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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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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푸스 | Crispus

파일:플라비우스 율리우스 크리스푸스.jpg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크리스푸스
(Flavius Julius Crispus)
생몰 년도 299년? - 326년
카이사르 재위 기간 317년 3월 1일 - 326년
부모 콘스탄티누스 1세(아버지)
미네르비나(어머니)
아내 헬레나
형제자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헬레나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 초기의 황족.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장남으로, 혼란스러운 내전중에 전장에서 맹활약하여 부친이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러나 서기 326년 계모인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간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2. 생애

콘스탄티누스 1세 미네르비나 사이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309~310년경에 기독교 학자이자 궁정 관료 락탄티우스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299년 즈음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07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인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결혼했다. 그가 기존의 아내였던 미네르비나와 이혼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 볼 때,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후대의 역사가들인 조시무스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미네르비나를 첩이라고 밝혔다. 반면 현대의 로마 역사가인 티모시 반스는 조시무스와 조나라스가 신뢰할 수 없는 이교도 역사가인 사르디스의 에우나피오스의 저서를 인용했기에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면서, 미네르비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친척이며, 콘스탄티누스 1세와 정식으로 결혼했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크리스푸스에게 그의 친어머니인 미네르비나와 함께 갈리아로 가도록 지시했다. 크리스푸스는 그 곳에서 락탄티우스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다. 317년 3월 1일, 세르디카 시에서 이복 동생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카이사르(부황제)의 칭호를 받았으며, 318년 집정관을 역임했다.이후 갈리아의 사령관에 선임되어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오늘날 트리어)에 거주했고, 322년 1월 헬레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이름이나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18년, 320년, 그리고 323년 서게르만계 알레만니족 프랑크족의 침략에 맞선 군사 작전을 진두지휘해 성공적으로 이끌며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선보였다. 324년 동방의 황제인 리키니우스와 전쟁을 벌이게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크리스푸스를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헬레스폰토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 프로폰티스 해(마르마라 해),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해전을 이끌었다. 특히 324년 7월 헬레스폰토스 해전에서 갤리선 200척을 이끌고, 리키니우스가 서방의 정제로 내세운 마르티니아누스의 갤리선 350척을 격파했다. 리키니우스 황제는 9월 18일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의 크리소폴리스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대패한 뒤 니코메디아로 도주한 후 항복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정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시 크리스푸스는 사실상 후계자로 예정되어 있었다. 서쪽의 갈리아와 동쪽 방면 해전에서의 탁월한 활약은 세간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고, 병사들도 그의 뛰어난 지휘력과 훌륭한 인품을 칭찬했다. 비록 이복 동생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그리고 콘스탄스가 있었지만, 아직 성인식도 가지지 않은 어린 아이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326년, 크리스푸스는 돌연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부황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령으로 긴급 체포된 뒤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일리리아 풀라에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처형당한 것이다. 몇 달 후 계모인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도 로마의 뜨거운 목욕탕에서 질식사했고, 두 사람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서기 4세기 말에 출간된 《카이사르의 전형》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전투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로마 제국 전체를 지배하게 된 뒤, 그는 아내 파우스타의 제안에 따라 아들 크리스푸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어머니 헬레나가 손자의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며 꾸짖자, 콘스탄티누스는 파우스타를 끓는 목욕탕에 던져 죽였다"
라고 기술했다. 또한 아리우스파 역사가인 필로스토르기오스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황후의 속임수에 의해 아들 크리스푸스를 사형에 처했고, 그 후 그녀가 자신의 시종들 중 한 명과 간통한 걸 알아내자 뜨거운 욕조에 질식시키라고 명령했다."
갈리아 아르베르눔의 주교였던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집정관 아블라비우스가
"궁궐의 누가 지금 토성의 황금기를 원하겠는가? 우리는 네로의 다이아몬드 시대이다."
라는 시를 쓴 것에 대해,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아내 파우스타와 아들 크리스푸스를 거의 동시에 뜨거운 물로 목욕시킨 걸 빗대었으니 실로 용감하다."
라고 칭송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또한 서기 6세기 초의 역사가였던 조시무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자연법에 대한 고려도 없이 크리스푸스가 계모 파우스타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혐의로 죽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이 잔혹한 행위에 슬퍼했고, 황제는 마치 모후를 위로하려는듯 병보다 더 나쁜 치료제를 발랐다."
라며 콘스탄티누스 1세의 행위를 비판했다. 한편 12세기의 역사가인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이 사건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파우스타 (황후)는 크리스푸스를 미친듯이 사랑했지만 쉽게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사랑하며, 종종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므로 크리스푸스는 아내를 믿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황제가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아내의 방탕함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내도 처벌했다. 파우스타는 과열된 욕조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폭력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현대 역사가인 거스리(Guthrie)는 크리스푸스의 처형은 파우스타 황후의 세 아들이 제위를 계승하도록 하기 위해 사생아인 크리스푸스를 제거하려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계획 살인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7년 크리스푸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여 후계자로 내세웠고, 크리스푸스는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는 등 충분히 능력을 보여줬는데, 굳이 그런 더러운 짓을 할 이유가 있느냐는 반박을 받고 있다. 게다가 크리스푸스를 제위 계승에서 배제하기 위한 음모였다면, 파우스타 황후까지 목욕탕에서 질식시키는 방식으로 죽여야 했느냐는 반론도 제기된다.

또 다른 설은 파우스타가
"크리스푸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
라며 모함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걸 믿고 크리스푸스를 죽였으나, 얼마 후 그녀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걸 알게되자 책임을 물어 파우스타를 고통스럽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죽인 후 기록말살형에 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설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크리스푸스의 처벌을 취소하고 명예를 회복해주지 않은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최고 권력자는 오류를 저질렀다는 걸 시인해서 권위를 손상받기보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쪽을 선택하기 마련이라며, 콘스탄티누스 1세 역시 크리스푸스가 억울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권위가 손상받는 것이 싫어서 진실을 밝혀주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인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가 큰 손자와 며느리를 제거하여 아들과 손주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녀가 파우스타를 상대로, 크리스푸스에게 강간당했다는 생각을 주입시켜서 크리스푸스를 모함하도록 유도한 뒤, 나중에 크리스푸스의 일로 감정이 상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조언을 구할 때 파우스타가 누명을 씌웠을 거라고 주장해서 역시 죽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헬레나가 그렇게까지 권력을 탐하는 여인임을 암시하는 문헌 자료나 물적 증거가 없기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다른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들 크리스푸스를 정적으로 여겨 숙청했다고 주장한다.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어 위세가 하늘을 찌를듯 하던 그의 입장에서,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언제나 승리를 거둬 군대와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큰아들을 경계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애당초 본부인에게서 낳은 세 아들에게 후계를 물려주지, 첩실에게서 얻은 큰아들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 없었고, 제위 경쟁자들을 물리칠 때까지 적당히 이용했다가 가치가 떨어지자 계모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처형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설은 세 아들의 어머니였던 파우스타를 잔혹하게 죽일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렇듯 326년 크리스푸스 황자와 파우스타 황후가 연이어 처참하게 죽은 사건에 대해 많은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가 서로 목숨을 걸고 사랑했다가 발각되어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두 사람의 간통 혐의가 사실이 아닐 거라고 여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티모시 D. 반스는
"크리스푸스는 아버지의 궁정이 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진 트리어에 주로 거주했다."
는 점을 근거로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육체적인 접촉도 없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여러 학자는 파우스타와 크리스푸스의 관계가 그리스 신화의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의 관계와 유사하다며, 그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이 신화를 모델로 하여 지어낸 이야기라고 간주한다. 또, 이교도 역사가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 점도 역사가들이 사건의 진실을 의심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캠브리지 대학의 데이비드 우즈(David Woods)는 색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크리스푸스가 파우스타를 강간해 파우스타가 임신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격노하여 패륜 행위를 저지른 크리스푸스를 처형했다. 이후 뱃속의 아기를 낙태하라고 목욕탕에 보냈으나 파우스타는 도중에 죽어버렸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헬레나는 낙태를 시도하다가 죽은 며느리를 수치스럽게 여겨 아들에게 요구하여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 모두 기록말살형에 처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파우스타가 사망한 장소인 칼리다리움이 로마 시대에 임신을 원치 않은 여인들이 자연 유산을 유도하려고 이용한 장소라는 사실을 근거로 제기된 가설이다. #

이렇듯 수많은 주장들이 제기되지만, 정설은 현재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두 사람의 모든 기록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파우스타 황후의 세 아들들은 제위에 오른 뒤에도 모후인 파우스타에게 내려진 형벌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는 수치스러운 황족으로 낙인찍혔고,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의 저자인 카이사레아 에우세비우스는 크리스푸스나 파우스타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