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20:57:35

이반 알렉산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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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반 알렉산더르.jpg
이름 이반 알렉산더르
(Иван Александър)
출생 미상
사망 1371년 2월 17일
직위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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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 22대 차르. 40년간의 긴 치세 동안 불가리아를 통치한 군주. 치세 전반기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경제를 부흥했으며 문화를 꽃피웠지만, 후반기엔 오스만 베이국 헝가리 왕국의 침략과 흑사병으로 국력이 쇠진하는 걸 막지 못 했고,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큰 실책을 범하여 사후에 나라가 3개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생애

로베치의 데스포티스 스라치미르와 미하일 아센 3세의 여동생인 케라샤 페트리샤의 아들이다. 그는 왈라키아 공국 초대 군주 바사라브 1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하여 미하일 아센 4세, 이반 스라치미르, 이반 아센 4세를 낳았다. 부친의 뒤를 이어 로베치의 데스포티스를 역임하다가 1331년 3월 동로마 제국 안드로니코스 3세 황제에게 트라키아를 무기력하게 내준 차르 이반 스테판을 상대로 정변을 일으켜 수도 타르노보에서 축출하고 새 차르로 즉위했다. 이반 스테판은 1330년 벨버즈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미하일 아센 3세를 죽인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의 지원으로 차르가 되었기에, 세르비아가 이 일을 문제삼을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 스테판 두샨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스테판 우로시 3세를 몰아내고 새 군주가 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호전되었다.

그는 세르비아와 손을 잡은 뒤 타타르 용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이전에 빼앗겼던 트라키아 북동부를 되찾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또한 1332년 부활절에 여동생 엘레나와 스테판 두샨의 결혼을 성사시키면서, 세르비아와 결혼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장남 미하일 아센 4세를 공동 차르로 세워서 후계 계승을 공고히 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미하일 아센 3세의 형제이며 비딘의 데스포티스인 베나르가 이반 스테판의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더르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했지만, 1332년 여름 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가 트라키아로 쳐들어오자, 우선 동로마군부터 막기로 했다. 그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남하하여 루소카스트로에서 동로마군과 마주쳤다. 그는 강화 협상을 하려는 인상을 내비쳐 동로마군을 방심케 한 뒤, 타타르 기병을 앞세워 기습을 가해 적을 루소카스트로 요새로 내몰고 이 지역의 여러 도시를 복종시켰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그의 우위를 인정하고, 딸 마리아와 알렉산더르의 장남 미하일 아센 4세를 약혼시키기로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1339년에 성사되었다. 알렉산더르는 이제 베나르 토벌에 나섰지만, 1336년 또는 1337년이 되어서야 진압할 수 있었다. 1337년 비딘을 공략한 그는 차남 이반 스라치미르를 그곳의 데스포티스로 임명하였고, 프레슬라프를 역시 데스포티스로 선임한 셋째 아들 이반 아센 4세에게 맡겼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가문이 불가리아 전지역을 확고하게 통제하길 바랬다. 그러던 1341년 동로마 제국에서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을 일으킨 요안니스 6세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자,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는 알렉산더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341년 알렉산더르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 영내에 들어갔다. 그의 군대는 마리차 강을 따라 행군하며 약탈하며 요안니스 6세를 압박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6세가 끌어들인 우무르의 투르크군 분견대의 급습을 받고 대패하였고, 알렉산더르는 타르노보로 철수한 뒤 1342년 요안니스 6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요안니스 6세는 테살로니키 포위에 들어갔지만 쉽사리 함락하지 못하자 스테판 두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는 사이 사보이아의 안나의 지지자인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는 디모티카 요새를 포위했다. 사보이아의 안나는 알렉산더르에게 디모티카 요새 포위전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알렉산더르는 이 요청에 응해 디모티카 요새 성문 앞에 도착했지만, 요새를 자기 것으로 하는 걸 인정하기 전에는 공성전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던 1343년 요안니스 6세의 구원 요청에 응한 우무르 베이의 투르크군 29,000명이 380척의 배와 함께 접근해오자, 알렉산더르는 타르노보로 철수했다.

1344년 사보이아의 안나는 플로브디프와 로도피 산맥의 주요 요새 8개를 불가리아로 넘길 테니 요안니스 6세를 공격해달라고 호소했다. 알렉산더르는 이에 응했지만, 우무르가 철수하기 전에는 군대를 파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로도피 산맥의 산악인 지원 부대의 지도자 보비드 맘칠(Voivode Momchil)은 알렉산더르의 의뢰에 응해 페르페리콘 요새(오늘날 카르즈할리 인근)를 공략하고 불가리아 이콘을 이곳에 설치했다. 이렇듯 불가리아의 확장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요안니스 6세는 1345년 초 오스만 베이국의 아미르 오르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345년 7월 7일, 투르크군과 요안니스 6세의 동로마군은 부루그라드 요새 인근에서 맘칠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알렉산더르는 확장 정책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1346년, 스테판 두샨은 알바니아,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북서부 등 발칸 반도 서부 일대를 확고히 장악한 뒤 스스로 차르로 즉위하였고, 세르비아 교회를 총대주교구로 격상하였다. 알렉산더르는 불가리아 총대주교 시메온을 대관식에 참석시켜서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시기, 알렉산더르는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 등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들과 무역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통해 경제를 진흥하였다. 그 덕분에 불가리아는 번영을 구가하였고, 문화 역시 '황금기'라 칭할 정도로 융성하였다. 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건축되거나 개조되었고, 콘스탄틴 므나스의 연대기가 중세 불가리아어로 번역되는 등 문학도 번창하였다. 그는 이러한 번영에 힘입어 수도 타르노보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칭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6세가 끌여들인 오스만 투르크군이 1346년과 1347년에 두 차례 트라키아로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1349년 투르크군이 또다시 쳐들어오자, 알렉산더르의 셋째 아들이자 프레슬라프의 데스포티스인 이반 아센 4세가 막으려 했으나 전사하고 말았다. 투르크군은 1352년과 1354년에 또 다시 트라키아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설상가상으로, 불가리아 각지에 흑사병이 창궐하였고, 1355년경에 알렉산더르의 장남이자 공동 차르였던 미하일 아센 4세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1351년, 요안니스 6세는 자기가 끌여들인 오스만 베이국이 발칸 반도 전역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걸 깨닫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연합 전선을 조직하여 투르크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알렉산더르는 요안니스 6세가 함대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돈을 빌려줬지만, 요안니스 6세를 의심하여 병력을 직접 보내지는 않았다. 1355년 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으로 요안니스 6세가 실각하고 요안니스 5세가 복위하자, 알렉산더르는 딸 케라차를 요안니스 5세의 장남 안드로니코스 4세와 결혼하게 해, 오스만 베이국에 대항한 동맹을 공고히하려 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이 시점에서 내부분열의 징조를 보였다. 알렉산더르는 1349년 첫번째 황후인 왈라키아의 테오도라와 이혼하고, 유대인이었다가 정교회로 개종한 뒤 '테오도라'라는 세례명을 받은 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는 이 결혼에서 새롭게 태어난 두 아들인 이반 시슈만과 이반 아센 5세를 1356년과 1359년에 차례로 공동 차르로 임명했다. 그러자 첫번째 황후의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인 이반 스라치미르는 아버지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비딘에서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벌이는 등 노골적으로 반항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더르는 이에 대해 어떠한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통제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365년, 헝가리 왕 러요시 1세가 이반 스라치미르에게 비딘의 종주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불가리아의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반 스라치미르가 거절하자, 그는 비딘으로 쳐들어가 단숨에 함락하고 이반 스라치미르 일가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비딘은 헝가리 왕이 임명한 '반(Ban)'에 의해 통치되었고, 주민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1366년 요안니스 5세가 헝가리로 가서 오스만 베이국의 압박에 대항하고 싶으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퇴짜를 맞고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러나 불가리아를 지나가던 중 알렉산더르가 그를 붙잡아 억류했다. 요안니스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신 통치하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안드로니코스 4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1]가 사촌을 구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출진해 불가리아 흑해 연안의 소조폴과 메셈브리아를 점령하고 바르나까지 공격하였다. 압박감을 느낀 알렉산더르는 평화 협상에 응했고, 요안니스 5세는 18만 플로린을 몸값으로 지불하는 대가로 풀려났다. 아메데오 6세는 메셈브리아와 소조폴을 동로마 제국에 넘기게 하였다. 알렉산더르는 받아낸 돈을 봉신인 도브루자의 도브로티차와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디슬라브 1세에게 줘서 비딘 탈환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1369년 헝가리군을 격파하고 비딘을 탈환하였으며, 이반 스라치미르를 비딘의 데스포티스로 재선임했다.

그러나 오스만 베이국의 공세는 갈수록 심화되었다. 1363년 또는 1369년, 오스만 베이 무라트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발칸 반도내 오스만 영토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뒤이어 불가리아의 도시인 플로브디프와 스타라 자고라를 공략하였다. 그는 오스만 베이국의 압박에 대항해 세르비아와 연합하고자 하였으나, 1371년 2월 13일 사망했다. 사후 두번째 황후 테오도라에게서 낳은 첫째 아들 이반 시슈만이 불가리아 수도 타르노보에서 차르로 즉위했지만, 비딘의 데스포티스 이반 스라치미르가 이에 반발하여 역시 차르를 칭했다. 여기에 오랫동안 세력을 확장했던 도브루자의 데스포티스 도브로티차 역시 이반 시슈만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독립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3개로 분열되었고, 이로 인해 오스만의 공세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1] 사보이아의 안나는 아메데오 6세의 고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