우스 부르불레이우스 옵타투스 리가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아일리아누스 아이밀리우스 투스킬루스 섹스투스 베툴레누스 키비카 폼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코엘리우스 발비누스 비불리우스 피우스
138년 138년 보결 138년 보결 139년 139년 보결
카누스 유니우스 니게르 마르쿠스 빈디우스 베루스 푸블리우스 카시우스 세쿤두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나탈리스 콰드로니우스 베루스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카메리누스 푸블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클레멘스 마르쿠스 노니우스 무키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루스티쿠스 루키우스 클라우디우스 프로쿨루스
139년 보결 139년 보결 140년 140년 보결 140년 보결
ignotus 마르쿠스 케키우스 유스티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 퀸투스 안토니우스 이사우리쿠스 율리우스 크라시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스카풀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플라쿠스 ignotus
140년 보결 141년 141년 보결 141년 보결 141년 보결
마르쿠스 바르비우스 아이밀리아누스 티투스 호에니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피시바누스 티투스 카이세르니우스 스타티아누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파비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율리아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스틀로가 프리스키누스 (라르키우스) 레피두스 ignotus ignotus
142년 142년 보결 142년 보결 142년 보결 142년 보결
루키우스 쿠스피우스 팍투메이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그라니우스 카스투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루키우스 투시디우스 캄페스테르 [술피키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콰드라투스 티베리우스 유니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라베리우스 프리스쿠스 퀸투스 코르넬리우스 세네키오 안니아누스 티투스 율리우스 카스투스
143년 143년 보결 144년 144년 보결 144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플라쿠스 토르콰투스 퀸투스 유니우스 칼라무스 루키우스 헤디우스 루푸스 롤리아누스 아비투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카루스 ignotus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히파르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헤로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유니아누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에그릴리우스 플라리아누스 퀸투스 라베리우스 리키니아누스
144년 보결 145년 145년 보결 145년 보결 145년 보결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켈레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롱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티투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피우스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라미아 실바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프로쿨루스 퀸투스 무스티우스 프리스쿠스
데키무스 벨리우스 피두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포블리콜라 프리스쿠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파이투스) 마르쿠스 폰티우스 라일리아누스
145년 보결 145년 보결 146년 146년 보결 146년 보결
루키우스 페트로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파디우스 루푸스 섹스투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 퀸투스 리키니우스 모데스티누스 (섹스투스) 아티우스 라베오 푸블리우스 뭄미우스 시센나 루틸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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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년 보결 146년 보결 146년 보결 147년 147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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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년 보결 147년 보결 147년 보결 148년 148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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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년 보결 148년 보결 149년 149년 보결 1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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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보결 150년 보결 150년 보결 151년 151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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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년 152년 보결 152년 보결 152년 보결 1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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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년 보결 153년 보결 153년 보결 154년 154년 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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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에트루스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스타티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세베루스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윤쿠스] 섹스투스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 티투스 유니우스 세베루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루피누스 사비니아누스 마르쿠스 가비우스 …
155년 보결 155년 보결 156년 156년 보결 156년 보결
안티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루필리우스] 세베루스 마르쿠스 케이오니우스 실바누스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우리나티우스 콰드라투스 퀸투스 카누시우스 프라이네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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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년 157년 보결 157년 보결 157년 보결 158년
마르쿠스 베툴레누스 키비카 바르바루스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콤모두스 오르피티아누스 퀸투스 빌리우스 프로쿨루스 (또는 퀸투스 비리우스 라르키우스 술피키우스) 섹스투스 술피키우스 테르툴루스
마르쿠스 메틸리우스 아퀼리우스 레굴루스 네포스 볼루시우스 토르콰투스 프론토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아일리아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binus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클레멘스
158년 보결 158년 보결 159년 159년 보결 159년 보결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파비아누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무사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마르쿠스 피시바니우스 레피두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덱스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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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notus 티투스 클로디우스 비비우스 바루스 마르쿠스 포스투미우스 페스투스 […] 플라부스 마르쿠스 켄소리우스 파울루스
160년 보결 160년 보결 161년 161년 보결 161년 보결
티베리우스 오클라티우스 세베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니우스 리보 가이우스 율리우스 게미누스 카펠리아누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티아누스 [… N]ovius 사비니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퀸투스 카무리우스 누미시우스 유니오르 티투스 플라비우스 보에투스
162년 162년 보결 162년 보결 162년 보결 163년
퀸투스 유니우스 루스티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폰테이우스 프론티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인스테이우스 비티니쿠스 마르쿠스 폰티우스 라일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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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년 164년 보결 165년 166년 166년 보결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마크리누스 티베리우스 하테리우스 사투르니누스 마르쿠스 가비우스 오르피투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푸덴스 마르쿠스 비비우스 리베랄리스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켈수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아비투스 루키우스 아리우스 푸덴스 루키우스 푸피디우스 폴리오 푸블리우스 마르티우스 베루스
167년 167년 보결 168년 168년 보결 169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덴틸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아프로니아누스 옥타비우스 프리스쿠스 퀸투스 툴리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세네키오 소시우스 프리스쿠스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쿠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팔라스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파울루스 ignotus 푸블리우스 코엘리우스 아폴리나리스
170년 170년 보결 171년 172년 172년 보결
가이우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 티투스 호에니우스 세베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세베루스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스키피오 오르피투스 가이우스 모디우스 유스투스
마르쿠스 가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ignotus 루키우스 알피디우스 헤렌니아누스 섹스투스 퀸틸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173년 174년 174년 보결 175년 175년 보결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마케르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플라쿠스 코르넬리아누스 ignotus 푸블리우스 살비우스 율리아누스 마르쿠스 디디우스 세베루스 율리아누스
176년 177년 178년 179년 179년 보결
티투스 폼포니우스 프로쿨루스 비트라시우스 폴리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카이사르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아페르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데키무스 벨리우스 루푸스 (율리아누스) 푸블리우스 마르티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윤쿠스
179년 보결 180년 181년 182년 182년 보결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파우스티누스 루키우스 풀비우스 루스티쿠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 (아우렐리아누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프로쿨리아누스 섹스투스 퀸틸리우스 콘디아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아티디우스) 코르넬리아누스
183년 183년 보결 183년 보결 183년 보결 184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투틸리우스 폰티아누스 겐티아누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세쿤두스 티투스 팍투메이우스 마그누스 루키우스 코소니우스 에기우스 마룰루스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 ignotus 마르쿠스 에그나티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플라쿠스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아일리아누스
184년 보결 185년 186년 186년 보결 186년 보결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빈덱스 트리아리우스 마테르누스 라스키비우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노비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사부키우스 마이오르 카이킬리아누스
카시우스 아프로니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쿠스 아피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 레길루스 아티쿠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루키우스 안니우스 라부스 발레리우스 세네키오
187년 188년 189년 189년 보결 190년
루키우스 브루티우스 퀸티우스 크리스피누스 푸블리우스 세이우스 푸스키아누스 둘리우스 실라누스 세베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로스키우스 아일리아누스 파쿨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실라누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셉티미아누스
190년 보결 191년 192년 193년 193년 보결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포필리우스 페도 아프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소시우스 팔코 퀸투스 티네이우스 사케르도스
아풀레이우스 루피누스 (또는 아툴레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브라두아 마우리쿠스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에루키우스 클라루스 비비아누스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스카풀라 프리스쿠스
193년 보결 193년 보결 193년 보결 194년 194년 보결
마르쿠스 실리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메살라 루틸리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셉티미누스 카티니우스 아킬리아누스 레피두스 풀키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가비니우스 바르바루스 폼페이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아이밀리우스 세베루스 칸타브리누스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셉티미우스 알비누스 카이사르 ignotus
195년 196년 197년 198년 198년 보결
푸블리우스 율리우스 스카풀라 테르툴루스 프리스쿠스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푸블리우스 마르티우스 세르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
퀸투스 티네이우스 클레멘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또는 가이우스) 쿠스피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갈루스 ignotus
199년 200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마르쿠스 아우피디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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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jpg
이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Tiberius Claudius Pompeianus)
출생 132년[1], 로마 제국 시리아 코일레 속주 안티오키아
사망 193년,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로마
직위 원로원 의원, 전직 집정관, 황제 고문, 장군, 로마 황족
가족 배우자 루킬라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장모 소 파우스티나
처남 콤모두스
동서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청년 시절2.3. 마르코만니 전쟁 루킬라와의 결혼2.4. 장인의 죽음과 마르코만니 전쟁의 종결2.5. 애증의 콤모두스2.6. 콤모두스 암살과 다섯황제의 해2.7. 말년과 사망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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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 집정관이자 장군, 황제 개인 고문, 황제 보호자이다. 로마 원수정 시대를 거론할 때, 언급되는 장군 중 한명으로, 동서지간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함께,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를 대표하는 대정치가이자 충신으로 유명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휘하 장군으로, 파르티아 게르만족 중 한 갈래인 마르코만니족과의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뛰어난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우이자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가 과로로 인한 뇌졸중으로 요절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소 파우스티나의 장녀 루킬라의 두 번째 남편으로 낙점돼 결혼 후 황족이 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아래에서 군부와 원로원을 대표하는 핵심인물로, 장인 생전에 장인에게서 카이사르 칭호를 한 차례 제안받고, 처남 콤모두스 치세에서 반란을 꿈꾼 이들에게서 두 번이나 황제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장인의 유지, 처남 콤모두스를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내세워 모두 거절해 더 큰 존경을 받았다.

193년 1월 1일, 처남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다음날, 원로원에게 동서지간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함께 황제 자리를 제안받았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이를 정중히 거절한 뒤 다섯 황제의 해 동안의 혼란기 동안 국가 존립과 치안 유지에 힘을 썼다. 따라서 로마민중과 원로원 동료들에게 더 큰 존경을 받았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즉위 이후, 평범하게 원로원 활동을 하다가 193년 사망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시리아 코일레 속주의 주도로, 로마 제국 동방의 두번째 대도시 안티오키아에서 이 지역 출신 그리스 혈통 기사계급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설에 따르면 125년생이라고 하나, 실제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보다 7살이나 적은 132년생이다. 전체이름에서 드러나듯, 조상이 1세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때 클라우디우스 1세의 로마시민권 특별법에 따라 로마 시민권을 취득했다.[2]

아버지는 안티오키아 출신의 기사계급이며 부모 모두 안티오키아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중산층이다. 어릴 적 삶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부모가 기사계급이고 폼페이아누스라는 사내가 젊은 시절부터 훌륭한 교양 지식을 가지고 있고 상류층들이 아는 예법을 몸에 익혔던 것으로 봤을 때 어릴 적부터 수사학, 웅변, 라틴어, 그리스어 등의 기본 교육을 훌륭히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2.2. 청년 시절

자세한 경력은 불분명하나, 대략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부터 대개의 또래 속주 태생 로마인 지식인들처럼 군복무를 하면서 관료가 되기 위한 경력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가 기사계급이고, 태어나기 100년 전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 만큼 고향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장교로 군경력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3]

폼페이아누스가 역사에서 처음 이름을 등장한 것은 서기 161년부터다. 로마는 161년~166년까지 파르티아와 전쟁을 치렀는데, 이때 폼페이아누스는 29살의 젊은 나이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으로 공동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 휘하에서 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이 당시 그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등과 함께 상당한 공을 세웠는데, 루키우스 베루스 휘하에서 전쟁을 하기 얼마 전 원로원 의원에 정식 임명돼 군단장 직에 재임명됐다고 한다. 이를 살펴보면 폼페이아누스는 가족 중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된 노부스 호모(신참자)라고 하더라도, 의외로 안티오키아 내에서 최상류층 기사계급 집안의 아들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파르티아 전쟁 당시, 폼페이아누스는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와 그를 따라온 로마 제국 수뇌부들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군사, 행정 방면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쳐 서기 162년 보결집정관에 추천돼 임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2.3. 마르코만니 전쟁 루킬라와의 결혼

파르티아 전쟁이 끝난 직후, 폼페이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한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와 그 측근들에게 아주 정직하고 능력이 출중한 장군으로 평가받았다. 그래서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 측의 추천 때문인지 몰라도, 루키우스의 형이자 공동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폼페이아누스를 다누비우스 강(오늘날의 다뉴브 강) 유역 전체 방어선을 담당할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총독 겸 다누비우스 전선 야전사령관(제2군단 아듀트릭스 군단장)에 임명했다.[4] 이때가 164년인데, 폼페이아누스가 28~31살 사이 정도에 원로원 의원이 되고 불과 1년만에 보결집정관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신참자인 그가 4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런 승진을 한 것은 2세기 로마 제국의 인재풀 전체에서도 군계일학 먼치킨 엘리트가 분명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평가받는다.

폼페이아누스는 164년부터 168년 말까지 판노니아에서 근무했는데, 166년 말(또는 167년 초) 롬바르디아족 6000명이 판노니아를 침공하자, 로마군을 이끌고 이들을 모조리 격퇴했다. 이때 그는 30대 중반의 젊은 장군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대비까지 하여 그들을 격퇴했는데, 롬바르디아인들의 침공은 마르코만니 전쟁의 서막이라서 그 책임은 더 막중해졌다.

167년 말, 게르만족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 중인 세력 중 하나인 마르코만니족이 마음 먹고 판노니아를 침공했다. 이들의 목표는 다누비우스 강과 판노니아를 넘어 부유한 본국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이남의 그리스였기에 침공 강도는 매서웠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는 그들의 침공을 막고자, 대규모 원정을 계획해 원로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안토니누스 역병이 더 심해져 원정대는 168년 초까지 판노니아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는 판노니아 일대 로마군이 고전한 이유가 됐는데, 폼페이아누스는 놀라울 만큼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며 자칫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뻔한 로마 제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그는 완벽하지 못한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대처했고, 올바른 상황보고로 두 황제가 올바르게 전황을 파악할 수 있게 도왔다. 이렇게 되자 두 황제는 젊은 장군 폼페이아누스를 더욱 신뢰했다, 그래서 두 황제는 그에게 군사 자문까지 구했는데, 이 시기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우 루키우스 베루스처럼 폼페이아누스를 진심으로 신뢰해 그를 두 황제를 보좌할 최측근 군사고문으로 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게르만족 일부가 북이탈리아 최대 도시 중 하나인 아퀼레이아를 침공했는데, 두 황제는 노예, 검투사까지 징집해 이를 격퇴했다. 하지만 밤낮으로 격무에 시달린데다 여러 전쟁으로 피로감이 심해진 까닭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가 뇌졸중 증세를 호소하다가 쓰러져 169년 1월 요절했다. 당시 루키우스 베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장녀 루킬라와 결혼했고, 공동황제였다고 해도 사실상 후임황제이자 후계자였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크게 좌절했다. 그리고 이때 마르쿠스 황제의 눈에 띈 이가 형제가 모두 신뢰한 37살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였다.

폼페이아누스는 미혼이었고, 신참자임에도 교양이 풍부하고 능력은 원로원 내에서 최고 수준으로 뛰어난 인재로 자타가 인정했다. 더욱이 그는 동방 출신임에도 모두에게 큰 존경을 받고 인정받았는데, 파벌을 만들거나 가입하는 등의 야심가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아 적도 없었다. 이런 점은 마르쿠스 황제 입장에서 아우의 빈자리를 메꾸고, 어린 후계자 콤모두스의 미래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루킬라의 재혼감으로 폼페이아누스가 직접 낙점받은 이유가 됐다.
파일:external/resources.oncourse.iu.edu/lucilla1.jpg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장녀 루킬라

타고난 미남이었던 루키우스 베루스와 비교해 폼페이아누스는 로마 상류 여성들이 선호한 미남은 아니었다.[5] 그러나 말년에 제작된 조각상에서 보여지듯 평균 이상의 키, 괜찮은 외모를 가졌고 인품이 대단히 훌륭하고, 정신력이 강하고 책임감이 대단했다. 그렇지만 루킬라는 어린 시절부터 공주라는 지위와 훌륭한 자신의 조상들, 부모 양쪽의 혈통, 그리고 수백년째 이어진 귀족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현역 원로원 의원 폼페이아누스가 자기와 격이 맞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특히 그녀는 새 남편이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때 로마 시민권을 얻은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이었고 본인 대에야 비로소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임을 혐오스럽다고 주장하면서 아버지에게 불만을 대놓고 표출했다.

루킬라 입장에서 보면 이 결혼은 황후(아우구스타)라는 신분까지 박탈되는 결정이라서, 그녀는 어떻게든 폼페이아누스와 엮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귀부인의 삶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고, 자신이 동생 콤모두스 때문에 희생된다고 생각해 격렬하게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이는 폼페이아누스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고 불만을 가질 만 했다. 그는 루킬라와 달리 미혼이었고, 이 결혼이 첫 결혼이며, 본인이 원한 결혼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정략혼이라고 해도, 그는 일평생동안 황제 자리를 꿈꾸거나, 황족 대우를 받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크게 꿈꾸지 않았기 때문에 향후 본인에게 짐이 될 이 결혼 명령을 쌍수를 들 정도로 반기지 않았다. 도리어 신분과 지위를 생각하면 폼페이아누스 쪽에서도 루킬라와의 결혼은 아쉬운 점이 있고, 매우 부담스러운 강제명령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후 파우스티나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화를 내는 루킬라 편을 들며 재혼 직전까지 "폼페이아누스는 우리와 격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충돌했다. 소 파우스티나는 아들 콤모두스의 안위를 대단히 걱정했음에도, 딸 루킬라가 격렬하게 반발해 딸 편을 들었는데, 이후에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를 견제하기 위해 공동 후견인으로 세우려고 노력하는 등 폼페이아누스를 온전히 신뢰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르쿠스 황제는 아내와 당사자의 반대에도 황실과 제국의 안녕 등을 고려해 무시했고, 결혼을 강행시켰다. 나이 차이도 서로 적당하고, 폼페이아누스의 재능과 충성심, 외모 모두 당시 로마 안에서 1등 신랑감인 것을 생각해보면 황제 역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후일 소 파우스티나 역시 폼페이아누스를 온전히 믿지 않다가, 유언으로 그에게 아들 미래를 맡긴 것을 생각해보면 비슷하게 전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169년 결혼식을 올렸다. 하여 부부 사이는 자연스레 냉랭했는데, 루킬라는 결혼 이후에도 남편 폼페이아누스를 대놓고 무시해 결혼생활은 최악으로 흘러갔다. 그래도 다행히 이 결혼에서 두 사람은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170~217)를 낳았고, 이 결혼 이후 마르쿠스 황제는 딸 루킬라의 아우구스타 칭호가 박탈되지 않도록 하고 폼페이아누스에게 여러 명예를 주면서 두 사람의 자녀도 제위계승을 할 수 있게 조치를 취해줬다.

이렇게 폼페이아누스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일원이 된 직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맏사위 폼페이아누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계속해서 각종 영예와 칭호를 부여했다. 냉랭했던 장모 역시 막내아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가 요절해, 아들이라곤 콤모두스 밖에 남지 않아 그나마 믿을 수 있는 폼페이아누스와 화해했다.

결국 169년 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폼페이아누스를 어린 콤모두스를 지켜줄 보호자이자 대부로 지명했다. 이때 황제는 그에게 카이사르 칭호까지 내려주겠다고 한 다음, 루킬라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도 후계자가 될 특권을 정식으로 내렸다. 하지만 폼페이아누스는 여러 조치 중 핵심인 카이사르 칭호를 받지 못하겠다고 황제에게 간곡히 호소하면서, 이 결정은 장차 콤모두스 안위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거듭 뜻을 밝혔다. 이런 호소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폼페이아누스의 카이사르 칭호 부여 제안을 철회했다. 그러나 다른 조치와 영예 수여는 예정대로 폼페이아누스 부부에게 수여됐다.

카이사르 칭호 부여 시도가 무산된 이후, 마르쿠스 황제는 이런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 속에서, 맏사위를 더욱 신뢰하게 된다. 이때 황제는 폼페이아누스를 본인이 출정한 전쟁터에서 황제를 사실상 대리하는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래서 마르코만니 전쟁의 실질적인 총책임자는 맏사위 폼페이아누스 몫이 됐다. 이 결정 당시, 황제는 40살도 되지 않은 사위를 보좌할 여러 장군들을 곁에 붙여줬다. 그중 한명으로 낙점된 참모격 장군이 파르티아 전쟁과 게르만족과의 게릴라 전쟁에서 두루 공을 세운, 해방노예 아들인 이탈리아 출신 장군 페르티낙스인데, 그는 다시 반대파들의 무고로 뇌물죄 등에 기소돼 고초를 겪다가 무죄가 확정된 뒤 폼페이아누스 곁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2.4. 장인의 죽음과 마르코만니 전쟁의 종결

마르코만니 전쟁 기간 동안, 폼페이아누스는 군사작전과 병참 운영, 속주 재건 등에서 큰 공을 세워, 군사적 경험이 부족한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보좌했다. 이때 그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 여러 장군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고 황제 역시 이런 사위를 기특하게 여겼다. 그래서 173년 황제는 폼페이아누스를 직접 추천해 두 번째 집정관에 오르게 해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 기간동안 언제 죽어도 모를 정도로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진 상태였는데, 이 시기동안 폼페이아누스는 여러 군사작전을 진두지휘하면서 장인과 처남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180년 3월 17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병영 기지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이때 폼페이아누스는 동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콤모두스를 잘 보좌해달라"고 고명을 받았다.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18살된 아들 콤모두스가 단독황제로 선포됐다.

이 당시 로마의 승리가 분명해도, 로마 국고는 오랜 전쟁으로 각종 특별세를 걷을 정도로 위태로웠고 로마인들의 전시특별세 피로도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민심 역시 자칫 흉흉해질 위기였다. 그래서 여러 고문들은 갓 단독황제가 된 콤모두스에게 현실적인 이유를 내세워, 서둘러 전쟁을 종결짓고 로마로 귀환해야 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폼페이아누스는 곧 있으면 완전 정복될 마르코만니 전쟁을 완료해야 한다고 콤모두스와 원로원, 재정 고문을 설득했다. 그러나 콤모두스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법과 관습에 따라 게르만족들과 평화교섭 협상을 할 것을 지시했다. 그래서 180년 가을, 마르코만니 전쟁은 종결되고 콤모두스는 장군들과 함께 로마로 귀환했다.

2.5. 애증의 콤모두스

파일:Commodus_Musei_Capitolini_MC1120-1.jpg
처남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페르티낙스 등 여러 제장들의 만류에도 콤모두스가 경제, 재정고문과 원로원 의원들의 요청에 따라 전쟁을 마무리하자, 젊은 황제와 경험많은 일부 장군 사이의 갈등이 시작됐다. 이 당시 콤모두스는 폭군도, 암군도 아니었고 괜찮은 후계자였는데, 이런 내부적 상황은 182년 폼페이아누스의 아내이자 콤모두스의 맏누이 루킬라가 콜로세움에서 콤모두스 암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일련의 사태로 확대되는 이유가 됐다.

당시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의 결정에 불만을 품었음에도, 장인이 죽기 전까지 간곡히 아들 콤모두스 안위를 부탁한 것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폼페이아누스와는 동서지간으로,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파딜라, 안니아 갈레이아 파우스티나, 코르니피키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도 비슷했다. 하지만 코르니피키아의 남편인 푸닉 출신의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 막내 공주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의 남편인 푸닉 출신의 명문 귀족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는 더 높은 권세를 위해, 동생 콤모두스에 대한 원한으로 똘똘 뭉친 루킬라의 음모에 가담했다. 이는 폼페이아누스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도 비슷해 그들은 182년 콤모두스를 실제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해 모조리 반역죄로 처형된다.

콤모두스는 비록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에 사오테루스가 별개의 사건으로 암살되자 한층 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두 차례의 암살 사건으로 젊은 나이에 큰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는 며칠을 끙끙 앓을 정도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 조사 결과까지 알게 되자 완전히 사람이 변하더니 쓸데없는 의심병이 생기고 정상생활조차 힘들어 할 정도로 사람이 변해버렸다. 다행히 콤모두스는 암살에 개입하지 않은 맏매형 폼페이아누스를 계속 신뢰했고, 그를 아버지이자 삼촌처럼 따랐다. 그렇지만 이 사건 이후,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 측근과 원로원에게 루킬라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계속 의심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콤모두스의 광기는 심해지고, 근위대장 페렌니스, 클레안데르의 부정부패와 전횡이 심해지는 가운데 콤모두스는 아예 손을 놓고 폐인 생활을 하며 놀고 먹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이는 처남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폼페이아누스가 애증 관계가 된 처남 콤모두스에게 크게 실망한 이유가 됐다.

하지만 폼페이아누스는 장인, 장모의 유지도 있고, 동서지간이며 동료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콤모두스의 누이로 플라우티우스의 아내인 파딜라와 끝까지 콤모두스 갱생에 힘을 쏟는 것을 보고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원로원에 남아, 불만이 쌓이고 있는 원로원 동료와 군대 장교들을 설득했고, 장인이 콤모두스를 끝까지 지켜달라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 콤모두스 움직임을 막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는 또 다른 동서관계인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대비된 모습이었는데, 이 사람은 훌륭한 스토아 철학자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부부에게 가장 큰 총애를 받은 사위임에도 끝까지 무책임하고 비열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그래서 폼페이아누스의 이런 모습은 파딜라, 플라우티우스 부부와 그가 세간에 충신으로 인정받은 이유가 됐다.

그렇지만 콤모두스의 광기는 사그라들지 않았고, 클레안데르가 근위대장이 된 뒤 매관매직이 일상화되면서 상황은 훨씬 안 좋게 흘러간다. 이런 상황에서 각지의 군대는 반란을 꿈꾸고 있음에도, 살아생전 선황이 보인 헌신과 안토니누스 가문의 노력을 생각해 안토니누스 황실 식구 중 가장 존경받고 있던 그에게 두 번이나 접근한다. 그들은 "황제에 오르겠다고 말만 해주면 제위에 올려주겠다"고 제안했고 두 차례에 걸쳐 "황제가 제발 되어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이에 그는 그 제안을 받자마자 모두 거절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콤모두스가 실망스러워도 선황과 본인을 생각해서 참아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렇지만 동료 의원들과 군대의 요청은 끊이지 않았다. 이에 폼페이아누스는 본인의 나이가 많고, 눈병이 있다며 이탈리아에 있는 시골집으로 떠나 버렸다. 당시 폼페이아누스의 나이가 로마 제국에서 한창 나이로 평가받은 40~50대에 불과함을 생각하면 너무 빠른 은퇴선언이었다. 그러나 이 은퇴선언과 사실상의 은둔생활에도 여러 인사들은 폼페이아누스와 어떻게든 접촉하려고 시도해, 그는 로마에 얼굴도 비추지 않고 시골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2.6. 콤모두스 암살과 다섯황제의 해

20대 후반에 접어들 무렵인 190년 직전부터 콤모두스의 부도덕하고 광적인 행동은 정신불안으로 점차 심해졌다. 특히 과대망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클레안데르가 죽고 난 뒤였는데, 이때 콤모두스는 애첩 마르키아, 새로운 침실 하인이 된 그리스인 해방노예 에클렉투스, 단독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레토)를 형식적인 친정체제에서 신뢰했다. 따라서 이런 점을 걱정한 파딜라,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부부는 콤모두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으면서, 황궁 별관으로 아예 들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심각한 콤모두스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을 했다. 하지만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에 대한 충성을 밝히며, 반 콤모두스 움직임을 견제함에도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2년 11월, 콤모두스는 콜로세움에서 플레부스의 경기 날 자신의 살아있는 헤라클레스의 화신임을 자처하며 검투사로서 보여줄 수 있는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콤모두스가 192년 11월 수많은 맹수들을 혼자 힘으로 다 죽이는 초인적인 능력을 공개할 당시,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을 손수 초대해 관람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세습 원로원 의원이었던 디오 카시우스, 동서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등은 반강제로 이 경기를 모두 관전했다. 그런데 처남의 막장행각을 참다 못한 매형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는, 동서지간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를 비롯한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유일하게 콜로세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상 문제였다고 하는데, 디오에 따르면 이건 핑계였다. 대신 그는 자신의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를 대리인 자격으로 내보낸 뒤, 아들을 통해 자신이 콤모두스의 안녕과 선전을 빈다고 의견을 밝혔다. 허나 폼페이아누스는 이 행동을 통해, 변해버린 처남 콤모두스에게 공개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폼페이아누스가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지를 받들고, 콤모두스를 지켜주겠다는 것만은 지켜주기 위해 아들을 보냈을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그리고 1달 뒤인,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황궁에서 애첩 마르키아, 침실 시종장 에클렉투스, 단독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사주를 받은 개인 레슬링 교사에게 교살됐다.

192년 12월 31일 저녁, 콤모두스가 암살되고, 다음날인 193년 1월 1일 원로원과 근위대에서 폼페이아누스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에게 황제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 이때 폼페이아누스는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함께 원로원에 출석해 후임황제 자리를 제안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본인과 자녀 모두 황제 자리에 뜻이 없다고 밝히면서 혼란해질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코르니키피아와 불륜 관계인 페르티낙스가 후임황제가 됐는데, 그는 얼마 안 가 근위대와 갈등을 빚다가 암살됐다. 이후 라이투스는 근위대 부하들과 함께 권좌를 경매형식으로 팔았고, 그 자리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손에 넘어갔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근위대가 자신을 온전히 지지하지 않고, 동료들도 본인을 손가락질하자 폼페이아누스에게 급히 공동황제가 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오랜 전쟁으로 몸이 늙은이와 다름없이 안 좋고, 눈 문제도 있다며 거절했다. 이는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도 비슷했는데, 그는 다섯황제의 해 동안 벌어진 온갖 추태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터라 단호히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판노니아 사령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를 자처하고 로마로 진격했다. 그러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플라우티우스에게 평화교섭을 요청하면서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를 거절했고, 플라우티우스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본인 소유의 시골별장으로 은퇴해 은거해버린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이에 로마에 있던 폼페이아누스에게 평화교섭을 요청하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그는 다섯 황제의 해 동안, 나라에서 벌어진 온갖 막장 행각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터라,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허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 역시 명백한 불법 행위이며, 이 과정에서 무수한 목숨이 희생돼 이 문제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내며 반대 의사를 사실상 밝혔다.

2.7. 말년과 사망

폼페이아누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군해, 황제가 되고 이후 경쟁자와 그 파벌을 모두 숙청할 당시 로마에서 평범하게 원로원 의원으로 있었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았고 193년 로마의 자택에서 향년 60세의 나이에 죽었다. 사인은 젊은 시절부터 장인과 함께 다양한 전쟁을 치르며, 일찍부터 몸이 크게 상해 건강 상태가 나빴던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후일 동서지간이며 우정을 나눈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세베루스 왕조 내 권력다툼으로 누명을 쓰고 자살형식을 빌려 처형된 것(205년)을 생각해보면, 폼페이아누스가 193년 병으로 죽은 것은 천운이었다. 왜냐하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플라우티우스를 죽일 때, 옛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족 중 권좌에 오를 수 있는 후보군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6] 더욱이 폼페이아누스의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가 카라칼라 게타의 골육상쟁 당시, 게타 지지자로 몰려 누명을 쓰고 피살된 뒤 목이 효수된 것을 생각해보면 폼페이아누스가 장수했을 경우 세베루스에게 보복을 받지 않아도 비슷한 비극을 당했을 확률은 높아보인다.

3. 여담

  • 최근에야 132년생이고, 루킬라와 결혼 당시 30대 중후반의 초혼으로 밝혀졌지만 과거에는 125생으로 추정돼 루킬라와의 결혼 당시 중년의 중늙은이(?)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시오노 나나미는 48살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에, 20살도 안 된 19살의 루킬라가 격렬히 반대했을 것이라고 추정했고, 이 인물의 경력이 추정으로만 예측할 당시를 기준으로 저술한 까닭에 폼페이아누스가 게르마니아 전쟁을 벌어지기전까지는 일개 1개 군단 사령관에 불과하고 경력도 전무하다시피한 인물에서 고속승진한 사람으로 묘사 중이다.
  • 장모 소 파우스티나가 결혼 당시 완강하게 반발한 루킬라를 지지했고, 그를 견제하고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아들 콤모두스 후견인 중 한명으로 내세웠지만 루킬라의 남편이 된 뒤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 황제의 맏딸을 아내로 맞이한 연상의 유능한 무장이고 개인의 야심을 앞세우지 않은 유능한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훗날 동로마 제국의 부마이자 군정의 거두였던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도 비교된다.


[1] 과거에는 125년생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132년생으로 밝혀졌다. [2] 이런 배경 때문에, 이 특별법에 따라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들이 많은 제국 동방(특히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출신들은 클라우디우스라는 성씨를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1세기 후반부터 3세기까지 등장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ooo' 등 원로원 의원, 장군, 집정관, 수도 장관 중 노멘(성씨)으로 클라우디우스를 사용한 로마인들은, 어머니가 진짜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고 양가 모두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인 막시무스( 푸피에누스)를 제외하면 폼페이아누스처럼 거진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출신이다. 일례로 3세기 초 세베루스 왕조에서 복수의 집정관 경력을 가지고 있고 수도장관까지 오른, 디오 카시우스의 동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만 하더라도 그리스인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또 다른 사위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역시 그리스인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특별법으로 시민권을 얻은 그리스인의 후손이다. [3] 대개의 기사계급 출신 청년들은 군에 입대할 경우, 일반 사병이 아닌 장교부터 경력을 쌓았다. [4] 그가 부임한 제2군단 아듀트릭스는 오늘날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기지를 둔 로마군 부대로, 로마군 내에서 게르마니아, 시리아와 함께 3대 주력군 중 하나인 판노니아 일대에서도 강력한 핵심부대였다. [5] 로마 귀부인들이 생각하는 미남의 기준은 금발머리+파란눈이었다고 한다. [6] 그래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의 아들, 딸은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아들 카라칼라처럼 비열하고 냉혹함에도 정도는 지키는 황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