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21:34:00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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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Licinia Eudoxia
파일:리키니아 에우독시아.jpg
출생 422년
로마 제국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 493년
로마 제국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2세
어머니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형제자매 아르카디우스, 플라킬리아
남편 발렌티니아누스 3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자녀 에우도키아, 플라키디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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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황후.

2. 생애

422년경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와 황후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사이에서 출생했다. 424년 어머니 갈라 플라키디아를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약혼했고, 425년 남편이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황후가 되었다. 437년 여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439년 라벤나에서 공식적으로 아우구스타로 승격하였으며,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의 사이에서 두 딸 에우도키아, 플라키디아를 낳았다. 하지만 갈라 플라키디아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서로마의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450년 플라키디아가 사망한 뒤, 그녀는 서로마 제국에서 위상이 가장 높은 여인이 되었다. 그러나 454년 남편이 아에티우스를 살해한 뒤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게다가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에티우스 살해에 공헌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아내 루시나를 능욕하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황후 에우독시아의 명의로 루시나를 불렀고, 황후의 명에 따라 황궁에 왔던 루시나는 황제에게 강간당했다고 한다. 루시나는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기고 페트로니우스를 저주했다. 이에 페트로니우스는 분노했고 황제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에티우스의 부하였다가 아에티우스가 살해된 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호위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옵틸리아와 트라우스틸라를 음모에 가담시켰다. 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말을 타고 로마를 나와 마르티우스 들판으로 가서 사냥 연습을 하는 동시에 운동 선수들이 연습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때 옵틸리아와 트라우스틸라가 튀어나와 뒤에서 그를 덮쳐 검으로 베었다. 두 병사는 황제의 관과 가운을 가져다가 페트로니우스에게 바쳤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명확한 황위 계승자를 두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후임 황제로 누구를 지명할 지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이집트 상인의 아들이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측근이었던 막시미아누스, 후에 황제가 되는 마요리아누스, 그리고 페트로니우스가 황제 후보로서 경합을 벌였다. 이때 에우독시아는 마요리아누스를 지지했지만, 페트로니우스가 원로원, 황궁 관리, 그리고 군대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침으로써 지지를 확보하고 455년 3월 17일 황위에 올랐다. 페트로니우스는 황제가 되자마자 에우독시아를 자신의 황후로 삼았다. 또한 아들 팔라디우스를 에우독시아의 딸 에우도키아와 결혼시켰다. 페트로니우스는 서고트 왕국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아비투스를 툴루즈로 보내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2세와 협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에우독시아는 페트로니우스와의 결혼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들을 처벌하기는커녕 측근으로 삼은 페트로니우스를 불신했다. 또한 일설에 다르면, 페트로니우스는 루시나의 일로 에우독시아에게 원한을 품고 폭행을 가했다고 한다. 에우독시아는 페트로니우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북아프리카를 지배하던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마침 가이세리크는 페트로니우스가 자신의 아들 후네리크와 에우도키아의 약혼을 파기하고 팔라디우스와 결혼시킨 일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는 에우독시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455년 5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 소식이 로마에 들어오자, 많은 주민이 달아났다. 페트로니우스는 방어전을 펼쳐봐야 소용없다고 여기고 원로원에게 자신과 동행할 것을 촉구하면서 탈출 계획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의 경비병들과 수행원들은 죄다 도망쳐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455년 5월 31일, 페트로니우스는 홀로 도시를 떠나려고 바삐 움직였다. 이때 성난 군중들이 그를 발견하고 돌을 마구 던져댔고, 결국 페트로니우스는 돌에 맞아 죽었다. 그의 시신은 훼손되어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이때 그의 재위는 불과 74일이었다. 그의 아들이자 카이사르였던 팔라디우스 역시 이때 처형되었을 것이다.

가이세리크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로마 시에 입성한 뒤 값진 보물을 약탈하면서도 교황 레오 1세의 청원에 따라 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않고 교회를 파괴하지 않았다. 그 후 에우독시아 황후와 플라키디아, 에우도키아 공주를 카르타고로 데려갔다. 가이세리크는 에우도키아를 아들 후네리크와 결혼시켰고, 모녀를 잘 대해줬다. 에우독시아는 카르타고에서 7년간 지내다 462년 동로마 황제 레오 1세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이때 딸 플라키디아도 함께 갔지만 에우도키아는 카르타고에 남았다. 그 후 그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의 사유지에서 조용히 지내다 493년경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