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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 (영어: George Terter I, 불가리아어: Георги Тертер I) |
출생 | 미상 |
사망 | 1308년 또는 1309년 |
직위 |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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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 14대 차르.2. 생애
불가리아인과 쿠만족의 혼혈로, 훗날 이반 2세의 섭정들에 의해 데스포티스로 임명된 알디미르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마리아와 결혼했지만 1279년 이혼하고 차르 이반 아센 3세의 여동생 키라 마리아와 결혼한 뒤 데스포티스로 선임되었다. 1280년 이바일로에 대항한 타르노보 보야르들의 추대로 차르가 되었다. 이바일로는 타르노보를 포위했지만 공략을 좀처럼 하지 못하다가 거듭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이 떠나면서 급격히 무너졌고, 카자흐 칸국에 망명했다가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의 사주를 받은 노가이 칸에게 처형되었다.이리하여 기반이 확고히 다져지는 듯했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내전으로 국력은 쇠진해졌고, 많은 보야르들이 중앙 정부에서 이탈했다. 그중 비딘의 데스포티스 시슈만 1세[1], 스밀레츠, 라도슬라프, 보이실 등이 각 영지에서 자기 영지에서 군림하며 중앙의 명령을 잘 듣지 않았다. 타르노보의 차르는 불가리아의 유일한 통치자에서 '동등한 보야르 중 첫번째'로 변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국의 군주 카롤로 1세의 반 동로마 연합에 참여하여 장차 동로마 제국을 정벌하여 위신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는 사생아인 에우프로시나를 킵차크 칸국 노가이 칸의 후처로 보내 원군을 호소했고, 노가이 칸은 1282년 4만에 달하는 기병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설상가상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카롤로 1세가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으로 인해 시칠리아 섬을 아라곤 왕국에게 빼앗기면서 불가리아를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게오르기는 동로마 제국과 휴전 협약을 맺고, 아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를 인질로 보냈다.
이에 게오르기는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1284년 자신의 딸인 안나를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과 결혼시켰다. 1284년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와 협상하여 키라 마리아를 동로마 제국으로 돌려보내는 대신에 아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와 첫번째 아내 마리아를 돌려받았다. 1285년 킵차크 칸국이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하자, 게오르기는 노가이 칸의 봉신을 자처하고 토도르를 다시 킵차크 칸국의 인질로 보내야 했다. 또한 딸 엘레나를 노가이 칸의 아들인 차카와 결혼시켰다. 이리하여 평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지만, 1292년 노가이 칸은 돌연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게오르기를 퇴위시키고 스밀레츠를 새 차르로 세웠다. 게오르기는 퇴위한 뒤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하했지만, 노가이 칸이 두려운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일단 영내에 들어오게 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거절한 것으로 처리했고, 그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주변에 숨어 지내야 했다.
그는 몇년간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에서 숨어 지내다가 아나톨리아로 보내졌고, 10년간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1301년 불가리아의 차르가 된 아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가 13명의 동로마 고위 장교와 그를 교환하면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아들에 의해 정해진 도시에서 호화롭게 지내다 1308년 또는 1309년경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