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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33년 |
사망 | 1396년 12월 10일 |
아버지 | 요안니스 6세 |
어머니 | 이리니 아사니나 |
형제자매 | 마테오스,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지노스, 마리아 칸타쿠지니, 테오도라 칸타쿠지니 |
남편 | 요안니스 5세 |
자녀 | 안드로니코스 4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마누일 2세,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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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아우구스타이자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5세의 황후.2. 생애
1333년경 요안니스 6세와 이리니 아사니나의 3남 3녀 중 막내딸로 출생했다. 1341년 10월 27일 황제를 자칭한 요안니스 6세는 1347년까지 요안니스 5세와 사보이아의 안나 황태후와 맞서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을 벌였다. 그러다 1347년 2월 3일, 양측은 마침내 합의에 이르렀다. 요안니스 6세는 수석 황제가 되었고, 요안니스 5세는 공동 황제가 되었다. 또한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의 딸 엘레니 칸타쿠지니가 결혼하기로 했다. 결혼식은 1347년 5월 28일 아야 소피아에서 이뤄졌다. 당시 엘레니는 13살이었고, 신랑은 15번째 생일이 한 달 남았다. 요안니스 5세와 엘레니 부부는 안드로니코스 4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마누일 2세,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등 6명을 낳았다.1352년, 요안니스 5세는 요안니스 6세에 맞서 반기를 들었다.(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이에 요안니스 6세는 사위를 폐위하고 장남 마테오스를 공동 황제로 선임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요안니스 5세에게 유리해졌고, 결국 1354년 12월 4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략되었다. 이에 요안니스 6세는 아내 이리니 아사니나와 함께 퇴위하여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마테오스는 이에 맞서 트라키아에서 할거하며 황제를 칭했으나, 1356년 말 또는 1357년 초에 세르비아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붙잡혔다. 세르비아인들은 마테오스에게 거액의 몸값을 붙였다. 이때 요안니스 5세가 끼여들어 세르비아인들에게 자신에게 그를 넘기는 대가로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결국 마테오스는 요한니스 5세에게 넘겨졌고, 요안니스 5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제위를 포기하고 동생 마누일이 있는 모레아로 향했다.
그 후 엘레니는 20여년간 남편과 함께 제국을 통치했다. 그런데 1376년 8월 12일,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시켰다. 이에 엘레니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노력했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했고, 요안니스 5세와 두아들 마누일 2세, 테오도로스는 감옥에 갇혔다. 1379년 6월, 세 사람은 탈옥하여 오스만 베이국에 투신하였고, 이로 인해 제4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오스만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요안니스 5세 쪽으로 기울자, 안드로니코스 4세는 갈라타로 도망치면서 어머니 엘레니, 20여 년전에 퇴위했던 요안니스 6세, 그리고 엘레니의 언니 마리아와 테오도라를 인질로 잡았다. 네 사람은 갈라타 요새 공방전 동안 감옥에 갇혀 굶주림에 시달렸다. 1381년 5월 요안니스 5세와 안드로니코스 4세가 평화 조약을 체결한 후에야 가까스로 풀려났다.
1391년 요안니스 5세가 사망한 후, 그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키라 마르타 수도원에 들어가 히포모네(Hypomone) 수녀가 되었다. 1396년 12월 10일 그곳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