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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황제 참칭자
베트라니오 VETRANI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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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베트라니오 Vetranio |
출생 | 미상 |
로마 제국 모에시아 | |
사망 | 356년 |
로마 제국 비티니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350년 3월 1일 ~ 350년 12월 25일 (9개월) | |
전임자 | 콘스탄스 |
후임자 | 콘스탄티우스 2세 |
종교 | 로마 이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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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비정통 황제. 350년 3월 1일 콘스탄스 황제를 시해한 마그넨티우스에 대항하여 일리리아를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카이사르를 칭한 뒤 동방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로부터 아우구스투스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350년 12월 25일 콘스탄티우스 2세의 공작으로 일리리아 군단이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복종하자 퇴위했고,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 뒤 프루시아에서 여생을 보냈다.2. 생애
모에시아 출신으로 전해지지만 출생년도와 기원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서방 황제 콘스탄스 휘하에서 빠르게 출세해 350년 무렵엔 일리리아 총독을 역임했다. 그러던 350년 1월 18일, 마그넨티우스가 아구수스토두눔에서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콘스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사냥을 떠나서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던 코스탄스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피레네 산맥의 헬레나라는 작은 마을로 도망쳤지만, 350년 2월 말 마그넨티우스가 보낸 암살단에게 살해되었다. 마그넨티우스는 빠른 시일에 콘스탄스의 통치 영역이었던 이탈리아, 갈리아, 아프리카, 히스파니아를 장악하였고, 콘스탄스가 관직에 앉혀놓은 귀족들 중 일부를 처단했다. 또한 "로마 세계의 해방자" 같은 문구를 새긴 동전을 주조하였고, 콘스탄티누스 1세의 후손인 유스티나와 결혼하여 부족한 정통성을 보강했다.콘스탄티누스 1세의 딸이자 동방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누이인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는 베트라니오에게 일련의 사태를 전한 뒤 황제를 칭하라고 권했다. 콘스탄티나는 본래 폰토스의 왕중왕이 될 예정이던 한니발리아누스의 아내가 되어 어엿한 황후가 될 수 있었지만, 남편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이 일에 한을 품고 있던 그녀가 마그넨티우스의 난을 기회로 삼아 베트라니오를 황제로 세운 뒤 자신이 그의 황후가 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베트라니오는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콘스탄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자신이 병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카이사르를 칭했으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에데사에서 베트라니오의 편지를 접한 뒤 사산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는 한편 베트라니오에게 왕관을 보내면서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인정하겠다고 전한 뒤 군자금을 보내고 도나우 강변에 주둔하고 있는 제국군을 지휘하게 했다.
그런데 베트라니오는 마그넨티우스를 저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콘스탄티우스 2세로부터 자금과 물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연이어 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가 그의 의도를 의심해 요구를 점차 들어주지 않자, 베트라니오는 마그넨티우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트라키아의 헤라클레이아에 도착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공동으로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안했다. 마그넨티우스는 자신의 딸을 콘스탄티우스 2세와 결혼시키고, 콘스탄티우스 2세의 누이는 베트라니오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콘스탄티우스 2세를 따랐던 이들의 직책을 유지하는 것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다만 콘스탄티우스 2세가 제국 서방의 영유권을 마그넨티우스와 베트라니오에게 넘기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그넨티우스와의 협상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베트라니오에게 별도로 사절을 보내 자신과 협력한다면 황제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여동생을 그와 결혼시키겠다고 제안했다. 베트라니오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다시 콘스탄티우스 2세와 손을 잡았다. 콘스탄티우스는 발칸반도 중부의 나이수스, 시르미움, 또는 세르디카 쯔음에서 베트라니오의 군대와 연합했다. 그러나 350년 12월 25일 베트라니오의 장교들을 포섭해 일리리아 군단이 자신을 유일한 황제로 받들게 만들었다.
베트라니오는 급히 몸을 땅에 던지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자비를 빌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그의 보라색 휘장을 가져간 뒤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후 "아버지"라 부르면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이후 그를 사면하는 대신 지휘권을 박탈하고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에서 여생을 보내게 했다. 그는 그 곳에서 6년간 연금을 받으며 조용히 살다가 356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