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21:53:50

폼페이아 플로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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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폼페이아 플로티나
Pompeia Plotina
파일:폼페이아 플로티나.jpg
출생 미상
로마제국 히스파니아 속주 테예다 라 비에라
(현재 에스카세나 델 캄포)
사망 121년 또는 122년
로마제국 그리스 속주 아테네
배우자 트라야누스
아버지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어머니 플로티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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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황후.

2. 생애

히스파니아 속주의 테예다 라 비에라(Tejada la Vieja)에서 아버지 루키우스 폼페이우스와 어머니 플로티아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네로 황제 재위 기간(54년~68년) 중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가문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부친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지주였지만, 원로원 의원은 아니었다. 트라야누스와의 결혼은 그가 법무관에 취임한 시기인 85년경에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기 98년 1월 25일 네르바 황제가 사망했을 때, 트라야누스는 라인강 주둔 로마군 사령관으로 활동 중이었다. 트라야누스는 서기 99년 늦여름이 되어서야 로마에 입성했다.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가 로마에 입성했을 때의 상황을 상세히 서술했지만, 플로티나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플로티나는 이전부터 로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플로티나는 처음 궁전에 들어갔을 때 잠시 주저하다가 자기를 지켜보는 여인들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는 여러분과 똑같은 여인으로서 이곳에 들어갑니다. 떠날 때 역시 마찬가지이길 바랍니다."

플로티나는 과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후들, 특히 발레리아 메살리나, 소 아그리피나, 포파이아 사비나 등을 반면교사로 삼은 듯하다. 그녀는 정치에 관심을 거의 가지지 않았고, 자신을 내세우길 무척 꺼렸다. 트라야누스가 로마에 입성한 직후 아우구스타 칭호를 선사했지만, 그녀는 이를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철학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121년 에피쿠로스 학파 수장이었던 포필리우스 테오티모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탄원서를 보냈을 때, 그녀는 아테네에서 테오티모스를 대신해 하드리아누스에게 탄원서를 전달했다. 또, 그녀는 에피쿠로스파 인사들에게 라틴어로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은 비문에 새겨졌다. 그 중엔 다음의 문장이 적혀 있다.
Quod siudium meum erga sectam Epicuri sit, Optime scis domine.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 역시 에피쿠로스 학파입니다.

그녀는 종종 남편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또는 자신의 수행원들과 함께 제국을 광범위하게 여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트라야누스가 다키아와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했을 때, 그녀는 이를 따라갔으며 킬리키아에서 임종하는 트라야누스의 곁을 지켰다. 하드리아누스가 그리스로 여행갔을 때 따라갔다.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으나, 여행길에 남편 및 하드리아누스와 철학적 주제를 놓고 토론하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트라야누스와의 부부관계는 화목했던 것으로 보이나, 불행히도 자식을 두지 못 했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부친이 일찍 죽은 뒤 남편에게 맡겨진 소년 하드리아누스를 무척 아꼈다. 트라야누스의 조카딸 비비아 사비나와 하드리아누스가 결혼하도록 중매해줬고, 하드리아누스가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심하게 대립했을 때, 플로티나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파르티아 전쟁 시기 하드리아누스가 시리아 속주 총독을 맡게 했다. 그러던 서기 117년 8월 초 트라야누스가 킬리키아 셀리누스 항구에서 임종을 눈앞에 두자, 플로티나는 하드리아누스를 불러서 임종을 지켜보게 했다.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인정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끊임없이 자신의 측근들과 대립했을 때 제지하지 않았고, 생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정한다고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가 하드리아누스가 아닌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L. Neratius Priscus)를 후계자로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고 쑥덕거렸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 황제 사후 원로원에 "황제가 죽기 이틀 전에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했다"라는 서신이 보내졌는데, 이 편지엔 트라야누스가 아니라 플로티나의 서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원로원이 의문을 제기하자, 플로티나는 "황제가 너무 허약해져서 서명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또다른 소문에 따르면, 플로티나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방에 누군가를 몰래 들여보내서 황제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하게 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후계자 지명을 알렸다고 한다. 심지어 플로티나와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몰래 불륜을 맺었으며, 하드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건 이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불륜에 대한 소문을 명백한 거짓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 자체는 의심되는 정황이 많으며, 로마에서 발굴된 한 묘비가 이런 음모론에 힘을 더해주는데, 이 묘비의 주인 해방노예 마르쿠스 울피우스 파이디무스(Marcus Ulpius Phaedimus)는 트라야누스의 음료 담당 시종이라고 쓰여있었고, 사망한 날짜가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3일 후였으며 사망 당시 겨우 28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종이 플로티나의 명을 받고 트라야누스의 목숨을 끊은 후 입막음으로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

하드리아누스는 플로티나 덕분에 황위에 오른 만큼 그녀를 극진히 대접했고, 플로티나가 121년 또는 122년경 아테네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9일 동안 검은 옷을 입고 그녀를 추모하는 벽화를 그리고 신전을 건설하게 하였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추도식에서 "그녀는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지만 어떤 것도 거절당하지 않았다. 그녀의 요구는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에게 부담을 주지도 않았고, 요구를 거절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정당성도 주지 않았다"라고 밝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