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02:26:47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FCE774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4A3800; margin: -5px 0px"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리비아 드루실라 소(小) 안토니아 리비아 오레스틸라 롤리아 파울리나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메살리나 소(小)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포파이아 사비나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스타틸리아 메살리나
네 황제의 해 갈레리아 푼다나
플라비우스 왕조 소 도미틸라 도미티아 롱기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폼페이아 플로티나 울피아 마르키아나 살로니아 마티디아 비비아 사비나 대(大) 파우스티나 소(小) 파우스티나 루킬라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다섯 황제의 해 플라비아 티티아나 만리아 스칸틸라 디디아 클라라
세베루스 왕조 율리아 돔나 풀비아 플라우틸라
마크리누스 노니아 켈사
세베루스 왕조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 아퀼리아 세베라 안니아 파우스티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살루스티아 오르비아나
군인 황제 시대 카이킬리아 파울리나 파비아 오레스틸라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트란퀼리나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 헤레니아 에트루킬라 코르넬리아 수페라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코르넬리아 갈로니아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술피키아 드리안틸라 빅토리아 제노비아 울피아 세베리나 마그니아 우르비카
사두정치 아우렐리아 프리스카 에우트로피아 갈레리아 발레리아 발레리아 막시밀리아
콘스탄티누스 왕조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미네르비나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딸 플라비아 에우세비아 파우스티나 헬레나
요비아누스 차리토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마리나 세베라 유스티나 알비아 돔니카 플라비아 막시마 콘스탄티아 레타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플라비아 갈라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마리아 테르만티아 아일리아 풀케리아 갈라 플라키디아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레오 왕조 아일리아 마르키아 에우페미아 플라키디아 율리우스 네포스의 아내 아일리아 베리나 아일리아 아리아드네 아일리아 제노니스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에우페미아 테오도라 아일리아 소피아 아일리아 아나스타시아 콘스탄티나
포카스 레온티아
이라클리오스 왕조 파비아 에우도키아 마르티나 아우구스티나 아나스타시아 그레고리아 파우스타 아나스타시아 에우도키아 하자르의 테오도라
아나스타시오스 2세 이리니
이사브리아 왕조 마리아 안나 하자르의 이리니 마리아 에우도키아 이리니 암니아의 마리아 테오도테
니키포로스 왕조 테오파노 프로코피아
레온 5세 테오도시아
아모리아 왕조 테클라 에우프로시나 테오도라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
마케도니아 왕조 에우도키아 잉게리나 테오파노 마르티나키아 조이 자우치나 에우도키아 베아나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테오도라 엘레니 레카피니 소피아 안나 가발라 엘레니 테오파노 마마스 베르타 테오파노 테오도라 엘레니 알리피아 조이 테오도라
콤니노스 왕조 불가리아의 예카테리나
두카스 왕조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알라니아의 마리아
콤니노스 왕조 안나 달라시니 이리니 두케나 헝가리의 이리니 키예프의 도브로데이아 줄츠바흐의 베르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프랑스의 아녜스
앙겔로스 왕조 헝가리의 머르기트 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 에우도키아 앙겔리나
라스카리스 왕조 안나 앙겔리나 아르메니아의 필리파 마리 드 쿠르트네 이리니 라스카리나 호엔슈타우펜의 안나 불가리아의 엘레나 아세니나
팔레올로고스 왕조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헝가리의 언너 몬페라토의 이리니 아르메니아의 마리아 브라운슈바이크의 이리니 사보이아의 안나 이리니 아사니나 엘레니 칸타쿠지니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불가리아의 케라차 마리아 엘레니 드라가시 이리니 가틸루시오 안나 바실리예브나 몬페라토의 소피아 트라페준타의 마리아 }}}}}}}}}}}}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
Flavia Maxima Fausta
파일:플라비아 막시미아 파우스타.jpg
출생 289년
로마 제국 로마
사망 326년
로마 제국 로마
아버지 막시미아누스
어머니 에우트로피아
형제자매 막센티우스
남편 콘스탄티누스 1세
자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헬레나
1. 개요2. 생애3. 사망의 진실은?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황후.

2. 생애

289년경 로마 제국 사두정 시대 로마에서 서방의 아우구스투스(정제)였던 막시미아누스 에우트로피아 사이의 황녀로 출생했다. 막센티우스는 그녀의 오빠였다.

307년 아들 막센티우스와 갈등을 빚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귀순한 막시미아누스는 딸 파우스타를 콘스탄티누스 1세와 결혼시켰다. 그는 310년 사위인 콘스탄티누스 1세가 프랑크족을 막기 위해 라인 강 전선에 간 틈을 타 반란을 꾀했다가 실패했고, 갈리아 남부 마실리아(마르세유)로 도주했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넘겨져 그해 7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버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막센티우스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동전을 주조하고 복수를 선언했다. 한편 파우스타의 입장이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312년 10월 28일 막센티우스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처남의 머리를 창문에 꽂아 로마의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이 잔혹행위에 대한 파우스타의 반응도 전해지지 않는다.

이렇듯 아버지와 오빠가 잇따라 남편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손에 죽었지만, 그녀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는 316년 8월 7일 콘스탄티누스 2세를 낳았고, 317년 8월 7일에 콘스탄티우스 2세를 낳았으며, 320년 또는 323년에 콘스탄스를 낳았다. 이 세 아들은 부친에 의해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 또한 파우스타는 두 딸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헬레나도 낳았다. 그녀들의 출생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콘스탄티나가 언니인 것만은 확인된다. 파우스타는 '노빌리시마 페미나'(nobilissima femina: 존귀한 부인)의 지위를 가졌으며,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키니우스를 상대로 승리한 직후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아우구스타로서 존경받던 그녀는 돌연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파우스타 황후와 간통한 혐의로 모진 고문을 받은채 처형당하고, 몇 달 후 파우스타도 로마의 뜨거운 목욕탕에서 질식사한 것이다.

3. 사망의 진실은?

4세기 말에 출간된 《카이사르의 전형》은
"콘스탄티누스가 전투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로마 제국 전체를 지배하게 된 뒤, 그는 아내 파우스타의 제안에 따라 아들 크리스푸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어머니 헬레나가 손자의 죽음을 지나치게 슬퍼하며 꾸짖자, 콘스탄티누스는 파우스타를 끓는 목욕탕에 던져 죽였다"

라고 기술했다. 또한 아리우스파 역사가 필로스토르기오스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계모의 속임수에 의해 아들 크리스푸스를 사형에 처했고, 그후 그녀가 자신의 시종 중 하나와 간통한 걸 알아내자 뜨거운 욕조에 질식시키라고 명령했다.

갈리아 아르베르눔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집정관 아블라비우스가
"궁궐의 누가 지금 토성의 황금기를 원하겠는가? 우리는 네로의 다이아몬드 시대이다."

라는 시를 쓴 것에 대해,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아내 파우스타와 아들 크리스푸스를 거의 동시에 뜨거운 물로 목욕시킨 걸 빗대었으니 실로 용감하다"

라고 칭송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한편 6세기 초의 역사가 조시무스
"콘스탄티누스가 자연법에 대한 고려도 없이 크리스푸스가 계모 파우스타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혐의로 죽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이 잔혹행위에 슬퍼했고, 황제는 마치 그녀를 위로하려는듯 병보다 더 나쁜 치료제를 발랐다."

라며 콘스탄티누스 1세의 행위를 비판했다. 한편 12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이 사건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파우스타는 크리스푸스를 미친듯이 사랑했지만 쉽게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콘스탄티누스에게 크리스푸스가 자신을 사랑하며, 종종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므로 크리스푸스는 아내를 믿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황제가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아내의 방탕함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아내도 처벌했다. 파우스타는 과열된 욕조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폭력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가 서로 목숨을 걸고 사랑했다는 의혹을 받아들이길 꺼린다. 역사가 거스리(Guthrie)는 크리스푸스의 처형은 파우스타의 세 아들이 제위를 계승하게 하기 위해 사생아인 크리스푸스를 제거하려 했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계획 살인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7년 크리스푸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여 후계자로 내세웠고, 크리스푸스는 리키니우스의 해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는 등 충분히 능력을 보여줬는데, 굳이 그런 더러운 짓을 할 이유가 있느냐는 반박을 받고 있다. 게다가 크리스푸스를 제위 계승에서 배제하기 위한 음모였다면, 파우스타까지 목욕탕에서 질식시키는 방식으로 죽여야 했느냐는 반론도 제기된다. 또 다른 설은 파우스타가 "크리스푸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라고 모함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걸 믿고 크리스푸스를 죽였으나, 얼마 후 그녀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걸 알게되자 책임을 물어 그녀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 역시 그녀에게 적용된 간통 혐의와 특이한 사망 방식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게다가 크리스푸스가 무죄라는 게 나중에 밝혀졌다면, 크리스푸스에게 쏟아진 비난은 거둬지고 명예가 복권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현대의 여러 학자가 이렇듯 두 사람의 간통 혐의가 사실이 아닐 거라고 여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티모시 D. 반스는
"크리스푸스는 아버지의 궁정이 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진 트리어에 주로 거주했다"

는 점을 근거로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육체적 접촉도 없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여러 학자는 파우스타와 크리스푸스의 관계가 그리스 신화의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의 관계와 유사하다며, 그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이 신화를 모델로 하여 지어낸 이야기라고 간주한다. 또, 이교도 역사가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주장한 점도 역사가들이 사건의 진실을 의심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캠브리지 대학의 데이비드 우즈(David Woods)는 색다른 주장을 제기한다. 즉
크리스푸스가 계모인 파우스타를 강간해 파우스타가 임신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격노하여 크리스푸스를 처형했다. 이후 뱃속의 아기를 낙태하라고 목욕탕에 보냈으나 파우스타는 도중에 죽어버렸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헬레나가 낙태를 시도하다 죽은 그녀를 수치스럽게 여겨 아들에게 크리스푸스와 파우스타 모두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했다.

는 것이다. 이는 파우스타가 사망한 장소인 칼리다리움이 로마 시대에 임신을 원치 않은 여인들이 자연 유산을 유도하려고 이용한 장소라는 사실을 근거로 제기된 가설이다. #

파우스타가 의붓아들인 크리스푸스와 간통한 게 사실인지, 정치적 음모에 의해 희생당했는지, 아니면 크리스푸스에게 겁탈당한 뒤 아기를 낙태하려다가 목숨을 잃은 것인지는 현재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두 사람의 모든 기록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파우스타의 세 아들들은 제위에 오른 뒤에도 어머니인 파우스타에게 내려진 형벌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우스타는 수치스러운 황후로 낙인찍혔고,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의 저자인 카이사레아 에우세비우스는 크리스푸스나 파우스타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