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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아버지 | 울피우스 크리니투스(?) |
남편 | 아우렐리아누스 |
자녀 | 성명 미상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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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의 황후이자 아우구스타다.
2. 생애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아내가 세 번 언급되지만 이름은 별도로 나오지 않는다. 이 신뢰성 떨어지는 역사서에 따르면, 아우렐리아누스의 아내의 부친은 일리리아와 트라키아의 로마군 지휘관 울피우스 크리니투스로,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발탁되어 도나우 전선을 주로 맡아서 전장에서 맹활약했다고 한다. 크리니투스는 아우렐리아누스를 양자로 들였다고 하며, 자신의 딸을 그와 결혼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니투스의 존재를 알려주는 다른 문헌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서, 현대 학계는《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창작한 인물이라 의심하고 있다. 한편, 12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제노비아의 딸과 결혼했다고 기술했지만 신빙성은 없다. 이렇듯 기록이 희박한 그녀의 존재를 입증할 유일한 증거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시기에 주조된 화폐 뿐이다.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 왕국을 정복한 이래, 트라야누스의 이름 중 하나인 울피우스는 다키아 속주를 비롯한 도나우 전선에 흔히 쓰였다. 따라서 그녀는 다키아 속주나 도나우 전선 부근 출신일 것으로 추정되며, 도나우 전선에서 장교로 활동하던 아우렐리아누스와 결혼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음을 암시하는 화폐학적 증거가 있으나, 성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무슨 연유인지 황제에 즉위한 이래 4년간 아내에게 아우구스타 칭호를 주지 않다가 274년 가을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 정복을 축하하는 개선식이 끝난 뒤에야 수여했다. 그녀가 아우구스타가 되었음을 알리는 주화에는 군대, 원로원, 나라의 어머니(mater castrorum et senatus et patriae)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녀가 아우구스타로서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275년 9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비서 에로스와 마찰을 빚다가 트라키아의 카이노프루리움에서 에로스의 농간에 속은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죽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차기 황위를 놓고 내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로마군 장성들은 긴급 회의를 열어 긴밀히 논의한 끝에, 원로원에 차기 황제 선출을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군대가 이걸 빌미삼아 숙청하려 들지 모른다고 의심하였고, 다들 제명에 죽지 못 하는 황제가 되길 꺼렸다. 그래서 원로원은 군대의 제안을 세 번이나 거절했고, 제위 공백은 2달 가까이 이어졌다.
세베리나가 이 상황에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에 관해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제위 공백이 있던 시기 조화와 평화의 여신 콩코르디아(Concordia)를 기념하는 동전이 주조되었으며, 로마와 안티오크, 티키눔에서 세베리나의 외양을 새긴 동전의 뒷면에는 콩코르디아 여신이 담겨 있다. 화폐학자들은 이 사실을 근거로 세베리나가 제위 공백으로 내란의 기미가 감도는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이 동전을 주조하도록 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녀가 사실상 여제가 되어서 제국을 잠시나마 통치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세베리나가 실제로 통치하였음을 입증할 문헌 기록이 없으며, 해당 동전은 세 도시 외에 다른 도시에는 주조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들의 주장에 지극히 회의적이다. 다만 황제가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아우구스타인 그녀가 2달 가까운 기간 동안 제국의 행정을 담당하면서 내란이 일어나는 걸 미연에 방지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아우렐리아누스가 사망한지 2달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75살의 원로원 의원 타키투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이후 세베리나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