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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48년 |
사망 | 1390년 |
아버지 | 이반 알렉산더르 |
어머니 | 테오도라 |
남편 | 안드로니코스 4세 |
자녀 | 요안니스 7세와 두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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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4세의 황후.2. 생애
1348년경 불가리아 제2제국의 수도 터르노보에서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와 유대인 출신의 테오도라 황후 사이에서 출생했다. 초명은 케라차(Кераца)이다. 1355년 8월 17일,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5세의 장남 안드로니코스 4세와 결혼하여 마리아를 이름에 추가하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두 나라는 이 결혼동맹을 통해 오스만 베이국의 침략을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부부는 요안니스 7세와 성명이 알려지지 않은 두 딸을 낳았다.1373년, 안드로니코스 4세는 아버지 요안니스 5세와 공동 황제로 재임하던 중 부친이 오스만 베이국의 무라트 1세와 함께 아나톨리아 원정에 간 틈을 타 무라트 아들 사무지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금세 진압되었고, 무라트는 사우지를 실명시킨 뒤 요안니스 5세에게 안드로니코스 4세와 어린 아들도 실명시키라고 요구했다. 요안니스 5세는 명령에 따르면서도 약간의 자비를 베풀었다. 두 부자는 한쪽 눈만 잃은 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감금되었으며, 안드로니코스 4세의 제위 계승권은 공식적으로 박탈되었다. 이때 마리아 역시 남편과 함께 감옥에 수감되었다.
1376년 7월, 제노바인들이 안드로니코스 4세와 마리아 등을 감옥에서 탈출시켰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비밀리에 갈라타로 간 후 무라트와 접촉하여 기병과 보병 혼성군을 얻었다. 그는 그 군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한 달 동안 포위한 뒤 뚫고 들어갔다. 요안니스 5세와 나머지 황족들은 금문의 요새에서 며칠 동안 버텼지만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그들을 자신이 얼마 전까지 갇혀 있었던 아네마스 탑에 가두었다. 그 후 그는 테네도스 섬을 제노바 공화국에 양도했고, 1377년 10월 18일에 마리아와 함께 정식으로 즉위하며 어린 아들을 공동 황제인 요안니스 7세로 삼았다.
한편, 무라트는 안드로니코스 4세를 복위시킨 뒤, 그를 복위시키는 대가로 갈리폴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이에 따라 1377년 말 갈리폴리를 오스만 베이국에게 헌납했다. 한편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은 아네마스 탑에 3년간 갇혀 있다가 1379년에 탈출하여 무라트 1세의 진영으로 갔다. 마누일은 무라트에게 자신과 아버지를 복위시켜 주면 공물과 군사 지원을 더 늘리고 소아시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로마의 거점인 필라델피아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무라트는 이를 승낙해 군대를 규합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노바를 선호하는 성향이 강한 안드로니코스 4세를 제거하기 위해 소함대를 파견했다. 1379년 7월 1일,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는 하리시오스 대문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입성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와 마리아는 갈라타의 제노바인들에게 도망쳤다. 이듬해(1380), 요안니스 5세와 안드로니코스 4세,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는 각각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내전을 벌였다. 무라트는 겉으로는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를 지원했지만 암암리에 안드로니코스 4세를 지원해 양측간의 적대 관계가 지속되게 만들었다.
전쟁은 거의 2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1381년 4월에야 비로소 양측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협상 결과 안드로니코스 4세는 제위 계승권을 되찾았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도 장차 아버지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1385년 안드로니코스 4세가 사망한 뒤, 마리아는 수녀원에 들어가 마티샤(Mathissa)로 개명했다. 1390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