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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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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 (Publius Helvius Pertinax) |
출생 | 180년 알바폼페이아 |
사망 | 212년 |
아버지 | 페르티낙스 |
어머니 | 플라비아 티티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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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다섯 황제의 해의 카이사르. 로마 황제 페르티낙스의 아들.2. 생애
180년경 페르티낙스와 170년 집정관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술피키아누스의 딸 플라비아 티티아나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헬비아가 있었다. 193년 12월 31일 콤모두스 황제가 암살당하고 193년 1월 1일 아버지가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 고대 기록상에는 페르티낙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제국 동방, 특히 이집트에서 어머니와 그가 각각 아우구스타,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은 것을 기념하는 주화가 발행된 것을 볼 때 실제로는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193년 3월 28일 아버지 페르티낙스가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에게 살해되었다. 당시 그는 외할아버지 술피키아누스의 집에 있었기에 무사했다.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 장병들은 새 황제를 뽑기 위한 경매를 공개적으로 벌였다. 이때 술피키아누스가 이에 입찰해 자신을 외손자의 섭정으로 자처하며 막대한 보상금을 그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입찰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술피키아누스가 제시한 것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하면서, 만약 자신이 아닌 술피키아누스를 지명한다면 페르티낙스의 원수를 갚겠다고 압박했고, 라이투스와 근위대는 논의 끝에 율리아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193년 6월 1일 로마에 입성하고 율리아누스를 처단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을 페르티낙스의 복수자라고 선언하고 페르티낙스를 신격화하면서, 그를 페르티낙스 신전의 사제로 삼았다. 그 후 212년경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지만, 같은 해에 카라칼라가 형제 게타를 살해한 사건과 관련해 황제에게 "사르마티쿠스( 사르마티아 정복자)", "파르티쿠스( 파르티아 정복자)"에 이어 "게타쿠스(게타 정복자)"라는 칭호를 수여하자는 조롱이 섞인 농담을 했다가 카라칼라에게 밉보여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