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스폰시아누스 (SPONSIANVS)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재위 | 미상 |
반란 대상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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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반란자. 당대의 어떤 문헌에도 언급되지 않았고 1713년 그의 동전이 발견된 뒤에도 위조품으로 취급되었지만, 2022년 동전이 진품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존재가 확인된 인물이다.
2. 의문의 동전
1713년,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트란실바니아의 보물창고에서 고대 동전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는 "Imp[erator] Sponsiani(임페라토르 스폰시아누스)"라는 문구가 적힌 금화 2개가 발견되었다. 이때 함께 발견된 로마 시대 동전으로는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것이 있었다. 이후 '스폰시아누스'라는 이름이 적힌 금화 3개와 은화 1개가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이중 금화 4개가 현존하고 있다. 2개는 비엔나 제국 컬렉션 박물관에 소장되었고, 하나는 글래스고 대학의 헌터 박물관에 보내졌으며, 다른 하나는 트란실바니아 총독 사무엘 폰 브루켄달 남작의 소장품이 되었다가 현재는 루마니아 시비우에 위치한 브루켄달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스폰시아누스 동전은 상당히 특이했다. 우선, 모든 로마 황제 주화에는 스탬프가 찍혀 있지만 이 주화는 거푸집에서 주조되었다. 또한 발견된 금화는 함께 발견된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것과 같은 가치를 지녔지만, 무게는 비정상적으로 무거웠다.[1] 그리고 이 동전은 때때로 철자가 틀렸으며, 다른 황제 동전에서 무조건 쓰이는 "CAES AUG(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명기되지 않았으며, 뒷면에는 로마 공화국 시기인 기원전 135년의 동전 형식이 그대로 쓰였다. 이 뒷면에는 C AUG"라는 글자가 새겨졌는데, 이는 돈을 찍는 업무를 담당한 이의 이름인 "가이우스 아우구리누스(Gaius Augurinus)"를 의미했다.
이렇듯 로마 황제들의 정형화된 동전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화폐 학자들은 이를 위조품으로 단정했다. 1868년 프랑스의 화페학자 앙리 코헨은 앞면은 "야만적이고 이상하며," 뒷면은 공화정 시기의 것을 복사했다며, "어리석은 자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어진 매우 형편없는 현대식 주화"라고 일축했다. 웨인 세일스는 군인 황제 시대의 반란자들과 황제들은 종종 재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동전이 희소하고 특이하다고 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학계 다수의 의견은 스폰시아누스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던 2020년 봄, 저서 <위기에 처한 로마 제국-신들이 로마를 버렸을 때> 집필에 전념하던 유니버시티 런던 대학 교수 폴 N. 피어슨은 글래스고 헌터 박물관에 스폰시아누스 동전의 양질의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헌터 박물관 큐레이터인 제스퍼 에킨슨이 사진을 찍어 가져왔다. 두 사람은 곧 고화질 이미지에서 금화에 작은 흔집이 군데군데 나 있고 흙 퇴적물이 흠집 속에 축적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단순한 모조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물론 화폐 위조범들이 3세기 이전에도 인공적인 노화 기법을 사용해 오래된 동전으로 위장하여 웬만한 전문가들을 속여왔긴 했지만, 두 사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더 자세한 연구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여러 전문가가 연구 결과에 비판을 가했다. 영국의 로마사 권위자 메리 비어드는 스폰시아누스 동전의 특징(스탬프를 찍지 않고 주조되고 뒷면은 공화국 시대의 복사판인 점)은 위조품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루마니아 화폐 협회 회장인 에마누엘 페탁은 스폰시아누스의 동전은 로마 제국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디자인은 초보적이고 기괴하며, 프라이노멘과 코크노멘이 동전에 쓰이지 않은 점을 볼 때 로마 황제에 의해 주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영 박물관의 로마 주화 컬렉션 큐레이터인 리처드 압디는 연구에 대해 "완전히 공상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또다른 루마니아 학자인 플로리안 마테이 포페스쿠는 스폰시아누스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3. 언제, 어디서 황제를 칭했는가?
만약 스폰시아누스가 진짜로 존재했다면, 그는 어떤 인물이었으며 언제, 어디에서 황제를 칭했는가? 폴 피어슨과 제스퍼 에킨슨은 스폰시아누스가 다키아 사령관 출신으로, 260년대에 이민족의 침략으로 다키아가 제국 본토와 단절되자 황제를 칭했다고 주장한다. 다키아는 우수한 품질의 금을 생산하는 금광이 많은 곳으로, 다키아에 주둔한 군단은 금광을 보호하고 로마로의 금괴의 꾸준한 수출을 보장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민족들의 침략으로 다키아가 제국 본토로부터 단절되자, 군대와 주민의 생존을 도모하고 지역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를 칭했다는 것이다.또다른 학자들은 스폰시아누스 동전이 발견되었을 때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동전도 함께 발견된 점에 주목하며, 고르디아누스 3세(238~244) 또는 필리푸스 아라부스(244~249)의 치세 때 판노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 일카 시반네는 동로마 제국 시기의 사료에서 언급된 필리푸스 치세 초기의 반란자 세베루스 호스틸리아누스가 스폰시아누스와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스폰시아누스가 정말로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어째서 뒷면에 기원전 135년경 로마 공화국 양식을 차용하는 등 기존 동전과 유별난 방식으로 동전을 주조했는지 등은 현재까지 알 수 없다. 다만 발견된 동전이 지극히 희소하고 트란실바니아 외에는 발견되지 않은 점을 볼 때, 설령 존재했다고 해도 황제를 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민족에게 무너지거나 토벌대에게 제압당했을 것이며, 영향력은 다키아에 한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기록에 그의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고대 역사가들이 고립된 다키아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얼마 버티지 못했고 영향력도 미미했던 그를 굳이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스폰시아누스처럼 역사 기록에는 남지 않고 동전을 통해서만 존재가 확인되는 로마 황제로 실반나쿠스도 있다.
[1]
필리푸스의 동전은 4.3g인데 비해 스폰시아누스의 동전은 10.02g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