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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484년 |
이사우리아 파파리우스 요새 | |
형제자매 | 바실리스쿠스 |
남편 | 레오 1세 |
자녀 | 아일리아 아리아드네, 레온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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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레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레오 1세의 황후.2. 생애
베리나와 오빠 바실리스쿠스가 어느 집안 출신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고대 기록에는 두 남매가 고트족, 루기이족, 스키리족 중 한 종족에 소속되었다고 기술했다.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와 혈연 관계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다. 그녀는 트라키아의 로마 장교 레오와 결혼하여 두 딸 아리아드네, 레온티아를 낳았으며, 463년경 아들이 태어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해서 이름은 알 수 없다.457년 1월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뒤, 동로마 제국의 권신 아스파르는 부하 레오를 새 황제로 추대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레오는 457년 2월 7일 황제가 되었고, 베리나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이후 레오 1세는 아스파르를 견제하기 위해 이사우리아 족을 기용하여 군대의 주축으로 삼았고, 이사우리아 출신의 제노를 트라키아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장녀 아일리아 아리아드네와 결혼시켰다.
베리나의 오빠 바실리스쿠스는 동로마군 지휘관으로 승격하여 463년 불가르족을 정벌하였고, 고트족과 훈족 정벌 등에서 전공을 올렸다. 467년 레오 1세가 가이세리크가 다스리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벌할 뜻을 밝히자, 베리나와 아스파르는 바실리스쿠스를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추천했다. 레오 1세는 이에 따라 바실리스쿠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468년 반달 왕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바실리스쿠스는 가이세리크의 책략에 넘어가 본 곶 해전에서 1,113척에 달하는 함대를 몽땅 상실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쳤다. 레오 1세는 원정 사령관인 바실리스쿠스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하였지만 황후인 베리나의 간곡한 설득에 목숨을 살려주며 용서했다.
아스파르는 바실리스쿠스의 실패로 레오 1세의 위세가 꺾인 틈을 타 레오 1세와 베리나의 둘째 딸 레온티아와 자신의 아들 파트리키우스와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파트리키우스를 카이사르로 선포했다. 그러자 레오 1세는 이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471년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들을 궁전으로 초대한 뒤 환관들로 하여금 이들을 치게 해 모조리 죽여버렸다. 파트리키우스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레온티아와 강제로 이별해야 했고, 레온티아는 안테미우스의 아들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했다.
473년 10월, 레오 1세는 제노와 아리아드네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레오를 레오 2세로 즉위시켰다. 그로부터 5개월 뒤인 474년 1월 18일, 레오 1세가 사망했다. 그 후 제노와 레오 2세가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레오 2세는 474년 11월에 요절했고 제노가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베리나는 이 시점에서 파트리키우스라는 이름의 전직 근위대 사령관을 애인으로 삼았다. 그녀는 애인과 함께 제노를 몰아낼 음모를 꾸몄고, 475년 11월 바실리스쿠스와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제노는 경마장에서 전차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군대가 오고있으니 당장 도망가는 게 좋을 거라는 첩보를 받고 곧바로 도피했다.
그 후 바실리스쿠스가 황위에 올랐지만, 여동생의 애인 파트리키우스를 살해하는 바람에 베리나의 원망을 샀다. 그는 이사우라인 장군 일루스에게 제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일루스는 제노의 동생 플라비우스 롱기누스를 인질로 잡아서 제노를 유인하려 했다. 그런데 바실리스쿠스가 수도에서 이사우리아 족을 학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루스는 제노의 편으로 돌아섰다. 한편 애인을 죽인 오빠에게 분노한 베리나는 제노의 귀환을 위해 자금을 보냈다가 발각당하자 블라케르나의 교회로 피신했다.
476년 8월 제노는 일루스의 도움으로 황위에 복귀했고, 베리나에게 버림받은 바실리스쿠스는 교회로 피신했다가 피를 흘리지 않게 해주겠다는 제노의 약속을 믿고 밖으로 나왔다가 연금된 뒤 굶어 죽었다. 이후 베리나는 일루스와 갈등을 벌였고, 그를 죽이기 위해 수 차례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했다. 수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일루스는 이사우리아에서 병사들을 긁어모으는 한편, 제노에게 베리나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제노는 그녀를 타르수스로 유배보내는 것으로 끝냈다. 479년 후반 베리나의 딸 레온티아의 남편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가 형제 프로코피우스, 로물루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제노는 이로 인해 거의 실각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진압했다. 이후 제노의 황후이자 베리나의 장녀인 아리아드네가 제노에게 어머니와 일루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제노는 베리나가 유배지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였고, 베리나는 일루스에 대한 세 번째 암살 시도를 벌였다. 암살자는 일루스의 귀를 잘랐지만 죽이지 못했다.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판단한 일루스는 484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베리나는 일루스에 의해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황제로 추대한 레온티우스를 지지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녀가 일루스를 일관되게 죽이려 했던 것을 볼 때,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우나, 아마도 자신을 끝까지 풀어주지 않는 제노를 원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루스가 자신을 여러 번 죽이려 했던 베리나를 풀어준 점 역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인데, 황실의 일원인 그녀를 이용해 레온티오스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술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루스의 반란은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반란군은 이사우리아의 파피리우스 요새로 철수했고, 베리나는 484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 요새에서 사망했다. 요새는 488년 함락되었고, 베리나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