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01 13:00:03

기병

騎兵 / Caval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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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티스트 에두아르 드타유(Jean-Baptiste Édouard Detaille) 작, 황제 폐하 만세!(Vive L'Empereur!)》, 1891년, 유채화, 445cm x 512.5cm.
프랑스군 소속 제4 후사르 연대(4e regiment de hussards)가 프리들란트 전투에서[1] 돌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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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반 윌리암 홈즈(Sullivan William Holmes) 작,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1898년
영국군의 로열 스콧츠 그레이즈(Royal Scots Greys) 기병대가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포대를 향해 돌격하고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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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육군 기병 병과 휘장인 기병용 외날도 세이버. 현재는 미 육군 기갑, 공중강습, 기계화보병 등의 부대 중 기병부대에서 개편된 일부 부대가 전통 계승 차원에서 전투병들이 해당 휘장을 사용한다.

1. 개요2. 기병의 위력3. 기병의 결함4. 역사
4.1. 고대: 기원전 9세기 ~ 기원 후 4세기4.2. 중세: 기원 후 4 ~ 15세기
4.2.1. 중기병4.2.2. 경기병4.2.3. 중기병 VS 경기병
4.3. 중세 말: 기원 후 15~18세기4.4. 근대 : 기원 후 18~19세기4.5. 근대: 20세기4.6. 현대
4.6.1. 공중 기병대4.6.2. 기갑 기병대
5. 유명한 기병대
5.1. 현실5.2. 가상
6.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
6.1. 현실6.2. 가상
7. 각종 매체에서의 기병

1. 개요

기병은 전투 전에도, 전투 후에도 유용하다.[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4]

육군에 존재했던 을 타고 싸우는 전투병과. 똑같이 말을 탄다고 해도, 이동을 위해 말을 사용하는 기마보병, 포병, 수송 병과 등은 기병이 아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말 또한 훈련과정에서 단련된다. 말은 군마로 쓰기 위해서 최소 3년 정도는 집단 훈련과 빠른 걸음, 구보의 연습 및 사람과의 친화 등을 가르쳐야 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지속적인 훈련으로 능력을 키워나가야 했다.[5] 그런 말을 예비마까지 포함해 몇 필이나 거느려야 하는 것이 기병. 그래서 유목민처럼 목축이나 수렵 따위의 생업(生業)을 목적으로 사람과 말이 함께 자연스럽게 단련이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위적으로 기병이라는 병종을 얻기란 무척이나 힘들었다.[6] 한마디로 고급 병과.

기병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무조건 말을 타고 이동하기 때문에 기동력이 좋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건 반만 맞는 말이다. 여건에 따라서 기병은 말에서 내려 걸어다녔다. 항상 말을 타고 이동한다면 전투에 돌입했을 때 말이 이미 지쳐있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기병이 아무리 정찰대의 역할을 자주 맡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보병과 함께 다니기 때문에 보병과 보조를 맞출 겸 걷는 경우가 많았다. 겸사겸사 말도 좀 쉬고. 기병대가 진짜로 기동력이 우수한 이유는 이 가지는 수송력 때문이었다. 기병 한 명이 말 여러 필을 대동하기 때문에 수송력 또한 좋았다. 진짜 전투용 말은 어지간하면 짐을 싣지는 않았지만 상기했듯 기병은 말 여러 필을 대동한다.

냉병기가 효과적이고 화기의 위력이 좋지 않았던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전력이었다. 단적인 예로, 사무라이 같은 무사 집단이 있었던 일본을 살피면 스와 분쿠로[7]와 같은 일개 기수에게 무사들도 손쉽게 패했다. 보병으로 유명한 로마조차 등자가 없던 시절에서도 기병 30명은 보병 100명과 똑같은 투표권을 행사하게 했다.

그러나 기병이 항상 보병보다 우세한 것은 아니었는데, 돌격력이 죽어버린 기병대는 보병대보다 오히려 전투력이 떨어졌다. 기병대가 돌파를 시도했으나 적의 보병대가 완강히 버텨낸 경우가 특히 위험했다. 말은 속도를 제공해주지만 반대로 멈춰있을 때는 기병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잘 훈련된 보병의 밀집대형은 기병들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로마군의 내전에서도 카이사르 휘하 소규모 중보병대가 더 많은 수의 폼페이우스 기병대를 저지한 전과도 있고 고구려 동천왕의 중기병대는 위나라 관구검의 창병대에게 참패를 당했으며 프랑스 네 원수의 근위기병대는 영국 레드코트의 방진을 뚫지 못했다.

2. 기병의 위력

나는 다른 점에서는 스키타이 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들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따라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을 타고 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토스 『역사』 6권 46p
기사들이 대열 가운데로 모여들더니 을 부여잡고 전쟁 구호를 복창하자 보병 부대가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그 사이를 통과해 나와 사방으로 돌진해가며, 일부는 우익으로 일부는 좌익으로 또 일부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 우리군을 초토화시켰다. 나는 중앙군이 공격받는 것을 보고서 좌익으로 대피하려 했으나 그쪽은 이미 중앙보다 먼저 무너진 뒤였고, 심지어 우익의 상황은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
바하 앗딘, 『술탄 살라딘의 진귀하고 탁월한 역사』[8]
왜적은 철환(鐵丸)을 비 오듯 퍼붓는데 한번 맞기만 하면 곧바로 쓰러지고, 근접해서는 칼을 사용하는데 그 검술이 지극히 기이하니, 이들은 참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 이 적병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아서 다른 기예(技藝)는 없고 단지 궁시(弓矢)와 전마(戰馬)만이 있을 뿐인데, 그 궁시는 사거리(射距離)가 우리 군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다. 다만 그들의 전마는 힘이 매우 좋아 치달리며 진격하기에 적격이라서, 순식간에 아군(我軍) 속으로 돌입(突入)하기 때문에 아군이 저절로 그 위세에 눌려서 무너지곤 한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와 전투를 벌일 적에 접전할 때마다 꼭 패하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그들의 전마를 막을 기구를 설치하여 돌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군의 마음을 안정시켜 동요되지 않게 하고는 꿋꿋이 서서 사격을 하게 하면, 적병이 진입을 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지체하며 머뭇거릴 것이요, 그러는 사이에 선봉(先鋒)이 모두 죽으면 뒤에 오는 자들도 모두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 분명하니, 그들이 도망치는 기회를 이용해서 추격하며 사격한다면 크게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조익, 『포저집』

기병은 크게 두 가지 장점을 가지는데 하나는 충격력이고 다른 하나는 기동력이다. 충격력은 기병이 가진 질량과 속도에서 오는 것으로, 말과 기수의 무게를 합치면 적어도 반톤이 넘어가고[9] 이런 덩치가 최소 50~60km/h의 속도로 달려오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인 흉기다. 하나만으로도 이럴진데 수십, 수백 기의 기병이 한꺼번에 돌격을 실시하면 그 앞에서 대열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리 손에 긴 창을 들었다 해도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기병 돌격에 대열이 무너진다면 무장상태가 좋고 난전에 익숙한 정예 보병단이 아닌 이상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거기에 더해 기병들도 보병들이 버티는 것을 감안해서 여러 차례 돌격을 감행했다. 기동력에서 밀리는 보병으로서는 아군 기병이나 충분한 원거리 무기의 지원 없이 기병의 움직임을 제어할 길이 없고, 대응 수단이 충분지 못하면 수동적으로 방어를 하면서 아군의 증원이나 지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기병 자체가 고급 병종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숙련도도 높아서 쓸 수 있는 전법의 다양성이 많았다. 즉 기병 지휘관이 기동성과 숙련병으로 주도권을 잡는 것이 쉬웠기 때문에 보병과 기병의 싸움은 기병이 대부분 우위를 차지했다. 만약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데다 원거리 화력이 충분하고, 보병이 숙련병이라 기병의 돌격에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보병 부대가 전투의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기병 부대가 보조병의 지원을 받거나 피해를 감수하고 정면돌격해서 어떻게든 이기는 경우가 더 흔했다. 보병 위주의 군대로 기병을 몰살한 몇몇 전투가 수백 년 넘게 회자되는 것은 그게 그만큼 어렵고 또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망치와 모루에서 망치 역할에 필수적이라든지 해서 전략전술적으로도 유리한 점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아 한니발 같은 명장도 기병 열세면 패하기도 했다. 보병으로도 망치 역할을 한 경우도 있지만 중국처럼 농지 개간 등으로 인해 기병이 부족한 경우에만 해당되고 그런 나라들조차 망치 역할로는 기병을 더 선호했다.

기병의 기동력은 빠르게 변하는 전장상황에서 대응력을 높임으로써 중요한 전술적 우위를 가져다 주었다. 거기에 단순히 기마한 것만으로도 전투 현장에서 보병보다 넓은 시야가 보장되며, 각종 보고와 명령을 빠르게 주고받는 정찰 및 전령 역할에도 유리했다. 그렇기에 기병은 오랜 세월 동안 전장의 주역으로서 활약해왔다.

조익이 설명하는 막을 기구를 설치하고 활을 쏘면 된다는것도 백년전쟁때 영국이 프랑스 상대로 연승했던 비슷한 사례가 있지만(나중에는 장궁병보다 더 사거리 긴 프랑스 포병을 잘 활용하면서 깨졌지만) 기병이 기동력을 이용해서 방비를 잘한 곳에서는 상대를 안 하고 다른 곳들을 공략하는 방법도 있기에 기병이 전장에서 유리할 수 있었다.

랜스 차징, 스웜 전술, 파르티안 샷, 망치와 모루 전술 참고

3. 기병의 결함

그런 기병이지만 결함도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는 지형[10]이나 날씨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 폭우가 쏟아지면 정말 답이 없는데 특히 물렁한 지형에서 폭우가 쏟아진다면 정말 제대로 망했어요. 말의 다리가 논두렁 같은 지형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면 완전히 살아있는 과녁으로 전락하고 만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강의 기병을 지휘했던 맹장 신립 탄금대 전투에 출진했으나 하필 그날 탄금대에 비가 오는 바람에 기병이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하게 패배했으며 신립 역시 고군분투 했지만 결국 전사했다.

둘째는 방진에 약하다는 점이다. 단순히 방진이라서가 아니라, 특히 말이 달릴 만한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공간에서 세워진 방진에 취약하다. 삼국지에서는 공손찬이 기병의 달인이었고 공손찬의 백마의종이라면 명성이 자자한 기병대였다. 그 공손찬의 4만 기병을 강변의 다리를 하나 두고 국의가 배치한 단 800명의 방진으로 완벽하게 깨버렸다.

셋째는 공성전에서 매우 불리한 점인데, 특히 공격쪽일 때 그게 두드러진다. 궁병이 제일 유리한 공성전 특성상 기병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 수비를 할 때에는 말에서 내려 돌던지기라도 할 수 있지만 공격을 할 때에는 말은 사다리를 탈 수 없으므로 화살이나 돌에 맞아가며 성문이나 두들겨야한다. 보병이 사다리타고 성벽을 넘고 궁병은 성벽에 붙은 병사들을 때려잡고 있는 동안 말이다.

넷째는 전술 전략이 아닌 병참학적 문제로, 기병을 훈련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기병은 인간인 기병 뿐 아니라 동물인 군마가 필수적인데, 군마는 가장 좋은 말을 골라 쓰는데다 이를 사육해 훈련시키고 먹이는 비용이 장난 아니었다. 일례로 미국 남북전쟁 당시 기병대 1개 연대를 조직하는 데 당시 돈으로 30만 달러(지금 돈으로 약 80억원), 유지하는 데 연간 10만 달러(지금 돈으로 약 13억원)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지금이야 겨우 수십~수백억원 단위의 군사 비용에 눈 하나 깜짝할 미국이 아니지만 당시 이는 엄청난 부담이었으며 남군과 북군 모두 개전 초에는 비용 문제 때문에 기병대를 적극 활용하지 못했다.[11]

4. 역사

4.1. 고대: 기원전 9세기 ~ 기원 후 4세기

고대은 품종 개량이 되지 않아 크기부터 작았다.[12] 승마도구인 마구(馬具)가 발달하지 않았고, 일부 기마민족을 제외하고는 직접 말을 타는 일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차가 많이 등장한다.[13] 기병은 보통 정찰용으로 쓰거나 말을 타고 투창의 용도로 사용하였고 말 위에서 칼이나 활을 쓰지는 않았다. 실제 전투는 말에서 내려서 하는 기동 보병이 많았다. 후대의 용기병 또는 현대의 기계화보병과 유사한데, 말의 기동성만 이용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중세에도 이런 식으로 기병을 운용하였다.

어쨌든 이후 말의 품종 개량과 마구 발달을 통해 무장한 전사(戰士)를 태우고도 빠르게 질주할 수 있는 군마가 탄생하면서 전차는 도태되고 중기병(重騎兵)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등자없이 승마하여 칼과, 창, 투창, 활 등을 다루는 훈련영상.

고대에는 아직 등자가 발명되지 않았고, 안장도 제대로 개량되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낙마하지 않고 달리면서 창과 검을 자유롭게 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물론 초기에는 추격전과 투창 등을 이용한 유격전이 많았다가, 마케도니아 왕국 필리포스 2세 때부터 장창을 들고 돌격하는 기병이 충돌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후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기병들도 창을 쥐고 적 보병을 향해 돌격하여 진형을 무너뜨리는 기록이 많이 나오고, 실제로 수차례 승마실험을 통하여서 검증도 되었다. 물론 안장과 등자가 있는 것에 비해 승마 안정감이 떨어졌고, 중세 유럽처럼 겨드랑이에 창을 끼워놓고 돌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지대의 유목 민족들은 말을 타고 싸우는 전투법을 일찍부터 썼는데, 중국에서는 조나라 무령왕이 이들을 본떠 호복기사(호복을 입은 기마무사)라는 기병부대를 편성하여 승마에 적합한 의복과 무장을 갖추고 활을 쏘는 궁기병을 편성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 진나라에서는 냉병기로 무장한 기병부대를 별도로 편성하였는데, 장평대전에서 백기가 기병대로 적의 보급로를 끊어서 승기를 잡은 일화가 유명하다.

4.1.1. 경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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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조나라의 호복기사. 말이 대단히 작은데, 잘못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시 마종의 크기를 고려하여 그린 것이다.

고대의 전장에서 기병이 처음으로 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을 사용하는 경기병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활을 든 기병대가 제일 먼저 등장하였으며 일찍이 아시리아 제국에서도 주요 병과로 취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기병대에 착안하여 등장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오랑캐 옷을 갖춘 기마무사)들 역시 을 쏘는 경기병이었다.

경기병은 서쪽으로는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로부터 동쪽으로는 만주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목민들의 주력 병종이었다. 유목민들에게는 목축과 수렵이 생계수단이었기에 고대부터 자연스럽게 경기병이 육성되었고, 광활한 초원은 활을 필요가 아닌 필수품으로 만들었기에 양다리만으로 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양손을 이용해 활을 쏘았다고 한다.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스스로를 '활의 백성'이라 자처했으며 중국의 문헌에도 이들을 '장성 이북 궁술의 나라'라고 일컫는 표현들이 보인다.

빠른 기동력을 갖춘 경기병들이 다수 모이면 칼이나 창 등의 냉병기를 든 보병은 그저 과녁일 뿐이고 중기병조차도 대응이 힘들었다. 똑같이 원거리 무기를 갖추지 않았으면 이들의 화살공격에 맞설 수 없었고, 무장이 가벼워 빠른 탓에 말을 타고도 이들을 추격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병을 많이 보유한 유목민족들은 정주민들에겐 악몽같은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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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의 궁기병

이 활을 든 경기병들은 다른 병과들처럼 대오를 맞춰 적과 교전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여러 뭉텅이로 쪼개어 적을 에워싼 뒤 벌레떼(swarm)처럼 우르르 달려들어 공격하다가 우르르 빠지는 것을 반복하였다. 반복되는 화살 공격에 적들이 손실을 견디지 못해 전투의지를 상실하거나, 대오가 무너지거나 할 때 중기병 등을 이용한 돌격을 겸하여 적을 무너뜨리기도 했는데 카르헤 전투가 대표적이다.

다만 근접전에서는 불리하였고 마상사격이 일반 사격에 비해 어렵고 사거리가 짧아서, 보병들이 전투력을 온존하고 있다가 역습, 경기병들에게 근접전을 강요함으로써 패배시키거나, 보병의 화망에 압도당해 경기병이 패배한 경우도 많았다. 보병의 경우는 사거리가 더욱 길고 관통력 운동에너지가 모두 큰 롱보우/장궁을 사용한 반면 경기병은 말위에서 휘두르기 좋게(말위에서 사용할 때 덜 거치적거리는) 숏보우/단궁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컨데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때에 조나라 이목이 흉노군을 유인하여 백병전을 펼쳐 흉노군 10만 명을 몰살한 적이 있었고, 한나라의 흉노 원정에서는 곽거병이나 이감이 기병대로 돌격하여 백병전으로 이들을 제압한 이력이 있었다. 삼국시대 때는 원소군의 국의가 활을 쏘며 전진해오는 공손찬의 백마의종 기병부대를 방진과 쇠뇌를 이용하여 격퇴한 바 있고, 위나라의 전예 조창과 함께 수송용 수레를 원형으로 빙 둘러 장애물을 삼아 원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쇠뇌를 쏘면서 오환의 기병대를 격퇴한 바 있다. 로마에서는 트라야누스 집권기에 기병과 궁병을 대규모로 육성하여 파르티아 원정을 펼치어 유목민족 기병대를 제압하기도 하였다.

4.1.2. 중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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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카타프락토이

인류 최초의 기병은 경기병이었으나, 말의 품종과 마구가 개량되어 보다 무거운 무게를 지탱할 수 있어져 중기병이 탄생했다. 최초의 중기병은 고대 중동에서 등장한 카타프락토이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기원전 10~7세기경에 아시리아 기병의 화려한 장식에 영향을 받아 마갑을 입힌 카타프락토이가 등장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렇게 말과 기수를 갑주로 감싼 중장기병은 기원전 5~6세기경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때 화살에 잘 견디기 위해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때 중장기병은 철제 흉갑, 투구, 그리고 말 전면만 가리는 철제 마갑을 씌운 모습이었다. 활과 단창, 철퇴와 장검으로 무장하여 돌격과 돌파보다는 말을 타고 적을 기습하거나, 측면과 후방교란, 그리고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활을 쏘는 적 궁기병 혹은 궁병과 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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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왕국의 중기병 헤타이로이

기병의 돌격전술은 조금 나중인 기원전 4세기경 마케도니아 왕국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즐겨 쓰면서 대외 원정을 다니다 보니 아시아 고원에까지 알려졌다. 보병과 협동하여 기병의 충돌력을 활용하는 이 전술을 망치와 모루 전술이라고 한다. 파르티아, 박트리아의 유목민들은 철제비늘갑주와 마갑을 씌우고, 장창을 도입한 중장기병으로 돌격과 충격전술을 구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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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중기병 간의 교전 장면. 양손으로 창을 쥐고 어깨 위로 들어서 찌르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시기 중기병은 아직 안장의 발달이 미흡하고 등자도 없어 후대의 본격적인 중기병과는 차이가 있었다. 보통 말 위에서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는 방식인 카우치드 랜스가 아니라 양손으로 창을 움켜쥐고 내지르거나 어깨 위로 들어서 찌르는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승마 시 안정감이 떨어졌고 양팔을 모두 사용하는 동작의 한계상 전투 간격이 넓어 조밀한 전투대형을 이루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육중한 갑주와 말의 돌파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당시 이들 중기병들이 막강한 활약을 펼치는가 하면 고대 지중해 유역에서도 중기병은 많은 활약을 펼쳤다. 흔히 궁기병에 로마군이 유린됐다고 알려진 카르헤 전투에서도 이들 중기병이 돌격전을 벌여 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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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카타프락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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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에 남아있는 개마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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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기마인물형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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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수나라 시기까지의 중기병 발전을 카툰풍으로 묘사한 그림.

동아시아에서는 기원후 2~3세기경 삼국시대까지도 마갑을 입힌 중장기병의 수가 없거나 매우 적었으며 본격적으로 대량 운영된 것은 5호 16국 시대부터였다. 마갑이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개발되었는지는 아니면 유목민들을 통해 중앙아시아로부터 수입된 건지는 불분명하지만, 기원후 2~4세기경 선비족이 먼저 중장기병을 대량 운용하기 시작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한국은 서기 3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고구려의 안악 3호 고분에 개마무사가 나타나, 그 쯤에 중장기병이 운영된 걸로 추정된다. 이밖에 가야에 기마인물형 토기나 마갑 유물 등이 발굴되어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이 한반도 남부에서도 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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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의 등장이 늦다는 것이지, 동아시아에서도 중기병을 이용한 충격 전술은 일찍부터 존재하였다. 본격적으로 기병을 이용한 돌격전이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경 한나라 흉노 원정 당시로, 이 무렵부터 기병대가 본격적인 전투병력으로 대량 육성되면서 이광의 아들 이감이 흉노 기병대에게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거나 곽거병이 기병 800명을 이끌고 흉노군 2천 명을 궤멸하는 등 주로 기병 간 돌격전이 많이 펼쳐졌다.

이후 기원후 2세기경 삼국시대때에 여포가 기병을 이끌고 장연에게 돌격해 승리한 기록이 있고, 조인이 기병을 이끌고 돌격전을 펼쳐 포위당한 아군을 구출한 기록들이 등장해 기병대가 보병에게 돌격한 사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 밖에 관우가 말을 타고 돌격하여 적 지휘관인 안량을 살해한 기록도 있으며 기원후 240년경에 고구려의 동천왕이 5천의 철기병(중장기병인지는 불분명)으로 위나라 군대에 돌격하여 위나라의 관구검이 방진으로 맞섰다는 기록이 있다.

4.2. 중세: 기원 후 4 ~ 15세기

지역을 불문하고 고대에도 기병대는 중요했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즈음의 서유럽에서는 기병대의 역할은 종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미 동서 로마제국에서도 보병보다 중무장한 기병대가 전력의 주축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세워진 프랑크 왕국의 군대도 초기에는 보병이 중심이었으나, 8세기 중엽부터 군벌들에게 봉토를 나눠주고 각각 사병을 육성하고 기마병을 육성하기 수월한 봉건제도를 실시하였고, 이미 그 전부터 기사계급이 성장하여 기병의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고 활약상도 점점 증가하였다. 주로 창이나 냉병기를 이용해 백병전 위주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는 카우치드랜스라는 창 파지법이 유행하면서 창을 든 중기병대가 주축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과 중동에서는 국가 단위로 대규모로 기병을 육성하였는데, 서유럽에서 중기병들이 대거 활약하는 것에 비해, 동로마와 중동의 중기병대는 측면이나 후방의 돌파를 위해 가끔 쓰이는 것에 그쳤고 서유럽과 달리 궁기병의 활용이 매우 빈번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활을 이용한 경기병이 존재하였으며, 후한시대부터 기병을 이용한 충돌 및 돌격전술이 부분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남북조시대부터는 마갑까지 갖춘 중무장기병대의 돌격전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며 한민족 국가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개마무사를 다룬 벽화가 등장하거나, 마구, 마갑 등이 출토되기도 한다.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농경국가임에도 기병 비중이 은근히 높은 편인데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1018년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기병 12,000기를 매복시켜 거란군을 격파한 바 있으며, 고려사 병지에 따르면 북계의 주진군 총병력이 4만 명인데 그중 기병이 약 5천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체 병력 중에 8분의 1이 기병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기병으로 윤관이 창설한 별무반의 신기군을 들 수 있으며, 고려 말 홍건적 왜구를 상대로 싸운 인간흉기 이성계 사병 2천 명도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황산전투 이후 왜구가 타고다니던 말 1,600여 필을 노획했다.

4.2.1. 중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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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이란계 민족 소그드족의 허리띠 장식. 5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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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전투와 갑주검술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13세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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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소드와 런들대거로 전투를 벌이는 트랜지셔널 아머 시대의 서유럽 기병들. 14세기 후반 그림

동로마 제국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중기병대와 궁기병대의 제병협동 전술이나 돌파전술이 유행하였고, 서로마 제국 멸망 후 프랑크 왕국에서도 백병전을 하는 기마병의 사회적 위치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후한~ 남북조 시대를 기점으로 동아시아 역시 중기병의 역할이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에서는 남북조시대에는 마갑을 갖춘 선비족 기병대 등이 활약하는 등 3~4세기 이후부터 마갑을 갖춘 중무장 기병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한국에서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중장기병이 육성되고 운용되었다. 삼국시대 공손찬의 백마의종도 마찬가지지만, 유럽의 중기병과 달리 동아시아나,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에서는 기병대열에 궁기병을 섞어서 활을 쏘면서 돌격하는 중기병 대열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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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드 랜스

서기 9~10세기에는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돌진하는 "카우치드 랜스(Couched Lance)"라는 새로운 기병전술이 등장했다. 등자와 함께 등장한 이 기술이 서유럽에서 기병이 활약할 수 있게 더욱 보탬이 되었다. 카우치드 랜스는 창을 잡을 때 겨드랑이를 활용함으로써 한손만으로도 창을 안정적으로 쥘 수 있었고, 남은 다른 한손으로는 방패를 쥐어 화살이나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으며[14], 양손으로 창을 쥐는 것과 달리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거나 양팔의 간격이 넓지 않아 좌우로 간격을 좁혀 집단으로 대열을 이루기도 수월하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린 화이트(Lynn Townsend White Jr)에 의하면 이미 서기 10세기 이전부터 동로마 제국 이슬람에서는 흔하게 쓰였다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몽골 등이 많이 사용하여 수렵이나 전투를 그린 회화에서 많이 보이고, 청나라 시대에 기병을 그린 삽화에서도 확인된다. 10세기 이전 서유럽에서는 마상전투를 다룬 그림이나 태피스트리에서 창을 쓸 때는 여전히 말 위에서 두 손으로 창을 잡은 모습이 확인된다.

그러면서도 중기병을 서유럽에서는 동로마 제국이나 이슬람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동로마와 중동은 여전히 중기병대를 적진의 측면이나 후방을 타격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으나, 서유럽에서는 중기병을 보병/기병, 정면/측면을 가리지않고 적진에게 돌파하는 용도로 수시로 사용하고, 돌격의 횟수도 단번이 아닌 여러 차레로 나누어 축차돌격을 감행하는 등 전투 내내 말이 탈진하여 쓰러질 정도로 창을든 중기병들의 돌격을 많이 활용하였다.[15] 이를 통해 11세기 말에 벌어진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부터 이미 서유럽의 중기병대는 근접전에 한해서 이슬람권의 기병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릴라이움 전투로, 앞뒤로 서유럽 중기병대의 돌격을 받은 아랍 기병대는 패주를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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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추세에 맞춰 창의 형태도 한손으로 잡고 겨드랑이에 끼기 쉽도록 변화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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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용 갑옷의 오른쪽 가슴 부위에는 창받침이 생겨났다.

또한 카우치드 랜스의 도입으로 기병대 대열도 약간 변화하였는데, 종전에는 마름모나, 삼각형, 쐐기형으로 대열을 편성하여 대열을 두껍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가로로 길고 얇게 펼쳐진 횡대 대열을 꾸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열을 가로로 길게 배치할수록 창을 이용하여 적을 더 많이 찌르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대열이 얇아 최초 돌격이 저지되었을 경우 병력을 후퇴시켜 재정비한 후 재돌격하는 것이 두꺼운 대열에 비해 더 수월하였다.

이것 말고도 중장갑화로 서유럽의 기병들은 막강한 돌격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동로마 역사가 안나 콤네나는 서유럽의 노르만인 기병대를 보고 " 거인의 힘으로 당긴 화살을 튕겨내며 바빌론의 성벽마저 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라고 평가하였고, 실제로 서유럽의 보두앵 4세는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 500명과 성당 기사단 8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해 2만 6천명의 살라딘 군대를 박살내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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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중기병의 갑옷이라고 해봐야 체인메일이었을 시절이라 이후 휘황찬란한 플레이트 아머가 도입되기 훨씬 전이었으며 말도 이후의 육중한 체구의 군마가 아니라 조랑말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의 소형마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옷을 갖춰입은 중기병대의 돌파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이때까지도 기병 돌격에 대해 대처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장창병들이 빼곡히 늘어서서 돌격을 저지하거나 똑같이 중기병을 돌격시켜 맞불을 놓거나, 그도 아니면 지형과 요새 등의 기물을 이용해야 했는데 장창병들의 경우는 기병 돌격에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버틸 강단있는 정예 보병대일 필요가 있었으며 중기병 맞돌격의 경우는 장비와 기량 차이에 심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문제가 있었고 마지막의 경우는 전술적인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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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중기병.

동시대 동아시아에서는 거란, 여진족 등 철광을 확보한 유목민족들이 집중적으로 중기병을 육성, 그 군사력으로 북송을 재패하고 만주, 연해주, 북 중국을 장악하면서 한때를 호령했으며, 남송 고려역시 마갑을 씌운 중장기병을 운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몽골족 역시 군의 편성에서 중장기병을 많이 운영하였다. 마갑을 씌운 중무장기병은 원나라 말기까지, 멀리는 청나라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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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갑주와 마갑

조선은 초기에는 중기병을 40%, 활을 다루는 궁기병을 60%로 구성했으나 세조대 궁기병 비중을 대폭 늘리면서 중기병은 사실상 없어지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주로 궁기병들만 남게 된다. 단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에 창기병의 모습이 그려져있는것으로 보아 중기병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편곤등의 근접무기들이 자리잡으면서 서양과 비슷한 방향으로 기병 활동 성격이 변하게 된다. 최형국, 『조선후기 기병전술과 마상무예』 조선군 환도는 일본 와키자시와 비교해도 짧을 정도로 좀 많이 짧기 때문.

4.2.2. 경기병

중세 전장에서 경기병이 자주 맡은 역할은 정찰 및 적진 교란과 전투 종반에 후퇴하는 적의 추격이었다. 적이 진형을 구성하고 있을 때 경기병이 먼저 나가서 전반적으로 찔러보고 약점을 찾는 식이거나 중기병의 돌파 시에 함께 나아가 적진에 사격을 가해 중기병의 돌파를 쉽게 해주는 식이다. 실제로 금나라의 기병 편제는 항상 중기병과 경기병이 한 부대로 편성되었다. 이 경우 중기병의 돌파가 쉬워질 뿐 아니라 적도 중기병으로 맞대응할 경우 충돌 전에 먼저 적의 숫자와 기세를 꺾어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전투의 종반에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전력을 가장 확실하게 줄이는 데에 경기병만큼 좋은 병과도 없었다.

고대에서부터 최초의 기병은 경기병[16]이었고, 중세에도 활을 든 경기병은 꽤 많은 활약을 했다. 활약의 내용은 고대나 중세나 크게 변하지 않아서, 말을 타고 계속 이동하면서 적에게 화살을 퍼부어서 타격을 입히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12세기 초반에는 경무장한 금나라 기병 17명이 자기들을 쫓아오는 2,000여 명의 북송 보병대를 활만 쏘아 일방적으로 유린하여 궤멸시킨 일화가 있다.[17]

몽골 제국의 경기병은 두 종류의 합성궁과 세 종류의 화살을 사용했는데, 활의 사용은 단순한 엄호, 견제를 넘어서 적의 대열을 와해시키고 타격을 주는 역할까지 담당하였다. 중기병도 다수 존재했으나 역시 동시대의 기병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경장이고, 전투의 주력은 주로 활을 든 경기병이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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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공국 중보병을 쏘아죽인 몽골 경기병.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나라들에서 유독 활을 이용한 경기병을 많이 운용하였는데, 예컨대 유럽의 헝가리 중동의 여러 이란계, 튀르크계 제국들이나 중국이 많은 경기병을 운용했다. 그 중에서 사산 왕조 맘루크에서는 중무장한 기병이 활을 쏘며 돌격하는 전술로 유명했다. 조선은 정책적으로 궁기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였고, 일본의 초기 사무라이들 또한 마상 궁술을 중시 여겼다. 또한 카우치드 랜스가 발달하기 전 일부 서유럽 기사들도 마상궁술을 사용하곤 했다.

4.2.3. 중기병 VS 경기병

서양이든 동양이든, 근현대의 역사가들은 경기병을 중기병보다 우위에 두었으며, 중기병의 갑옷을 겁쟁이의 자기위안급으로 폄하하기까지 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봉건기사의 갑주를 '리더십의 결여'의 산물로 평하며 유럽 중기병의 갑옷이 기병의 생명인 기동성과 화력을 떨어뜨리고 실질적으로 기습을 불가능하게 만든 반면, 몽골의 경기병은 기동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유기적인 전술을 펼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존 키건은 날붙이를 부딪히는 것을 고집했던 중기병의 전법을 육탄전을 고무하던 게르만족 특유의 군사문화와 결부하기도 했다. 바투가 행한 서방원정이 이를 증명한다고 믿었다. 바투의 몽골군의 주력은 경장 궁기병이며, 이들이 발슈타트에서 동유럽 최강의 튜튼기사단을 꺾고, 슐레지엔 공 하인리히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 연합군 역시 격파했다는 인식이 현대까지도 지배적이었다. 물론 몽골군도 돌격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동시대의 중기병에 비하면 비교적 경장에 가까웠다. 카르피니는 당시의 몽골군을 가죽과 철판을 입은 군대에 비유했다. 첨언하자면 카르피니가 한 말은 "그때의 몽골군은 거지꼴을 하고 왔는데 이젠 우리한테서 빼앗은 장비들로 잘 무장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특히 레그니차 전투는 유럽식 중기병과 중앙아시아 경기병의 충돌로 서양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오히려 서양 쪽에서 많은 의의를 두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프로이센이 리그니츠의 전장 위에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바람에 숱하게 강의주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주로 전장에서의 기동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사례로 차용되며 당시 유럽식의 충격기병이 경장비의 기병을 상대하는데 겪었던 어려움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위키피디아에도 언급이 있다.

하지만 몽골군 전력의 20~40%은 항시 중기병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비록 유목민 징집병이긴 했지만 유목민의 특성상 사냥[18]과 약탈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 자체가 전투훈련의 연속이어서 일반적인 농경민족의 군대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괜히 화약무기가 대량으로 보급될 때까지 농경국가가 유목국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게 아니다. 그리고 몽골군은 말이 사람보다 많아서 무장을 해도 군마의 체력에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리그니츠 전투에서 튜튼기사단의 참전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사안이며, 튜튼기사단 참전의 주요 출처인 얀 듀고츠 연대기에서 전투에 참가, 전사했다고 기록된 기사단장 포포 본 오스테른의 사망연대가 리그니츠 전투 10여 년 후고, 당시 기사단장도 아니었으며, 리그니츠 전투 직후 프로이센에 대한 튜튼기사단의 대규모 공세를 미뤄보면 리그니츠 전투에 튜튼기사단이 참전했더라도 주전력의 참가는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바투가 직접 지휘한 사조강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숫적으로 열세한 상황인 데다 귀족들이 등을 돌려 추가적인 지원을 받기 힘들었고 전력의 상당수가 보병이라 기병전에서 불리한데도 불구 사조강을 배경으로 몽골군의 기동을 제한시키고 백병전을 강요, 오히려 몽골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바투가 직접 가신들과 친위대를 이끌고 돌격해서 전황을 안정시키고 수부타이군이 뒤늦게 도하에 성공해서 헝가리군의 배후를 습격해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승리와 패배가 한끝차이인 상황이었으며 40년 후 헝가리군은 이때보다 더더욱 중무장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몽골계 노가이칸의 침공 당시 성공적으로 결전을 강요, 격파한 바 있다. 즉 지휘관이 우수하고 시기가 잘 맞아떨어지고 운을 제대로 탄 것이 몽골의 최고의 장점이다. 이런 우수한 지휘관이 없고 오히려 상대편에 우수한 지휘관이 있는 원 말기의 경우 기병대의 무장이 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의 병사들에게 깨져나갔다.

고구려에서는 유목민족들의 경기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으로, 영토였던 요동지역에서 생산되었던 많은 양의 우수한 철을 바탕으로 중장기병을 양성했으며 이들을 바탕으로 남만주와 중만주를 지배하였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뒤 들어선 요나라와 금나라에서도 중장기병을 운영했고 청나라도 중장기병을 운영했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직접적으로 싸우는 데는 중장기병이 우세했다..

이는 아랍에서도 드러나는데, 이집트 맘루크 중기병과의 전투에서 몽골기병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맘루크 기병과의 근접전을 강요받았고, 그 근접전에서 몽골기병은 크게 패한다. 다만 맘루크가 근접전만 했던 것은 아니다. 맘루크는 기마술, 창술, 검술, 궁술에 모두 통달해야 했으며 4 과목에 대한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인잘루트에서는 몽골군이 돌격해오자 맘루크들도 활을 쏘며 응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맘루크들은 근접전'만' 잘한 것이 아니라 근접전'도' 잘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는데 맘루크와 싸운 몽골군은 사실은 대부분 투르크인들로 구성되었다. 즉 당시 몽골의 인구는 150만-200만 정도로 추정되는데 실제 전쟁에 나가는 성인 남자의 수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제 몽골군의 다수는 몽골에 점령당한 지배지의 민족들이었고 몽골인은 장교나 지휘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장 일본 정벌을 떠난 몽골군도 대부분은 남송의 투항병들이었다. 따라서 맘루크와 싸운 몽골군도 실제로는 맘루크와 같은 투르크인들이었고,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지휘했던 키트부카도 투르크인이었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이슬람 경기병은 번번히 유럽의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나중에는 동급의 중기병이 이에 대항하여 유사한 형태로 돌격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http://basiloikon.egloos.com/1642282 여기에도 드러나듯이 중무장한 로마군이 숫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튀르크군을 이겨버렸다.

중기병은 전장에서 증명하듯 매우 강력한 병종이었으며 중기병 무시 풍조는 17-19세기에 걸쳐 유럽에 팽배했던 중세 무시 사고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경기병과 중기병중 어느 쪽이 언제나 우세하다고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으며 '전투의 상황에 따라' 그 효력이 다른 병종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는것이 두차례의 도릴라이움 전투로 십자군 중기병이 근접전을 강요한 1차 도릴라이움전투에서는 십자군이 승리했지만 투르크 궁기병의 스웜전술에 휘말인 2차 도릴라이움 전투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십자군이 궤멸당했다. 근접전에서는 중기병이 우세한 반면, 경기병은 적과 직접 충돌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데에 더 유용했다.[19] 어차피 대부분의 전쟁은 전투에서 승부가 나기 때문에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경기병이 보조하는 형태로 병력을 구성했다.

애당초 경기병>>>중기병 이라는 단순한 논리대로라면 중앙아시아,서아시아,동아시아,유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가들이 죄다 경기병만 죽어라 양성하지 중장기병을 양성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화약무기의 발달 이전까지 대다수의 문화권이 심혈을 기울여 중장기병을 육성했고 유목민조차 정복한 땅의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되면 최대한 중장기병을 많이 육성했다. 애당초 중장기병 자체가 경기병을 카운터 치기 위해 나온 병과다

4.3. 중세 말: 기원 후 15~18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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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군의 화기에 의해 저지당하는 프랑스 중기병의 돌격. 1503년에 벌어진 체리뇰라 전투(Battle of Ceriñola)를 다룬 그림이다.

튼튼한 갑옷과 말의 빠른 기동성으로 움직이는 중장기병은 냉병기 시대의 현대전차라 할 수 있을 만큼 위력을 발휘했지만, 이후 화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점차 힘을 잃어간다. 이러한 중장 창기병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폴란드 윙드 후사르로 당시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던 몇 배의 파이크 보병 방진을 돌파해 버리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선보이기도 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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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는 예외적인 것으로, 16세기부터 서서히 기병의 주무장이 권총으로 바뀌게 된다.[21]

기병끼리의 전투에서 총으로 원거리 사격을 가하는 것이 창으로 다가가 찌르는 것보다 유리하고, 총을 쏘아대는 보병들에게 기존의 중기병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특히 1587년 쿠트라 전투(Battle of Coutras)에서는 프랑스 국왕군의 중기병이 위그노군의 총기병에게 패배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중기병들인 돌격기병들이 쇠퇴하고, 사격 위주로 싸우는 총기병대가 오와 열마다 번갈아 교차 사격을 하는 카라콜 전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병화기의 화력이 기병화기보다 위력이 높았기 때문에 카라콜의 변형전술인 신교도 카라콜, 스네일(snail), 리마콘(limacon) 등이 그 주를 이루다가 30년전쟁에서 스웨덴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총을 쏜 뒤 돌격하는 " 하카펠리타트"를 육성함으로써 돌격기병을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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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갑이 줄어들고 기마병이 입는 갑옷도 변화하였는데, 화기가 발달하기전에는 전신 판금갑옷을 입다가, 화기가 발달하고 나서부터는 총알을 막으면서 사람이 입고 다닐만한 무게를 지니기 위해 맞아도 덜 치명적인 부위의 갑옷을 없애는 대신, 중요 부위를 매우 두껍게 하는 갑옷양식이 유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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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기병대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병대의 전술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명나라 군대는 마갑을 폐지하고 핸드 캐논 등을 활용하는 기병대를 같이 운용하기도 하였고, 청나라 군대는 별도의 편성없이 기병대가 기병무기 전반을 다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도 부분적으로 마갑까지 갖춘 중장기병을 잔존시켜 운영하기도 하였고, 사르후 전투에서는 조선군을 상대로 돌격전을 펼쳐 승리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창기병들은 경기병의 장비를 갖추어 빠르게 이동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경우 일찍이 창기병이 사장되었으며, 왜란 이후 조총수 중심으로 편제가 뒤바뀜에 따라 서양 국가들처럼 다른 기병-특히 궁기병-들의 입지도 매우 좁아진다. 또한 인구 증가로 인해 초지가 농지로 개간되며 말을 키울만 한 지역 자체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점차적으로 유럽의 용기병이나 후사르를 결합한 듯한 운용법을 보이게 된다. 거점 방어 시에는 하마하여 가지고 있던 총이나 활로 보병들과 함께 방어전을 수행하였으며, 야전에서는 수색대로 활동하거나 포병과 보병을 엄호하였다. 그러다 화력에 짓눌린 적이 후퇴하기 시작하면 말을 타고 돌진하여 편곤이나 기병용 환도를 휘두르며 그 뒤를 추격하여 추가적인 피해를 입히고 전과를 확대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역할이었다. 특히 편곤이 매우 자주 쓰였는데, 말 위에서 편곤을 휘두르면 말 자체의 속력과 원심력이 결합하여 청 중갑기병의 중무장 갑주도 우그러뜨릴 정도의 강력한 일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후기 조선군 기병의 후사르/드래군화가 되어간다는 잡설들

일본의 경우 보병 중심의 전투가 벌어졌던 전국시대와 평화로운 에도 막부를 거치면서 전투용 마술의 맥은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센다이 번과 토사 번을 중심으로 의전용 마술이 근근히 이어져내려왔다. 특히 토사 번(현재 고치 현)은 마술 문화가 매우 발달해 말을 키우기에는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 2위에 달하는 약 3만 5천마리의 말을 생산했을 정도였다. 토사의 번교에서는 무사들에게 마술 교육을 매우 장려했으며, 심지어 조선 통신사가 보여준 조선군 기병대의 진법인 마상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까지 카와고에 번(현재 사이타마 현)에서 배워와서 번의 주요 마술로써 가르치기도 했다. 출처: 이명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마상재(馬上才) 공연과 일본의 마술(馬術) : 조선류요마술(朝鮮流要馬術)을 중심으로, 영남대학교 대학원, 2019년 2월

총기가 등장하고부터는 활을 이용하는 궁기병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총을 사용하거나 권총을 이용하는 기병의 수가 증가하였는데, 이미 일찍부터 서유럽에서는 이를 이용한 카라콜 전술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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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군과 청군의 교전

특히 준가르와 청나라의 전쟁에서 기병대의 화기사용이 더욱 두드러졌다. 준가르군은 뛰어난 소구경 화포와 기동력을 이용하여 화력전을 펼쳤고, 적이 다가오면 지리적인 엄폐물을 활용하거나 수송용으로 쓰인 낙타등을 엄폐물로 삼아 말에서 내려 총격전을 펼쳤는데, 청나라 군대도 이에 하마사격과 화력전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군의 기병대가 마상궁술과 하마총격술, 화포사격술 등 다양한 사격전술을 펼치며 기술적 변화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4. 근대 : 기원 후 18~19세기

18-19세기에 이르자 머스킷을 사용하는 전열보병이 전장의 주력이 되었고, 소총에 장착하는 총검이 발명되어 이제는 장창병의 보조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기병대가 단독으로 잘 정비된 총병 전열을 향해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로 취급되었다. 거기에 기술의 발달로 포병이 더욱 강화되면서 굳이 기병을 보내지 않더라도 선제타격으로 보병대열에 충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기병은 다시 고대 세계처럼 보조군으로서의 능력을 더 절실하게 요구받았고, 이에 따라 보병이 할 수 없는 모든 일을 도맡게 되어 수많은 병과가 파생된다.

물론 돌파력을 이용한 돌격전도 여전히 존재하였으나, 다른 병과와 협동해 제한적으로 실시되었고, 원거리 투사무기를 사용하는 경기병 역시 거의 사라져 돌격전에 사격을 하거나 돌격을 하면서 한 두발 사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상에서 활과 총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이집트 맘루크 기병대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보병방진의 화력을 못이기고 궤멸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시대의 기병의 가장 큰 특징은 기병이 전장의 주역에서 밀려나 전장의 보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보병 사이를 파고 들거나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해 사살하는 것에서는 기병이 압도적이었으나, 화력으로는 보병과 포병에 밀리고, 가격에서는 보병에 잽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장에 기병이 없어서는 안 되었다. 이 당시 보병은 대부분 총검으로 무장한 머스킷총병이었고, 이들의 원거리 화력은 얇은 선형진에서 극대화되었다. 또한 아군 포병이 이들을 잡으려 하여도, 고폭탄이 개발되지 않아 볼링공같은 탄환을 날릴 뿐이었던 이 당시의 포병들은 얇은 선형진을 상대로 그 효율이 극도로 떨어졌다. 포탄이 공처럼 통통 튕기며 지나가면서 그 궤적에 있는 보병을 죄다 으스러뜨리는 것이 이 당시 포병의 개념이었는데, 선형진 상대로는 직격해 봐야 그 위치에 선 적 병사 두셋만 잡고 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선형진은 측면에서의 기병 돌격에 극도로 취약하기 때문에, 아군 기병대가 달려들면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적군 보병들은 필연적으로 원형진 또는 방진을 짜서 밀집대형을 갖추어야 했고, 그러면 아군 포병의 사격이 제 효율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기병은 중세의 기사들과는 달리 정면돌격으로 적의 전열을 직접 무너뜨리는 것보다는 적의 측후면을 교란하고 아군 포병의 사격이 진가를 내도록 도왔으며, 패잔병을 추격하고 정탐을 수행하는 등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수행하였다. 따라서 기병 장교들은 첩보장교를 맡기도 하였으며, 기병 장교들과 부사관들의 중요한 역할은 전장에서 언제 돌격할지 타이밍을 재는 것이었다. 적의 전열이 빵빵한 시점에서 정면돌격하는 것은 순식간에 압도적인 보병의 화력 앞에서 벌집이 되어 전멸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며, 기병대가 제 때 돌격하지 않으면 적이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해 올 말미를 헌납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가 되면 기병용 갑주가 거의 사라져 중기병과 경기병의 차이는 주로 말의 중량에 좌우되고 승마자의 장비는 별 상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나폴레옹 전쟁기의 워털루 전투에서 괴멸당한 영국군의 스코츠 그레이(Scots Grey)는 후사르와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했고, 근위 기병대(Horse Guard)는 군복에 투구만 착용했지만 말이 대형마였기 때문에 중기병으로 분류된다.

이 시기 주요 기병의 병과는 다음과 같다. 각 병과의 자세한 설명은 개별 항목을 참고.

4.4.1. 울란

Ułan(폴란드어)/Ulanen(독일어)/Uhlan(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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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봉기 당시 러시아군에게 돌격하는 포즈난 기병대.

근대 창기병. 울란(우완)은 폴란드 등지에서 부른 이름이며, 영어로는 랜서라고 했다.

나폴레옹이 쏠쏠하게 전쟁 내내 써먹은 창기병대의 경우 제대로 진형을 짜서 들이치면 경기병인 후사르는 물론 심지어 중기병인 드라군이나 흉갑기병을 능가하는 전력을 과시했다. 워털루 전투에서는 프랑스 경창기병 연대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영국의 정예 중기병대 '스콧츠그레이'(ScotsGrey)를 개발살내기도 했다.[22]

물론 이때 당시엔 두 부대의 정면격돌이 아니라 스콧츠그레이가 프랑스군 보병과 포병을 상대로 무쌍을 찍다가 너무 신나서 대열이고 뭐고 엉망이 된 상태에서 프랑스 퀴레시어와 울란의 공격을 받아 괴멸당한 예외적인 상황이었다.[23] 일단 검기병이 아무 준비도 없이 창기병이 해달라는 대로 정면으로 꼴아박는 일부터 잘 없으니까.

이 때문에 영국군에도 창기병이 등장하게 된다. 윈스턴 처칠도 창기병 출신이다.[24]

다만 어디까지나 나폴레옹의 대 기병 기병대의 주력은 16개 연대의 프랑스 퀴레시어이다. 나폴레옹은 장비를 일신하여 갑옷 착용율을 높였고, 폐지되어가는 분위기였던 배갑도 부활시켜 장갑 방어력을 늘려서 프랑스 기병대의 대 기병 요격부대로 큰 활약을 벌였다.

그리고 같은 경기병이지만 척후임무 및 적 전열의 측후방 타격이 가능한 등 매우 기동성과 활용도가 높은 검기병인 후사르에 비해 창기병이라 방향전환이 힘들어[25] 측면이 약하고 검기병이 창기병이 해달라는 대로 순순히 아무 대책도 없이 정면충돌해 주지 않는 데다가, 진형이 풀리거나 창의 거리 안쪽으로 파고들면 급격하게 불리해지는 단점이 있었다. 창은 기본적으로 조준해서 찌르는 무기인데다가 창을 가지고 진형을 만든이상 적이 움직인다고 해서 그에 맞춰 창의 지향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고, 검도 가지고 있었지만, 급할 찰나에 빠르게 뽑아서 대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훈련 강도도 일반 기병보다 강해 쉽게 양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후로도 기병의 주력은 검과 총을 사용하는 후사르가 될 수 밖엔 없었다.

병과상으로는 경기병에 속한다. 이유는 빠른 기창돌격를 위해 덩치보다는 속도가 빠른 말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4.4.2. 후사르

Hus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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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기 영국군 제11 후사르 연대[26]의 후사르.

대표적인 경기병/검기병.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 또한 경기병에서 출발했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중세 기사급의 중기병이 되어버린 케이스다. 후사르의 원조는 헝가리 등지의 동유럽계 경기병이었으며, 19세기 전쟁 등을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굽은 검인 세이버를 휘두르는 털모자 쓴 기병이 바로 후사르다.

4.4.3. 샤쇠르

Chasseur à che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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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엽기병. Keith Rocco 作

프랑스의 추격기병. 당연하지만 ' 엽기적인 기병'이라는 뜻은 아니고, 사냥꾼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Chasseur'를 직역하여 수렵의 렵(獵)자를 사용해 엽기병이라 일컫는다. 이들은 후사르와 장비 면에서는 비슷했지만, 사냥꾼이라는 의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이 주임무.

4.4.4. 퀴레시어

Cuiras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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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돌격하는 프랑스군의 퀴레시어.

흉갑기병. 총탄과 기병도에 대한 약간의 방호력을 가진 두꺼운 흉갑을 입는 돌격용 병과. 대표적인 중기병이었다. 이들은 중기병이었기에 굽은 검인 세이버를 쓰는 후사르나 샤쇠르와는 다르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직선형의 기병도를 장비했다. 중기병보다 상대적이게 작고 속도가 빠른 말을 타는 경기병인 샤쇠르나 후사르는 속도를 이용한 베기에 유리한 세이버를 장비했다.

4.4.5. 드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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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다온다 전투(Battle of Majadahonda)에서 프랑스군의 흉갑기병을 상대하는 영국군 용기병.

용기병. 기병총 드라군을 다루는 병사로 어원은 이들이 다뤘던 총의 이름에서 나왔다. 본래는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전장에서는 말에서 내려 하마전투를 하는 승마보병으로서 기병이 아닌 보병이었으나, 이후 18세기에 들어와서부터는 후술하는 총기병과 비슷하게 말 위에서 사격하는 기병으로서의 승마 전투도 행하게 되면서 보병에서 기병으로 바뀌게 되었다.

영국군에서는 18세기 후반부터 잡다한 기병 병과를 해체하고 중 드라군과 경 드라군으로 개편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겪은 뒤 오히려 대륙의 영향을 받아 여러가지 기병 병과가 생겨나게 된다.

4.4.6. 캐러비니어

Carabinier(프랑스어)[27], Carabineer/Carbineer(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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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기병대 소속의 후기 케러비니어. 퀴러시어보다도 잘 차려입은 갑옷이[28] 눈에 띈다.

총기병. 카빈[29]을 다루는[30] 병종으로, 이쪽은 드라군과는 달리 처음부터 말 위에서 사격하는 기병으로서의 승마전투를 염두에 두었던 부대이다. 따라서 적의 탄환을 막을 충분한 갑옷과 총을 다루는 것의 편의를 위해 대형마를 운용 했다. 따라서 중기병으로 분류.[31] 이들은 루이 14세 당시의 프랑스 기병대중 최정예를 기마총병대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례했다. 나폴레옹 휘하에서 총기병대는 두개의 연대를 갖추었고 낭수티등 유능한 중기병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는 중기병 사단에 배속되어 싸웠다. 이들은 흉갑기병 연대가 10여개에 달하는 숫자를 갖추었을 때 겨우 2개 연대를 갖추었을 뿐이었기에 그 희소성은 엄청 났다. 하지만 실전에서 이들은 졸전을 거듭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졸전이다. 이들의 진형에 일련의 헝가리 후사르들[32] 이 돌격해 왔고 이들의 지휘관인 세바스티아니 장군은 중기병에게 경기병이 돌격해오다니 저 바보들ㅋㅋㅋ 하며 박장대소 했지만[33] 이게 웬걸 총기병대는 장군을 버려두고(!!!) 패주했다. 결국 이 후사르들과 교전한 것은 총기병대 뒤에 서있던 제1 흉갑기병 연대였고 전투 후에 이들은 모든 중기병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다. 어쨌든 이 사례 외에도 그 멋진 장비와 두 개 연대 뿐이라는 희소성에 비해 총기병대는 나폴레옹 전쟁 내내 졸전을 거듭했지만 총기병은 19세기까지 남은 대표적인 기병 병종이었고 나중에 가면 퀴레시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흉갑기병이 된다. 사실 총기병대가 흉갑기병이 된데는 조금 슬픈 내막이 있다. 원래 총기병대는 곰가죽 모자에 검정색 말을 탄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근위대 소속 기마척탄병 연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울름 전역에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들이받는 오스트리아 울란과 앞쪽 갑옷밖에[34] 안입은 오스트리아 흉갑기병에게 계속 피해를 입자 최우수 인적자원이[35] 전쟁에서 자꾸 소모되어감을 우려한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흉갑과 곰가죽 모자 대신 프랑스 경창기병 연대와 거의 같은 디자인의 금속제 신그리스풍 투구를 지급했다. 웃긴 것은 이 명령을 받은 이들의 반응인데 이들은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용맹을 의심하여서 흉갑을 입으라는 줄 알고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여러 모로 불편한 점도 많았지만 흉갑이 사람을 안전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이들은 그 후에도 쭉 투구와 흉갑을 입고 싸우게 된다.

이들 역시 드라군과 마찬가지로 치안 유지에 투입되었고, 이 때문에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는데, 현재 이탈리아군 소속 국가 헌병대 카라비니에리는 1814년에 창설된 사보이 왕가 소속 총기병 연대가 1861년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이탈리아군에 편입된 것이 기원이다.

4.4.7. 시파히

سپاهی(오스만 터키어)/sipahi(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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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빈 포위 당시의 시파히 기병대.

오스만 제국의 정규 기병대[36]로, 예니체리와 함께 오스만 제국 군단의 핵심전력. 크게 근위대인 '카프쿨루'와 유럽의 봉건 기사격인 '티마를르'로 나뉜다. 훗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식민지군이 운용하던 경기병대인 '스파히'와 영국 동인도 제국 소속 인도인 용병인 ' 세포이'의 모티브기도 하다. 항목참조.

4.5. 근대: 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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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기병대. 붉은 바탕에 녹색 옷깃·소매는 기병병과의 복색이였으며 이들이 소지하고 있는 기병창 및 기병도는 전부 독일,러시아제를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이름은 騎兵이지만 사실상 機兵으로 체계화되었다.

19세기 후반 미국 남북전쟁을 참관한 유럽 기병 장교들은 "미국 기병은 총만 쏘네?"하며 비웃었다. 미군, 특히 북군의 총이 발달한 것도 있지만 급히 군의 규모를 늘리다 보니 마상 검술을 비롯한 수준 높은 승마술을 훈련시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남군의 기병 사령관이었던 존 싱글톤 모스비의 부대는 세계 최초로 기병도를 장비하지 않은 기병대로 유명하며 젭 스튜어트와 함께 남군 최고의 기병사령관으로 꼽히는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의 기병대는 말은 이동수단으로 사용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하마상태에서 치뤘다. 하지만 리볼버 레버액션식 라이플을 비롯한 연발총의 발달로 기병이 칼 휘두를 일은 거의 사라졌고, 마상에서 연발총 쏘는 게 효율도 좋았다.

사실 세계대전 시기 이전부터 기병의 역할은 꾸준히 축소되는 경향을 겪어왔는데, 이러한 경향은 화약의 성능이 시대에 따라 개선되어 가면서 시작된 일로 여겨지며 특히 무연화약의 개발이 결정타가 되었다. 이 시기 화약 성능이 개선되어 살상력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장터에서 불발탄의 비율도 크게 낮아졌다.[37] 더군다나 제1차 세계 대전에는 참호에서 기관총을 난사해대니 기병의 입지는 더 급추락했다. 정찰 임무마저 비행기가 발명되면서 운용이 크게 줄었다. 그래도 동부전선, 특히 인구밀도가 낮은 중동 지역에서는 그나마 활약했는데, ANZAC 용기병대가 터키 보병대에 돌격해 승리한 베르셰바 전투나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해진 아랍 반란군의 활약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기술이 더 발달한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폴란드 창기병대 러시아 카자크 기병대가 크게 알려져 있고, 전간기에는 신생 폴란드 공화국의 창기병대와 소련 적군 카자크 기병대 간의 기병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폴란드 창기병대는 창 들고 전차에 꼬라박은 뒤 전차가 나무로 만들어진 줄 알았다고 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나, 이건 사실 용맹히 싸웠던 폴란드군을 바보로 선전하기 위한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 헝가리와 같은 추축국의 프로파간다. 실제 폴란드 기병대는 독일군 보병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전차부대와 충돌, 끝까지 저항하다가 몰살당한 사례이며 이 장면을 찍어다 프로파간다용으로 쓴 게 퍼진 것이다.

이 시대의 폴란드 창기병은 말이 창기병이지 기관총도 가지고 있었고, 전원 개인 화기로 무장한, 말로 이동하는 정예 보병에 가까웠다. 연대 규모로 가면 대전차포와 대공포, 부속 기갑중대까지 붙은 세계대전 기준으로는 매우 현대화된 부대였으나 "창기병"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도록 기병창과 기병도 역시 지급하고 훈련도 했으며, 실제로 창기병 돌격으로 독일군 보병중대를 격파한 적도 있다고 한다.[38] 독일 육군을 무찌르는 기병대의 위엄 폴란드 기병대는 세계대전 일어나기 몇년 전에 일어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소비에트 러시아군을 분쇄한 활약으로 세계에 막강한 폴란드군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독소전쟁 개전 이후 동부전선에선 나치 독일에 포섭된 카자크 기병들이 활약했지만, 소련 육군 역시 카자크족을 징집해 추격전이나 게릴라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소련 육군은 여기에 1개 기병군단과 1개 전차군단을 조합한 기병-기계화 집단을 창설해 전차가 기동하기 힘든 지형에 투입하거나 일반적인 전차부대보다 더 빠른 기동력을 발휘하게 하여 추격과 포위 기동에 활약하게 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카자크들이 도망치는 독일군들의 목을 수확하고 다녔다고 한다.

독일군은 2차세계대전 당시 6개 기병 사단을 운용했으며, 대부분 동부전선에서 운용했고 일부 발칸 반도에서 사용한 기록도 있다. 대부분 후방의 빨치산에 대응하기 위한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차량과 함께 기병을 편성해 운용했다. 또, 적백내전 당시 백군파에 속했던 카자크를 모집해 2개 카자크 사단을 창설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서부전선에도 참전한바 있다. 무장SS는 치안유지와 후방 게릴라 소탕을 위해 여러 기병부대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무장SS의 제7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라는 전쟁범죄부대가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일화가 있는데, 미육군으로 입대한 어느 인디언 병사( Joe Medicine Crow)는 워치프가 되기 위한 과업 중 2가지, 아군을 전쟁으로 이끌고 적의 말을 훔치는 것을 휘하 부대를 이끌고 SS의 말 50필을 훔침으로써 달성한 바 있다. 기병이 아니라 군마의 경우, 독일군의 차량화와 기계화 비율은 대단히 낮은 편[39]으로 전쟁 기간동안 엄청난 숫자의 말을 징발했다. 1939년 개전 당시에 59만 마리, 1945년 1월에는 120만 마리에 이를 돌보는 인원만 수만명이었다. 중간에 죽거나 다친 말까지 포함하면 유럽 전역에서 최대 700만 마리의 말을 징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독일군은 고질적인 석유 부족으로 최일선의 전차부대를 제외하면 말을 굴려야 했다. 이 말은 수송부대나 포병대, 지원장비 등을 견인하는데 사용되었다.

이탈리아군 역시 기병대가 존재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독소전에 파견된 육군 사보이아 기병연대의 기병돌격. 1942년 8월 24일에 있었던 일로 포병 지원까지 받던 소련 육군 시베리아 보병연대를 기병 돌격으로 박살내버렸다. 졸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군이지만 이런 분전도 많았다.

일본군 태평양 전쟁 당시 기병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는 좋은 말이 드물어 근대 이전에도 기병을 대규모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1차대전 직후인 1919년 기병폐지론이 강하게 일어나서 이를 주장한 쿠니시 고시치 소장과 이를 반대하는 제4기병여단장인 요시하시 토쿠사부로 소장 간에 격론이 벌어졌는데, 요시하시 소장의 자살과 함께 기병 폐지론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20년대부터 보병사단에 소속된 기병연대를 먼저 기병정찰대대로 축소한 다음 차츰차츰 폐지했다. 중국 전선에서는 여전히 기병을 사용하여 중일전쟁에서는 4개 기병여단을 유지했지만, 1940년 기병 1여단이 차량화되었고, 1941년 기병2여단이 해체, 1945년에 초에 기병3여단이 해체되어 패전 당시까지 보유한 기병대는 기병4여단 하나뿐이었다. 1945년 6월 중국 허난 성 라오허커우시에서 비행장을 확보하려는 중국군과 일본군의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 일본군 기병4여단이 참전하여 여단 이상급 대단위 기병대가 전투를 벌인 마지막 전투라고 한다.

몽골군 역시 이쪽분야 최고봉답게 2차대전 시기에 기병대가 존재했고, 할힌골 전투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2차대전 당시 자력으로 전군의 기계화를 이뤄낸 군대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미군이다. 말과 마초를 저 멀리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수송하는 것보다 차량을 수송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고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랜드리스를 통해 소련군 또한 전쟁 중후반부 부터는 보병이 다 죽어서군의 기계화에 성공한다. 미군은 기병대를 전간기에 이미 대부분 폐지하거나 차량화 하였으나 제2차대전 까지도 소수의 기병대를 운용했으며 1942년 1월 16일 필리핀 바탄 반도 방어전을 수행하던 제26기병연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미국 역사상 최후의 마상 돌격을 시행해 수적 우세를 점하던 일본군을 격퇴한 전적이 있다.

1차 대전과 달리 전선이 고착되지 않고 기동전 위주가 된 덕분에 기병이 반짝 활약은 할 수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 기병이 활약할 여지는 기마경찰대로서 사용하는정도이다.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장에서의 독일이나 영국, 미국 육군의 '기병대'는 많은 경우 말로만 기병이고, 헬기, 차량화부대나 기갑 또는 기계화 보병이 되어있었다.

물론 한자어로 번역을 해서 기병이 되긴 했지만, 사실은 'cavalry'라는 단어의 뜻 자체가 변한 것에 가깝다.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어 중 비슷한 변화를 겪은 비슷한 분야의 단어를 찾는다면 전차가 있다. 현재는 탱크를 이르는 말이지만 원래는 춘추전국시대에 널리 쓰던, 말이 끄는 전투용 수레를 이르는 말이었다.

4.6. 현대

현대전에서는 기술 발달로 육군이 기계화되면서, 의장대와 기마 경찰대 정도를 제외하면 을 이용하는 부대는 거의 없으며, 과거에 기병이 맡았던 역할은 전차 장갑차, 그리고 헬리콥터들이 계승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이들을 현대의 기병이라고 봐도 된다. 실제로 기갑 부대나 헬기 강습 부대 등은 이전에 기병이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다. 타던게 말에서 장갑판 두른 자동차나 헬리콥터가 되었을 뿐이지. 현대에 와서 중기병의 "충격력" 개념은 전차가 계승했고, 경기병과 총기병의 "속도와 범용성" 개념은 헬기 장갑차가 계승한 격이다. 이 중 장갑차는 기병처럼 기동하는 역할이 아니라 보병을 수송하는 개념이므로,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병의 기동성을 가진다. 즉, 과거의 승마보병 드라군의 개념을 계승한 것으로 봐도 되겠다. 처음에는 하마(하차) 전투를 위주로 하다가 점점 승마( 승차) 전투를 주요 교리로 하게 된 것도 드라군과 장갑차를 타는 기계화보병의 공통점.

많은 기갑 부대, 헬기 강습 부대들이 부대 마크에 편자를 넣고, '기병(Cavalry)'이라거나 ' 드라군(Dragoon)'[40] 등을 부대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명한 예로는 미국 육군의 제1기병사단이나 제2기갑기병연대 등이 있다. 2차 대전중의 독일군 기갑부대는 복장과 마크에서 프로이센 창기병을 계승하고 있었다.

보통 유럽 군대에게 있어서는 기병대는 과거 군대의 전통을 상징하기에 부대의 역사가 몇백년 되어 기갑으로 변환한 병과들도 후사르, 창기병, 샤쇠르, 쿼러시어, 드라군 등의 명칭을 이어받고 있다. 러시아 군가 초원(군가)에서도 가사에 말, 전차가 번갈아 나온다.

반면 이런 전통이 빈약한[41] 미국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모든 기병 병과가 단 하나로 통일되었고, 지금의 수색대 단대호는 본래, 그리고 현재 미국 기병의 단대호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UH-1 휴이를 주력으로 공중강습전을 벌이는 공중 기병대(Air Cavalry), 기갑차량을 편제받아 위력정찰 역할을 하는 기갑 기병대(Armored Cavalry)로 개편된다. 이후 공중 기병대는 보다 전문적인 공중강습부대나 공수부대 등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고 대신 카이오와 정찰헬기 등을 사용해 기갑 기병대의 눈 역할을 맡고 있으며, 기갑기병은 각 사단 내지 여단전투단에 연대 단위로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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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대구역에 집결한 국군 기병대

한국전쟁에서도 대한민국 국군 독립기갑연대 휘하에 기병대가 2개 중대 정도의 규모로 있었다. 개전 초기 전역부터 지연전역 때까지 전장에서 계속 싸웠다. 물론 북한군 탱크에 정면으로 돌격하는 미친 전술은 당연히 아니었고,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교전시 말에서 내려서 보병 전투를 진행하는 드라군처럼 운용하였다. 지연전 전개 기간 동안에는 기병대장 장철부 소령이 적에게 포위되어 전사[42]하는 등 사실상 괴멸되었지만, 북한군을 상대로 기병돌격을 감행포위망을 뚫고 이기는 등 상당한 활약도 했다. 그러나 1950년 8월을 전후한 무렵에는 말이 거의 전멸한 상태에서 추가 수급이 불가능해 보병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말들은 훗날 경찰 및 헌병에 흡수되어 기마경찰대와 기마헌병대가 되었다가 역시 195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1972년에 제1군사령부에서 강원도 산악지대에서의 수송과 대간첩 작전의 효율성을 위해 토종 조랑말을 이용한 타마(駝馬)부대를 창설하기도 했으나 말먹이를 수급하기 어렵고, 기계화 장비들을 도입하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어 1982년에 공식 해체되었다.[43] 현대 한국군에서 정식으로 말을 운용하는 곳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의 승마 교육을 담당하는 군마대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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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군대인 로디지아군도 게릴라전에 쓰기 위해 기병을 운용했었다. 지형상 차량을 원활히 운용하기 어려운 곳에서 유용했을뿐만 아니라, 말이 원래 아프리카에 사는 동물이 아니라서 그런지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흑인 게릴라들은 말의 존재를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심리적 압박감도 상당했었다고 한다. 로디지아군 항목의 동영상을 보다보면 드라군 마냥 총들고 말 달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런 이유다. 물론 로디지아 자체가 사라지고 나서는 반짝 부활했던 이 기병들도 뿔뿔이 흩어졌겠지만...

그러나 일부 산악지역, 사막 등 차량이 이동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진짜 기병이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도 있다. 정말 험난한 곳은 말로도 못 가니까 걸어가야만 하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산악 지역같은 험한 곳은 말은 힘들긴 해도 그럭저럭 갈 수 있더라도 장갑차로는 택도 없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 굳이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동만 말을 타고 하는 드라군식의 운용으로도 이런 지형에서는 쓸모가 있다. 그냥 걷는 것보다는 빠르기에 험지에서도 기동성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으며, 사람 대신 기관총이나 견인포 같은 무거운 공용 화기를 운반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기에[44]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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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해방군 기병대. QBZ-03으로 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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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 기병대.

한 예로 사막과 산악이 대부분인 중국의 서북부 지역에는 기병대가 현존하고 있다. 이쪽은 아무래도 지형 특성상 차량화부대의 유지, 보수가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로 발달한 듯. 비슷한 이유로 몽골 역시 기병대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기병이 활약했다. 원래 이 땅에 살던 북부동맹이나 탈레반 등은 기계화된 기동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특성상 기병을 사용했는데 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부동맹에게 지원나간 미군 특수부대가 폭격 유도를 해주면 북부동맹이 기병 돌격(!)을 실시했다고. 몇몇 전투에선 미군 특수부대도 같이 기병 돌격했다고 한다(...). 이후에 미군도 현지의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에 노새를 이용한 물자 수송을 하기도 했다. 이 일화를 다룬 영화가 12 솔져스다.

4.6.1. 공중 기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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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에서 이러고 다니지는 않는다
보면 알겠지만 미국 기병대로 위가 빨갛고 아래가 하얀게 인도네시아 모나코 국기와 닮았지만 당연히 별 관계 없다. 원래는 성조기에서 Stripes에 해당하는 빨간색과 하얀색이다. 1862년 일반명령 4호에서 기병대 깃발(guidon)을 성조기 줄무니를 이용해 만들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그에 따라 만들어진 것.

Air Cavalry

냉전과 그에 수반된 베트남 전쟁 당시, 보병으로는 극복하기 힘든 지형들을 통과하여 전장을 자신들이 먼저 고른다는 개념으로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이 공중강습사단으로 개편되어 제11공중강습연대가 사단 내에 예하 부대로 배속되면서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하늘을 뒤덮은 휴이의 파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수송헬기를 이용한 공중강습전은 여타 다른 공중강습사단들에 소속하는 보다 전문적인 공중강습부대들에게로 넘기고, 정찰헬기와 무장헬기· 공격헬기 등을 이용한 정찰 화력지원·대전차전 등을 주로 수행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은 기갑 기병대의 눈으로서 OH-58 카이오와 정찰헬기나 AH-64D 롱보우 아파치 공격헬기 등을 통하여 기병대의 정찰을 주로 도맡는 역할이다. 물론 그렇다고 수송헬기 자체를 아예 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UH-60 CH-47 등으로 구성되는 수송헬기 전력도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공중기동 기병대라고 해서 장갑차 같은 지상 기동장비들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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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인지 부대에서 운용하던 헬기의 퇴역식에서는, 과거 기병대의 전통에 따라 애마 안락사시키듯이 퇴역하는 헬기를 보내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이 부대의 강습 보병들과 조종사 등 항공대 인원들도 군복의 병과표지를 기병의 것으로 달기도 한다.

4.6.2. 기갑 기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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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얘도 실전에서 이러고 다니진 않는다.-
Armored Cavalry

베트남 전쟁의 종결 이후, 공중강습사단이었던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이 삼중임무수행능력(TRICAP, 기갑/항공/강습 3개 임무의 동시수행)을 요구받으면서, 공중강습과 더불어 편제에 전차 기병전투차를 편제받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현대적인 기갑 기병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갑차량을 활용한 위력정찰이 주된 임무이며, 각 사단 내지 여단전투단에 연대 단위로 파견되어 활동하기도 한다. 또한 기병전투차만이 아니라 전차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정찰만을 수행하는 부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기갑 기병대는 수색대의 역할을 맡고 있는 부대이지만, 타 국가의 수색부대와는 교리가 다소 다르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수색부대들은 가급적 직접교전을 피하여 정찰을 하나, 미군 기갑 기병대의 경우에는 정찰을 한 뒤 그 상대들을 직접 갈아버리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마치 전근대의 기병과도 비슷하다. 아예 현용 CFV(기병전투차) 주력전차가 배정되고 직접 교전을 꺼리지 않는 점에서 점에서 타국의 수색부대와는 차이가 큰 편. 중과부적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육군 항공대(상기한 공중 기병대도 당연히 포함)나 공군 등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찰만이 아니라 교전에도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때문에 단순한 수색부대는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육군 편제에서는 각 기계화 보병사단 직할의 기갑수색대대와 독립 기갑여단의 기갑수색중대가 그 명맥을 이어받았다. 영문 명칭 역시 동일하게 사용한다.

5. 유명한 기병대

5.1. 현실

5.2. 가상

  • 로한 기병대

6. 기병으로 유명한 인물들

6.1. 현실

6.2. 가상

7. 각종 매체에서의 기병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가상, 현실 배경 상관없이 말을 쓰지만 그 세계의 환상종을 탈것으로 쓰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날 수 있는 종의 경우는 그걸 타고 날기도 한다. 하지만 공중이건 지상이건 대부분의 동물들은 사람을 태울 만큼 힘이 남아도는 경우는 품종개량을 하지 않는 한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특히 새는 자기 몸 날게 하는 것도 힘들다. 때문에 하늘을 나는 것에 사람을 태울 경우 드래곤 같이 굉장히 큰 동물을 태운다.

SF, 특히 스팀펑크 배경인 경우 오토바이가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7.1. 드라마, 영화

한국이든 외국이든 영화, 사극 등에서 기병전이 제대로 묘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대개는 그냥 말탄 기병들이 보병들의 옆을 얌전히 지나가거나, 기병과 보병이 대치한 상태로 질, 질을 주고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나 군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이런 묘사에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지만,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크다. 일단 말은 매우 비싸며, 말을 탈 줄 아는 전문 배우를 구하기 힘들고, 훈련된 말이라 해도 결국 동물인 만큼 촬영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데다, 기병의 충격력과 돌격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말들이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질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사람 머리 높이에서 떨어지는 낙마 장면은 전문 스턴트맨을 써야 할 정도로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위험하다. 백병전과 달리 살아있는 생물인 말을 이용한 전투는 사실적인 리인액트가 무척 어렵고 위험이 따르게 된다.

그래서 칸나이 전투를 다룬 BBC의 다큐멘터리에서 한니발군의 기병을 묘사하기 위해 고용된 리인액터들은 카우치드 랜스를 사용해야 했다. 고증을 따르자면 창을 양손으로 쥐고 돌격하거나 창을 역수로 잡고 밑으로 내려 찍는 방법을 써야겠지만, 이는 고삐를 다룰 손이 없으며 몸의 중심을 잡기가 어려운 탓에 낙마 사고의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사극 한편에 수십 수백 억의 예산을 쏟아 붓는 BBC마저도 기병전의 묘사를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정도로 기병의 연출은 어렵다.

기병전을 그나마 볼 수 있는 영상 매체는 현재로서는 블록버스터 영화 정도이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첫 돌격, 그리고 뒤이어지는 백병전을 살짝살짝 다뤄주는 정도다. 상술했듯 안전 문제가 크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기병 돌격 장면은 바로 영화 반지의 제왕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의 로한 기마대 돌격장면이다. 배우들의 연기력, 막대한 물량, CG와 실사가 조화된 소설적인 연출, 웅장한 BGM( #Riders of Rohan, The Battle of the Pelennor Fields) 등이 아름답게 어울려, 영화 속 전투장면 베스트를 논할때 항상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랭크되는 희대의 명장면이다. 기병이 보병과 접촉하기 전에 3~4회의 화살세례를 온몸으로 뒤집어 써야 한다는 현실적이고도 처절한 요소도 잘 묘사되었다.

다만 이 기병 돌격장면은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오크들이 변변한 대기병진형도 형성하지 못 했다 하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토록 두터운 진형을 짜고 있는 보병들을 상대로 기병들이 일직선으로 돌격하면 충격력이 금방 없어져 정지해 버리고[59] 보병들에게 둘러싸여 학살 당할 뿐이다. 제대로 묘사하면, 실제 기병돌격처럼 여러 웨이브로 나누어 보병의 전열이 무너질 때까지 돌격을 반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는 관객이 보기에는 다소 맥 빠져 보일 수도 있으며, 원작에서도 세세한 기병 돌격이 묘사되기 보다는 원경에서 마치 빗자루가 먼지를 쓸어내듯이 묘사되고 있으니 영화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연출을 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로한인의 군마가 현실의 군마와는 다르다는 반론을 내세울 수도 있으나, 위의 각주에서 보이듯, 두려움따윈 아예 존재하지 않고 군마의 수십배의 힘을 내는 자동차라 할지라도 보병방진에 그대로 돌진하면 결국 돌진하며 죽인 시체들로 인해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게 된다. 또한, 반지의 제왕 영화 시리즈 자체에서 기병들이 보병들을 쓸어버리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것도 변명이 되지 못한다. 굳이 따지자면 이 장면은 반지의 제왕 원작 자체가 기병들로 보병을 쓸어버리는 묘사들이 나오기에 최대한 원작을 반영하기 위해 현실성을 무시했다고 봐야한다.

< 킹덤 오브 헤븐>에서의 기병전 묘사도 매우 훌륭하다. 케락의 백성들이 성으로 안전하게 들어올 시간을 벌기 위하여 이벨린의 발리앙( 올랜도 블룸)이 이끄는 소수의 유럽 기병대가 압도적 다수의 이슬람 기병대를 상대로 일자형 진형을 장방형으로 바꾸어 가며 돌격하는 장면이 장렬하다. 중장갑이어서 그런지 대부분 포로로잡히는것도 고증에 맞는다. 영상

< 브레이브 하트>도 역사왜곡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여러 볼거리가 충실하게 채워진 훌륭한 작품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장창을 기습적으로 빼든 스코틀랜드 보병방진이, 코앞까지 돌진한 잉글랜드 기병을 제압하는 스털링 전투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잉글랜드 기병이 출진하여, 충분한 충격력을 얻을 때까지 속도를 서서히 올리는 장면은 묵음처리가 되는데, 시청자로 하여금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연출도 훌륭하다.

최근에는 HBO 미국 드라마 < 왕좌의 게임> 시즌 6 9화의 쟁점인 윈터펠 전투에서 존 스노우 램지 볼튼이 각기 이끄는 스타크 병력과 볼튼 병력의 기병 충돌 장면이 화제가 되고 있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블록버스터 영화를 거진 쌈싸먹는 어마어마한 퀄리티를 보여주는 명장면으로, 극중 지휘관들의 전략적 오판과는 별개로 중세 기병의 돌격력과 기병 대 기병간의 난전 묘사를 그 어떤 영화보다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존 스노우의 시점에서 난전의 현장을 보여주는 롱테이크 장면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초반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중세판으로 옮겨놨다 봐도 될 만큼 압도적. 전투 종반에 볼튼 창병대의 방진에 존 스노우의 야인 군대가 끔살당하기 직전, 그들을 지원하러 온 베일의 대규모 기사단이 방진의 후미를 강타해 압살해 버리는 장면도 볼 만하다.



하지만 기병전 묘사의 TOP는 역시 1970년 영화 < 워털루>이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CG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진짜 코사크 기병 2000여 기까지 동원된(!!!) 14,000 여 정도가 동원된 것이 장관이다. 평원을 뒤덮을 기세로 몰려든 기병들이 보병들의 수많은 방진들 사이로 말려드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압권. 배우 하나가 낙마하면 그 사람은 100% 끔살 확정일 정도로 대단히 위험한 장면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걸 찍을 생각을 했는지. 또 포탄이 터질 때마다, 보병들의 일제사격이 있을 때마다 기병들이 무더기로 넘어지는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연기한 것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기병 돌격 장면이 있다.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45년 동안 촬영기법이나 녹음장비가 발전해 훨씬 현실감 있는 디테일한 묘사가 가능해졌다.


워 호스에선 1차 세계대전 당시 기병 돌격의 장관과 기병의 몰락을 처절하게 그려냈다.


프랑스의 TV시리즈 나폴레옹에서 아일라우 전투 당시의 기병돌격을 잘 연출했다. CG없이 액션만으로 말이 보병을 돌파하고 부닥치는 위험한 장면을 잘 보여주었다.


(1분 56초 지점부터)


(처음 지점부터)

바이킹스에서 묘사한 기마 충격 전술. 전투장비나 기술 및 생활사 등 미시사적 고증이 충실한 이 드라마에서 눈여겨볼만한 부분 중 하나이다. 방패벽(shield wall) 전술을 비롯한 보병 방진은 부대 질량이 충분할 경우 방패를 들고 전열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기병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해당 장면처럼 겨우 2열 남짓한 정도로는 말과 기수의 체중에 속력까지 빠른 기병의 충격력을 저지할 수 없었다. 무기를 휘두르지 않아도 그냥 부딪쳐 오는 것 자체가 보병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었던 것. 사실 부대 질량이 돌파를 저지하기에 충분하다고 해도 전열의 앞 부분은 기병의 충격력을 고스란히 받기에 피해가 크기 마련이었는데, 이는 서유럽 내에서 기창을 이용한 지속적인 기병 충격으로 적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전술이 발전하는 요인이 되었다.[60]

서부극의 영향으로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암담한 상황에서 기다리는 지원군이나 구조대를 기병대로 부르는 관행이 있다.

7.2. 게임

대다수의 전략 게임에서는 기병을 그저 힘세고 강한 빠르고 강한 보병수준으로 구현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를 비롯한 고전 RTS 게임에서도 이런 경향이 강한데, 게임 엔진상 기병의 충격력을 묘사하는 게 어렵고, 게임의 기본 디자인 자체가 전쟁을 정확하게 그리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대신 고증에 맞춰서 보병과 포병에 보너스 데미지를 주는 것이 보통이다.

삼국지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기병, 보병, 궁병이 등장하며, 기병은 빠른 기동력과 공격력이라는 게임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기병 묘사다. 게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병종 적성도가 존재하는데, 기병 적성도가 높을수록 기병의 위력이 강해지기에 기병 적성이 높은 장수가 없는 세력은 기병 운영에 애를 먹는다.(예를 들면 오나라 세력은 전통적으로 기병 약체다.) 일부 시리즈(특히 삼11)에서는 북방에 말이 특산물이고,북방에 기마대를 잘 지휘하는 장군이[61]깔렸다.빠르고, 전투기술만 풀찍으면 캐사기.

이에 반해 토탈워 시리즈 마운트 앤 블레이드처럼 꽤나 훌륭하게 구현해 놓은 게임도 있다. 게임상에서 멈춘 기병은 보병의 좋은 먹잇감이 되며[62], 창병이나 전열보병에 매우 취약하지만, 돌격을 수차례 반복하여 적을 약화시키거나 적을 패퇴시킨 후 전과확대 단계에서 추격하는 임무를 맡는 등.[63] 상당히 현실적이다. 또한 일단 붙어서 칼질을 하는 다른 게임과 달리 충돌시 적 보병이 뒤로 날아가기도 하며, 혹은 한번 들이받았을 뿐인데 전열이 개박살나면서, 모랄빵이 나는걸 생생히 볼 수도 있다.

또한 경기병과 중기병간의 특성이 꽤 커서 경기병은 창기병이 아닌한 큰 충격을 주기가 어렵고 방어가 약해 잘 죽지만 쉽게 지치지 않고 빠르며, 중기병은 강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가지고 있으나 첫 돌격 이후 지치기가 쉬우며, 기동 또한 경기병에 비하면 많이 뻑뻑한 편이다.

온라인게임에서는 보기 힘든 직종이다. 그도 그럴것이, 뭔가를 타면서 공격까지 가능해진다면 파티 플레이때 다른 파티원에 비해 이동속도가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게 되는데, 그러면 그만큼 팀웍에 장애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냥 속도에 따른 성장 및 아이템 파밍 면에서도 밸런스 붕괴가 되기 쉽다. 그리고 일단 기마상태의 전투 자체를 구현하기가 썩 쉽지가 않다. 단순히 시스템을 구현하는것이든,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든 난점이 산적한다. 3D 오픈월드 계통의 온라인 게임이라면 더불어 조작성까지 난해해진다. 그래서 탑승물 개념이 있는 온라인게임도 대부분 전투가 아닐때만 탈 수 있고 전투상태가 되면 탑승물이 사라진다. 굳이 구현하려 든다면 트리 오브 세이비어 캐터프랙트 슈바르츠라이터가 대표적이다. 디아블로3 성전사가 군마질주라는 일시적 이동버프 스킬로 구현하기도 한다.

라그나로크 온라인 검사가 상위직업으로 전직하면 탑승물을 탈 수 있다. 이동속도가 민첩성 향상 버프를 받는 수준으로 빨라지고 인벤토리 무게제한도 오르지만 패시브 스킬을 찍지 않으면 평타 공격속도가 절반으로 뚝 떨어져버리기 때문에 스킬포인트가 빡빡한 편이다. 3차 전직을 하면 탑승물이 쓰는 전용기술도 생긴다. 이동속도가 빠르니 파티원이 못따라가는건 아닌가 싶겠지만 현실은 기동성과 맷집을 살려서 몹을 몰아오는데 이용한다.

리그 오브 레전드 헤카림의 경우 정통 기병의 기동력은 물론 충격력까지 가장 잘 구현한 몇 안되는 사례다. 파멸의 돌격(e)은 이동 속도가 최대치로 증가할수록 가할 수 있는 피해량도 최대로 늘어난다. 이동속도가 많이 추가될 수록 공격력도 늘어나는 패시브는 덤. 이 충격력을 구현한 스킬의 위력을 극대화한 전략이 바로 유성 헤카림. 다만 헤카림은 엄밀히 말하면 기병이 아니고 켄타우로스이다. 헤카림을 제외하고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기병이라고 부를만한 챔피언은 세주아니, 클레드정도밖에 없지만 그나마도 각각 멧돼지와 목도리 도마뱀을 타고 다닌다...

배틀필드 1의 경우 1차대전인 만큼 기병이 등장했는데 현실의 기병의 장단점이 자연스레 구현되어 있다. 빠른 기동력과 선회력으로 보병에게 우위를 차지하지만 바위나 장애물등에 기동력을 잃거나 멀리서부터 관측당하면 고화력화기에 벌집이 되거나 저격수에게 머리를 따여 죽는게 다반사다.또는 무리하게 돌격하다 전차나 장갑차에 호떡이 되기도 한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의 인간 진영에서 전통적으로 등장하는 기병대인 챔피언의 경우 이동한 거리에 비례하여 공격력이 증가하는 특수능력으로 기병대의 돌격 능력을 어느 정도 구현했다. 3편의 경우 창병이 챔피언의 돌격 특수능력을 무효화시키는 것으로 기병과 창병 간의 관계도 구현했다.

랑그릿사 시리즈 영걸전 시리즈 같은 일부 SRPG에서는 지형에 따라 유불리를 다르게 설정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대표적으로 조정되는 능력치가 바로 기동력이며 이 지형 패널티 때문에 특히 주요 어려운 전투에 실내와 동굴 등의 지형이 대거 포함되어 있는 랑그릿사 시리즈에서는 기병이 시리즈 내내 취급이 좋지 못한편이다.


[1]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로, 러시아 기병을 향해 돌격하는 후사르를 그린 그림이다. [2] 이 때까지는 기병이 중요하게 쓰였고, 방진을 짜지 못했거나 뚫렸다면 편히 죽기를 기도해야 했다. 기병이 파고든다면 그야말로 난전이 된다. [3] 전투 전에는 척후병으로서 주변 정찰 및 진격로 확보를, 전투 후에는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며 전과 확대를 할 수 있다. 물론 패전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기병 예비대가 있다면 추격해오는 적을 교란시킬 수 있다. [4] 실제로도 나폴레옹의 휘하에는 조아킴 뮈라라는, 엄청 뛰어난 기병지휘관이 있었다. [5] 근대 일본의 기병용 전투마는 2살 때 사들인 망아지에게 3년간의 훈련을 시켜서 기병부대에 배속한 후 1-2년의 훈련을 추가로 거쳤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훈련을 거듭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6]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러시아 원정 이후 시달렸던 가장 큰 문제도 기병의 부족이었다. 보병이야 사격 방법만 알려주고 전열에 세워도 어느 정도의 역할은 기대할 수 있었고 포병도 구닥다리 포라도 무기고에서 꺼내 쓸 수 있었지만 기병만큼은 원하는 정도로 보충할 수 없었다. [7] 그는 검술 시범에서 말을 타고 싸울 수 있으면 참가하겠다며 말 위에서는 누구라도 물리칠 수 있다고 어그로를 끌었는데, 순차적인 다굴에도 불구하고 다른 무사들을 압도하다가 갑작스럽게 말을 목검으로 후려친 무네노리에게 패한다. 무네노리 정도의 누구나 인정하는 명문 무사가 제대로 맞붙지 않고 말을 공격하는 일종의 꼼수(?)로도 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게 했다는 점에서 흠좀무. 그런데 사실 꼼수라고 보기는 어렵고, 기병전에서 기수 대신 말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유리할 때가 많다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식이었으며 기사의 전성기였던 13세기 유럽에서도 보병이 직접 기병의 공격 거리 안으로 들어가 기병이 탄 말을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비난받기보다는 명예롭고 용감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 [8] The Rare and Excellent History of Saladin. 살라딘의 기록관인 바하 앗딘(Baha ad-Din ibn Shaddad)이 쓴 살라흐 앗딘의 연대기로 원 제목은 "al-Nawādir al-Sultaniyya wa'l-Maḥāsin al-Yūsufiyya(술탄의 일화와 유수프의 공덕/Sultany Anecdotes and Josephly Virtues)"이다. 해당 장면은 제3차 십자군 전쟁 당시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의 전술적 움직임을 묘사한 것. [9] 말의 몸무게는 약 380~1000kg이며 군마의 경우 대체로 대형이다. [10] 코르테스의 남미 정복 때 모세의 기적 수준으로 무적을 자랑하던 23기의 기병도 불리한 지형에서 싸워서 패한 적이 있다. 당시 기병은 고작 한 명으로도 수만 명의 적진을 분쇄하고 적의 지휘관을 살해하는 둥 그냥 거의 무적 수준이었다. [11] 여담으로, 남군은 기병이 자기 말을 직접 조달하도록 함으로써 북군보다 먼저 기병대를 창설할 수 있었다. [12] 야생마인 얼룩말의 어깨높이가 1.3m로 오늘날 경주마의 어깨높이인 1.5m보다 작다. [13] 고대 중국에서는 전차 1대에 보병 100명이 붙어 함께 전투했다고 한다. [14] 플레이트 아머가 발달한 중세 후기 유럽의 중기병대는 방패를 장비하지 않거나 장식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방패를 들었기 때문에 대신 고삐를 쥐어 더 안정적인 승마가 가능했다. [15] 13세기 영국 수도사 베이컨에 의하면 여러 차례의 재돌격으로 말이 쓰러져 바꿔 타야 했다고 한다. [16] 투창 기병이나 투석 기병 궁기병 [17] 폴 J. 스미스, 《천부(天府)에 과세를 해서》, 하버드대학 출판국, 1992 [18]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는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대규모 사냥을 실시했다. 유목민은 특성상 사냥을 자주 했기에 이것만으로도 일상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은 셈이다. [19] 정찰, 약탈, 수송대 호위, 패퇴하는 적 추격, 후방 급습 등의 비정규전 등등 전면 교전 이외의 모든 부류의 작전에 쓰임새가 있었다. [20] 윙드 후사르가 격파한 파이크 방진이 서유럽의 파이크 방진에 비해 뒤떨어기는 했다. [21] 그러나 이 시대의 권총이라는 물건이 명중률이 그다지 뛰어난 물건은 아니었던지라 여전히 근접전 위주의 무장을 했다. 랜스와 검으로 무장한 경기병들인 윙드 후사르가 권총으로 무장한 덴마크 기병들을 일방적으로 관광태운 사건도 있었다. [22]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 중기병대를 박살내고 지휘관 폰슨비 소장을 전사하게한 부대는 폴란드 울란이 아니라 일반 창기병대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워털루의 영향으로 낚이곤 하는 부분. [23] 더군더나 스콧츠그레이가 박살날 당시엔 그 숫자가 요격하러온 프랑스 기병대에 비해 적었었다. 진형도 엉망인 상태에 숫자도 더 적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 [24] 다만 처칠은 고질적인 어깨 탈구 증세가 있어 검이나 창을 쓰지 않고 상부의 허가를 받아 권총을 썼다고 한다. [25] 창기병 돌격은 대열을 이루지 않으면 효율이 몹시 떨어진다. 대열은 대충 갖추고 돌격해도 되는 검기병과 다른 점으로, 대열을 유지한 채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방향전환이 어렵다. [26] 바로 이 연대가 저 유명한 발라클라바 전투의 그 경기병 연대이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고. [27] 정확히는 기마총병대라는 의미의 Carabiniers-à-Cheval(카라비니에르 아 셰발)이라고 한다. [28]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총기병대는 흉갑기병의 흉갑에 황동을 입힌 갑옷을 입고 싸웠다. 방호력은 흉갑기병의 것과 다르지 않지만 황금빛이다 보니 멋하나는 타국의 어떤 흉갑도(이를테면 러시아나 오스트리아 흉갑기병대의 검정색 흉갑)확실히 압도했다. [29] 카빈이란 말 자체가 캐러비니어에게서 유래하였다. 그외에도 등산장비인 카라비너역시 여기서 유래. [30] 사실 드라군과 흉갑기병, 기마척탄병등과 같은 중기병에게 있어 카빈총이 기본 옵션이었다. 물론 기본 옵션인 것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기병 대원들이 잘 안들고 다니긴 했지만..(이 당시 기병대들은 권총도 거추장스럽다고 잘 안들고 다녔다) [31] 중기병이기에 흉갑기병과 같이 길고 곧거나 약간 굽은 세이버를 장비했다. [32] 헝가리 후사르들은 프랑스 기병대에게 나폴레옹 전쟁 내내 자존심을 구긴 오스트리아 기병대의 유일한 빛이라고 칭함받는 용감한 기병대 중 하나였다. [33] 보통의 경우 더 큰 말을타고 더 길고 타격력 있는 검을 장비하고 흉갑을 입어 방호력이 좋은 중기병이 경기병을 발라야 정상이다. [34] 오스트리아 흉갑기병은 갑옷이 앞쪽 한 개밖에 없어 등쪽은 전혀 방호받지 못했다. [35] 총기병은 중기병들 중에서도 정예를 뽑아서 편성했다. 하지만 상술한 예에서 보듯이 나폴레옹의 전쟁에서 이들이 보인 모습은 나폴레옹과 중기병대 지휘관들의 대접과 기대에 비해 한심했다. [36] 오스만의 기병은 크게 '아큰즈'(Akıncı) 나 '델릴레르'(Deliler) 라고 하는 비정규 기병대와 신하국, 칸국 등에서 파견된 병사. 그리고 시파히들로 구성되어있다. [37] 전장식 화기를 쓰던 시절에는 불발탄의 비율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38] 또한 전멸한 사례 중 일부는 퇴각 중인 후방부대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우다 전멸했다고 한다. [39] 전격전의 전설의 자료에 따르면 독일군의 월간 차량 생산량으로는 비전투손실의 2%도 채우지 못할 정도로 저조하여 10개의 기갑사단과 6개의 차량화보병사단에게 보유한 차량 대부분을 꼴아 박았을 정도였다. [40] 이쪽은 영국 육군에서 주로 볼 수 있다. [41] 실제로 미국은 독립전쟁기에 드라군밖에 보유할 수 없었고, 폴란드에서 온 의용병단으로 풀라스키의 군단이라는 창기병대를 하나 보유하게 된다. [42] 완전히 포위되어 포로로 잡히기 직전에 스스로 권총 자살하였다. [43] 미처 수습되지 않은 말들은 야생화되어 2000년대 초엽까지 야생마로 살기도 했다. # , # [44] 헬리콥터도 가능하겠지만 대공무기에 취약한 것과 연료문제가 있다. [45] 당장 험비는 전 미 지상군의 종마 역할을 하고 있는 놈이기에 이 녀석을 빼면 병력 수송, 물자 운반 등, 기초적인 지원들도 불가능하다. 트럭들이 있기는 하지만 험비의 마당발(?) 능력에는 못 미친다. [46] 민족의 이름이지만, 러시아가 이들로 구성된 경기병 부대를 양성하여 병과의 이름과 같이 쓰였다. [47] 노르만 기사들이 워낙 다양한 곳에 진출하였고 따지고 보면 프랑스와도 봉신관계이긴 해서 마냥 잉글랜드만을 대표하는 기병대라 보긴 힘들 수 있으나 결국 이들이 최후까지 가장 네임드 메인 지배계층으로서 정착한 국가가 잉글랜드이다. 현세엔 이들의 후손들이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내세우지는 않으나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왕가에는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이들을 좀 더 정확히 지칭하자면 앵글로-노르만이다. 그리고 채널 제도의 노르만족은 영국 본토의 노르만계 후손들과 달리 현재까지도 노르만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48] 여진족, 몽골족 등 명나라 치하의 북방 유목민족 및 이들에게 동화된 한족들로 구성된 기병부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엄청난 약탈을 저질러서 조선에서는 순수 한족들로 구성된 남병 위주로 파병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49] 잉글랜드가 백년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노르망디를 상실한 이후로도 계속 노르망디에 잔류한 노르만족은 잉글랜드로 이주한 노르만족과 달리 현재까지도 나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프랑스의 노르만족은 백년전쟁 종전 이후에는 잉글랜드의 노르만족과 달리 메인 지배계층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50] 프랑스 국가 헌병대의 기원이 프랑스 왕의 지휘하던 중기병대였기 때문. [51] 후사르라는 이름의 병종은 근세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나, 그 원조는 헝가리 후사르이다. [52] 일단 기병대로 유명은 한데 실제로 기병들을 대규모로 운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강하다. 당시 일본에서 제일 많이 쓰인 키소의 말들은 제주도 조랑말보다 작았고 그나마 숫자가 많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조선에서 함부로 군마를 내줬을 리도 없거니와 사갔다는 증거도 없다. 쉽게 말해 말도 없는 주제에 기병대가 어디 있었겠냐는 것. 이에 더해서 다케다 신겐이 활동했던 전국시대 당시의 일본의 기병 전술은 헤이안 시대 무렵까지의 궁기병을 중심으로 했던 전술과는 달리 용기병 내지는 승마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로 변화되어 있었고, 앞서 상기한 군마의 부족이라는 문제 때문에 기병대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용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일본에 본격적으로 기병대가 생긴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53] 다만 그렇다고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에 기병 그 자체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13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대의 일본 무사들은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궁기병이었으며, 14세기 남북조 시대가 되자 일본에도 말을 탄 채로 칼과 창 같은 무기를 들고서 적에게 돌격하여 육박전을 치르는 기마 전술이 널리 퍼졌다. 한 예로 1370년에 나온 일본 남북조시대의 무용담을 다룬 책인 태평기(太平記)에 따르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인 우는살을 발사한 후, 막부군 쪽에서 먼저 함성을 외치며 깃발을 들고 전진했는데, 최초에는 활의 명인들을 늘어세워놓고 서로 활을 쏘아댔으나, 적아군 모두가 용맹한 무사들이었기에, 이윽고 도검太刀과 장도長刀를 빼든 후, 말에 탄 채로 백병전을 전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링크 [54] 전부 중국인이었으나 몽골과 인접한 지방 사람들이었으니. [55] 출신이 흉노의 영토와 가까운 병주 출신이라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기마술이 뛰어났다고 하며,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도 자신을 기병대장으로 삼으면 된다고 꼬득여 조조가 일순간 고민하기도 했다. [56] 이쪽도 위의 다케다 신겐과 동일한 이유로 기병대를 운용했을 가능성은 작다. [57] 북관대첩 당시 소수의 기병대로 기습전을 펼치며 가토 기요마사를 농락했다. [58] 풀네임은 서(Sir.) 브라도 잇사 크레이탄 켄드리드. 폴라리스 랩소디의 등장인물이다. 작중 최고수준의 야전지휘관. [59] 새벽의 저주의 버스 돌파 장면을 생각해 보자. [60] 여담이지만 이 전투는 노르드인 앵글로색슨인의 전투를 묘사한 것인데, 다른 부분은 충실하게 고증되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기병 활용 자체는 다소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경향이 있다. 보병 중심 군사 문화를 가진 앵글로색슨 하 잉글랜드 내에서 마상전투술은 문헌 상으로나 고고학적 발견으로나 노르만 정복 이후에야 증거가 나온다. 따라서 실제 저 시점에서는 기병이 극소수만 운영되거나 아예 없고 기마보병 전령 정도만 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드라마보다 약간 후대를 다루는 드라마 라스트 킹덤에서 더 잘 묘사되는데, 색슨 측이 바이킹 측을 사지로 끌어내기 위해 거짓 도주를 할때 전원이 말을 타고 달리고, 적절한 지형에 도착하자 모두 하마하여 바이킹측과 똑같이 방패벽 전술을 쓴다. [61] 북방엔 문관만 아니라면 주로 A~S가 주를 이룽다. [62] 수가 적고 덩치가 큰게 주된 이유다. [63] 전열 돌파는 주로 중기병, 추격 및 전과확대는 경기병이 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