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14:49:12

안나 달라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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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안나 달라시니
Anna Dalassene | Ἄννα Δαλασσηνή
파일:안나 달라시니.jpg
출생 1025년~ 1030년
사망 1100년/ 1102년 11월 1일
아버지 알렉시오스 달라세노스
남편 요안니스 콤니노스
자녀 마누일 콤니노스, 마리아,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에우도키아, 테오도라, 알렉시오스 1세, 아드리아노스 콤니노스, 니키포로스 콤니노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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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모후.

2. 생애

1025~1030년경 이탈리아의 황실 관리인 출신의 알렉시오스 달라시노스와 동로마 제국 귀족 가문인 달라시노이 가문의 여식의 딸로 출생했다. 부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모계인 달라시노이 가문은 다미안 달라시노스를 시작으로 10세기 말과 11세기 초 동로마 제국의 저명한 군사 귀족 가문이었다. 안나는 이사키오스 1세의 남동생인 요안니스 콤니노스와 결혼하여 아들 5명, 딸 3명 등 총 8명을 낳았다. 이중 한 명인 알렉시오스 콤니누스는 훗날 동로마 제국의 중흥을 이끄는 군주 알렉시오스 1세가 된다.

1059년 11월, 사냥 도중 번개에 맞아서 몸이 매우 쇠약해진 이사키오스 1세는 남동생 요안니스에게 황위를 넘기려 했다. 그러나 요안니스가 간곡히 사양하자, 이사키오스는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에게 황위를 넘겼다. 하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일 뿐이고, 두카스 가문의 압력 때문에 요안니스가 황위를 잇지 못한 게 진실에 가까웠을 것이다. 안나는 이때부터 두카스 가문을 적대했고, 언젠가 황좌를 되찾고 콤니노스 가문을 명실상부한 황족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1067년 7월 남편 요안니스가 사망한 뒤, 안나는 8명의 자식을 홀로 기르는 동시에 콤니노스 가문의 재산을 경영했다. 그녀는 가문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유력 귀족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었다. 딸 마리아는 미하일 타로니티스와 결혼하였고, 에우도키아는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와 결혼했다. 또한 1068년 1월 1일 황위에 오른 로마노스 4세와 연계해 두카스 가문을 견제하기로 하고, 막내 딸 테오도라를 로마노스의 아들 콘스탄티노스와 결혼했다. 로마노스는 안나의 장남 마누일 콤니노스를 총애해 동방군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마누일은 1071년 초 귀염으로 위독해졌다. 이에 안나가 비티니아에 있는 장남을 보러 달려갔다. 임종이 임박했던 마누일은 어머니를 보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나중에 어머님이 잠드실 무덤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 뒤 곧 사망했다. 이리하여 가문의 미래는 이사키오스와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이끌게 되었다.

1071년 8월 19일, 로마노스 4세는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에게 참패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노스 10세의 동생 요안니스 두카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로마노스 4세의 황후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를 수도원으로 보내고 미하일 7세를 황위에 올렸다. 로마노스 4세가 석방되자, 두카스 가문은 군대를 파견해 그를 체포한 뒤 실명형에 처했다. 이때 안나는 폐위된 황제와 비밀 서신을 주고받은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녀는 재판정에 서서 겉옷 아래에서 십자가상을 꺼내, 재판관들의 얼굴에 대고 흔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저의 심판관이며, 당신들의 심판관입니다. 저에게 판결을 내릴 때 주를 생각하고, 마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대법관에 걸맞은 판결을 내리도록 주의하십시오."

일부 대법관들은 이에 당황하여 무죄를 선고하려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요안니스 두카스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 완강히 반대했다. 결국 그들은 안나를 자식들과 함께 프랑키포 섬으로 유배보내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1072년 초 아들들과 함께 프랑키포 섬으로 유배된 그녀는 머리를 삭발당하고 수녀로 지내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요안니스 두카스가 조카 미하일 7세와 사이가 틀어져 그의 영지로 은퇴하자, 안나와 자식들을 풀어줘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1072년 8월 9일 맹인 신세로 지내던 로마노스 4세가 사망하자, 미하일 7세는 안나와 자식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이후 안나의 차남 이사키오스와 미하일 7세의 황후 알라니아의 마리아의 사촌 이리니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1072년에서 1073년 사이, 동로마 제국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아나톨리아 반도 전역은 셀주크 투르크에게 거의 넘어갔고, 남이탈리아의 지배자 노르만족이 바다를 건너 발칸 반도로 쳐들어왔다. 이에 미하일 7세는 이사키오스와 알렉시오스 형제를 장군으로 기용하여 외세를 막게 했다. 두 형제는 외세를 상대로 숱한 전공을 세웠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두카스 가문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이사키오스를 안티오크로 좌천시키고 알렉시오스에게는 적은 병사만 맡겨 노르만족을 막게 했다. 알렉시오스는 이로 인해 죽을 고비를 몇번 넘겨야 했지만,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노르만 족을 상대로 선전하였다.

1078년 1월, 니키포로스 3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미하일 7세를 몰아내고 황위에 올랐다. 그는 미하일 7세의 황후였던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결혼해 두카스 가문을 달랬다. 그러나 니키포로스는 마리아가 이전 남편 미하일 7세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후계자로 삼길 거부하고 조카 니키포로스 시나디노스(Nikephoros Synadenos)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에 마리아와 두카스 가문은 분노해 니키포로스를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안나는 이 기회를 틈타 아들을 황위에 올리기로 하였고, 마리아 황후가 알렉시오스를 양자로 들이도록 주선했다. 1078년경 알렉시오스와 당시 12살이었던 이리니 두케나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안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는 결혼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고집했고, 안나는 결국 승낙했다.

1080년, 니키포로스 3세에 의해 아나톨리아 연안의 코스 섬에 유배되었던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가 튀르크 세력을 포섭하여 서부 아나톨리아를 장악하면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니키포로스 3세는 알렉시오스에게 반란을 토벌하라고 명령했지만, 알렉시오스는 처남을 토벌하길 거부했다. 이로 인해 니키포로스의 옛 친구들인 보릴루스와 게르마누스가 알렉시오스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가 알렉시오스에게 경고했다. 이에 이사키오스와 알렉시오스 형제는 1081년 2월 14일 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하여 트라키아 군대로 향했다. 그날 새벽, 안나는 남은 가족들을 데리고 아야 소피아로 피신했다. 니키포로스가 당장 궁전으로 오라고 명령하자, 안나는 성화벽에 매달리면서 "나를 데려가려면 손을 잘라야 한다"라고 경고했다. 결국, 황제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들을 건드리지 않겠다며 그녀와 협상했다. 이후 안나와 가족들은 페트리온 수녀원에 이송되었다.

1081년 4월 1일, 알렉시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니키포로스 일당을 몰아내고 황위에 올랐다. 수녀원에 감금되었던 안나는 즉시 석방되었고, 아들로부터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이 당시 안나가 아들에게 이리니 두케나와 이혼하라고 권유했다는 소문과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알렉시오스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며 마리아가 차기 황후가 될 거라는 소문이 동시에 퍼졌지만, 알렉시오스는 두카스 가문의 압력에 못이겨 일주일 만에 이리니 두케나를 황후로 지명했다. 이후 안나는 황실의 가장 존귀한 어른이 되었고, 알렉시오스는 매번 어머니의 조언을 구했다. 1081년 8월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족과 상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일리리아로 갔을 때, 알렉시오스는 어머니에게 자기가 없는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를 권한을 주었다. 그리고 "주님, 바실리오스와 어머니인 달라세나 안나 1세를 보호하소서"라는 글귀가 새겨진 도장을 선물하기도 했다.

안나는 15년간 아들과 함께 제국을 공동 통치했다. 아들이 외적에 맞서 싸우는 동안, 그녀는 내정을 도맡았다. 안나 콤니니는 "그녀는 명령을 내렸고, 그녀의 아들은 노예처럼 복종했다. 그는 권력을 과시했지만, 그녀는 실체였다."라고 기술했다. 또한 안나는 문란한 궁정을 바로잡고 종교적인 열의를 일으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096년경, 알렉시오스는 그녀가 궁정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단속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 당대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안나가 너무 오랫동안 권력을 잡았으며, 알렉시오스는 자기가 명목상 황제일 뿐이라는 데 좌절했다고 기술했다. 안나는 시류의 변화를 직감하고 강제로 쫓겨나기 전에 은퇴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안나는 1096년 말 수녀원에 들어가서 수녀로서 여생을 보냈다. 사망년도는 1100년이라는 설과 1102년이라는 설로 나뉘며, 사망 날짜는 11월 1일이다.